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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풀이 되는 與野 예산전쟁,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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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12월18일 17시10분

작성자

  • 옥동석
  • 인천대학교 무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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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우리 헌법이 제정된 이후 70여년 만에 우리 예산제도의 헌법적 결함이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제헌헌법 이래 우리 헌법은 행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국회가 일방적으로 삭감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헌법 제57조는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이는 국회가 지출예산 각항을 증액시키지는 못하지만 감액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음을 규정하는 것이다. 만약 국회가 행정부를 마비시키고 싶다면 지출예산을 대폭 삭감할 수 있는데, 이 때 나타날 수 있는 국가적 위기를 우리 헌법은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타난1) 우리 헌법의 이러한 제도는, 국회와 행정부가 예산안을 반드시 합의할 수 있다는 순수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예산의 증액을 도모하기 때문에 행정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 또한 국회의원들은 예산집행에서도 행정부에 요구할 사항이 많기 때문에 감액의 권한을 함부로 행사할 수 없다. 행정부 관료들 역시 국회의원들의 예리하고도 집요한 감액 요구를 둔화시키기 위해서는 증액 요구를 적절히 수용하는 타협을 원한다. 이 때문에 국회와 행정부가 대립하는 여소야대의 국회에서도 예산안의 여야 합의는 지금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 이후 여야 정권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며 여야 간의 정치적 대립은 점점 격화되고 있다. 특히 국회가 여소야대로 구성된 경우 국회와 행정부의 대립은 국가를 마비시킬 정도로 증폭되고 있다. 마침내 2022년의 여소야대 국회에서는, 거대 야당이 일방적으로 감액한 수정예산안을 통과시키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여당 또한 예산안이 일방 감액된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국정철학에 반하는 사업은 결코 증액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거대 야당이 대통령의 국정방향에 반하는 사업의 증액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대선불복이라고 반발하는 것이다. 

 

예산안에 대한 국회와 행정부의 이 같은 대립은 우리나라 특유의 헌법 제도에서 비롯한다. 다른 나라의 헌법과 달리 한국의 헌법에서는 ‘예산은 법률로 확정한다’는 명문상의 조항이 없기 때문에 ‘예산의 비법률주의’로 해석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국회가 의결한 지출예산에 대해 대통령의 거부권(또는 재의요구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반면 미국에서는 예산이 법률로 확정되기 때문에 대통령의 거부권이 인정된다. 따라서 의회가 3분의 2 이상으로 재의결하지 않는 한 대통령의 예산의지는 존중된다. 

 

‘의회 의결→대통령 거부권→의회 재의결’의 절차로 예산이 확정되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 헌법은 증액과 감액의 권한을 행정부와 국회에 나누어 부여해 놓고 예산에 대한 여야 합의를 종용하고 있다. 합의를 요구하는 한국 헌법의 이러한 순수함은 국회와 행정부의 격한 대립 속에서 한낱 순진한 발상으로 전락한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국회와 행정부의 대립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적대적인 대립 속에서도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단 1표로도 승패가 갈리는 투표처럼> 최종 결정을 만들어내는 명시적인 절차가 구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행정부 예산안이 큰 수정 없이 의회를 통과한다. 행정권을 장악한 정당들의 의지를 존중하여 행정부 예산안이 그대로 확정되는 정치적 관례 또는 제도가 구비되어 있는 것이다. 영국식 내각책임제에서는 의회가 행정부 예산안을 수정할 경우 의회의 해산과 총선이 이어진다. 예산안의 수정은 내각불신임과 연계되는 매우 엄중한 사안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내각책임제에서는 의회 다수당이 행정부를 구성하기에 예산안의 수정은 극히 예외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준(準)대통령제에서는 <또는 이원집정부제> 여소야대의 동거정부가 나타날 수 있지만 행정권을 장악한 수상이 편성한 예산안은 대부분 수정 없이 의회를 통과한다. 프랑스 헌법 제40조는 지출증가와 세입감소에 대한 의회의 제안을 금지하였고, 제47조는 의회가 70일 내에 예산안을 의결하지 않으면 행정부가 명령(Ordinance)으로써 예산을 확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만성적인 정치 불안정 속에서 국력의 심각한 저하를 경험하였던 프랑스 국민들은 1960년대 제5공화국 헌법에서 행정부 우위의 헌법조항들을 다수 구비함으로써 정치적 안정과 국가적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재정헌법의 결함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꾸준히 우려가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권은 예산안이 마땅히 여야 합의로 처리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예산규모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을 때에는 행정부와 국회의원들이 매년도 예산증가분을 나눠먹기로 적절하게 타협할 수 있다. 그러나 예산규모 증가가 멈추는 순간 행정부와 국회의 협상은 곧바로 전쟁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제 우리는 국회와 행정부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는 속에서도 우리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최종 결정에 이르는 제도적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헌법 개정 없이 작동 가능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다음 두 가지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문의 규정에 충실하여 헌법 제57조의 ‘각항’을 예산의 프로그램 단위인 ‘항’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산항목은 장, 관, 항, 세항, 세세항, 내역사업 등 계층적인 체계로 구성되는데, 국회가 의결하는 입법과목은 장, 관, 항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하의 예산항목들에 대해서는 행정부가 재량으로 편성할 수 있는 행정과목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법령 체계 내에서 국회가 의결하는 법률과 행정부가 결정하는 시행령이 구분되어 있는 것과 같다. 

 

입법과목과 행정과목을 구분함으로써, 국회의 심사는 예산의 각항으로 표현되는 입법과목 사이의 ‘전략적 예산배분’에 주력할 수 있게 된다. 행정부는 각항의 금액 범위 내에서 전략적 목표와 성과지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세항, 세세항, 내역사업들을 설계해야 한다. 국회와 행정부의 분업체계가 이와 같이 형성된다면 국회가 각항의 금액을 일방 삭감하더라도 예산에 미치는 영향은 극단적이지 않다. 또한 국회의 증액도 각항에 한정될 것이기에 그 하위의 세항, 세세항, 내역사업 등에 대한 선택은 행정부 재량에 맡겨진다. 국회가 세항, 세세항 등에 대해 증액과 감액의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그 최종 선택은 행정부에 맡겨져야 한다. 

 

둘째, 지출예산의 증액과 감액에 대한 국회의 의결은 반드시 법률로서 확정되어야 한다.2) 예산 그 자체는 법률의 형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예산안의 변경에 대해서는 반드시 법률로서 의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법률로 의결한다면 국회가 요구하는 증액과 감액의 내용은 모든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될 수 있다. 그리고 법률의 형식으로 의결되기 때문에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여론은 국회의 예산수정을 감시하게 될 것이다. 증액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일방적 거부가 가능하지만, 감액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거부의견을 참조하여 국회가 재의결할 기회를 갖게 된다. 

 

우리 예산제도의 헌법적 결함을 교정하기 위한 이 두 가지 수단은 국회의 예산권한을 제한하는 것이기에 매우 도전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산제도에 대한 국제적 비교연구에 정통하였던 세계은행의 리너트(Ian Lienert) 박사가 2010년 12월 한국을 방문하여 발표한 논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

 

그는 많은 예산권한을 가지고 있는 미국 의회의 예산제도를 한국이 본받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회는 전략적 관점에서 거시예산 심사에 주력하고, 미시예산에 대해서는 행정부의 편성권을 존중하여 사후점검과 감독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주장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국회는 앞서 제안한 두 가지 과제를 반드시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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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헌헌법 제정 당시 유진오 박사는 국민부담의 증가와 감소라는 측면에서 예산의 증액과 감액을 이해하였다. 따라서 감액과 달리 증액에 대해서는 엄격한 조건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제정 취지에 대해서는 옥동석, 「권력구조와 예산제도」, 2015, p. 263 참조. 

 2) 세입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세 수입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관련 세법을 변경해야 한다. 2022년 12월의 국회 예산심의에서는 법인세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여야 간의 첨예한 이슈가 되었다. 세법 개정에 대한 여야 이견이 예산안의 국회의결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행정부의 예산안 제출 이후에는 세법 개정이 불가하다는 국회 내부의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3) Lienert, Ian, “국회의 예산권한: 과연 한국은 미국 의회의 관행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재정포럼」, 2013년 11월호, 한국조세재정연구원, pp. 6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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