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상국 교수의 생활과 경제 이야기 <93> 항상 소녀와 어쩌다 청년!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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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4월17일 13시49분
  • 최종수정 2024년04월17일 13시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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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는 조금 가벼운 얘기를 한번하고 싶다. 그러나 옛날부터 생각했던 얘기다.

 

지금이야 어른이고 아이고 간에 놀거리가 너무 풍부하다. 돈과 시간만 있으면 못 할 놀이가 거의 없다. 골프, 수영, 스쿠버 다이빙, 테니스 등등 여유만 있다면 쇼핑도 훌륭한 취미 중 하나일 것이다. 옛날에는 쇼핑도 직접 돌아다녀야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안방에서 클릭클릭 몇 번만 하면 원하는 상품이 집 앞에 도착한다. 기분도 낼 겸 백화점에 가면 시간 보내기도 너무 좋다.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까지 하면 어떤 때는 아이들 때문에,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시기가 얼마나 되었을까?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90년대쯤부터라고 생각되고, 지방 도시들은 그보다 조금 늦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런 호사는 여유 있는 집들 얘기일지 몰라도, 이런 여유 있는 분들이 우리 주위에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먹고사는 것도 어려웠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였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놀이라는 것은 거의 상상도 못 했었다. 조금만 옛날얘기를 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마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3, 40년 전에는 남자들이야 술 먹고, 낚시 가고, 천렵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주머니들, 어머니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친구들과 모여 식사하며 노래 부르거나, 구 치며 노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우리 고향에는 어머니들이 놀 수 있는 놀이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물 맞으러 가는 것”이었다. 물 맞으러 가는 것? 그것이 무엇이야? 아마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높은 산에 있는 계곡에 가면 작은 폭포들이 있었다. 그러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큰마음 먹고 점심 식사를 준비하여 한꺼번에 모여 폭포 있는 곳으로 놀러 가는 것이다. 그리고 계곡의 그늘에서 시원하게 놀기도 하고, 새차게 떨어지는 폭포 물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놀다 오는 것이었다. 폭포 물이 야무지게 어깨와 등을 두드리면 어머니들은 “아, 시원하다. 아, 시원하다.”는 말씀을 반복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물만 맞고 그냥 갈 수 있겠는가? 오랜만에 야외에 나온 어머니들은 술도 조금 마시고, 구도 치며, 모처럼 만의 휴가를 즐기며 노셨다. 그러나 이렇게 놀다 보면 정도를 지나치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은 특히 옆에 있던 남정네들은 혀를 끌끌 차며, “집안에나 처박혀 있지, 왜 밖에 나와 추태를 부리나?”라는 소리가 반드시 나왔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인들은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서긍은 1123년(인종 1년) 6월 6일에 군산도에 당도하였다가 7월 13일에 송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불과 한 달여밖에 우리나라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12세기 우리나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인 것은 틀림없다. 6, 7월은 여름에 해당하니, 사람들이 밖으로 많이 나다녔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술과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는 평이 실린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민족이 『끼』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서긍 얘기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끼와 특히 『여성들의 끼』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지금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의 가무’를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처럼 만에, 정말로 모처럼 만에 밖에 나와 어머니들이 “물 맞고 노는 것”을 오랜만의 휴가를 즐긴다고 생각하지 않고, 혀를 끌끌 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도 살며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머니들이 정말 몇 년 만에 밖에 나와 모처럼 노시는 건데, 왜 그것을 나무랄까?” “그 모습이 보기 싫으면 나라면 차양이나 천막을 쳐주어서, 밖에서 안 보이게 하고, 더 편히 노실 수 있게 하겠는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무래도 조금은 “페미니스트 적” 기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오히려 거꾸로인 것 같다. 구박받는(?) 남편들 소식도 심심찮게 들리고, 친구 녀석들도 보면 영 마누라한테 쥐여사는 놈들이 많다. 그리고 기껏 하는 소리가 “집안이 평화로우려면...”하는 소리를 한다. 겸양의 소리가 아니다. 가끔 전화 받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조금 값비싼 음식점에 가면 남자와 여자 손님의 비율이 너무 차이가 난다. 어느 때인가 내가 몇 번 남녀 손님 비를 세어보고 평균을 내보니 8:2 정도였다. 조금 더 비싼 곳은 9:1 정도로 여성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것은 정말 큰 반전이다. 무심히 보면 “그런가 보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불과 4, 50년 전과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가 있다. 세상이 변하기는 확실히 변한 것 같다.

 

1. 여자분들의 소녀 마음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누구를 못 박고 찍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여 노는 모습을 무작위로 찍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사진을 본인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찍힌 사람들의 재미있는 표정을 혼자서 보기도 한다. 사진을 크게 인화하는 데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 그러나 몰래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말기 바란다.

 

그런데 이런 사진들을 보면서 여성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다. “여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소녀 마음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여자들은 “끼가 없는 여자는 없다.”는 사실이다.

 

자리에서 곧잘 노는 분도 있지만, 좀처럼 나와서 춤이나 노래를 안 하는 분도 있다. 어느 정도 나이 들고 특히 점잖은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런 분들도 때와 소와 분위기만 맞으면 어찌 그리 신명 나게 노시는지 놀랄 정도다. 특히 사진 속에 나타난 그럴 때의 표정을 보면 어찌 그렇게 천진하고, 그 순간에 몰입하시는지 정말 놀라울 정도다. 

 

여기서 나는 조금 이상한 단어를 썼다. 천진(天眞) 몰입(沒入)이라는 단어다. 그냥 쓴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선택하여 쓴 단어다.

 

왜냐하면 그렇게 완고하던 여성분들도 기분이 맞는 순간에 마음이 동(動)하면, 어찌 그리 표정이 순진무구해지고 천진하게 변하는지, 그저 감탄스러울 정도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아하. 그렇구나. 여자분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또 아무리 점잖은 생활을 오래 하여도, 마음속에는 소녀의 마음이 그대로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한두 번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서 노는 것을 볼 때마다 자주 느껴지는 기분이다. 특히 요즘처럼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는 더욱 자주 느껴진다.

 

그래, 여자분들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소녀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2. 남자들의 청년 마음

 

그러면 남자들은 어떠할까? 같은 방식으로 유추하면 남자들은 ‘소년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애해, 그러나 아니다.” 남자들은 기껏해야 ‘청년의 마음’ 정도가 최고다. 남자들에게 소년 시절은 언제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철 없던 시절을 별로 돌이키고 싶지도 않다. 대신에 활기차고 재미있게 그리고 자신감이 넘쳐있던 『청년 시절』이 그립다. 아니면 “내가 소싯적에는 말이야, 내가 한참일 때는 말이야...” 로 시작하는 3, 40대를 말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뭐든지 할 수 있었던 것 그때가 훨씬 더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다. 

 

3. 여자들은 소녀 마음, 남자들은 청년 마음

 

그러면 왜 그럴까? 이것이 수수께끼다. 그러나 조금 짐작은 간다. 그것은 바로 남자들 ‘어깨의 무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전 어느 글에서도 말하였지만, 유전적으로 남자들은 ‘1차 생산책임자’다. 즉 옛날이라면 가족을 먹일 동물을 잡아 와야 하고, 현대라면 충분한 돈을 벌어와야 한다. 이것은 4백만 년 동안 DNA 새겨진 남자들에게 내려진 명령이다. 그래서 남자 생각은 부모의 보호 밑에 있었던, 1차 생산자가 아니었던 시절을 기억할 수가 없다. 그것은 나의 본분에 맞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내가 생각나는 것은 “내가 1차 생산자 역할을 잘했을 때”, 즉 돈을 잘 벌어 왔을 때, 또는 돈을 많이 벌 기회가 충분히 있었을 때를 회상하는 것이다. 그러니 20대 청년 시절 또는 3, 40대가 회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남자들이 회상하는 시절도 남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자기가 희망에 차 있던 시절, 잘나가던 시절이다. 그래서 그때가 2, 30대였으면 그때가 생각나고, 그때가 40대였으면 40대가, 50대였으면 50대가 생각나는 것이다.

 

4. 미래의 남자와 여자는 어느 시절을 회고할까?

 

그러나 이제는 남자 여자의 역할이 많이 섞여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남자도 직을 갖지만, 여자들도 직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직을 가진 젊은 여자분들은 그들이 6, 70대가 되면 회상의 시기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아마 3, 40대, 4, 50대? 

 

그러나 설령 그럴지라도 여자들이 회상하는 시절은 그리 크게 달라질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본질적으로 남자보다 더 순수하기 때문이다. 여자분들은 자기 자식 모두를 하나하나 돌보아야 하고, 비가 오는 날도 준비해야 하며, 식량이 없는 날도 대비해야 한다. 그러니 여자들은 항상 객관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객관적인 자세가 있어야 만이 찬찬히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객관적인 생각이나 차분한 마음은 어느 정도 순수한 마음이 있어야만 가질 수 있다. 물론 여성들의 객관적인 마음은 자기 친족에 관한 것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 논의를 잠깐 접어두도록 하자. 

 

5.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어요?

 

이것은 공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요즘 대학교에서도 그렇고, 사법고시, 의사고시, 선생님 임용고시도 1등부터 5등까지는 여자분들인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들이 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머리가 영리해서? 물론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곧 여자들이 남자보다 더 순수하고, 그래서 마음이 더 차분할 수 있고, 그래서 공부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자주 듣는 얘기가 있다. “교수님, 어떻게 하면 자식들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꼭 뒤에 따라오는 말은 “머리가 좋아야겠지요?”라고 한다. 나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해주는 말이 있다. “절대 머리는 아닙니다. 보통 정도만 되면 공부하기 부족하지 않아요.” 그러면 어느 부모는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자식이 머리는 나쁜 것 같지 않은데,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이게 정답이다. 도대체 중고등학교 공부, 그리고 대학 공부도 머리가 나빠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차분한 마음이 없어서, 지긋이 쳐다보며 깊게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못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분들은 이런 차분한 마음을 가지는데 남자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그래서 여자들이 1등부터 5등까지 차지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 나만의 지나친 속단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6. 에필로그

 

이런 글에 무슨 결론이랄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세상 참 많이 변했어.”라는 말을 한다. 나도 가끔 그런 말을 한다. 그러나 유행이라는 것이 여자들 마음을 더 쉽게 유혹(誘惑)하듯이, 세상의 변화에 따라 더 빨리 변화하는 것도, 남자보다는 여자들인 것 같다.

 

은유적으로 얘기하겠다. 옛날 젊은이, 어머니의 모습과 지금 일부 젊은이, 어머니의 모습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보고 대하는 태도에도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자식 교육에 대해서는 더 많은 차이가 있다. 옛날에는 마음가짐을 가르쳤는데 요즈음은 지식교육이 훨씬 더 우선이다. 옛날에는 나의 겸손함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뽐내는 것과 과시가 중요한 듯하다. 

 

옛날에는 10개를 가지고 있으면 여섯, 일곱을 보여줬는데 지금은 열한 개, 열두 개를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옛날에는 아이들이 싸우면 내 아이를 먼저 나무랬는데, 요즈음은 자기 자식이 번연히 잘못했는데도 오히려 상대방 아이를 나무라기도 한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도, 손해를 끼치고도 “물어주면 될꺼 아니야.”라고 소리친다. 잘못하여 자동차 사고를 내고도, “보험처리 하세요.”라고 너무 당당하게 얘기한다.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너무 위험하게 운전하여 항의하니, 오히려 “미안하다고 깜빡거렸잖아요.”라고 너무 당차게 얘기한다. 

 

물론 일부 사람들의 얘기다. 세상이 모두 이러면 어찌 세상이 유지되겠는가?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기원전 3세기 점토판에 “요즘 젊은이들은 예의가 없다. 미래가 걱정된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 후 2,500년이나 지속해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요즘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다. 말세야!”할지라도,“세상은 지금보다 한참 후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림 1> 젊은 시절의 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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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아직도 아름다운 노년의 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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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젊은 시절의 아란 드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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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그저 평범한 할아버지 아란 드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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