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경제학 여정(旅程) <9> 미·중 데탕트(dḗtent)와 홍콩·대만 출장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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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3월12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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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공존 시대로 나아가자!”

1969년 7월 2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미국의 새로운 대(對)아시아 정책(괌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 정책은 1970년 2월 그가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세계에 선포되었다.

 

이로부터 미국의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행되어온 미 해군 함대의 대만 해협 순찰이 1969년 11월 중지되었고, 동년 12월엔 미국인들의 중국 여행제한이 해제되었다. ​

 

1970년 11월엔 유엔 총회에서 중국 가입을 허용하고 대만을 축출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1971년 4월엔 미국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하여 “핑퐁 외교”를 했고, 같은 해 10월 중국은 유엔에 가입하고 대만은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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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월 9일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하여 주은래(周恩來) 중국 수상과 장시간 회담을 했다. 1972년 2월엔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모택동(毛澤東) 주석과 회담하고, “상해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의 핵심은 미국과 중국이 상호 적대관계를 끝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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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닉슨 미 대통령과 모 중국 주석의 첫 만남,1972년 2>

이런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대만이었다. “상해 공동 성명”은 “대만은 중국의 1개 성(省)”이라고 명시했다. 이것은 대만에는 큰 충격이었다. 미국은 대만을 오랫동안 지지해왔고 반공 전선의 가장 강력한 우방으로 연대(連帶)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국제정세의 급변에 따라 한·대만의 관계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한국과 대만은 경제적으로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김 조사역! 나하고 대만에 다녀오자!”

“네? (이게 웬 떡, ㅎㅎ)”

“홍콩을 먼저 보고 대만으로 가자고.”

 

1972년 5월경(?), 당시 무협 조사부와 무역 정보 신문인 “무역통신”을 담당하고 있던 고 문형선 상무의 호출이었다. 나는 당연히 내심 쾌재를 불렀다. 문 상무님은 매일경제신문 편집국장 출신으로 국내외 언론인들과 폭넓게 교류하셨던 분이었다. 미·중 관계의 해동(解凍)에 따라 한국의 무역이 어떤 영향을 받게 될 것인지를 홍콩, 대만의 언론인들과 접촉하여 파악하려는 목적의 현지 출장인 것으로 이해했다. 당시 나는 1971년 가을 미국 국무성이 설립한 EWC( East West Center)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72년 여름에 미국 하와이로 출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ㅎㅎㅎ! 이게 뭐야. 우리가 자기들 책을 번역했는데 우리 번역본을 입수해서 자기들이 역(逆)으로 번역했잖아?”

 

1971년 무협 조사과는 JETRO( Japan External Trade Organization)에서 발간한 “중국의 무역”이란 보고서를 번역했다. 그런데 이 한국어판을 일본의 어느 연구소가 일본어로 번역해서 출간한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이 왜 벌어졌을까?

 

당시에 한국이나 일본이나 중국 경제, 대외무역에 관해서 거의 ‘깜깜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후 형성된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질서 하에서 미국과 적대관계에 있었고, 서방 국가들에 대해서 경제 외교적으로 폐쇄적이었던 중국을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하기도 했다. 

이런 무지(無知)의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적대관계에서 벗어나 평화 공존과 상호 교류·협력으로 새롭게 설정함에 따라, 이 새로운 국제질서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나로서는 생애 첫 해외여행이었다. 당연히 설렘으로 가득했다. 홍콩에 가서 그곳 언론인들과 여러 만남을 통해서 의견 교환을 했다. 홍콩의 분위기는 환영 일색이었고, 미·중 수교가 곧 성사되고 미·중 경제교류가 활성화 되면 홍콩이 경제적으로 큰 혜택을 받게 될 것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대학 시절에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慕情)”이라는 영화를 매우 인상 깊게 감상했다. 이 영화는 윌리암 홀덴과 제니퍼 죤스가 주연했다. 스토리가 펼쳐진 장소는 홍콩, 시대적 배경은 한국전쟁이었다.

 

이 영화의 주제곡이 영화 제목과 같다. 엔디 윌리엄스가 불렀다.

“ONCE ON A HIGH AND WINDY HILL IN THE MORNING MIST, TWO LOVERS KISSED~~~” 라는 가사가 포함되어있다.

 

“문 상무님! 그 언덕(HIGH AND WINDY HILL)에 가보고 싶은데요.”

“그래? 사람 소개해 줄 테니 일과 끝난 후 다녀와.”

 

이 언덕은 빅토리아 파크에 있는 병원 뒤에 펼쳐져 있었다. 영화에서 본대로 나무 한 그루가 그 언덕에 서 있었다. 나는 그 나무 아래 서서 마치 윌리엄  홀덴이라도 된 듯이 감상에 젖었다. 이 영화에서 윌리엄 홀덴은 미국 언론사 특파원으로서 한국전 취재 중 사망했다. 

 

대만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방문한 대만 정부의 한 고위 관리는“미국은 우리를 배신했고, 한국도 우리를 배신하려 한다. 여기 뭐 하러 왔나. 알고 싶은 거 있으면 빨리빨리 묻고 가라.” 아주 싸늘한 반응이었다. 

 

f4e35c501417fd30a9cff41679ab2271_1646973  <사진  대만 언론인들과의 만찬.왼쪽에서 네번째가 필자,그 바로 오른 편이 문형선,그 다음이 대만 언론사 주필​>

 

​ 그 당혹감과 실망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국가 간의 관계란 결국 실리(實利)에 의해서 형성되고 변화한다.” 는 인식을 새삼 확인했다.​​현지 언론인들도 배신감을 토로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문 상무와의 오랜 교류가 바탕이 되어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줬다. 

 

나는 어느 신문사 주필과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서로 인간적 유대감을 느끼기도 했다. 연세(年歲)가 많으신 분이었는데 솔직하고 따뜻한 인품을 느꼈다. 만찬이 끝날 즈음 이분의 부인이 오셔서 부축하고 귀가했다. 아름답고 정겨운 모습이었다.​

 

홍콩과 대만의 현지 방문에서 수집한 자료와 정보를 잘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그 보고서보다 더 소중했던 경험은 국제관계의 냉혹한 현실이었다. 인간들 간의 기능적 관계(Functional relationship)보다 더 가변적인 것이 국가 간의 관계라는 인식이 강하게 나의 뇌리(腦裏)에 자리 잡았다.

 

“내가 김 조사역 덕을 보려고 함께 가자고 했는데, 지내놓고 보니 내가 자네를 수행한 셈이네, ㅎㅎ” 

 

문 상무님의 따뜻한 배려와 호탕한 웃음이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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