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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의 문화시평 <16> 예술과 진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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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9월04일 17시11분

작성자

  • 김찬동
  • 전시기획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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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최근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과 이념적 편 가르기가 그 어느 때보다 과열되어 있다. 하지만 둘의 차이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흔히 자유와 평등을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핵심 가치로 꼽는데, 국가마다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그 해석이 상이하다. 일반적으로 보수는 자유의 가치관, 진보는 평등의 가치관을 중시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경제를 시장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유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지지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진보는 일반적으로 ‘큰 정부’를 선호한다. 또 보수는 대체로 성장을, 진보는 분배를 우선한다. 이에 따라 성과주의, 개인주의, 사유재산권은 보수의 가치이고 분배, 집단주의, 공유는 진보의 가치이다. 물론 양자는 상대적 개념으로 서로의 가치를 배제한 주장은 편향적 이념에 불과하다. 

 

  예술은 속성상 진보적이다. 하지만 정치적 의미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예술의 가치 중 하나가 창조임을 생각할 때, 늘 새로운 지경을 넓히며 움직이는 속성을 가진다. 예술가들은 남을 흉내 내는 것을 가장 치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예술가들은 늘 새로운 정신과 가치를 찾아 매진한다. 예술사는 끊임없는 과거를 부정하며 새로움을 찾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예술의 경우 이성적 합리주의와 맥을 같이 하며 정반합의 역사적 진보를 신뢰하는 성향이 강했다 할 수 있지만, 현대에 오면 예술사는 기존 예술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영토를 구축하기 위해 과거의 그것들과 과감한 단절을 꾀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에 나타난 예술의 변화는 과거 어느 때 보다 빠르게 진행되었고, 때에 따라서는 점진적 진화를 거부하는 양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 2차 세계대전의 간전기에 나타난 다다(Dada)운동이다. 근대의 자연과학과 합리주의 그리고 역사에 대한 진보를 신뢰했던 유럽인들에게 두 차례 전쟁은 자신들의 믿음의 기반을 송두리째 거부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 사회를 목도케 한 것이다. 다다는 기존의 예술을 파괴하며 등장하였다. 1917년 중립국 스위스 취리히의 한 카페에 모인 젊은 예술가들은 무의미한 예술적 행위를 통해 기성 예술의 면전에 펀치를 날렸다. 음악도 미술도, 무용도 연극도 아닌 정체불명의 예술 행위가 밤마다 이어졌고, 이들의 운동은 스위스를 넘어 파리와 베를린, 뉴욕 등으로 번져 나갔다. ‘예술의 무정부주의’라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도시에 따라 성격을 달리했지만, 베를린의 경우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적 모순을 비판하며 극단적인 정치적 서향을 보이기도 했다. 

 

  다다와 같은 경향의 예술을 아방가르드, 즉 전위예술이라 한다. 전위란 글자 그대로 전장의 척후병 역할로 적진과 근접한 최전선에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부대를 지칭한다. 이렇듯 아방가르드 예술은 가장 최전선의 가치를 지향하는 예술 행위이다. 일반적으로 전위예술을 논할 때 전술한 다다(Dada)나 미래파, 초현실주의와 같은 사조나 미술운동을 지칭한다. 오늘날 고전이 되어버린 과거의 전위예술은 당대에는 일반에게 수용되기 어려운 난해함과 급진성을 가진 것들이었다. 급진성은 정치·사회적 주장들을 내포하기도 했는데 정치에 함몰될 때 실패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미래파 운동은 기술과 과학의 발전을 환영하며 기계, 도로, 도시 등 산업화와 현대화를 상징하는 요소들을 예술 작품에 통합하여 미래지향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미래파의 기수인 마리네티와 같은 인물은 과거 문화의 집적이라 할 수 있는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을 폭파해버려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급진적인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고, 그는 파시스트 이념을 일부 공유하며 국가주의와 군사적 영광을 강조했다.

 

  좀 더 급진적인 예술 활동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들 수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1919년 러시아 혁명의 주역으로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새로운 사회적 혁신을 위해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필요했다. 이들은 회화, 조각, 디자인, 영화, 사진 등 분야에서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예술적 주장을 강력히 펼쳤다. 그러나 레닌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전위예술이 프롤레타리아의 정서에 맞지 않는 예술 형식이라고 이 양식을 비난하고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많은 예술가들이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이 필요로 했던 것은 실험적인 추상미술로서의 전위가 아니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양식으로 정치를 위한 도구였다.

 

  1,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국은 현대미술의 중심지를 프랑스로부터 옮겨왔다. 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이 전위예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미국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이 진보적인 미술을 이끌었던 장본인은 프랑스 예술가인 마르셀 뒤샹이다. 그는 1917년 남성용 변기에 자신의 사인을 한 후 전시회에 출품한 것으로 유명하다. 작가가 직접 제작하지 않은 기성품을 전시의 맥락 속에 예술 작품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기성의 예술과 제도로부터 탈피한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사유는 매우 급속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이들을 새로운 상품으로 만들려는 미술시장의 속도 또한 더 빠르게 변모하기 시작한다. 결국 전위예술의 실험성은 기성의 예술개념뿐만 아니라 자본과의 싸움으로 변모하게 된다. 미술관이나 화랑을 벗어난 대지예술마저도 빠르게 시장의 상품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예술가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종래의 양식과 언어를 근본부터 전환하는 혁신을 꾀한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이후 전자 시대의 예술적 언어의 개척자가 되었다. 보여주는 방식 역시 ‘위성예술’과 같은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시공간을 극복하였다. 여전히 예술가들은 새로운 언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고 있고, 이러한 예술 활동은 인간의 사유와 인식을 획기적으로 변모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예술에 있어 보수와 진보는 사회·문화적 논의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정치적, 사회적 담론에 머물지 않고 이를 전혀 다른 차원을 제시한다. 혁명 초기 레닌이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옹호했던 것은 정치적 이유에서였고, 역사발전의 종착점을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대로 설정하고 싶었겠지만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정치적 이념에 얽매일 수 없었다. 미국의 전위예술 역시 끊임없는 자본과의 싸움이었듯이 정치. 사회적 통념에 얽매이지 않는 예술이야말로 예술적 본질에 충실한 에너지의 총합이다. 

 

  우리에게도 보수와 진보의 예술이란 용어가 존재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중’이나 ‘민족’을 앞세운 예술 활동과 같이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는 예술을 진보의 예술이라 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진보라는 정치적 이념에 충실히 복무하던 시절의 예술이었다. 여전히 오늘도 그런 낡은 사유체계에 머물며 제도를 점유하고 이권을 챙기려는 부류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념과 다른 예술을 보수예술이라 칭한다. 이 얼마나 저급한 시대착오적 논리인가? 

 

  예술은 서구 모던의 ‘역사적 진보’의 개념을 신뢰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과거보다 오늘의, 오늘보다 내일의 역사가 진보했거나 할 것이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역사는 단지 변화하며 지경을 확산해 가는 것일 뿐, 선형적으로 진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술적 진보가 중요한 이유는 정치나 사회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되,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언어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의 가치를 비선형적으로 전환해가는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 자정력을 가지고 사회를 통합하는 잠재력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생활의 장식물이나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여기의 활동이 아니며, 또는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선결한 다음 여유 있을 때 신경 써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사회는 예술가들의 창의와 예술의 진보를 위해 언제나 무한히 열려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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