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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최협의 박물관 이야기 <37> 바사 박물관 (Vasa Museum) 1,300m로 끝난 역사상 가장 짧은 처녀항해 이야기를 담은 박물관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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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7월04일 09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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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협
  •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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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박물관은 뜻밖에도 오직 배 한 척을 위해 세워진 조그마한 박물관이다. 세계 최대의 여행 웹사이트 TripAdvisor가 선정한 2015년도의 세계 10(top 10 list) 박물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유일의 스웨덴 박물관이 <바사 박물관>(Vasa Museum)인데, 바로 이 <바사 박물관>은 배 한 척에 대한 이야기를 담기 위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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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정부가 발표한 2017년 통계에 따르면 그 해 <바사 박물관> 방문객 수는 1,495,760명에 달했으며, 1990년 이래 2017년까지 28백만 명이 다녀갔다. 그렇다면 오직 배 한 척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어떠한 이유로 그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지 궁금해진다. 무언가 만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이다.

 

스웨덴의 전함 바사(Vasa)호는 1625, 북쪽의 사자(The Lion of the North)로 불리던, 바사 왕가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왕(Gustav II Adolf)의 명령으로, 1626년 건조가 시작되어 다음 해에 건조가 완료되었다. 바사호는 10개의 돛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돛대 3개를 장착하고, 높이 52m, 길이 69m, 무게 1,200t에 달하는 강력한 군함으로, 거기에 대포 64문을 장착하였으니 바사호는 무적(無敵) 스웨덴 해군 함대의 상징으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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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막강해 보이던 군함이 1628810일 처녀 항해 때 단지 1,300m를 가고 침몰한 것이다. 그 후 바사호는 바닷속 뻘밭에 333년 동안 묻혀있었다. 이렇게 극적인 최후를 맞은 바사호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수많은 난관을 뚫고 인양되어 세상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었으니, 어찌 보면 그를 위한 박물관의 설립은 당연한 귀결이었으리라!

 

바사호를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는 물론 믿어지지 않는 항해 첫날 침몰의 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바사호가 첫 출항을 하던 날, 만 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바사호의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해안가로 모여들었고 갑판 등 배 전체가 화려하게 장식돼 보는 이들의 환호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바사 박물관>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바사호의 침몰광경은 다음과 같다.

“1628810, 바사호는 Tre Kronor 성 아래에 있는 계류장에서 풀려났습니다. 포문이 열리고, 모든 대포는 바깥쪽을 향했으며 예포가 발사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군함은 천천히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차례 돌풍이 불자 배는 옆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열린 포문 사이로 물이 스며들면서 바사호는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150여 명의 승선자 중 최소 30명이 사망했습니다.”

 

바사호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당연히 처녀항해 때의 침몰을 놓고 시작된다. 우선 원인분석이 여러 갈래다. 많은 이는 설계의 잘못 가능성을 말한다. 스웨덴 왕은 1625년 네덜란드의 유명 배 설계자인 Henrik Hybertsson와 계약을 했는데, 배의 건조가 막 시작된 1626년 그가 병으로 사망하여 작업이 그의 조수 Hein Jakobsson의 손으로 넘어갔다. 조수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여 기술 혁신이 요구되는 새로운 군함설계에 하자 발생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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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는, 당시 북쪽의 사자(獅子)로 불리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왕이 강력한 군함에 대한 욕심이 지나쳐 너무 많은 함포의 배치를 요구하는 등, 배 설계에 무리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즉 원래 함포는 1개 갑판 배치가 통상적인데 아돌프 왕이 더 많은 함포를 요구함에 따라 포열 갑판이 두 개의 층으로 확대되었고, 첫 항해 당시 2개 층의 포열 갑판의 문들이 예포 발사를 위해 모두 열려있어 바닷물의 침수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설계는 네덜란드, 건조는 스웨덴 기술인력인 상태에서 양국 기술자들이 쓰던 기준자()의 길이가 조금 달라 바사호의 좌현이 우현보다 무겁게 건조되었고, 그러한 비대칭 모양이 침몰의 원인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혹자는 바사호가 스웨덴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하여 부착한 지나치게 과다한 조각 장식이 선박의 안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스톡홀름항구 연안에 침몰한 바사호는 그냥 방치되지 않고 17세기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바사호에 탑재된 함포와 처녀항해 시 실었던 물건들이 그냥 버려두기에는 값진 물품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이킹의 후예답게 스웨덴 해군은 실제로 1663~1665년에 현대의 다이빙벨(diving bell)과 비슷한 특수 잠수기구를 제작하여 바사호에 탑재된 함포를 인양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 후 잊혔던 바사호는 20세기 초 검은 참(oak)나무로 만든 가구가 인기를 끌자 스톡홀름항구 앞바다 어디엔가 가라앉아있을 바사호의 검은 참나무 선체(船體)를 사겠다는 사업가가 등장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 들어 스톡홀름대학의 유명 역사학 교수였던 Nils Ahnlund17세기에 침몰한 선박에 대한 책을 펴내어 바사호에 관한 대중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고, 스웨덴 해군의 엔지니어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스웨덴 해군의 침몰한 선박들에 관심을 가져왔던 Anders Franzén1954년부터 바사호의 위치를 본격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Franzén은 방대한 문헌 조사에 머무르지 않고 그가 개발한 특수 채광기구(coring device)를 사용하여 항구의 여러 지역을 탐사한 결과 1956825일 마침내 바사호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다.

 

Anders Franzén과 잠수부 Per Edvin Fälting30m 해저에서 발견한 바사호는 놀랍게도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그들의 과장된 표현을 빌자면 바사호는 마치 다음 항해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나중 인양 후 복원한 선체는 98%가 원래의 부품을 사용할 정도로 상태가 좋았으니 참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스톡홀름항구 앞바다 바닷물의 염도가 낮아 목선의 파손을 가져다주는 어패류의 서식이 어려웠고, 동시에 수온이 지나치게 낮아 목선에 치명적인 배벌레(shipworms)도 없었으며, 심지어 오랜 기간 항구에 유입된 하수와 오물은 박테리아의 활동마저 불가능한 환경을 조성한 것으로 나중에 분석되었다. 문제는 해저의 뻘 속에 파묻혀있는 거대한 선체를 어떻게 인양하느냐였다.

 

인양작업은 1957년 케이블을 선체의 아래로 통과시켜 배 전체를 끌어 올릴 수 있도록 잠수부들이 선체 아래에 터널을 파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작업은 2년이 걸렸다. 19598월에는 선체에 엉켜있는 뻘흙을 펌프로 걷어내고 선체를 조금씩 들어 올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년 반 뒤 여러 가지의 기술적 난관을 뚫고 1961424, 14,000개 조각의 목재 부분이 인양되었다. 1961424일 바사호가 333년의 긴 세월을 견뎌내고 그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은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실시간으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1962년에는 와사 조선소(Wasa Shipyard)에 바사 선체(船體)를 안치하고 전문가들과 목수 등이 바사호의 복원과 보존을 위한 작업을 본격화했다. 이러한 광경은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었는데 1962년 한 해 동안에만 439,300명이 유료관람권을 구매하여 작업상태의 바사호를 구경하러 왔다. 그런데 300년 이상을 바다 속에 잠겨있던 선박의 복원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닷물을 잔뜩 머금은 목재는 건조 과정을 거치며 쪼그라들거나 금이 가기 쉽다. 전문가들은 선체에 물을 뿌리는 작업을 계속하여 배의 갈라짐을 막고, 9년간의 건조 과정을 거쳤고 보존제를 17년 동안 발랐다. 그래서 1979년까지 계속된, 당시의 최첨단 문화재 복원 기술이 적용된, 복원과 복구의 전 과정은 그 자체가 박물관학도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역사로 남았다.

 

선체의 복구 작업 이외에도 선박에서 발견된 여러 종류의 유물 분석 통하여 선박에서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작업도 병행해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1990년 박물관이 건립되면서 17세기 스웨덴 해군의 선상생활을 보여주는 전시콘텐츠가 되었다. 1990년 건립된 바사 박물관은 공모를 거쳐 결정되었는데 무려 384개의 설계 제안이 들어왔고, 최종 채택안은 스웨덴의 유명 건축가 Marianne Jakobbäck Göran Månsson의 몫이었다. 신축된 박물관 건물은 구리로 만든 지붕과 바사호의 실물 크기의 돛대가 이곳이 선박에 관한 박물관임을 잘 나타내 준다.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특색있는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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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호를 둘러싼 연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오래된 목재의 습도 조절 문제에 관한 연구, 선박과 함께 인양된 선원 유골을 최신의 영상기법을 동원하여 인물을 복원해보는 작업, 나무와 볼트의 수명연장 문제 등 바사호를 최대한 잘 보존하기 위한 연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복원 이후 바사호를 박물관에 전시하는 과정에서도 꾸준한 연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선체에 400개 이상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 할 수 있는 장치를 부착하여 뒤틀림을 방지하고 있으며, 온습도 조절 장치를 설치하여 공기 접촉으로 인한 부식을 막고 있다.

 

마침 한국에도 1976년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14세기에 침몰한 원나라 무역선이 발견되어 수만 점의 유물을 건져낸 경험이 있다. 그리고 인양된 선박과 유물을 보관, 전시, 연구하기 위해 목포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설립했다.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은 바사호와 신안의 무역선을 비교해가면서 양 박물관을 보면 더욱더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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