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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5>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⑦김종서[金宗瑞(1383-1453), 시호 忠翼公](上)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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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6월24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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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V.7 김종서[金宗瑞(1383-1453), 시호 忠翼公]​

 

 

황희, 변계량, 허조가 모두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사람으로서 태종의 추천으로 세종이 중용한 사람이라면 김종서는 세종 시대에 들어 와 신임을 받은 사람의 대표라 할 수 있다. 김종서는 태종 5년 에 문과 급제하여 10년 뒤 태종 15년에 상서사(尙瑞司) 직장으로 있었다. 상서사란 인사정보 및 관리의 업무나 정부의 각종 관인을 관장하는 매우 중요한 부서였으나 인사관리 업무가 태종 5년 2월 이조와 병조로 옮겨간 이후 한직이 되어버렸다. 

 

태종 시절에 김종서는 곡절이 많았다. 상서원 직장(直長)으로 있다가 순패를 직접 주지 않아 직무를 태만히 했다 해서 세종의 스승인 이수와 함께 태40대 형벌을 벌금(속)으로 바치고 파면되었으며, 3년 뒤에는 죽산현감으로 있다가 제방관리를 제대로 못했다 하여 태50대를 맞은 적이 있었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 김종서는 사헌부 감찰(정6품)을 맡아 강원도와 충청도에 행대감찰로 파견되었으며 세종 2년에는 광주목(廣州牧)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세종 5년 1월 의주삭주도 경차관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직후 사간원 헌납에 이어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 김종서는 사헌부 감찰(정6품)을 맡아 강원도와 충청도에 행대감찰로 파견되었으며 세종 2년에는 광주목(廣州牧) 판관으로 임명되었다. 세종 5년 1월 의주삭주도 경차관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직후 사간원 헌납에 이어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되었다. 세종은 천민(賤民)이 죄를 범하는 경우 벌금으로 대납하도록 하던 법을 바꾸어 천민도 반드시 실형을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사헌부 관리들이 왕의 지시를 어기고 벌금형을 내린 사건이 발생하여 이에 책임으로 관련된 사헌부 관원이 처벌받게 되는 데 이 때 김종서는 물론 대사헌 하연과 장령 황보인도 같이 문책 당하였다(세종 6년 4월 4일). 이후 세종 7년에 이조정랑(정5품)과 사인(정4품)을 거쳐 다시 세종 9년에 사헌부집의(종3품)가 되었으나 이 때 양녕대군 탄핵문제가 불거져 다시 전농윤으로 좌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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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의 양녕 탄핵과 좌천]

 

사헌집의 김종서는 양녕의 작위(대군작위)를 삭탈하고 출입을 금지하며 그 아들 순성군을 바깥으로 내쫒을 것을 세종에게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김종서가 사간원의 좌사간 김효정과 함께 올린 탄핵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禔,讓寧)의 죄는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일만 하더라도 비밀리에 천민 불로와 결탁하고 관계하면 안 될 여자와 관계하였으니 죄는 정말 큽니다. (중략) 만약 법으로 다스리지 않으시면 양녕은 더욱 방자해 질것이며 끝내 무서워하는 것이 없어져 비록 보전하고자 하더라도 불가능해 질 것입니다. 제(양녕)가 누차 불법을 행하여 국가 질서를 우롱하는 것도 전하의 은총이 뜻밖에도 과도하게 후하셔서 그렇습니다. 아들 순성군에게 작록까지 주고 서울에 와 살도록 하다 보니 비밀리 사통하는 사고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무릎 꿇어 우러러 전하께 아뢰오니 대의결단을 내리셔서 작록을 회수하시고 먼 외방으로 내쫓으시고 궁궐 출입을 금지하시며 그 아들 또한 외방에 떨어져 살도록 하여 변고가 생길 여지(변생지계,變生之階)를 끊으시고 신민들의 바람을 위로하소서(세종 10년 1월 16일).”     

 

여기서 ‘변생지계(變生之階)’란 혹시 발생할 지도 모르는 양녕 일당의 모반을 암시하는 말이다. 세종은 이들의 언사가 좀 심하다 싶었다. 특히 제를 의금부에 내려서 국문하라는 종서의 말은 너무 심한 말이라 생각했다.  

 

   “계묘년(1423)이후, 정부와 육조 대관들 모두 양녕 건으로 거듭 

    주청을 올리니 심히 아름답지 못하다. 훗날 비록 내가 간언을 듣지

    않았다 하더라도 단지 형을 위해 그런 것이니 어찌 뒷날 걱정을 하겠   

   는가. 양녕이 전에 종묘와 선왕 앞에서 맹세하고도 잘못을 고치지

    못하였는데 내가 어떻게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또 나를 속인 것은 속이지 않으면 자기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할 것 

    같아서 한 것이지 어찌 반역의 마음이 있어서 그런가.

    (自癸卯之今年 政府六曹臺諫 每以讓寧事 連章累請 不祥甚矣 

    後雖謂予爲拒諫 但爲兄耳 況恤後議 讓寧前此誓告宗廟與父王 

    而尙未改過 予何能使之自新乎 且其誣我者 但以不誣 則未遂其欲耳 

    安有逆心而然乎 : 세종 10년 1월 16일)”

 

그러나 김종서와 김효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법대로 엄단해야 된다고 하였다. 세종은 당나라 때 여덟 가지 감형 조건인 팔의(八議:議親,議故,議賢,議能,議功,議貴,議勤,議賓)를 들면서 양녕을 두둔했고, 반대로 종서는 십악(十惡:謀大逆,謀叛反,惡逆,不道,大不敬,不孝,不睦,不義,內亂) 중 하나인 반역은 팔의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세종은 양녕이 거짓말 한 것은 십악이 아니라고 호통 쳤지만 그래도 김종서는 물러서지 않고 대들었다. 불경한 마음은 평소 가슴 한가운데 쌓여 있다가 자연스레 밖으로 나타난 것이므로 십악 중에 하나라고 했다. 태종께서 백방으로 깨우쳐 인도하시고자 했음에도 따르지 않았으니 양령은 실로 사납기가 극심하다고 몰아세웠다(세종 10년 1월 16일).” 

 

우의정 맹사성도 양녕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김종서의 무리를 곁에서 거들었다. 이 날 이후에도 무려 열다섯 차례나 간원들의 탄원이 빗발치듯 올라왔으며 사헌부 직원들은 아예 출근도 안하면서 집단 파업에 돌입했다. 그래도 세종은 결코 물러서지 않고 버티었다.

 

   “옛 성현의 말씀에 세 번 간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만 둔다고 했다.

    너희들은 들어주지 않으면 거기서 끝을 내지 어찌 그리 말들이 많은가. 

    (聖訓有言 三諫不聽則去 爾等言不聽 則去以己矣 何其言之多也

    : 세종 10년 1월 18일)”

 

일이 이쯤 되자 모든 대간은 퇴청하는 즉시 사직했다. 그리고 한 달도 못되어 김종서는 전농 윤으로 좌천된 것이다(세종 10년 2월 7일). 

   

[승지 김종서 : 세종이 활과 화살을 내리다.]

 

전농 윤으로 좌천되었던 김종서는 1년 반 만에 임금 곁에서 왕명을 수납하는 우부대언(정3품)직으로 복귀한다(세종 11년 9월). 6개월 만에 좌부대언이 되고 그 후 석 달 만에 우대언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넉 달 지나 좌대언이 된다. 그러니까 꼭 1년 4개월 만에 품계는 다 같은 정 3품이지만 지신사 다음으로 높은 좌대언까지 수직 승진을 한 셈이다. 이 기간 동안 김종서가 무슨 이유로 빠르게 승진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 당시 지신사도 종서와 절친한 황보인이었고(세종 12년 8월 16일), 남지(좌부대언), 안숭선(동부대언) 등 승정원 구성원 모두가 가까운 사람들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김종서에 대한 세종의 믿음 또한 확고하였다. 일전에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되었던 양령대군 문제에 대해서는 세종이 먼저 해명하고 나선 다. 이 글을 보면 세종이 얼마나 형 양녕을 사랑했으며 동시에 김종서를 배려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경이 전에 언관으로 있을 때 양령의 일을 벌주지 않은 것을 따지며 

    간언 하였으나 그것은 내 본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한 말이다.

    (중략) 모든 필부들도 형의 허물을 덮어 주고 좋은 점을 고양시켜 허물   

   이 없는 것처럼 하고, 혹 불행하게 죄를 범하게 되면 때로 뇌물을 주고    

   때로 애걸하여 풀어주려고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나는 일국의 왕이 되   

   어 오히려 필부보다도 못하게 형의 과실도 벗겨 주지 못한단 말인가.  

   경은 내 이 뜻을 여러 사람들에게 잘 알리도록 하라. 나는 장차 (형을)   

  서울에 모셔 매일 매일 봄으로써 형제의 도를 다할 것이다.   

   (卿嘗爲言官 亦言讓寧之事而不置 然不度予本心 而敢言之耳(中略)

   凡匹夫猶欲爲兄隱其過 楊其善 使立於無過之地 不幸罹於罪辜則或納賂    

    或乞哀 使之得免者 人之至情 我爲一國之王 反不如匹夫以不能脫兄於過    

   失乎 卿知此意 以喩諸人 予將招置于京 常常見之 以盡兄弟之道 

   : 세종 13년 5월 4일)”

 

이 당시 세종의 김종서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세종이 종서를 곁에 가까이 불러 놓고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병이 있고 사신 대접으로 분주한데 환관들이 내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하고 했던 말도 중복하므로 몹시 심기가 피곤하다.

    경은 오늘부터 마음을 다스리고 경계하여 주야로 공소에 머물러

    나의 말을 듣고 밖에 전달하도록 하라. 내 병으로 쇠약해짐이 옛날 

    같지 않아 날로 더 심해가니 경은 그리 알고 있으라.     

    (予以病 適値使煩慮  宦侍不盡傳言 語之重複 因而心氣俱困 

    卿其自今齋戒 晝夜在公 聽予所言 宣傳于外(中略) 予之衰病 

    非前日益滋 卿其知之 : 세종 13년 8월 18일)”

 

그리고 얼마 안 되어 활과 화살을 종서에게 내렸다(세종 14년 2월 25일).

 

세종의 신임이 높아 갈수록 주변에서는 김종서에 대한 질투와 모함이 늘어났는데 병조판서 최서강이 개입된 인사청탁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 풀려난(세종 14년 10월 29일) 종서에게 세종은 이렇게 위로했다.

 

   “신하가 임금의 신임을 얻으면 동류들이 싫어하는 것은 자고로 당연하니   

  경은 부끄러워 말라. 이 일로 꺾이거나 좌절하지 말고 심기를 더욱 갈고    

  닦아 과거와 같이 국사에 봉사하라. (臣以爲上任用 同流惡之 自古以然    

   卿無愧焉 勿以此事摧挫  而益礪心氣 奉公如昔 : 세종 14년 10월 29일)”


[함길도로 가는 김종서]

 

인사 청탁 문제로 홍역을 치렀던 김종서는 일 년 뒤(세종 15년 12월), 이조우참판 겸 함길도 도관찰사로 임명되어 함길도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세종 22년 12월 형조판서가 되어 돌아올 때까지 만 7년 동안 김종서는 함길도 도관찰사 혹은 함길도 도병마절도사 혹은 함길도 도절제사으로 임명되어 함길도를 에워 싼 국토확장, 국경수비 및 축성, 야인방어, 사민(거주민 이주) 등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    

 

세종이 그렇게 아끼는 김종서를 함경도로 배치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 함길도 주변의 북방영토가 세종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책과제였기 때문이다. 함길도 가장 북단에 있는 두 요새, 즉 경원과 영북진은 중앙으로부터 너무 멀므로 좀 더 남쪽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경원을 용성(지금의 경성 북쪽)으로 80여리(32km) 남쪽으로 물리는 것은 국경을 뒤로 물리는 것과 같으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세종은 일단 황희를 파견하여 상황을 점검하도록 하였다(세종 14년 3월 6일). 가서 상황을 살펴 본 황희의 판단도 옮겨야 한다는 당시 예문관 부제학 정초의 의견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생각이 달랐다. 오히려 경원지역을 확고한 국경으로 방위하는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조종의 옛 봉토(즉, 공험진)’를 꼭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최측근 김종서를 택하여 함길도로 보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가 되자마자 이 지역을 순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임금의 생각에 꼭 들어맞는 건의를 올렸다(세종 16년 2월 14일). 알목하(지금의 회령)는 농지는 적지만 전략상 요충지이므로 3천 척 성을 건축하고, 영북진을 백안수소로 북진시키며 경원부를 소다로로 이전하고 공주성을 재수축할 것을 건의했다. 알목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써 이 때 설립된 성이 6진의 하나인 회령으로써 육진 설치의 시발점이 된다. 영북진은 세종 14년 6월에 석막(지금의 부령부근)에 쌓아 처음 시설하였는데 이를 약 40리 북쪽에 있는 백안수소(지금의 행영)으로 옮기자는 것은 김종서 건의의 핵심이다. 국토방위의 핵심거점인 영북진을 북으로 올림으로써 장차 경원과 경흥을 뒫받침함은 물론 종성, 온성 등 육진으로 강역을 확산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세종의 칭찬]

 

세종이 김종서를 함길도 지역으로 보낸 이유가 분명해졌다. ‘나라의 북쪽’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김종서에게 백일 안에 다시 임지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세종이 이렇게 말했다.

 

   “함길도는 저쪽 땅과 붙어있어 방어가 매우 긴요하니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욱이 최근 새로운 군과 읍을 신설하였으니

    편안히 다스려야 하고 또 비상에도 대비해야 한다. 경은 옛날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고 다스리는 재주가 뛰어나며 또 나의 측근에 

    있어보았으니 내 뜻도 잘 헤아릴 것이므로 무거운 직책을 능히 맡을 수 

    있어 도관찰사와 도절제사로 임명하였다. 북방에 기거하며

    토속을 깊이 익혀 알고 적의 가볍고 무거움과 백성의 진실과 허위를

    다 갖추어 잘 알고 있어 조치가 필요할 때마다 방법을 찾아내었으므로 

    내 뜻은 단연코 경으로 하여금 ‘북문’을 위임해 맡기는 것이다.

    (如今咸吉道 境連彼土 守禦之緊 本非他道之比 況今新設郡邑撫綏之方 

    又比常時之比 卿有稽古之力 治事之才 嘗居近職 備知予意 可當重任 

    故曾命爲都觀察使 又移都節制使 久居北方 熟見土俗 敵之輕重 民之情僞   

   備悉知之 處置有方 故予意斷然以 卿委北門之寄: 세종 18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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