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이 그린 연예계 지옥도 : 유아인, 김민희와 홍상수 사례를 보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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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의 윤리성 시비와 21세기 기생질병
자본주의 소비주체의 재화 구매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생산과 소비의 메커니즘은 자본주의의 교리다. 만인은 돈을 통해 평등해지고 부자와 부자가 아닌 자로 구분된다. 우리는 그 속에서 모든 사물과 행위를 소비재나 서비스의 가치로 환원시켜버리곤 한다. 연예인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은 소비자로서의 대중에 의하여 도구적 존재이자 일종의 서비스업 종사자로 쉽게 환원되어버린다.
스타의 윤리성 시비가 연일 뜨겁다. 스타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어야 하는가, 사회적 영향력과 공적 투명성을 염두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그 전에 스타는 공인이가. 유아인의 병역 기피 가십과 홍상수, 김민희의 사례, 심지어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탤런트들을 향한 맹목적인 비난은 그 자체로 문제적이다. 그들의 비난은 그 어떠한 정당성과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맹목적이라는 점에서 공허하고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는 그 무의미한 혐오에 어쩔 도리 없이 힘들어하기를 반복한다.
지난 몇 달간 배우 유아인을 향한 병역 기피 의혹이 증폭되었다. 그는 입대를 할 기회가 몇 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의로 연기를 거듭했다. 이에 대하여 네티즌은 맹비난을 쏟아 부었고, 지난 시간 배우 유아인이 쌓아온 이미지에 먹칠을 가했다.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그는 직접 나서 입장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골종양이 발견됐다는 그의 고백에는 더 이상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었다.
그의 입장문에서 “저의 불행이 타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문제라는 현실이 개인적으로는 아주 힘들지만……”은 스타와 대중 사이의 병적으로 비대해진 수직성을 시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안타깝다. 왜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일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가. 그 이유 중 하나로 대중의 크고 어설픈 착각을 들 수 있다. 때로 소비자로서의 대중은 스타를 서비스업 종사자로, 본인을 그것을 향유하는 자로 착각하는 듯하다. 자본주의의 착시다. 그들에겐 다른 서비스업이 그런 것처럼 손님인 본인이 왕이고, 스타는 유희를 제공하는 도구적 존재이자 한낱 객체로 전락된다. 그리고는 스타가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듯이, 뻔뻔하게 주인 대접을 강요한다. 잘못에는 사과로, 잘못이 아닌 것에도 사과를 받음으로서 장원의 주인과 노예를 연상케끔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고개 숙일 것을 강요하는 주인 놀이는 여러모로 역겹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타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악한 네티즌은 그것을 악용한다.
엄밀히 말하여 혐오의 대상이 중요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병역 기피 가십의 대상은 유아인이어도 좋고, 유재석이라도 좋으며, 유희열이더라도 상관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의 배설일 뿐이며 그 대상의 가변성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런 점에서 혐오 놀이이자 배설 놀이며 스타는 그 추악한 감정의 쓰레기통일 뿐이다. 이는 마치 숙주를 찾아 헤매는 기생동물의 습성을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다.
시대를 대표하는 질병이 있다고 가정할 떄, 21세기의 경우 그것은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의 형태로 자기착취를 가속화함을 의미한다. 일례로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과거 규율 사회의 부정성이 광인과 범죄자를 낳았다면, 현재의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진단한다. 인터넷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의 과학은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지만 한편으론 병들게 하며, 본인이 자유롭다고 느끼는 21세기 소비주체의 가짜 자유를 단적으로 표방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들이 느끼는 가짜 능력과 가짜 자유의 긍정성은 효과적으로 그들을 매료시킨다. 인터넷이란 매체에서 그들은 가상적인 자유에 유혹 당한다. 오늘의 사회가 익히 말하듯 정신적으로 소진되어버린 우울증적 사회일 때, 악플을 비롯한 온갖 비난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을 빌린 환자들이 가짜 자유를 맹신하며 스스로 병들었음을 증명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즉, 연예인에 대한 시기와 비난은 오늘날 우리가 떠안을 수밖에 없는 기생적 질병이다. 인터넷 사회의 깨끗한 미래를 낙관하는 일은 시대적 의미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 네티즌의 가변적 분노를 상대하는 일
“우리는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에 의지하여 타자를 최대한 가까이 끌어오려고 한다. 그리고 가깝게 만들기 위해 타자와의 거리를 파괴하려 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타자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거리의 파괴는 타자를 가까이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타자의 실종으로 귀결된다. ‘가까움은 그 속에 ’멂‘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부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먼 것의 완전한 철폐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먼 것의 철폐는 가까움을 만들어내기는커녕, 오히려 가까움의 철폐로 이어진다. 가까움 대신에 거리의 부재가 형성되는 것이다.”
「에로스의 종말」에선 미디어 사회의 집착적인 밀착이 유발한 거리 조정 능력 상실으로 인하여 타자 간의 긴장이 도리어 철폐됨을 간결히 역설한다. 그것은 동일자적인 타자뿐만이 아니라 대중-스타의 관계에서도 정확히 대입된다. 고도로 첨예화된 기술사회에서 대중은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을 직간접적으로 관찰한다. 스타 역시 마찬가지로 연일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왜냐하면 잔뜩 신비주의를 고집하던 시대는 가고 소통이 돈이 되는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스타는 대중과의 거리를 한없이 좁히고, 즉 돈을 벌고, 대중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스타와 대중 사이의 거리감이 상실되어버리고 스타의 평준화 혹은 비즈니스 혹은 노출증을 본인의 지위상승이라 착각한 대중은 제멋대로 위계를 세워버린다. (연예인 가십에 한정한) 인터넷 자경단이나 사이버 명예 경찰 따위가 그것이다. 그러한 일종의 완장질이 우리를, 그리고 스타를 정말로 행복하게 만드는가? 그들을 보자면 사회가 정의로워졌다기보다는 오히려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
스타는 그것을 인지한다. 일전 배우 유아인이 언급했던 ‘잘못 없음의 잘못 있음’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이 잠깐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도덕적 차원이 아닌 경제적 차원에서 올바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이는 대중 일부에게 다시금 자위할 거리를 주는 꼴이고, 그들 사이의 위계가 다시 단단해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하막론 하여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고개를 숙이는 탤런트의 입장에 감히 불만을 섞을 수도 있으리라. 물론 일측에선 무조건적 사과가 옳다고 하겠지만, 이는 스타와 대중 사이에 존재하는 교묘한 수직성에 더 큰 착시를 만들 빌미를 제공한다. 사과가 일종의 악습처럼 굳어지는 것은 문제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때론 사과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아름답다. 본인의 신념 아래 잘못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잘못의 윤리적 시비는 가려낼 수 있겠지만, 괜스레 굴복하듯 하는 사과는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든다. 대중이 탤런트를 공인이라는 명제 하에 제멋대로 재정의한 ‘잘못’을 근거로 사과를 요구할 때, 과감히 무시해버리는 것. 요즘의 대중을 보자면 도리어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아버지 김구라의 영향력으로 가수가 됐다고 있는 힘껏 질타를 받아낸 MC그리(김동현)는 그 공허한 비난을 실력으로 입증하자고 애쓰는 중이다. 한편 마찬가지로 아이돌 에프엑스의 멤버였던 설리는 온갖 욕설과 비난을 무색하게 만들만큼 꿋꿋이 본인의 사진을 포스팅한다. 어떤 사람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미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인은 개의치 않는다. 이는 아이돌이기보다는 오히려 사라진 록정신의 계승처럼 보인다. 그리고 네티즌이 한창 연예계의 지옥도를 그리는 장소에서 그 불행을 받아내는 당사자에게 록스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최고의 찬사다.
한편 앞서 말한 예외적으로 잘못의 윤리적 시비를 가릴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민희의 사례다. 그들을 굳이 비판해야한다면 그것은 홍상수 감독의 외도에 의한 나머지 가족의 불행이지 그의 작품 세계와 예술성, 나이 많은 남자와 어린 여성의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대중은 이를 혼동하고 맹목적인 욕설과 비난을 퍼붓는 듯하다. 영화인으로서 감독 홍상수와 배우 김민희의 커리어에는 감히 윤리적으로 트집을 잡을 것이 없다. 심지어 김민희에게 베를린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그들의 자전성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사례를 불륜으로서의 가십이 아닌 서사와 자전성으로의 예술적 쟁점으로 질적인 전환을 원하고, 또 합당한 비판을 가하고 싶다면 그의 작품 세계를 욕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탐독해야 할 일이다. 무비판적인 분노는 어떤 대상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가변적 분노다. 지나친 혐오와 맹목성은 그들의 스캔들을 일회적이고 낭비적으로, 배설적으로 소모한다. 역설적이게도 수준 낮은 부정성은 오히려 가십을 쟁점으로 질적 확장하는 부정성을 거세해버린다.
네티즌이라는 이름의 몇 추악한 자들은 지독하게 보수적이지만 늘 진보적인 것을 원하는 척한다. 그리고 스타가 그 부름에 응답할 때, 그들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아우라가 주는 낙차를 실감하기라도 한 듯 무섭게 헐뜯기를 시작한다. 그들은 오를 수 없는 차이를 실감하고 수준 낮은 부정성을 쏟아냄으로써 제 발로 그 낙차에서 떨어져 죽어버린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의 연예뉴스와 SNS는 마치 잠시 살아있는 시체들이 산 자를 흉내 내는 놀이의 공간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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