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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15: 3대 인재가 이어진 후진(後秦)을 망가뜨린 요홍(姚泓) (L,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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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8월06일 16시4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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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77) 유유의 침입과 연속 항복(AD416)

 

비록 요홍이 아버지의 뒤를 이었지만 주변 상황은 점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저왕 양성은 기산(감숙성 예현)을 함락시킨 뒤 진주(천수)를 향해 내려왔고 후진의 요평과 요숭이 양성을 반격하였지만 혁련발발이 4만 기병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바람에 거의 모든 후진 장수들이 전사하거나 패퇴하여 들어왔다.   

양성이나 혁련발발만이 아니었다. 유유의 동진 군사들도 허약한 후진의 변경을 노리며 들어왔다. 왕진악, 단도제, 심임자 등이 모두 후진의 국경을 공격하여 들어왔고 그곳을 지키는 후진 장수들은 제대로 항전하지도 않은 채 유유 군사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후진의 남쪽 국경은 회수에서 뒤로 크게 밀려 황하 언저리까지 후퇴해야 할 형편이었다.

 

후진 동평공 요소가 요홍에게 말했다.

 

“ 동진의 병사가 허창을 지났습니다만

  안정(감숙성 진안)은 외롭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이 공격하기도 또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마땅히 그리고 옮겨서 안으로 알차게 운영하시면

  10만 대군은 쉽게 얻습니다.

  그렇게 되면 동진이나 하나라가 침입하여도

  나라를 망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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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복야 양희는 이렇게 말했다.

 

“ 제공 요회가 위세로 이름이 뛰어납니다.

  요회에게 안정(감숙성 진안)수비를 맡기시면 됩니다.

  그리고 관중의 병사는 동진군사를 막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요홍은 양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의부랑 의횡이 몰래 요홍에게 말했다.

 

“ 요회는 광평공(요필)의 어려움이 있을 때 폐하께 큰 힘이 되셨읍니다만 

  폐하께서 제위에 오르신 후 보답을 변변치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안정지역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남쪽으로 들어오려고 난리인데 그를 사지에 그냥 내버려두시면 

  만에 하나 그가 불안한 군중을 몰아 경사로 쳐들어 온다면

  얼마나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곧바로 불러 들여서 가까이 두시는 것이 안전하고 좋겠습니다.“

 

요홍은 반대했다.

 

“ 요회가 만일 불령한 마음을 품었다면

  징소하는 것 자체가 반란을 일으킬 계기가 될 것이다.“ 

 


(78) 동진의 낙양함락(AD416)

 

북진하는 동진 군사가 양성(하남성 등봉)과 형양(하남성 형양)을 함락시킨 뒤 쪽 성고(하남성 형양)까지 다다랐다. 그곳을 지키던 진류공 요광이 장안에 긴급구원을 요청했다. 요홍은 3천 기병을 염생에게 주어 즉각 구언하도록 했다. 그리고 요익남에게 보졸 1만을 거느리고 낙양으로 가서 돕도록 하는 한편 병주(산서성 영제)목 요의를 섬진(삼문협)으로 보내 굳건히 수비하도록 했다.       

 

요광의 참모 영삭장군 조현은 요광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충지는 금용(낙양성 북쪽모퉁이)이니 이것만 지키면 동진군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그러나 요광의 사마 요우는 몰래 동진의 단도제와 내통을 하고 있었는데 조현을 매우 시기하고 있었으므로 요광에게 이렇게 말했다.

 

“ 전하는 무용이 뛰어나지 않으십니까?

  이런 큰 사태를 만나 지키기만 하신다면

  설혹 지켜낸다고 한 들 나중에 책임추궁이 없겠습니까?“

 

요광은 요우의 말이 더 옳다고 판단하고 조현을 시켜 금용이 아닌 백곡오(하남성 언사 남쪽)를 지키도록 하였다. 조현이 눔눌을 흘리면서 요광에게 말했다.

 

“ 저 조현은 세 분 황제(요장,요흥,요홍)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올바름으로 지키다가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밝으신 진류공께서

 충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간사한 사람에게 오도되시니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요광의 군사는 동진군에게 패배하였고 조현은 10여 곳 칼에 찔려 부상당했다. 조현의 사마 건감이 조현을 끌어안고 울었다. 조현이 건감에게 말했다.

 

“ 나의 부상이 이미 무거우니 나는 가망이 없다.

  그대는 마땅히 빨리 도망하여 목숨을 건지도록 하라.

  명령이다.“

 

건감이 이렇게 외쳤다.

 

“ 장군을 구하지 못하고 저 건감이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명을 받들 수 는 없습니다.“

 

조현과 건감은 모두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요우는 단도제에게로 도망쳤고 요광은 동진에 항복했다. 이렇게 해서 후진의 낙양은 동진에게로 떨어졌다. 

 

 

(79) 요의의 반란(AD416)

 

요흥의 둘째 아들 요의의 사마 손창이 요의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 장안을 습격하시고

  주군 요홍을 폐위하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 오르십시오.“

 

요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곡식을 풀어 장수와 백성들의 민심을 사도록 했다. 좌상시 장창과 시랑 좌아가 간곡히 말리며 나섰다.

 

“ 전하께서는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는 동생으로써

  안전과 위험과 기쁜과 근심을 모두 같이 누리고 계십니다.

  지금 오가 쳐들어와서 노략질을 하니 네 주가 기울어져 없어졌고

  서북쪽으로는 오랑캐들이 끊임없이 변경을 괴롭히고 있어서 

  나라가 마치 계란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형국입니다.

  이런 형편에 곡식을 풀어서 창고를 텅 비게 하심은 

  장차 어쩌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요의는 화를 내며 장창과 좌아를 매질 쳐 죽여 버렸다. 후진의 주군 요홍은 동평공 요소를 불러서 대응책을 의논했다. 요소가 이렇게 대답했다.

 

“ 이것은 손창의 계략이 분명합니다.

  그를 일단 조정으로 소환하시고

  요찬을 급히 그곳으로 보내 섬성을 장악하도록 하시지오.

  신은 동관으로 군사를 몰고 나아가 방어하겠습니다.

  손창이 들어오면 요의를 보내 동진을 막도록 다시 명령하시되

  만약 들어오지 않으면 지체하지 마시고 토벌군을 보내십시오.“

 

드디어 요의가 반란을 선언하고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참칭했다. 요의가 영동장군 요성도에게 동참하자고 패도를 보냈으나 요성도는 거절했다. 요소의 군대가 포판으로 들어가 요의를 체포하고 손창 등을 주살했다. 

 

 

(80) 제공 요회의 반란(AD417)

 

정북장군 요회가 조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안정으로부터 군사를 몰아 장안으로 향했다. 명분은 황제 주위의 간악한 무리를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강기가 요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 지금 나라의 장수와 군대는 

  모두 동방(동진과의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경사가 텅 비었을 테니 

  공께서 재빨리 경사로 들어가시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요회는 강기의 말을 따르지 않고 요심이 방어하는 남쪽 미성(섬서성 미현)을 먼저 공격했다. 요심은 요회에게 패전했다. 황제 요홍은 서둘러 사신을 요소에게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동평공 요소는 서둘러 군사를 몰아 영대(장안 서쪽)에서 요회와 대치했다. 요찬도 윤아에게 동관을 맡기고 요소와 합류했다. 요홍의 군대들이 사방에서 장안으로 지원오자 요회의 부하들이 두려워하며 일부는 조정의 군대에 항복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요회가 서둘러 요소에게 전투를 재촉하자 요찬이 요회의 배후를 습격하여 격파해버리고 말았다. 요회와 세 동생은 참수되었다. 

 


(81) 요홍의 북위 구원요청과 북위의 의논(AD417)

 

유유의 동진 군대가 회수와사수를 거쳐 물밀 듯 후진의 영토로 북진해 들어오면서 북위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했다. 다급한 요홍도 북위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북위주군 탁발사는 대신들과 이 문제를 놓고 의논했다. 거의 모든 신하들의 이견은 유유에게 길을 빌려주면 안된다고 했다.

첫째로 동관은 험조하므로 동진의 수군으로도 공략하기 어렵다는 점과,

둘째로 유유의 참 뜻을 알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셋째로 후진은 혼인관계(요흥의 딸 서평공주를 맞은 탁발사는 요홍의 처남)를 맺은 사이라는 것이었다.     

 

최호가 나서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유유의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첫째로, 유유의 진정한 목적은 중원, 즉 관중을 되찾는 일이므로 길을 빌려줘도 되고,

둘째로,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황하를 올라와 북위를 먼저 칠 것이며,

셋째로 지금 북위는 북쪽 유연의 노략질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유유와 다시 대적한다면 양쪽으로 전쟁을 하는 꼴이 되어 여간 어렵게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은 유유의 목적이 북위공략에 있다고 봤으므로 최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탁발사는 10만 대군을 몰아 황하북쪽 하안에 주둔시켜 유유에 대비하도록 했다. 

 

탁발사는 최호에게 물었다.

 

“ 유유는 요홍을 이길수 있는가?

 

최호가 답했다.

 

“ 그렇습니다”

 

탁발사가 되물었다.

 

“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최호가 대답했다.

 

“ 요흥은 헛 명성을 좋아해서 실제 쓰임이 적었고   

  요홍은 병약하고 형제들과 벌어져 다툼이 많습니다. 

  유유는 그 위태로움의 틈새를 타고 공격하는데다가

  장수와 병사들이 날쌔고 용감하니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탁발사가 물었다.

 

“ 유유와 모용수(후연의 창업자)의 재능을 비교하면 어떤가?”    

  

최호가 대답했다.

 

“ 유유가 낫습니다.

  모용수는 아버지와 형제의 밑천을 빌려서 

  예전의 대업(전연)을 살린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유유는 가난하고 미천한 데서 출발하여 

  한 치의 땅도 없이 환현을 토벌하고  

  동진 조정을 바로 세웠으니

  재능이 보통 사람을 넘지 않고서는 

  어찌 이룰 수 있는 업적이겠습니까?“

 

탁발사가 물었다.

 

“ 이미 유유가 함곡관으로 들어갔으니

  우리가 날쌘 기병을 팽성과 수춘으로 보내 그 뒤를 공격하면

  유유는 장차 어떤 전략으로 나오겠는가?“

 

최호가 대답했다.

 

“ 첫째, 서쪽에는 혁련발발이 있고 북쪽에는 유연이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에겐 좋은 장수가 곁에 없습니다. 

        장손숭이라고 해도 유유에게는 적수가 도지 못합니다.

  셋째, 유유가 후진을 이기면 반드시 동진 황위를 찬탈 할 것입니다. 

  넷째, 관중지역은 화족과 이민족이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유유가 다스린다고 한 들 옷을          벗고 불을 품으며 그물을 벗겨놓고 호랑이를 잡는 것과 같이 어렵고 힘듭니다. 군          사를 남겨둔들 주민들의 원망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유유가 하는 짓을 가만 두시고 백성을 쉬게 하시면 후진의 땅은 자연히 우리 것이 될 것이니 초조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탁발사는 최호에게 비단과 술을 내리면서 칭찬했다.

 

“  그대의 말은 이 소금과 술 맛 같으니

   같이 즐기도록 합시다.“

 

그러나 탁발사는 몰래 장손숭과 숙손건에게 명하여 형양 서북 범수에서 황하를 건너 팽성(안휘성 서주)와 패군(안휘성 회북)을 침입하도록 지시했다. 

 

 

(82) 요흥의 항복과 후진 멸망(AD417)

 

AD417년 7월 유유의 군대는 삼문협까지 도달했다. 유유의 남군 심전자와 부흥지는 청니(섬서성 남전)까지 올라왔다. 요홍은 먼저 심전자의 군대를 상대했으나 숫적으로 훨씬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하여 장안으로 도망갔다. 왕진악이 유유의 허락을 받고 수군으로 장안을 공격했다. 후진의요강과 요난의 군사가 왕진악에게 패배했다. 왕진악은 수전을 이긴 뒤 군대를 이글고 육지로 올라왔다. 그리고 후진의 방어군 요비와 요심을 격파했다. 요홍은 황궁 안으로 대피했다. 후진의 장수 호익도가 마침내 유유에게 항복했다. 궁지에 몰린 요홍이 항복하려하자 열 살 짜리 아들 요불념이 이렇게 말했다.

“ 아버님, 자결하는 것만 못합니다.”      

 

요불념이 성벽에서 떨어져 자결했지만 요홍은 머뭇거리며 망설이다가 결국 처자를 모두 이끌고 왕진악에게 항복했다.(AD417년 8월24일) 9월 태위 유유가 장안에 도착해서 왕진악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의 대업을 이루게 한 사람은 경이오!“ 

 

요박, 요찬 등 후진의 모든 황족과 장수들이 유유에게 항복했는데 유유는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요홍도 건강까지 데리고 와서 목을 베었다. 유유는 낙양으로 천도할 것을 생각했으나 측근 왕중덕이 반대하였으므로 그만 두었다. 유유가 장안을 점령하는 사이 혁련발발은 후진의 옛 북쪽 땅을 거의 대부분 차지하였다. 유유가 혁련발발에게 사신에게 편지를 붙여 보내 형제서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혁련발발은 중서시랑 황보휘에게 보낼 편지를 외우게 한 뒤 유유의 사신에게 구술로 불러주어 받아 적게 하였다. 유유가 탄식하며 말했다.

 

“ 내가 혁련발발 보다 못하구나.”  

 

 

(83) 후진 멸망의 원인 : 무능하고 용렬한 혼군 요홍

 

강직하고 의리 깊은 할아버지 요익중과 훌륭한 두 아들 요양과 요장, 그리고 총명하고 온화한 요흥의 삼대 약 65년에 걸친 뛰어난 지도자 계승은 중국 어느 황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행운이었다. 비록 건국은 하지 않았지만 당시 5호16국 어떤 창업자 못지않게 총명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또한 의리 깊었던 요익중의 인생은 모든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도 남는다. 그의 뛰어난 아들 요양은 불행히 26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했지만 그 동생 요장은 항상 형님의 뛰어남을 존경하면서 겸손하게 패업을 달성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전진의 부견을 마침내 제거하고 AD384년 후진을 세운 이후 그가 AD394년 죽을 때까지 후진의 국력은 줄기차게 팽창했으며 그를 이어받은 요흥 또한 더욱 나라를 확장하여 AD400년경에는 북중국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강성하던 후진은 AD402년 강력한 라이벌 북위와의 시벽전투에서 패배한 뒤 조금씩 국력을 잃기 시작한 것은 주변 국가들이 무서운 속도로 강성해진 때문이었다. 하를 세운 혁련발발, 남량의 독발녹단의 배반, 구지지역의 양성의 반란, 날로 강해진 북위와 남쪽 동진의 유유는 더 이상 후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이었다. 거기에다가 주군 요흥이 병으로 눕게 되자 요흥의 아들들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과 반란이 이어지면서 허약해진 후진은 요홍이 죽자 빠른 속도로 해체되었던 것이다. 후진의 멸망 원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북위, 하, 동진의 유유 등 주변국들이 너무 빠르게 강성해졌다. 

둘째, 명군 요흥이 사망하면서 조정 내부에 급격한 내부분열이 발생했다.         

셋째, 요흥의 아들 요홍이 후진의 대업을 계승할 재목이 전혀 되지 못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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