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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5 : 3대 인재가 이어진 후진(後秦)을 망가뜨린 요홍(姚泓) (J)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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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7월23일 16시4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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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62) 동진 환현의 황위 찬탈(AD403)

 

당시 동진 조정은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AD396년 안제(安帝)가 즉위하고 숙부인 사마도자(司馬道子)가 섭정을 맡으면서 전횡을 일삼았다. AD398년 안제 2년 사마도자의 측근 왕국보(王國寶)가 북부군(北府軍)의 통솔권을 빼앗으려고 하자 연주자사(兗州刺史) 왕공(王恭)과 예주자사(豫州刺史) 유해(庾楷)는 조정에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켰다. 당시 광주자사(廣州刺史) 환현도 형주자사(荊州刺史) 은중감(殷仲堪)과 함께 서부군(西府軍)을 이끌고 군대를 일으켰다. 왕공의 반란은 유뢰지(劉牢之)의 배신으로 실패했지만 환현은 세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조정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마도자ㆍ사마원현(司馬元顯) 부자는 은중감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환현을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임명한 것이다. 환현은 AD399년에 은중감과 옹주자사(雍州刺史) 양전기(楊佺期)를 죽이고 서부군(西府軍)을 장악했다.

 

AD399년 저장성(浙江省)과 장쑤성(江蘇省)에서 손은(孫恩) 주도로 오두미교(五斗米敎)민란이 일어나면서 AD402년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을 위협하였다. 이 민란은 유뢰지의 북부군에의해 진압되었지만, 환현은 서부군을 이끌고 건강으로 진입해 사마도자 부자를 죽이고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환현은 유뢰지마저 제거하고 AD403년 12월 3일 안제에게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초(楚)라고 불렀다. 역사에서 ‘환초(桓楚)’라고 부르는 나라다.

환현이 황제의 자리에 올라 건강의 황궁 어좌에 앉았을 때 마루가 가라앉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 백료가 깜짝 놀라 어쩔줄을 몰라했다. 은중문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 성덕이 깊고 두터워서

  땅도 폐하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63) 환현의 사람됨(AD404)

 

환현은 정서적으로 불안증이나 혹은 우울증의 질환을 앓았던 것 같다.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항상 불안하고 불편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하루는 큰 파도가 덮쳐 수도 건강의 북쪽 석두에서 많은 사람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놀란 사람들의 원성과 탄식이 그치지 않았는데 환현은 한편으로 매우 두려워 하면서도 그것이 노비들이 일부러 만들어 낸 소리라고 일축하려 했다. 환현은 매우 자잘한 일도 손수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어서 말단 직급자도 직접 면접하고 뽑았다. 문서의 글자가 하나 틀렸는데 이 때문에 좌승상 이하 전 관련부서 관료들을 파면시키기도 했다. 

 

 

(64) 남조 유송의 창업자 유유(劉裕:AD363-AD422)의 환현 제거(AD404)

 

옛날 유뢰지의 부하였던 유유가 서연주자사 안성왕 환수와 함께 건강으로 입조했다. 환현은 유유를 보고 마음에 흡족하기도 하고 또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 유유는 아마도 대단한 인걸임에 틀림없어.”

 

곁에 있던 부인 유씨가 경계하며 말했다.

 

“ 생김새나 눈매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걸음걸이가 용과 같고 호랑이와 같습니다.

  빨리 제거하시는 것이 낫겠습니다.

 

환현이 이렇게 말했다.

 

“ 내 바야흐로 중원을 평정하려하는데

  유유는 꼭 필요한 사람이요.

  황화를 장악한 다음에 그 문제를 생각해 보겠소.“

 

이 때 환초의 참군 유매와 유의는 환현을 제거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유씨 형제들이 그런 생각을 말하며 하무기에게 생각을 묻자 이렇게 되물었다.

 

“  환씨가 전국에 널려 있는데 그게 가능하겠소?”

유의가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 천하에는 강한 것도 있고 약한 것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진실로 도리를 잃으면 강한 것도 약해지는 법입니다.

  진정으로 염려되는 것은

  제대로 주관할 진실된 사람을 얻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무기가 대답했다.

 

“ 천하 초택(시골구석)에 영웅이 없지는 않을 것이외다.”

 

유의가 바닥을 치며 말했다.

 

“ 유하비가 있지 않습니까?”

 

유유는 하비(지금의 안휘성 서주 부근)태수여서 유하비라고 불렀다. 하무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와 유유에게 그 사실을 전해 주었다.

 

유유에게 동조한 환현 제거세력은 동생 유도규와 하무기, 유의 외에도 왕중덕, 왕원덕, 맹창, 위영지, 단빙지 제갈장민, 신호흥, 동후지 등 여럿이었다. 유의와 유도규는 광릉(지금의 강소성 양주)자사 환홍을 죽이고 광릉을 장악했고 제갈장민은 역양을 지키던 조규를 죽이고 그곳을 장악했다. 왕원덕과 신호흥, 동후지는 안에서 호응하기로 약속했다. 맹창은 부자였던 처 주씨에게 중대한 일을 꾸리고 있으니 일단 이혼하고 나중에 성공하면 재결합하자고 제안했다. 주씨는 그런 말을 하는 이유, 즉 거사자금을 도와달라는 뜻을 즉각 알아차렸다. 주씨는 이혼을 거부하기는커녕. 아이를 팔아서라도 자금을 마련하여 돕겠다고 나섰다. 

 

작전계획에 따라 AD404년 3월8일 새벽 경구(강소성 진강)의 성문이 열리고 유유의 결사대가 들어와 환수를 처단했다. 맹창은 자신이 모시는 광릉(강소성 양주)자사 환홍에게 사냥을 가라고 유혹한 뒤 유의 유도규가 들이닥쳐 환홍의 목을 잘랐다. 경구와 광릉이 유유에게 무너지자 환현은 초조해졌다. 여러 장수들이 즉각 군사를 발동하여 반란군을 초기에 격퇴하자고 했으나 환현은 한편으로는 유유의 예봉이 두렵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유유에게 동조하는 군사들은 급격하게 세력을 넓혀 나갔다. 

 

곳곳에서 환현의 군대가 패전하자 환현은 결국 도망가기로 마음먹었다. 참군 초번이 이렇게 외쳤다.

 

“ 한 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가시다니

  가신다면 어디라도 갈 곳이 있겠습니까?“

 

환현은 은중문, 아들 환승과 조카 환준을 데리고 강릉으로 도주했다. 유유는 건강에 입성했다. 그리고 건강에 남아있던 환씨 종족을 모두 제거했다.(AD404년 3월 24일) 조상 대대로 근거지였던 강릉에서 재기를 노리던 환현은 유유의 군사가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한중이나으로 도망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측근 중 한 사람인 모수지가 자신의 아버지가 있는 익주(사천성 성도)로 갈 것을 권유했다. 익주로 가던 환현 무리는 도중에 익주의 장수 풍천에게 6월 19일 살해되었다. 36세였다. 환현의 목은 건강으로 보내졌고 유유는 폐위되었던 안제 사마덕종을 다시 황제로 옹립했다. 환현이 죽은 뒤에 사촌인 환겸(桓謙)이 남은 세력을 모아 유유에게 맞섰으나 패한 뒤 후진(後秦) 요흥에게 투항했다.

 

 

(65) 요흥과 유유의 화친(AD405)

 

이제 천하는 삼분 된 셈이다. 황하 이동의 북위와 황하 이서의 후진, 그리고 장강유역의 동진이 천하를 삼분하고 자웅을 겨루는 형국이 된 것이다. 물론 자잘한 나라들이 곳곳에 널려 있기는 하였지만 이들 강대국에게 조공하거나 복속하는 형편이었으므로 독자 세력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유유는 환씨 일족들에게 농단 당하여 어지러운 동진 조정을 수습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북쪽의 북위나 혹은 후진으로부터의 침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유는 북위와 후진 가운데 누구와 먼저 화친을 할까 깊이 고민한 끝에 생각 끝에 사신을 후진 요흥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러면서 12개 지역 땅을 화친의 댓가로 요구했다. 요흥의 신하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오히려 후진 쪽에서 내부적으로 혼란한 동진에게 화친의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요흥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 천하의 올바른 일이란 한가지일 뿐이다. 

  지금 유유가 천한 집안에서 일어나 

  악랄한 환현 일가를 토멸하고 동진 조정을 일으켜 세웠으니

  안으로 정치를 바로잡고

  밖으로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는데

  내가 어찌 땅 몇 쪼가리를 아끼면서

  그의 아름다운 과업을 완성시키지 못하겠는가?“

 

요흥의 이런 대답은 그의 사람됨의 깊이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할아버지 요익중의 유언처럼 동진 조정의 정통성을 깊이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유와 같은 훌륭한 영웅의 업적을 경쟁자, 혹은 제거 대상자로써가 아니라 천하를 안정되게 다스리는 군자의 모범으로 칭찬하는 입장에서 보고 있었다. 그런 점이 할아버지 요익중이나 아버지 요장처럼 군사적 능력과 함께 훌륭한 인군(人君)의 소양을 지닌 지도자였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비록 12년 뒤 유유에 의해 후진이 멸망하기는 하지만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은 요흥의 아들 요홍의 문제이지 요흥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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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하를 세운 유발발의 후진 침략(AD407)

 

 

AD391년 북위의 탁발규가 유위진을 멸망시킬 때 그의 아들 유발발은 후진의 요장에게로 도망왔었다. 유발발의 총명함과 무재에 매력을 느낀 요흥은 유발발을 크게 중용하였다. 요흥의 동생 요옹이 형에게 유발발의 간교함을 경계하라고 했지만 요흥은 듣지 않고 고평지역의 수비를 유발발에게 맡겼다. AD402년 시벽의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북위의 탁발준이 고평(영하성 고원)을 공략할 때 유발발은 장인 몰혁간과 함께 도망갔었다. 유발발은 그 후 선비족 근거지를 야금야금 병탄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탁발준에게 빼앗긴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 

 

후진 요흥은 5년 전 북위와의 대립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우호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수지간인 북위와 요흥이 다시 가까워지는 것에 분노한 유발발은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고 하나라(AD407-AD434)를 건국하고 백관을 설치했다. 유발발의 장수들은 고평을 수도로 삼고 독립할 것을 종용했다. 유발발이 말했다.

 

“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오.

  나의 대업이 막 시작된 참이라 군사가 많지 않소.   

  게다가 요흥은 한 시대의 큰 영웅이어서 

  그의 수하들이 충심으로 그를 받들고 있소. 

  따라서 내가 관중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아직은 불가능하오.

  내가 고평을 도읍으로 삼고 독립을 선언한다면 

  그는 국력을 기우려 고평성을 공략해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망하는 것은 서서 기다리는 일이 되고 말거요.

  우리의 전략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저들이 전혀 예기치 못하는 곳을 습격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요. 

  10년이 되지 않아 영북지역(섬서성 장안 동북부)와 하동(산서성 서남부)은 

  저절로 우리 땅이 될 것이니 조용히 기다리시오.

  요흥의 아들 요홍은 어리석고 나약하기만 하니 

  요흥이 죽기만하면 장안이 서서히 나에게로 굴러 들어올 것이요!“ 

  

이 해에 하(夏)나라를 창업한 유발발(혁련발발,AD381-AD425)의 영특함이 엿보이는 말이다. 유발발은 후진의 변경지역을 야금야금 침탈해 나갔다. 

 

 

(67) 귀신같은 요흥(AD408)

 

사천성 성도에서 후촉이란 나라를 세웠던 동진의 장수 초종이란 사람이 몰래 사람을 요흥에게 보내 와 후진의 번국이 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후진에 망명와 있는 환겸을 보내주면 함께 장강을 따라 내려가서 동진 조정을 구하겠다고 제안했다. 요흥이 환겸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환겸이 이렇게 대답했다.

 

“ 신의 가문은 여러 세대 동안 형지역과 초지역에서 큰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만약 파촉을 밑천으로 하여 장강을 따라 내려 가면

  군사와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부응해 올 것입니다.“ 

 

보내 달라는 말이었다. 요흥이 이렇게 말했다.

 

“ 작은 강은 큰 고기를 담아 낼 수 없으니

  만약 초종이라는 작자가 그 자신의 재주와 능력으로   

  큰일을 할 수 있다면

  임시로 그대의 비늘과 날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대는 필시 많은 행운과 복을 구해야만 할 것이다.“

 

요흥은 환겸을 보내 주었다. 환겸이 성도에 도착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주민들의 마음을 사며 동진 정벌에 나서려하자 초종은 의심으로 가득차 환겸을 옥에 가두고 말았다. 환겸은 동생을 부둥켜안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요흥의 말이 귀신같이 맞아 떨어졌구나.” 

 


(68) 요흥의 무리한 독발녹단 공략(AD408)

 

유발발은 남량의 독발녹단에게 혼인관계를 맺자고 제안했다.(AD407년11월) 독발녹단이 거절하자 화가 난 유발발이 2만 기병으로 지양(감숙성 영등)을 공격하여 1만 명을 죽이고 약탈해 갔다. 독발녹단이 유발발의 군대를 추격하였으나 유발발의 작전에 말려들어 또 다시 크게 패하였다. 겁에 질린 독발녹단은 변경에 수도 주변 300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수도 안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강제로 수도로 이주당하여 불만이 쌓인 사람들을 규합하여 성칠아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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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은 안팎으로 어려운 독발녹단의 남량을 흡수할 생각을 품고서 상서령 위종(韋宗)을 무위에 보내 염탐을 시켰다. 무위에서 독발녹단과 오랫동안 예기를 나누었던 위종이 나오면서 이렇게 한탄했다.

 

“ 기이한 영재와 영특한 인물이 

  화하(華夏,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밝은 지혜와 명석한 지식이 

  반드시 책을 읽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구주(구주) 바깥과 오경 밖에도

  또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독발녹단의 재주에 놀란 위종이 돌아와 요흥에게 이렇게 간단하게 보고했다. 

 

“ 남량왕국이 비록 피폐하긴 했어도 아직 도모할 수 없겠습니다.”

요흥이 이렇게 되물었다.

 

“ 아니 유발발은 그 까마귀 떼 같은 무리들로도 

  독발녹단을 궁지에 몰수 있었는데

  나와 같은 천하 대군을 가진 사람이 그를 처단하지 못한단 말인가?“

 

위종이 말했다.

 

“ 형세가 변하고 뒤집어지는 경우는

  천만가지가 넘습니다.

  남을 깔보는 자는 반드시 패하고

  남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공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독발녹단이 유발발에게 패한 것은 

  그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독발녹단이 그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주군의 천만대군을 가지고도 이기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요흥은 위종의 충간을 듣지 않았다. 아들 요필과 염성 걸복건귀 등의 장수와 함께 3만 군사를 보내 독발녹단을 공격하고 동시에 좌복야 제난을 시켜 2만 기병으로 유발발을 공격했다. 

이부상서 윤소가 요흥을 막아섰다.

 

“ 차라리 북량의 저거몽손과 서량의 이고에게 명하여 남량의 배후를 공격함만 못합니다.”

 

요흥은 이 또한 듣지 않고 독발녹단에게 기만하는 편지를 썼다.

 

“ 제난을 보내 유발발을 토벌시켰다.

  유발발이 서쪽으로 달아날 것을 대비하여 

  요필에게 군사를 붙여서 하서회랑(난주-무위-장액-주천을 잇는 길)

  그쪽으로 보내니 그대는 그렇게 알아라.“

 

독발녹단은 요흥의 편지를 곧이곧대로 믿고서 대비하지 않았다. 요필의 부하 강기가 군사 5천을 요구하면서 급습하자고 건의했지만 요필은 듣지 않고 정산 속도로 무위로 다가갔다. 요필의 군대가 무위로 들이닥치자 독발녹단은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를 갖추었다. 전투가 지루하게 계속되자 무위 성안에서 내부반란의 기미가 있었으나 독발녹단은 반란무리 5천명을 전원 매몰시켜 수습하는데 성공했다. 독발녹단은 성안에 있는 양과 소를 모두 성밖으로 풀어 내 보냈다. 후진 장군 염성이 병사를 풀어 양소무리를 잡게 했는데 이 틈을 타고 독발녹단의 군사들이 뒤를 공격하여 요필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7천명의 후진 병사의 목이 이 때 달아났다. 요흥은 요현에게 2만 기병을 붙여서 패전한 요필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나 요현 또한 독발녹단에게 패했다. 요현은 패전의 책임을 염성에게 묻고 독발녹단에게 사과하고 철군했다. 독발녹단 또한 사자를 후진에 보내 사죄했다. 후진과 남량이 다시 화친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해 AD409년에 독발녹단은 독립을 선언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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