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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강사 매질하는 강사법, 누굴 위하나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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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5월1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5월17일 16시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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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주 두어 잔을 연거푸 입에 털어 넣으며 하소연했다. 그는 A대학 연구조교다. 작년 초부터 올해 1학기 2개 학부강의를 맡기로 계획돼있었다. 하지만 대학이 강사법 시행에 대비해 박사학위 미소지자 대다수를 해고하거나 예정된 강의를 취소하면서, 박사과정에 있는 그 역시 강의를 못하게 됐다. 한편 박사학위 소지 강사들은 ‘초빙교수’라는 이름으로 대학에 전속시켰다. 문제는 명칭만 초빙교수일 뿐 이들에게 시간제로 임금을 책정·지급한다는 점이다. 4대 보험도 보장되지 않는다. 즉, 대학 입장에서는 강사법을 명분으로 박사 미만 강사들을 정리하는 동시에 전속 교원율은 높이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법률의 취지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일명 ‘강사법’은 2011년 ‘고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통과됐다. 그러나 시간강사들의 반대로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네 차례나 시행이 유예되었다. 정작 강사들의 의견은 반영치 않고 정부가 법안을 설계하고 국회의원 다수가 동조해 만든 악법이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꾸려진 ‘대학강사제도개선협의회’는 18차례 회의 끝에 ‘대학 강사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이찬열 교육위원장이 이를 받아 재작년 10월 강사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은 지난해 1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올해 8월 1일부터 시행된다.

 

강사법 제정의 취지는 비정규직 교원의 신분 안정화다. 개정안에 따르면, 대학은 시간강사에게 교원의 지위를 부여하고 임용 기간을 1년 이상 유지해야 한다. 신규임용을 포함해 재임용은 3년까지 보장한다. 방학기간 중에도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더불어 부당해고나 부당징계에 대응하는 강사의 소청심사권 또한 보장된다. 4대 보험도 제공된다. 퇴직금의 경우, 강의시간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지급하기로 했다(물론 1년 이상 일해야 한다). 다만 그 금액은 강의시간에 연동된다.

 

취지는 좋다. 문제는 이 법을 악용하는 대학들의 행태다. 시행 시점이 다가오면서 대학들은 시간강사를 감축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앙대의 경우 강사를 1200여 명에서 약 500명까지 절반가량 줄이는 내용의 「강사법 시행 대비 개강계획」 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대 대외비 문건(「강사법 시행예정 관련 논의사항」)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겼다. 개설과목을 현재 대비 20% 줄이고, 외국인 교원이나 명예교수 등을 활용하는 방안 등을 골자로 한다. 학부 졸업이수학점 또한 130점에서 120점으로 축소하기로 했다. 강사단체들은 최대 2만명의 시간강사가 일자리를 잃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되면 고등교육 전반의 질이 저하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선 강사들이 대학에 1년 동안 전속되기 때문에 일부 강사는 2학기 때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강의를 담당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강사의 절대적인 수가 줄어들면서 일반강의 수가 줄고 100명 이상의 대형 강의가 늘어난다. 학생들은 같은 등록금을 내고 질이 떨어지는 수업을 들어야 한다. 축소된 강사들의 강의를 맡아야 하는 전임교수들의 부담도 가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강사법은 누구를 위하고 누구를 보호하는가.

 

교육부가 강사법에 따라 내놓은 「대학강사제도 운영 매뉴얼(시안)」도 탁상행정의 결과다. 우선 강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 졸업자는 연구 1년·교육 1년 이상의 실적이 필수다. 전임교원이야 시간강사 기간을 통해 쌓을 수 있다지만, 시간강사는 어디서 실적을 쌓나. 인턴을 하기 위해 인턴 경력이 있어야 하는 대학생들 처지와 다를 바 없다. 또한 매주 6시간 이하 강의를 원칙으로 하되 9시간까지 예외를 인정하기로 했다. 기본급이 지급되더라도 전임교원 임금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이처럼 시간을 제한해두면 수입은 물론 강의 기회도 줄어들게 된다. 무엇보다 연봉과 복지에 대한 명확한 방침이 없다. 방학기간 산정, 연구 및 지도 등 강의 이외의 업무에 대한 수당, 상여금 등에 대해서 어떤 기준이나 가이드라인을 찾을 수 없다. 대학과 강사 간에 협의하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주체는 빠진 채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고리타분한 그림은 언제쯤 끝날지 의문이다.

 

강사법을 제정할 때 정부가 재정 지원을 약속하고, 대학이 이를 이유로 구조조정 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를 미리 마련했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늦었다. 대학은 자정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지식의 상아탑’이라는 명분으로 치외법권을 주장하지만, 정작 어떤 교육적 모습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대학의 교육권과 자치권을 침해하는 게 아니다. 정부지원금과 국가장학금 등으로 상당한 공적 예산을 투입했다면 적어도 공공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안을 조정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대학 조직과 시간강사라는 불균등한 사회 주체 간의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대학의 자율성이란 사익 추구를 위해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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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9년05월17일 16시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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