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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6-1 : 전한(前漢)의 창읍왕 유하(BC92-BC52) <J>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10월15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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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둘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31>중위 왕길(中尉 王吉)의 상소 (BC74)

 

유하는 창읍국왕 유박의 아들로써 봉국에 있을 때 방종하고 광포하였으며 행동에 절제함이 전혀 없었다. 할아버지 무제가 죽었을 때도 유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냥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방여라는 곳에 이르러서는 반나절에 이 백리를 돌아다닐 정도로 놀이에 열중했다. 그런 유하를 황제로 세우는 것에 대해 반대가 없을 리 없었다. 낭야사람인 중위 왕길이 긴 상소문을 올려 간언을 올렸다.  

 

    ” 대왕께서는 책과 경서 읽기를 즐기지 않으시며

      놀고 즐기는 것에 빠져 지내시고,

      격식을 무시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말을 달리는 것을 즐기시며 

      입으로는 목이 쉴 정도로 질타하시고

      손은 채찍과 고삐를 내리치시니

      몸은 마차 위에서 피곤하여 소리 지르고

      아침이 되면 이슬이 모자에 내려앉을 정도입니다.                        

     밤이 되면 옷은 먼지 띠끌로 뒤덮입니다.

     여름이 되면 살이 타들어갈 정도로 덥고

     겨울에는 찬바람에 엎어지고 척박해질 정도가 되며

     연약하고 부드러운 몸은 심한 노동피로로 독이 되듯 하니

     이것은 종묘를 위해 수명을 올바로 지키는 것이 되지 못하며

     인의를 융성하게 하는 길도 되지 못합니다.

     무릇 큰 궁궐 안에서 부드러운 비단 옷을 입고

     앞으로는 훌륭한 선비를 모시고

     뒤에서는 경전을 낭독하면서

     위로 당과 우 시대를 의논하고

     아래로 은과 주의 융성함을 의론하고

     인자하고 성스러운 기풍을 상고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발분망식하여 

     하루하루 부족한 덕을 새롭게 하셔야지

     어찌 재미가 길가 말뚝 사이에 있겠읍니까.

     쉬면서는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하고 몸을 굽혔다 폈다 하여 몸을 이롭게 하시고   

     나가고 들어오면서는 걸음걸이를 재촉하여 다리를 튼튼하게 하시며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 뿜으면서 장을 단련하시니

     오로지 정성을 쏟아 정신을 가다듬으셔서

     생기를 북돋우시면 어찌 장수하지 못하겠습니까. 

     대왕께서 진실로 이렇게 유의하시면 

     마음은 요와 순의 의지를 본받게 되고

     몸은 교와 송처럼 장수하게 되니

     아름다운 평판으로 영예를 얻고

     결국에는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 

     복록은 저절로 들어오고 사직도 안정될 것입니다.

     황제께서는 어질고 성스러우셔서 

     지금까지도 사모하는 일이 그치지 않으시니 

     궁관여흥이나 호숫가나 사냥을 가까이하시지 않으셨는데

     대왕께서는 당연히 아침저녁 이에 유의하셔서 

     성스러운 마음을 이어받으셔야 합니다.               

     제후들은 모두 골육친척들이시나 대왕같이 가까운 분은 없으시니

     속하기로는 아들과 같으시나

     위치로 보면 신하이시니 몸은 하나이나

     두 가지 직분을 가지신 셈입니다.            

     은혜로 생각하고 의롭게 행동하시며

     조금이라도 갖추지 못한 바가 황제에게 보고된다면

     나라에 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림] 창읍(=산양)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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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읍왕 유하는 아래에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 과인은 타락한 행동을 없앨 수가 없었는데

        중위가 충정으로 지적하여 

        여러 번 나의 잘못을 고쳐주었다. “

 

알자 천추를 보내 쇠고기 오백 근과 술 다섯 섬과 포 다섯 묶음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다시 전과 같이 방종한 행동을 반복하였다.

 

<32> 창읍왕의 무능 :낭중령(郎中令) 공수(龚遂)의 충간(忠谏) : 교서왕의 간신 후득(侯得)(BC74)

 

낭중령 사양사람 공수는 충성스럽고 강인한 사람으로 절개가 곧아서 안으로는 왕에게 자주 쓴소리를 하면서 밖으로는 왕의 스승을 꾸짖으면서까지 경서의 의로움을 가지고 화가 되는 일과 복이 되는 일들을 진술해 밝혔는데 나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면서 면전에서 왕의 과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듣다 못한 왕은 귀를 가리며 일어나 소리질렀다.

 

     ” 낭중령은 정말로 괴롭히는 사람이군!“

 

왕은 오래 전부터 마부나 놀음꾼들과 같이 춤추고 술마시기를 좋아했는데 그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 절도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공수가 들어가서 무릎을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말렸고 좌우 시종들 또한 나오자마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물었다. 

 

     ”낭중령은 왜 우는 것인가?“

 

공수가 대답했다.

 

    ” 신은 사직이 위태로운 것이 마음에 아픕니다.

     청컨대 주변을 물리시면 제 우둔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은 좌우를 물러가라고 했다. 공수가 물었다.

 

   ”왕께서는 교서왕이 무도하여 망한 것을 아십니까?“

 

왕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공수가 말했다.

 

   ” 신이 듣기로는 교서왕에게는 아첨하는 신하 후득이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왕이 마치 걸왕이나 주왕같이 포악했지만

     후득은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다고 칭찬해 댔습니다.  

     왕은 그런 아첨에 중독되어 침소에까지 곁에 두어

     오로지 그의 말만 듣다가 그 지경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소수의 무리를 가까이하시면서 

     사악한 것을 배우시고 점점 빠져들고 계셔서

     존망의 기로에 서 있으니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경서에 밝고 행동이 의로운 선비를 뽑으셔서

     왕과 함께 기거하시고

     앉으시면 시경, 서경을 읽으시고

     서시면 예절과 몸가짐을 배우시는 것이 도움 되실 것입니다.“

 

유하는 그렇게 허락했다. 낭중 장안 등 열 명을 선출하여 왕을 시종들게 하였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유하는 그들 모두를 쫓아냈다.

 

왕이 전에 크고 흰 개를 보았는데 목 아래는 마치 사람과 같았고 머리는 방산관 같은 것을 썼는데 꼬리가 없었다. 기이하다고 생각한 왕이 공수에게 물었다. 공수가 대답했다.

 

    ” 그것은 하늘의 훈계라는 것입니다. 

      즉, 주변에 있는 자들이 모두 관(벼슬)을 쓴 개들이라는 뜻입니다.

      쫓아버리면 살아남으시지만 그렇지 못하면 망한다는 뜻입니다.“ 

 

그 후에 어떤 사람이 곰이라고 하여 봤는데 큰 곰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괴이하게 여긴 왕이 다시 공수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공수가 말했다,

 

   ” 곰은 산에 사는 야생동물입니다.

     궁궐에까지 내려왔고 오직 왕께서만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늘이 대왕에게만 경계를 보이신 것입니다.   

장차 궁궐이 텅 비고 위태로울 형상일까 두렵습니다.“  

 

왕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탄식했다.

 

   ” 불상스러운 일들이 어찌 이렇게 여러 번 발생한단 말인가?

 

공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 신은 감히 충성스런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여러 번 위태롭고 망할 징조라는 것을 말씀드렸지만

     대왕께서는 불쾌하게만 생각하셨습니다.

     대저 나라의 존망이 어찌 신의 말에 달려 있겠습니까.

     원컨대 왕께서는 안으로 스스로 잘 살피십시오(内自揆度).

     시경 305편을 낭송하셔서 

     사람의 일을 두루 살피시고 왕도를 준비하십시오.

     왕의 행동은 시경의 어느 한 편과 일치 할까요.

     대왕은 위치가 제후왕이라서 행동은 서민들에게 미치는데

     지키는 것은 어렵고 망하는 것은 쉽습니다.

     깊이 살피셔야 합니다.”  

    

그 후 피가 왕의 좌석을 적셨다. 왕이 공수에게 묻자 대답했다.

 

   “ 궁궐이 텅 비는 것이 멀지 않았습니다.

     요상한 징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피를 흘린 것은 어둡고 우울한 징조입니다.

     마땅히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고 근신해야 합니다.”

 

왕은 끝내 버릇을 고치지 못하였다.

 

 

<33> 창읍왕 유하가 황제위에 오르다(BC74)

   

마침내 창읍왕 유하를 부르는 서신이 도착했다. 밤 물시계가 일각을 채우지도 못할 때였으므로 불을 밝혀서 초빙문서를 읽어야 했다. 낮이 되어 창읍왕은 장안으로 출발해 오후 서너 시 경에 정도에 도착했다. 그 거리가 백 삼십 오리(54km)였으므로 따르는 사람과 말의 시체가 길에 널릴 정도였다.   

왕길이 창읍왕에게 경계하는 서신을 올렸다.

 

    “  신이 듣기로는 은나라 23대 고종은

       부모의 상을 당하여 상복을 벋기까지 3년 동안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황제가 돌아가심에 따라 황제로 초빙받은 것이니

       마땅히 주야로 곡을 하시고 슬픔과 비통한 눈물을 흘리셔야 하며

       근신하셔서 나가는 일을 만드시면 안 됩니다. 

       대장군께서 인애하시고 용기와 지략이 있으시며

       충성심과 믿음과 덕이 깊으신 것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천하에 없습니다.          

       효무황제를 섬기기 20여 년 조그마한 잘못도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선제(소제)께서 여러 군신을 놔두고 

       그에게 천하와 어린 고아(소제를 말함) 위탁하셨습니다.

       대장군께서는 어린 군주를 강보에 껴안으시고 

       정치를 펼치고 교화를 펴시니 해내가 안연해 졌는데

       비록 주나라 주공이나 이윤이라 할지라도 

       그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지금 황제께서 후사가 없이 돌아가셨으니

       대장군께서는 오로지 종묘를 이을 후사만을 찾고 계시다가

       대왕을 뽑으셔서 잇게 하셨으니 

       그 인자후덕하심을 어떻게 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은 원하옵건대 대왕께서 

       그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공경하시고 

       정사는 그에게만 물으시고 

       대왕께서는 오로지 팔짱만 끼고 남면하고 계서도 되겠습니다.

       깊이 생각하시고 항상 유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대왕이 산동 제양에 도착했을 때 장명계(길게 우는 닭, 애완용 닭)을 구해 찾았고 길에서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지팡이를 샀다.  하남 영보를 지나면서는 시종을 시켜 옷을 싣는 수레에 마음에 드는 여자를 실어 나르게 하였다. 호 지방에 당도했을 때에 조정의 사신이 그 일을 가지고 사람을 시켜서 창읍의 수상 안락을 꾸짖게 하였다. 안락은 들어가서 공수에게    고해 바쳤고 공수는 유하에게 그런 일, 즉 여자를 수레에 실은 일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유하는 아니라고 잡아떼었다. 공수가 지적했다.

 

    “ 즉시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어떻게 한 시종을 아끼시면서 거짓말을 하시고 

      의롭게 행동하는 것을 버리십니까?     .

      청컨대 관련 속리들을 잡아들여서

      대왕의 죄를 깨끗이 씻으십시오.”

 

즉시 시종을 잡아들여 위사에게 넘겨주며 법대로 처분하라고 명했다. 유하가 패상에 도착하자 대홍려가 영접을 나왔고 승여로 바꿔 탔다. 낭중령 공수가 같이 수레에 올랐다.   

광명 동도문에 왔을 때 공수가 말했다.

 

      “ 예에 따르면 나라의 도읍을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울어야만 합니다.

        저 장안의 동곽문이 바로 그 장안의 문입니다.”

 

창읍완 유하가 이렇게 불평했다.

 

     “ 내 목이 아파서 울 수가 없소.”

 

성문이 가까워오자 공수가 또 곡을 하기를 권했는데 왕은 이렇게 말했다.

 

     “ 성문이나 곽문이나 같은 것이지.”

 

마침내 미앙동궁에 도달하자 공수가 다시 재촉했다.

 

    “ 창읍국 장막은 이 궐 바깥 북쪽 길로 가면 있습니다.

      아직 그곳에 다다르지는 않았으나 몇 발자국이면 가게 됩니다.  

      대왕께서는 수레에서 내리셔서 

      대궐의 서면을 향해 꿇어앉아

      슬프게 곡을 하신 다음 그치십시오.“

 

유하는 허락하고 겉으로 곡하는 흉내만 냈다. 6월 1일 병인일에 유하는 황제의 옥새수를 인계받고 황제가 되었다. (BC74)

 

 

<34> 음난무도한 창읍왕이 한 달 만에 쫒겨나다.(BC74)

 

창읍왕 유하가 황제로 세워지고 나서도 음난한 장난질이 그치지 않았다. 창읍국에 관속들은 모두 장안으로 발탁되었고 급을 초월하여 승진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창읍국 재상 안락은 장락위위가 되었다. 공수가 안락을 보고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왕을 세워 천자가 되었는데

       날로 교만이 넘치고 간언을 올려도 다시 들으려고 하지도 않구려.

       지금 장례로 애통함이 끝난 것도 아닌데 

       매일 신하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호랑이나 표범 싸움을 즐기고 계시고

       가죽으로 씌운 마차를 타시고 동서로 분주하게 쏘다니시니

       패악한 짓이 아닐 수 없구려.

       옛 제도에는 관대함이 있어서 신하들은 몰래 숨고 나서지 않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빠지는 것이 불가능하여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오로지 들킬까봐 걱정할 뿐이니 내 몸이 죽고 가족이 살육을 당한들 어쩌겠소.

       그대는 폐하의 옛 재상이니 죽기를 각오하고 간쟁해야 할 것이오.“

유하가 파란 파리똥이 궁궐 서쪽 계단에 수북히 쌓이는 꿈을 꾸었는데 대 여섯 가마는 되어 보였고 기와지붕으로 덮여있었다. 왕이 무슨 꿈인지 물어보자 공수가 대답했다.

 

    ” 폐하, 시경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앵앵거리는 파란 파리가 울타리 위에 앉았고,

       편안하고 공손한 군자는 참언을 믿지 않네.“   

       폐하의 왼쪽에 참언을 하는 부류가 널려있으니 

       이것이 다 파란 똥 같은 놈들입니다.

       마땅히 선제께서 쓰셨던 대신들의 자제를 뽑아 올려 

       좌우 가까이 두셔야 합니다.

       창읍 옛 신하들을 냉정하게 끊지 못하시고

       아첨과 참소를 믿고 따르시다가는 큰 불행을 겪으실 것입니다.

       원컨대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하시려면    

       모두 방출하십시오. 신이 먼저 방출되겠습니다.”       

 

왕은 듣지 않았다. 대장군은 걱정이 가득했다. 고민 끝에 평소 친하던 옛 신료 대사농 전연년에게 어찌해야 할지 물었다. 전연년이 단호하게 말했다.

 

    “ 대장군은 나라의 기둥이오. 

      창읍왕이 이미 부족하다고 판단하셨으면

      어찌 태후에게 건의하셔서 다시 현명한 사람을 뽑지 않으시오?”

 

곽광이 말했다.

 

    “ 지금 그리 하고 싶지만

      과거에 그리한 적이 없었던 것 아닌가요?” 

 

전연년이 대답했다.

 

    “ 이윤이 은나라 재상이 되었을 때 

      종묘 안정을 위해 태갑을 폐했었는데

      후세에 그의 충정을 높이 칭송하지 않았소.

      만약 장군께서 그렇게 하시기만 한다면

      이 역시 한나라의 이윤이 되시는 것이오.”

 

곽광은 그를 급사중으로 끌어 들이고 몰래 거기장군 장안세와 함께 계획을 세웠다.    

 

<35> 하후승의 경고(BC 74) 

 

왕이 놀이를 나가려고 문을 나서는데 광록대부 하후승이 왕의 승여 앞에서 통열히 간언을 올렸다.

 

    “ 하늘은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을 보니

      신하들 중에 음모가 있는 듯합니다.

      폐하께서 나가시려하는 것은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왕은 도모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요망한 말 매우 기분이 언짢았다. 당장 그를 옥에 가두었다. 관리가 그 사실을 곽광에게 보고했는데 곽광은 하후승에게 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거사의 계획이 새어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장안세를 나무랐다. 그러나 장안세로부터 말이 새어나간 것이 아님을 확인하자 하후승을 불러 알게 된 연유를 물었다. 하후승이 대답했다.  

 

    “ 홍범전이라는 옛 책에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 황제가 똑바르지 못하면 날이 항상 어두우며 

       밑의 사람이 윗사람을 해치는 일이 벌어질 때다.’

      그대로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그냥

     ‘ 신하들 중에 음모가 있는 듯합니다.’ 라고만 했습니다. ”   

  

곽광과 장안세는 홍범전이라는 책의 내용과 하후승의 말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오싹했다. 그 일 이후로 경술사들을 더욱 높이 대우하고 중요하게 생각했다.  시중 부가 또한 여러 번 간언을 올렸지만 하후승과 같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될 뿐이었다. 곽광과 장안세는 이미 의논을 확정 지은 터라 전연년을 승상 양창에게 보내 그 사실을 알렸다. 양창은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할 말을 잃었다. 식은 땀이 솟아 등을 적시고 그저 그렇군요 그렇군요 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전연년이 일어나 옷을 갈아입을 때 양창의 부인이 서둘러 남편에게로 가서 말했다.

  

    “ 이일은 국가의 대사입니다.

      지금 대장군의 계획이 이미 확정되어

      아홉 명의 경들로 하여금 당신께 보고하게 하셨으니

      만약 당신이 대장군과 같은 편이라고 하시지 않으면

      미적거린다고 판단하시고 누구보다 먼저 주살될 것입니다.”

 

전연년이 다시 옷을 입고 나설 참에 양창의 부인이 전연년이 있는 곳에서 허락하는 말을 했다.

 

    “ 대장군의 교령을 높이 받들기를 청합니다.”

   

이로써 승상 양창은 대장군 곽광의 계획에 동참한 셈이 되었다.           

 

곽광은 감사의 말씀을 올렸다.

 

    “ 구경께서 곽광을 책망하시는 것은 옳습니다.

      다만 천하가 매우 흉흉하고 불안하니 

      저 스스로 환난을 감당하겠습니다.”

 

<36> 창읍왕 유하의 폐위(BC74) 

 

6월 28일 곽광은 승상과 어사와 장군과 열후, 이천석 이상의 고관, 대부, 박사 등을 모두 미앙궁으로 불러 말했다.

 

    “ 창읍왕의 행동이 혼미하기 그지없어

      사직이 위태로운데 장차 어떻게 해야겠소?”

 

대소군신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어서 아무도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전연년이 앞에서 칼을 잡고 일어나 말했다.

 

    “ 선제께서 어린 황제(죽은 소제)를 장군께 위촉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장군께 천하를 부탁하는 것은 장군이 충성과 현명함을 갖고 있어서 

      능히 유씨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오.

      지금 창읍왕을 따라 온 여러 무리들이 날뛰며 

      천하를 어지럽혀 사직이 쓰러지게 되었소.

      또 한조정이 시호를 항상 ‘효성효’자로 이어간 것은

      그것으로 천하를 오래 보전하고 

      종묘에서 따뜻한 혈식으로 제사를 이어가고자 함이었소,

      만약 한씨의 제사가 끊어진다면

      장군이 죽더라도 어찌 지하 저승에서 선제를 뵐 면목이 서겠소?          

      오늘의 의론을 미룰 수는 없는 것이니

      나중에 호응하겠다는 자는 신이 청컨대 목을 치겠소!” 

          

곽광이 군신들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 아홉 경들께서 저를 책망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천하가 흉흉하고 불안하여 불가피 한 것이니

      모든 수난은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

 

곽광은 즉시 모든 군신들과 일일이 인사하고 난 뒤 창읍왕이 종묘사직을 계승할 수 없다는 것을 태후에게 보고했다. 황태후는 마차를 타고 미앙궁 승명전으로 가서 금문군사들에게 창읍국 출신 관료들을 절대 입궁시키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다. 왕 유하가 들어 와 태후를 만나 뵌 뒤 온실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중황문의 내시들은 각각 문을 드나들 수 있는 부채를 지니고서 왕을 들여보낸 다음에 문을 닫아버리니 창읍국 출신 관리들은 들어갈 수 없었다. 왕이 물었다.

 

     “ 왜 이렇게 하는가?”

 

대장군 곽광이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 태후께서 내리신 명령입니다. 

       창읍국 신료들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왕이 말했다.

 

    “ 잠깐만 계시게.

     어떻게 그리 사람을 놀라게 한단 말인가?”

 

곽광은 개의치 않고 사람을 보내 창읍 관료들을 모두 내보내 금마문 바깥에 모은 다음 거기장군 장안세는 우림기병을 이끌고 그들 이백여 명을 옥에 가두어 재판에 회부해 버렸다. 옛날 소제 때 시중에게 창읍봥 유하를 지키도록 하였다. 곽광이 좌우에게 말헀다.

 

    “ 숙위를 잘 하도록 하시오.

      혹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주군을 죽였다는 천하에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말것이오.”

    

유하는 아직도 왜 폐위 당해야 하는지 모르고 이러헤 물었다.

 

    “ 나의 옛 부하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대장군이 그들을 죄다 가두었단 말인가?” 

 

조금 지나 태후가 유하를 불렀다. 유하는 소환되었다는 말을 듣고 물었다.

   

    “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소환당한다는 말인가?”

 

태후는 구슬 달린 옷을 성대하게 차려입고 군막 가운데 앉아 수백 명의 무장한 신하들의 보호를 받았는데 문 옆 계단 아래에는 무사들이 창을 들고 있었고 군신들은 그 위에 줄을 서 있었다. 그런 가운데 유하를 불러내니 유하는 그 앞에 엎드려 조서를 받들었다. 곽광과 여러 신하들이 연명하여 쓴 청원서를 상서령이 읽어 내려갔다.    

 

  “ 승상인 신 양창 등은 죽기를 각오하고 황태후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효소제께서 일찍이 천하를 등지시어 사람을 보내 창읍왕으로 하여

    상복을 입으시고 상례를 주관하시고 기를 바랐으나 

    슬퍼하는 기색이 없고 예절을 무시하며

     길가를 돌아다니며 검소한 식사하기를 마다하시었습니다.

     사람을 보내 여인을 납치하여 수레에 싣고 와 거소에 까지 들여보냈습니다.  

     처음 뵙고 황태자로 세웠으나 항상 사적으로 돼지와 닭을 사들여 먹었습니다.

     돌아가신 황제의 영구 앞에서 황제의 옥새를 받아들었지만

     곧바로 봉함하지 않은 채 옥새를 들고 다녔으며

     당장 창읍국의 관리, 마부, 관노 이백여 명을 지절로 불러들여서는

     내궁에 머물게 하고서 온갖 놀이와 오만한 유흥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알렸습니다.

         ” 황제가 시중 등 여러 경(창읍국의시중 등을 말함)들에게 문안하니 

           중어부령 고창에게 황금 천근을 줄 테니

           처 열 명을 얻도록 하라.‘        

     효소제의 영구가 아직 내전에 있는데도 악기를 꺼내와 창읍사람들과 함께 

     북을 치고 노래를 하며 배우들과 함께 희희낙락하였습니다. 

     게다가 사당과 종묘의 연주가들 마저 불러내 같이 놀았습니다.

     황제의 가마를 이끌고 북궁과 계궁에서 치달으며

     돼지 싸음과 호랑이 싸움을 즐겼습니다.

     황태후의 작은 마차를 가져와서 관노들에게 타게 하고

     궁궐 내 감옥에서 놀이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효소황제의 궁인 몽 등과 함꼐 음난한 짓을 하고는

     궁궐 감옥 액정령에게 조서를 내려서 

         “누설하면 허리를 자를 것이다.” 라고 협박했습니다.

 

한참을 듣던 황태후가 소리쳤다.

 

    “ 그만하라. 신하가 되어서 어찌 그렇게 패역할 수가 있단 말인가.”

 

창읍왕 유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바닥에 엎드렸다. 상서령은 주문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 제후왕, 열후, 이천석 관리의 흑수와 황수을 빼앗아 

       창읍의 옛 노복들에게 차보게 하였습니다.

       황실의 금고를 열어 금과 도검과 옥기와 비단과 여러 보물을 꺼내

       같이 놀던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따르던 시종이나 관노들과 먹고 마셨으며 술독에 빠져 지냈습니다.

       야밤에는 홀로 아홉 명이 들어갈 온실을 짓고서

       매부인 창읍관내후를 끌어 들였습니다.       

       황실종묘제사는 치르지도 않은 채 편지를 써 

       사람을 보내어 창읍애왕의 묘소에 태뢰제사를 올리면서

       이르기를 ’사자황제嗣子皇帝‘라고 불렀습니다.

       옥새를 받은 지 27일 동안 어지럽게 사자를 보내 지절을 가지고

       황궁으로 소환한 자가 1127명이나 되었습니다.

  

    황음미혹하고 제왕의 예의를 버렸으며 

    한나라 제도를 극히 문란하게 했습니다. 

    신 양창 등이 여러 번 간언을 올렸지만 

    변하는 것이 없을뿐더러 날로 더 심해지니  

    사직이 위태로워지고 천하가 불안해 질까 두렵습니다.

    신 양창 등은 신중하게 여러 박사들과 의논하였는데 모두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번 폐하는 효소제의 후계이나 음벽불궤淫辟不轨하다“.

        다섯 가지 형벌 중에서 불효한 것만큼 큰 것이 없습니다.“

       

   주나라 양왕이 어머니를 섬길 수 없었는데 <춘추>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왕이 나와서 정나라에 거했다.“

 

   불효한 까닭에 나라에서 쫒겨 난 것이고 천하가 그를 버린 것입니다. 

   종묘는 군주보다 더 중요한 것인데 

   폐하가 그것을 이어 천하의 질서를 지킬 수가 없으니 

   종묘와 만 백성을 받들고서 당연히 폐위해야 합니다.”

   신 들은 유사를 보내 태뢰를 가지고 고묘에 제사 지내기를 청합니다.“

 

황태후가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라.“

 

곽광은 왕에게 일어나 조서를 받들도록 하였다. 유하가 말했다.

 

      ” 천하에 다투는 신하 일곱 명이 있으면 

        도가 땅에 떨어져도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유능한 신하들이 많으니 종묘가 쓰러질 일은 없을테고 따라서 자신을 폐한다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곽광이 말했다.

 

     ” 황태후께서 폐하라고 하셨는데

       어찌 천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소.“ 

 

곧바로 그의 손을 잡고 옥새와 인수를 뺏고 태후에게 드렸다. 왕을 거들고 금마문을 나오니 신하들이 따라와 이별을 보냈다. 왕이 서면을 향해 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 어리석은 제가 한의 일을 맡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어나서 수레를 타고 떠나니 곽광은 창읍 저택까지 따라가 송별했다. 곽광이 말했다.

    ” 왕께서 스스로의 행동으로 하늘관계를 끊은 것이지만

      신은 비록 왕께는 빚을 졌지만

      사직에게 빚을 질 수는 없었습니다.

      원컨대 스스로 조심하십시오. 

      신은 오래 좌우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         

 

눈물을 흘리고서 곽광을 돌아왔다.

 

<37> 창읍왕과 살아남은 충신 공수, 왕길, 왕식

 

여러 군신들이 말했다

 

    ” 옛날에는 사람을 폐하여 버릴 때에는

      멀리 보내서 다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유하를 한중의 방릉현으로 유배보내기를 청합니다.“

 

태후는 그 말을 좇지 않고 유하를 창읍으로 되돌려 보내고 탕목읍 2천호와 함께 옛 창읍왕가의 보물을 모두 돌려보내주었다. 그리고 애왕(유하의 아버지)의 네 딸들에게도 탕목읍 천호를 주었으며 대신 창읍국을 없애고 산양군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창읍국의 옛 신하들은 과거 창읍왕 유하의 죄과를 낱낱이 드러내지 않고 한 조정에게 보고하지 않았으며 제대로 정치를 보정하지 않아 왕으로 하여금 큰 죄를 짓게 한 죄에 연루되었다. 모두 하옥되었으며 이 백 여명이 주살되었다. 오직 중위 왕길과 낭중령 공수는 충직함으로 여러 번 간언을 올린 공이 인정되어 죽음을 면제받고 머리를 깎인 채 성을 쌓는 노역에 충당되었다.    

 

유하의 스승 왕식은 옥에 갇혀 곧 죽게 되었다. 옥리가 그를 꾸짖으며 물었다.

 

    ” 선생께서는 어찌 간쟁하는 편지를 쓰지 않았소?“

 

왕식이 대답했다.

 

    ” 신은 <시경> 삼백 오편을 조석으로 왕께 읽어드렸소.

      충신편, 효자편에 이르러서는 

      왕에게 반복하여 낭송하라 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도를 잃어버린 왕편에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왕에게 진심으로 말씀드리지 않은 적이 없었소.        

      신이 삼백 오편으로 간했으니

      이것이 따로 편지를 쓰지 않은 이유입니다.“

 

옥리가 그것을 상부에 보고하였더니 그 역시 사면되었다. 군신들이 동궁에 상주하여 태후가 정치를 하게하자고 주청을 올렸으므로 태후가 경술을 배워 알도록 곽광은 하후승을 장신소부로 임명하고 관내후를 주어서 태후에게 <상서>를 가르치게 하였다. 쫓겨난 유하에서 보면 오촌 조카였다.  

 

곽광은 위태자 유거의 손자 열 일곱살 유병이를 택하여 황제로 삼았다. 효선제 유병이는 유하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지만 장창과 곽광이 유하가 그럴 인물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두었다. 유하는 황위에서 쫓겨난 지 15년 되는 BC59년 서른셋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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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10월15일 1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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