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진해의 주유천하> 사회적 거리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9월26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0년09월25일 10시43분

작성자

  • 김진해
  • 경성대학교 예술종합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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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의 사람은 집사람이다. 같은 침대를 쓰며 아침 시간을 함께 보낸다. 내가 일어나 외출하면 거리는 멀어진다. 친밀한 관계란 일상생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다. 가족이나 연인 사이가 친밀한 관계다. 출근길 지하철이나 만석의 버스를 타면 가까운 거리의 사람은 옆자리의 승객들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물리적 거리는 가깝지만 심리적 거리는 십 만 리다. 이들과의 관계가 사회적 거리다. 사회적 거리의 기본은 상대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말을 걸지 않는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말을 걸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거나 상대는 금방 경계심을 발동한다.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란 용어가 등장했다. 물론 책에서 보던 학술적 용어가 매스컴에서 널리 쓰이고 통용되고 있다. 때로는 사회적 거리가 정말 사람들을 사회적 거리에 머물게도 한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인간관계가 그놈의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점점 더 멀어지는 듯하다. 요즘은 만나서 차 한 잔 하자, 식사 한 번 하자 라고 말하기가 힘들어졌다. 연일 매스컴이 대면관계를 범죄인 양 몰아대니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자기 검열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이 검열은 누구 조장한 것인가? 프랑스에서는 매일 확진자가 7천명인데 천연덕스러운 이유가 국민들이 정부의 통계를 믿지 않는단다. 사망률도 낮아 그저 독감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답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주장을 빌리지 않아도 우리가 사회적 동물임은 다 인정한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한다.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아이큐(IQ)가 높은 사람이다. 이를 사회성 지수 또는 네트워크 지수라고 말한다. 사람이 최대한 친밀히 사귈 수 있는 범위의 숫자가 150명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에게 저장된 5천개의 전화번호는 필요 없다. 150명의 지인들과 깊은 교류를 하면 될 성싶다. 그래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행복할 것이다. SNS 활동을 한다고 페북과 인스타에 사진과 글을 올렸다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세상이다. SNS 활동을 하지 않는 편이 편할 수도 있다.

 

대통령은 우리나라 5천2백만 국민들과 소통한다. 대통령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 국민이 아는 대통령도 그가 친밀하게 사귈 수 있는 사람은 150명에 불과하다. 그럼 그가 관계 맺는 수천 수 만 명의 공직자, 당직자, ‘문빠’들과는 무슨 관계인가? 그들은 동지 즉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다. 그 뜻은 이념이다. 이념으로 뭉친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갖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는 정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리그의 룰에  얼마나 충실한지가 중요하고 리더의 말에 얼마나 충성하는 지가 관건이다. 비판은 없고 얼빵한 보스의 한 마디에 충견들이 함께 개소리를 내며 짖어대고 있을 뿐이다.

 

대통령과 나와의 거리는 공적인 거리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만나 친근한 사이인 것 같지만 실은 아주 먼 거리에 있다. 나는 대통령을 직접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다. 어쩌면 서울 부산의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고 천당과 지옥처럼 서로 만날 수 없는 물불의 관계이기도 하다. 혈연관계인 가족과도 원수지간으로 변하고 견훤지간이 될 수가 있다.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가족과 친구 사이가 멀어지는 것은 돈, 신뢰, 약속, 눈 먼 사랑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공적 거리의 친소관계는 내편 네 편인가로 결정된다. 정작 물리적 거리를 결정짓는 요소는 돈도 힘도 이념도 아닌 심리적 요소이다. 내 마음이 어디로 가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나를 잘 다스리고 남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 이것이 살아가는 도리가 아닌가 한다. 내 주장이 옳다고 줄창나게 떠드는 인간의 대부분은 자아도취에 빠져있거나 한 쪽만 보고 나머지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혹은 알아도 애써 외면하고 보지 않으려한다. 왜냐하면 상대를 인정하면 싸움에서 패배자가 되는 듯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생을 전투로 생각하고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삶에서의 싸움은 스포츠 경기와 마찬가지로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게임에서 질 수도 이길 수도 있는 것과 같다. 인생은 그러나 스포츠 경기도 게임도 아니다. 그러니 승패에 너무 연연해 마라. 인생이 초라해진다. 인생에서 진정한 승자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다.

<ifsPOST>​ 

 

※ 금주부터 청계산 칼럼의 하나로 ‘김진해의 주유천하(周遊天下)’를 신설, 매주 일요일 아침 독자들을 찾아 갑니다. 경성(慶星)대학교 예술종합대학장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한 김진해(金鎭亥) 교수가 집필하는 이 칼럼은 예술인의 시각으로 우리 주변의 일상사를 다각도로 짚어보는 재미난 이야기들이 연재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독자제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김진해(金鎭亥)는 누구?

1993년 영화 '49일의 남자'로 데뷔한 영화감독이자 현재 경성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예술종합대학장을 맡고 있다. 연세대학교와 뉴욕테크대학원 (MA)을 졸업하고, 미주 중앙일보 기자·오로라픽쳐스 대표이사·홍익대학교 조형대학 우대겸임교수 등을 거쳤다. ‘디지털 시네마’ ‘시나리오의 이해’ ‘메가폰을 잡아라’ '문화는 정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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