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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68> 사람 세상을 버린 고양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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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4월20일 16시41분
  • 최종수정 2024년03월07일 11시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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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고양이가 고양이 새끼들을 데리고

상수리나무 숲으로 가고 있다.

검은 놈도 있고, 검정과 하양이 섞인 놈도 있다.

비틀비틀 어미를 따라 산으로 가는 어린 고양이가

이따금 야~옹 하고 운다.

어미를 따라 산으로 가는 고양이들이

사람이 사는 쪽을 향해 야~옹 하고

운다.

사람을 버리고 산으로 가는 고양이들이

있다.

사람을 버리고, 사람의 문지방과, 아랫목과

던져진 먹이를 버리고, 이 도시에 창궐 사람의

일상을 버리고

산으로 가는 것들이 있다.

이슬에 젖은 채 깨어나, 뜨는 해를 바라보거나

서리 내린 빈 산을 지키며 지는 잎을 바라보거나

밤새 내려 희게 쌓이는 눈발을 바라보면서

야~옹, 야~옹, 야~옹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산으로 가는 것들이 있다.

사람을 버리고 산으로 가는

그런 것들이 있다.

                  이건청- 「도둑고양이가 사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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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사는 것이 참 용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도시의 어디선가 잠을 자고 제각기 아침 출근길에 나서고 어딘가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을 해내고는 밤이 되면 그 자리에 돌아와 쓰러져 잠을 잔다. 이 동일 반복 속에서 개체로서의 변별성을 주장할 어떤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왜소화되고 각질화 되어 상상력을 상실하였으며 감성도 직관도 잃어가며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다양성을 상실 사람이 세상을 자기 편의에 의해서만 재단하려 하고 자기 능력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범주만을 모두라고 생각해 버린다는 점이다. 현대인이 지닌 이런 독선과 독단은 결국, 감각을 단순화하고 상상력마저도 고착화시킴으로써 사람의 삶을 도시적인 것으로 끌어내리게 될 것은 자명 이치인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총체적 삶의 세세 부분까지를 두루 수용할 다양 감수성과 시각의 상실이다.

 

 2

  양촌리 집에선 정신이 맑아진다. 양촌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몸도 마음도 결 가벼워진 것을 느낄 수 있다. 기분이 좋아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잠이 들어도 그렇다. 그야말로 잠 푹 자고나면 눈도 결 맑아지고 귀도 맑게 뚫리는 걸 느낄 수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왜 이 보잘 것 없는 시골 마을에 와서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는 것일까.

 

  양촌리에는 고집과 아집과 통념을 감싸고도 남는 바람소리가 있고 시냇물이 있다. 자작나무와 상수리나무와 찔레나무가 있다. 개망초와 달맞이꽃과 산나리가 있으며 달래와 두릅과 무릇이 자란다. 여치와 베짱이와 풍뎅이, 아욱과 쑥갓과 상치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이 시골 마을을 감싸고 있어 우리의 시력과 청력을 맑게 틔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시골 마을을 좋아다고 해도 언제나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다. 거기에도, 따분 일상사가 가로놓여 있게 마련인 것이다. 우선 내 직책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보니, 강의 준비도 해야 하고 이런 저런 일로 찾아오는 학생들을 만나줘야 하는 것도 내 일이다. 내 일이 글 쓰는 일이다 보니 갖가지 원고 쓸 일이 가로놓여 있다. 난감하고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책무도 그렇고, 시민으로서의 국민으로서의 책무도 그러하다. 말하자면 일상적이고 관념적인 일들이 무진장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일에 묶여 살다보니 세상 살아가는 모든 일이 또 그렇게 관념적인 것들이 되게 마련인 것이다. 세상 모든 일들을 나름의 편의에 의해서만 바라보게 되고 대충대충 건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건 큰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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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 마을엔 고양이가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나 고양이를 볼 수 있을 만큼 그 수효가 늘었다. 늦은 밤 자정 이후 마당에 나가보면 울타리 쪽을 지나가는 고양이를 볼 수 있다. 이른 새벽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울안에 나가보면 상수리나무 밑에 쭈글뜨리고 앉아 있는 고양이를 만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고양이들 중의 상당수가 주인이 없는 말하자면 길고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야릇 충격을 느끼게 되었다.

 

  주인 곁을 떠나 임의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 조그만 짐승들을 보게 되면서 나는 이 고양이들이 무능, 욕구불만, 타성, 관념과 같은 것들을 버리고 살아가는 본능의 비유물인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 조그만 시골 마을을 근거지로 하며 살아가는 활달하고 발랄 이 짐승들을 보는 것은 위안이고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나의 시 「길고양이가 사는 마을」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각질화 되고 도식화된 인간과 스스로 이별하고 떠나는 고양이들의 이별장면이었다. 지금 고양이들은 사람과 사람의 세상을 버리고 애초에 그들이 살았던 자연 속으로 돌아가고 있다. ‘사람을 버리고, 사람의 문지방과, 아랫목과/ 던져진 먹이를 버리고, 이 도시에 창궐 사람의/ 일상을 버리고’ 그들의 삶을 찾아 산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 고양이들은 사람의 일상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이슬에 젖은 채 깨어나, 뜨는 해를 바라보거나/ 서리내린 빈 산을 지키며 지는 잎을 바라보거나/ 밤새 내려 희게 쌓이는 눈발을 바라보면서’짐승 본연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비록 지금 나의 삶이 핍박하고 가난 것이라 할지라도 상식화되고 각질화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사람과 결연히 헤어져 자신의 삶을 찾아나서는 고양이들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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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4월20일 16시41분
  • 최종수정 2024년03월07일 11시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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