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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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설명한 융복합주의와 사의사색화의 기본 설명은 아래 링크로 대신합니다.

융복합주의(Convergeism) https://url.kr/ke4u1s

사의사색화(寫意思索畵) https://zrr.kr/usAb

 


사의사색 w-02 170 X105cm 거울 위에 아크릴페인팅과 혼합재료2022

 

작품 배경 설명 : 한국에서 미국을 관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중에서도 뉴욕의 맨해튼을 담고 있는데 뉴욕은 잠들지 않는 도시로 유명하고 한때 미국의 수도이기도 했지만 세계의 수도로 불리고 있다. 이는 정치, 경제, 문화가 뉴욕을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우리는 141년의 수교 관계를 맺고 있다. 그중에서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로는 장기적인 강력한 정치, 경제, 군사적 동맹을 형성하고 있다. 기밀한 유대관계만큼 유학생이 가장 많고 미국의 선진문물을 배워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귀국 후 활약으로 자연스럽게 우리의 문화 속에는 미국적 문화가 많이 형성되어있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정치적 대화와 협력, 문화 교류 확대, 학술 및 교육 교류 강화, 경제 및 무역 협력 확대, 안보 협력 강화가 이뤄져야함을 생각하며 제작된 작품이다.

 

사의사색 w-02(부분)

사의사색 w-02(부분)

 

작품 표현 설명 : 근경에 위치한 산은 한국을 나타내는 것이고 원경으로 보이는 건물들을 미국의 상징인 맨해튼이다. 파랑색 계열의 산과 빌딩 중 One World Trade Center를 파란색으로 표현한 것은 서로 각 나라의 문화, 정치, 경제의 정체성은 다르지만 서로 융합하며 강하게 연결되어있고 교류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최근 한류가 미국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고 그 흐름이 연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파동의 형태로 나타내었다. 하늘을 석양빛으로 나타낸 것은 잠들지 않는 도시가 뉴욕과 서울이 닮은 꼴이라고 생각되어 표현하였다. 한국의 산에서 3개의 기념비적인 빛 기둥이 솟아 오르는 것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성장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26장의 대통령상”. 이것은 1년간 정부에서 각 전통예술 경연대회에게 주어지는 대통령 상장의 수이다. 다시 말해서 1년에 전통예술 부문 대통령상을 받는 국악인이 26명이란 이야기이다. 또 다시 말하자면 전국의 명인·명창이 한 해에 26명씩 나온다는 말이며, 2년이면 52명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무려 3년이면 78. 4년이면 104명이다.

 


대통령상장 마크

 

 

이러한 현실을 기쁘게 생각해야 하나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야 하나. 알지 모를 아이러니에 빠지고. 우선 필자의 고민은 후자에 두고 그러한 이유의 일장일단을 이 글을 읽는 이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난해 2021년 정부시상 지원 경연대회의 상장을 살펴보면 무용 분야는 총 15개 대회 중 대통령상이 있는 곳은 2, 음악 분야는 총 12개 대회 중 대통령상이 있는 곳은 2, 연극 분야는 총 8개 대회 중 대통령상이 있는 곳이 총 1. 전통예술 분야는 총 86개 대회 중 국립국악원 온나라국악경연대회까지 포함 총 26개의 대통령상을 보유하고 있다.

 

전통예술의 진흥과 인재 등용을 위해선 꼭 정부가 수여하는 상장이 필요하다. 이는 정부의 공신력 필요를 뜻하며 명예에 걸맞은 공정성과 운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각 지방자치단체의 시군에서는 여러 전통예술 경연대회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을 파악하고, 진흥하며 공정성과 더불어 각 특색있는 지역의 명분을 만들어 경연대회를 장려하고 있다.

 

문제는 그 이후다. 그러한 역사적 좋은 의도의 깊은 뜻을 간직하고 생겨난 각종 경연대회는 전통예술의 진흥과 우수한 국악 인재 등용에 힘써야 하는데 그러한 모습은 후자로 퇴색되고 운영단체나 개인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황금만능주의 악순환으로 순수성이 사라진 안타까운 과거를 본 적이 있다. 이제 그러한 과거의 아픈 기억은 잊어버리고 소중한 우리 전통예술의 등용문인 전통예술 경연대회를 올곧은 신념과 공정, 가치로 무장하고 감사함과 더불어 소중히 이어나가야 한다.

 


2021 전주대사습놀이 포스터


       2022 온나라국악경연대회 포스터

 

우리나라 최고 정부시상인 대통령상의 수가 무용이나 음악, 연극보다 전통예술 부문에 더 많은 이유는 그 최고의 상이 세계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대한민국의 소중한 가치이며 지켜야 할 우리 선조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특히 호남에서는 전통예술 분야 정부시상 경연대회 총 86개 대회 중 37개의 경연대회가 매년 치러지고 있다. 그것은 43%란 엄청난 전통예술계의 영향력이며 그만큼 전통예술에서의 호남이라는 거점을 중요한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

 

이제 호남을 비롯하여 전국각지의 경연대회에서 등용되어 매년 나오는 26명의 대통령상 수상자들도 존재가치를 더욱 드높여 그러한 숫자의 자존감을 나타내고 우린 민족의 예술성을 높여 정부시상의 취지와 존재가치에 합당한 의미 부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 또한, 상장 수여와 더불어 관리·감독을 면밀히 추진하여 상의 훈격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노력과 믿음을 이으며 지켜가야 하겠으며 전통문화의 초석인 전통예술이 지나치는 문화의 환류가 되지 않게 관심과 배려로 그 존재감을 높여야 하겠다.

 

 

 

전통문화 칼럼니스트 소개

 

김용호 / 한국학 박사(Ph.D)

사범대학에서 수학교육을 전공하던 중 판소리에 심취되어 전주로 내려가 이날치의 손녀 이일주 명창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박종선 기악 명인에게 아쟁을 배워 1999년 춘향제 전국국악대전 기악부 최고상인 대상을 수상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이수자이며 서울시무형문화재 제39호 아쟁산조 이수자이다.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창작 및 표현활동지원 대상자전통음악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10년 독자적인 '아쟁' 주제 논문으로 한국 최초 아쟁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2년부터 수년간 러시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음악원에서 한국 전통음악 Master Class와 연주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여 주러시아 한국대사관과 차이콥스키음악원 간 MOU를 성사시켰고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간 체계적인 국악교육과 연주회를 시행했다. 경북도립국악단 악장, 국립부산국악원 초대 악장, 국립남도국악원 악장, 대구시교육청 대구예술영재교육원 음악감독,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을 역임했으며 정읍시립국악단 단장, 전주대사습청 운영위원, 전북일보 문화칼럼니스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위원,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심사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정부시상지원 현장평가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논문 / "전통예술공연 예술단체 활성화의 도정과 모색"(국회), "지역문화 균형발전을 위한 국립충청국악원의 역할"(세계음악학회), "거문고 명인 강동일"(완주문화재단) 외 다수

# 저서 / "박종선류 아쟁산조"(은하출판사), "산조아쟁의 이론과 연주"(부산문화재단), "박대성류 아쟁산조 연구"(부산문화재단), "아쟁교본"(전북도립국악원) 외 다수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순수예술을 보고 들으며 삶의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찾는다. 또한, 가까운 곳에 두고 향유하고 싶어 하며 자신의 힘들고 찌든 삶에 활력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떤 때에는 고통을 덜어내는 촉매로, 어떤 때에는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도구로 우리 삶을 지켜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삶의 치유제이며 활력소인 순수예술을 반기며 업으로 즉 삶의 직업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독일 뮌헨 악기박물관 사진 자료

 

예술가는 무릇 노력과 더불어 타고난 재주가 있어야 끼를 발산하여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손가락이 부서져라 악기를 연습해도 타고난 재주, 즉 끼를 타고난 사람에게는 예술성을 따라갈 수 없다. 그것은 참으로 불공평한 세상의 법칙 같지만,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천륜의 법칙이라 원망하기도 모호한 신묘한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천재를 이기는 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교육과 노력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순수예술 전문가 교육을 하는 과정의 학생 정원은 나날이 줄고 있으며 졸업자 또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물론 코로나19의 펜데믹 시대에 순수예술만이 그렇겠냐마는 더욱 억울한 사정은 펜데믹 시대 이전부터 순수예술을 위한 배움터와 졸업자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세간의 뉴스엔 항상 순수예술 관련 소식이 보도된다. "재벌가의 누구가 귀한 미술품 수백, 수천 점을 내놓았네. 누구누구가 세계 유명 콩쿠르에서 입상했네. 한국의 전통예술이 다른 나라에서 이슈가 됐네." 자랑스럽고 귀한 소식들로 가득 차 있지만 정작 그들을 위한 교육과 정책은 바르게 가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대학 시절, 부모님의 반대와 지인들의 만류에도 다니던 사범대를 자퇴하고 판소리가 좋아 국악으로 인생행로를 바꾼 과거가 있다. 그렇게 순수예술에 대한 많은 조언과 편견에도 묵묵히 그 길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나에게 다가온 전통예술의 절실함 때문이었다. 그 절실함은 무엇이었을까? 절실함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전주대사습놀이 출신 명창들


2021 전주대사습뎐 포스터

 

JTBC 손석희 사장의 일화다. 손석희는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했고 마흔셋의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을 하며 마련해 둔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서 낮엔 식은 도시락으로 저녁에는 햄버거로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유학 시절 첫 학기 첫 시험 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하고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흘린 눈물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이 절실했으며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가치였다고 믿었다. 그렇게 절실함은 오늘의 손석희를 만들었고 대중의 중심에 서 있다. 물론 그분의 졸업장 한 장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자신과의 싸움. 즉 스스로 결정한 삶의 절실함은 운명도 바꾼다는 이치를 알리고 싶어서다.

이 세상엔 절실함보다 더한 희망은 없다. 절실하다고 후회할 필요도 없다. 순수예술을 공부하거나 업으로 생활을 하는 모든 이여! 현실은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에겐 스스로의 절실함이 있다. 그것은 백만금을 갖은 재벌가도, 세상의 모든 권력을 가진 자도 부럽지 않은 순수예술가만의 존재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순수예술의 가치에 의해 밝고 맑게 변화된다는 것도 많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제 국가는 그러한 순수예술을 품고 삶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예술가를 위해 어떠한 방향과 추진으로 함께 할 것인가를 더욱 고민하고 피력해야 할 것이다.

 

<김용호 한국학 박사(Ph.D) 칼럼니스트 소개>

이날치의 손녀 이일주 명창에게 춘향가 사사박종선 기악 명인에게 아쟁을 배워 1999년 춘향제 전국국악대전 기악부 최고상인 대상을 수상국가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이수자서울시무형문화재 제39호 아쟁산조 이수자.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창작 및 표현활동지원 대상자’ 전통음악부문에 선정. 2010년 독자적인 '아쟁주제 논문으로 한국 최초 아쟁전공 박사. 2012년부터 수년간 러시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음악원에서 한국 전통음악 Master Class와 연주회를 주도적으로 개최하여 주러시아 한국대사관과 차이콥스키음악원 간 MOU를 성사.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간 체계적인 국악교육과 연주회를 시행경북도립국악단 악장국립부산국악원 초대 악장국립남도국악원 악장대구시교육청 대구예술영재교육원 음악감독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을 역임했으며 정읍시립국악단 단장전주대사습청 운영위원전북일보 문화칼럼니스트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위원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심사위원예술경영지원센터 정부시상지원 현장평가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문화영토를 무한 확장하는 꿈.

한국어는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전 세계인에게 주목받고 있다. 러시아, 터키, 태국, 인도 등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정하는 국가는 약 41개국에 이르고 있고 베트남이 전 세계 최초로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선정했다. 한국어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한국어의 표현법인 한글의 우수성이 매우 큰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한글은 세종대왕님이 밝힌 바와 같이 똑똑한 사람은 반나절에도 익힐 만큼 쉽고 합리적이다. 특히 컴퓨터와 모바일의 보급이 늘어나면서 한글의 우수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가까운 나라 중국과 일본의 경우는 자기네 나라말로는 도저히 키보드 자판을 구성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나 한글의 경우는 어떤 디바이스건 간에 쉽게 적용되고 활용된다. 국격의 상승과 한류문화의 확산이 강해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의 보물인 한글과 한국어의 수출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2외국어로 선정하는 국가는 약 41개국

전 세계 나라 수는 국제표준화기구에 의거한 경우 249개국 그리고 UN에 등록 승인된 국가는 196개국이다. 우리나라의 세계무역 순위는 10~8위 수준이다. 거대 무역국인 만큼 교역을 하는 나라는 거의 전 세계적이다. 그러나 그 비중을 보면 전체 교역 내용의 3/4은 중국, 미국, 베트남, 홍콩, 일본, 대만, 인도, 싱가포르, 독일, 말레이시아가 주요 수출국이고 중국, 미국, 일본, 독일, 베트남, 호주,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말레이시아가 주요 수입국이다. 중복된 나라를 묶으면 13개 국가로 압축이 된다.

전 세계 나라를 약 200개라고 보고 우리의 주요 교역국이 13개 나라라면 187개국에는 더 많은 교역의 기회가 있다는 단순 계산이 나온다. 물론 교역이라는 것이 국가나 해당 국민의 필요에 의해 성립되므로 무턱대고 접근해서는 안 될 일이므로 국익에 우선한 합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어 수출 방법

우선 한국어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수출할 곳이 분명해야 한다. 한국인이 거점을 만든 세계적인 네트워크 중에 태권도가 있다. 태권도는 212개국에서 15천만 명이 즐기는 가장 대중적인 무술이며 1만 여개 이상의 도장이 있다. 다른 형태의 네트워크는 750만의 재외동포로 구성된 한상네트워크다. ‘세계한상대회180여개 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기업인들의 모임으로 활발히 기업을 운영하며 대회에 참가하는 기업수가 5000여개에 달한다. 여기에 국가가 취업준비생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지원금을 결합하면 효과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

해외취업준비생에게 국가의 해외정착지원금이 선진국은 400만원, 우대국가에는 800만원의 지원금이 지급되고 있다. 이를 보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미 태권도 교육은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한국어로 교육을 한다. 여기에 사범이 수련 시간 외에 한국어 교육을 하는 코스를 만든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은 한국어 교육 자격증을 주고 대한민국이 공인하는 교육시설이라는 인증을 하며 지원금과 관리 제도를 만들면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 더불어 해외취업준비생의 인턴쉽을 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여 우리나라 국민의 일자리 창출도 되고 해당 국가의 국민도 한국에 들어와 취업할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고구려의 유민으로 알려져 있는 라후족과 묘족 등 한국어와 유사도가 높으며 어순이 거의 비슷한 종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일이다. 그 외에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상호교류 및 인력 수급을 위해 진행하는 베트남,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의 기술연수생의 교육에는 한국어 자격 취득 시험이 있는데 이를 더욱 확대한다면 효과적일 수 있다.

 

한국어 수출의 이점

위와 같은 방법들로 한국어를 수출하면 생기는 이점은 당연히 국격이 높아지고 문화영토의 확장으로 기존의 교역내용과는 확연히 다른 교역량과 수준이 높아지게 될 수 있다. 그 이점은 굳이 거론할 필요 없이 많이 알고 있으므로 효과적으로 실천하면 된다고 본다.

 

효과적인 실천이 필요한 것을 조금 더 서술하겠다.

 

위에서 거론한 코트라의 경우 전세계 84개국에 10개 지역본부, 129개 무역관을 운영중인 한국 경제의 대외 경쟁력 진흥기관이다. 코트라 해외무역관의 고유 업무는 수출상품의 홍보와 현지 정보수집 및 활용 등 국내 기업과 상품, 서비스의 현지 진출 지원이 중심이지만 해외 취업을 위한 업무도 추진하고 있는데 이 업무의 필요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요구되고 있으나 취업 효과는 크지 않다. 이런 문제의 원인은 현지 기업인과 한국인과의 소통문제이다. 물론 해외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은 현지어를 능숙하게 익혀서 진출하지만 현지 기업인의 인식은 다를 수 있다. 그가 만약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인과 한국 상품에 대한 가치 측정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미 진행하고 있는 정책이라도 종합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한국어와 한류문화보급이 직접적으로 연계된 프로그램으로 재구성하는 필요성이 있다.

 

대한민국의 문화영토를 무한 확장하는 꿈을 꿔야 한다.

 

- 사색을 그리다.

 

연필과 붓을 잡은 시간이 40년 정도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추구하는 것도 달라지나 보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최고가 되고 싶었고, 청년기에는 낭만이 좋았고, 좀 더 어른이 되어서는 사랑이 필요했고, 지금은 삶의 가치를 바라본다.

 

사색의 시간 -전완식-
 

가치를 찾는 사색의 시간에는 나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고 내면으로 들어가면 시간은 동결되고 기억의 파편들이 흩어지고 모이며 나는 타자의 시선으로 내면의 조각에 생긴 흠집의 기억을 줍는다.

 

흡집은 나에게서 파생된 것도 있고 남에게서 파생된 것도 있다. 흠집은 각각 사건들의 기록이며 앞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과거에 있지만, 해법은 현재에 있다. 이성적 사유는 객관적인 나를 평가하여 자연의 원리에 입각한 지혜를 생산한다.

많은 사람의 사유 동기는 사람의 신변, 자연의 변화 등의 특이점을 발견하면서부터인데 나에 대한 지성적 인식 활동의 동인은 사람의 신변 그중에서도 보편적이지 않은 성취욕이라고 본다. ‘성취욕이 있다라는 인식, ‘성취욕이 문제라는 인식, ‘성취욕도 나의 일부라는 인식의 변화 속에 성취욕으로 파생된 다양한 인간의 희로애락과 도덕률과 모순을 대면한다.

 

 

 (좌)주변이 투영되지 않은 원형, (우) 주변이 거울에 비춰진 현상 /전완식(Kai Jun)-Time of origin.2103-100X100cm-Oil on Mirror-2021

 

내가 대면하는 비명제적인 지각, 기억에 대한 이해를 위해 나는 알고 있는 명제적 지식을 모두 동원하여 문제 원인의 이치를 따지고 풀며, 재조립하여 내면의 갈등 요인을 탐구하며 완성을 시도한다.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거의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모순의 명제를 직면하게 되고 모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모순이 아님을 깨우치게 되는 순간은 지난한 시간이 흘러야 겨우 알아채게 된다. 이런 과정의 연속 선상의 사유는 자연스럽게 산책으로 이끈다. 산책은 사유를 하기 가장 좋은 상황이다. 꼭 장소가 강이나, 산이나, 들판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만의 공간이 될 수 있고 자연과 조우 되는 환경이 더욱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환경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좌)주변이 투영되지 않은 원형, (우) 주변이 거울에 비춰진 현상/전완식(Kai Jun)-Time of origin.2115-116.8X91cm-Oil on Mirror-2021

 


(좌)주변이 투영되지 않은 원형, (우) 주변이 거울에 비춰진 현상/전완식(Kai Jun)-Time of origin.2110-116.8X91cm-Oil on Mirror-2021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은 사색의 시간을 시각화한 작품들로 구성되어있고 전시는 2022413일부터 19일까지 인사동에 위치한 토포하우스에서 진행한다.

 

코로나 사태의 거리두기 실천으로 인하여 본 행사는 9월1일에 예정하였으나 정부 지침에 의거 보름간 연기하였으나 여전히 경각심을 가져야하는 시기이므로 대상 수상자만 모시고 최소한의 행사를 진행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미술의 전래에 있어 용어적 오류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현대미술은 우리의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나 이해가 안되는 문제로 인하여 기피 현상이 생기는 것 이 문제입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실천입니다.

- 대한상상창의 공모전 조직위원장 Kai Jun​

 

수상자 명단


대상 : 
김용석     우수상민경진, 박용진, 양승규

 

대상 수상자 감상문


相濡以沫

김용석

 

상유이말(相濡以沫). 곤경 속에서도 작은 힘을 보태어 서로 돕는다.” 물고기들이 샘물이 마르자 자신들의 거품으로 서로의 몸을 적셔주었다는 내용의 사자성어이다. 물고기가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다.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 이 세상에 자신만의 이익을 찾는 사람이 가득하다면 세상은 결국 공사(共死)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이다. 게다가 이번 코로나 사태로 세상은 더욱 아비규환이 되었다. 하지만 공생(共生)을 향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속한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뒤엉켜서 싸운다. 그러다 함께 타들어 가고 만다.

 

최근 개인의 이기심, 집단의 이기심으로 인해 코로나 확진자가 많이 발생했다.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국민에게 주어진 권리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유만을 위해 행동하여 코로나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지나친 이기심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 지나친 이기심으로 인하여 속한 집단이 사회의 악으로 낙인찍혀버린 것은 스스로 발등을 찍는 일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타들어 가기보다 함께 힘을 합쳐 공생(共生)의 길을 추구할 때이다.

 

작품 속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그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안긴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이다. 의지는 상호 간의 믿음과 존중이 있을 때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의지하는 모습이 남아 있다면 우리는 공생(共生)의 길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의료인력의 부족함을 느끼고 공공 의대 신설 등 의료인력 보충에 대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의료인들과 합의가 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충돌이 계속되고 있고 의사들은 파업을 선언한 상태이다. 이로 인한 피해는 누구에게 가는 것인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누구를 위한 정책이고, 누구를 위하여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였는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 요구하기보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공생(共生)을 위한 행동을 한다면 모두가 작품 속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닐 날이 오지 않을까.

 

수상자 소감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https://youtu.be/nIiAHNfUqhw


새로운 방송을 소개합니다.

 

대한상상창의 방송을 함께 진행하는 카이전 교수와 장엘리 앵커입니다.

서양화가이면서 교수인 Kai Jun이 연구한 서양문화와 동 서양인의 심리와 사고의 차이를 가지고 한국인이 알아야하는 창조적 사고의 방법을 얘기합니다.

이번 방송은 동서양인의 차이에 대한 개략적 설명을 진행합니다.

 

동양인은 전체, 관계, 변화를 바탕으로 세상을 보고 서양인은 부분, 개별, 불변을 바탕으로 세상을 봅니다. 이런 차이점들이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나타나는데 이 차이가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4차산업혁명에서 많은 차이를 내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과거에서부터 내려온 사고의 차이는 무엇이 더 좋다고 판단 할 수는 없으나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산업을 일으키는 데에는 서양식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양미술을 통하여 창의적 사고법을 알아보고 한국인의 장점을 더욱 살려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김명곤 /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 72.7× 60.6cm / Acrylic on Canvas / 2020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라는 주제로 전시를 열고 있는 김명곤 작가는 1995년 첫 전시부터 현재까지 희망이라는 무형의 대상과 자동차를 결합한 시리즈물을 연작하고 있다. 희망을 표현함에 있어 이 되기도 하고 선물상자’, ‘풍선이 되기도 한다. 이 시리즈물들에서 나타나는 자동차의 형태, 희망의 대상, 배경의 어우러짐은 각각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중앙에 압도적으로 거대하게 배치되는 희망을 실은 자동차이다. 이 구도의 설정은 보는 이를 당혹하게 할 정도로 크게 나타나는데 이는 꿈, 희망이라는 주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이 벅차 오른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벅찬 감정들이 작가에게 발현된 이유가 궁금해진다

 

김명곤 /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 112 × 112cm​ / Acrylic on Canvas / 2020


김명곤 /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 117 × 80cm​ / Acrylic on Canvas / 2020

 

작가 노트를 보면 그는 겨울에 앙상한 가지가 봄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 맺는 과정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의 관심과 심리적 표현 속에 나타나는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추면 생명 존중’ ‘삶의 환희라는 내용이 보인다.
 

 

김명곤 /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 117× 91.0cm / Acrylic on Canvas / 2020

 


김명곤 / 비밀의 정원 / 131 × 131cm  / Acrylic on canvas / 2020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대.

그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는 때이다. 

전시는 '갤러리 작'에서 9월24일까지 열린다. http://galleryjhak.com

 

 

 

 

김명곤 / Kim, Myeong - Gon

 

학력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 전공(석사)

전시경력

<주요개인전> (1995 ~ 2017)

2020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갤러리 작. 서울)

2017 즐겁지 아니한가! (갤러리 H. 서울)

2016 상상은 현실이 된다 (윤 갤러리. 서울)

2015 꿈을 싣고 오는 자동차 (갤러리 작. 서울)

꿈꾸는 자의 행복이야기 (롯데갤러리. 서울) 20여 회

<주요단체전> (1993 ~2017)

Art 30ists(sia gallery. 뉴욕. 미국) / Red Gate(호감 갤러리. 서울) / SMART EYE : 대중의 새로운 시선 7(슈페리어 갤러리. 서울) 200여회

아트페어 (2007~2017)

ART CENTRAL HK (홍콩), 대만아트페어(대만), CONTEXT Art Miami 2015(마이애미. 미국), Asia contemporary art show (홍콩), 부산 아트쇼 (벡스코. 부산), KIAF (코엑스. 서울), 마이애미 아트페어(마이애미. 미국), LA 아트페어 (로스엔젤리스. 미국), 휴스턴 아트페어(휴스턴. 미국), 찰즈부르크 아트페어 (찰즈부르크, 오스트리아)

 

작품소장처 :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서울시립미술관, 대명리조트, )방태, )메드비젼, 산업은행, 하나은행, 연세 대학교 기념관, 경향신문, 순여성병원, 그람피하우스, 로이코 외 개인 소장 

전통을 현대적 재료와 기법으로 재해석한다.

‘21세기 정신을 전통의 산수화에 담기프로젝트 NO.1

 

Kai Jun  등용문01  150호M 227.3cm X 145.5cm  Acrylic on Canvas  2020년

 

프로젝트를 왜 시작하였는가?

현대미술은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인 장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은 어려운 것이다.’ 또는 나는 문외한이다.’라는 식으로 기피하려한다. 전시장에서 보이는 감상의 상태도 매우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이 적음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관념 변화를 꾀하려는 시도를 안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는 대체적인 나라가 자본주의의 사회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정의로 볼 때 사유재산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윤획득을 위해 상품의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는 경제체제이다. 따라서 생산과 소비의 원활한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감과 소통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공감과 소통은 남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데 일반적인 생활환경에서는 자기의 경험과 관습적인 사고의 고착화로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데 거북함이 많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좋은 장르가 현대미술이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좋은 환경 제공 말이다.

 

미국은 자본주의와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국가이다. 현대미술이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현대미술의 꽃을 피운 작가의 대부분은 미국 출신이거나 미국 거주인들 이다.

 

Kai Jun  등용문12  100호F 162.2cm X 130.3cm  Acrylic on Canvas  2020년

 

현대미술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충격적인 것이다.

1863년 에두아르 마네는 풀밭위의 점심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봉건주의적, 관습적 표현에서 탈피하여 모더니즘을 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인상주의, 큐비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등 다양한 이즘들이 나타나며 작가들은 당시의 사회에 필요한 정신적 요소를 작품에 녹여 넣는 실험적 경향을 띠게 된다. 수많은 작가들은 스스로 전위예술가(아방가르드avant garde)를 자처하며 시대정신과 문명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제시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모더니즘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흐름은 조형적 순수 예술사회적 담론으로써의 예술로 정리할 수 있는데 두 흐름 모두 신, , 귀족 등의 봉건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자기 본연의 가치관을 갖게 하려는 목적이다. 그 누구도 누군가에게 귀속 될 수 없고 스스로 완전하며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스스로의 모색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일깨우려는 태도의 산물이다.

19세기까지 사회전반에 깊이 물들어 있는 봉건주의적 사고의 혁명 또는 혁신을 위하여 기존 이념을 개선하기 위한 시도가 매우 많았다. 당시 유럽에서 활동이 많고 잘 알려진 화가들의 대부분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개선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이념적 배경을 두고 작품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참여도가 낮은 피카소의 경우도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당시 유럽의 대체적인 철학, 문학, 미술, 과학 등등의 창작자들은 이념적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활동의 변화가 세계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승전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수많은 창작자들과 자본주의 결합이 사회적 이념이 아닌 개인의 사고에 초점이 맞춰지며 자유로운 사고의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추상표현주의 잭슨폴록, 팝아트의 앤디워홀, 색면추상의 마크로스코, 미니멀리즘의 프랭크 스텔라 등등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나타난다. 이 작가들의 출현은 감상자 대상이 다수의 대중을 타겟으로 하는 경향을 띤다. 이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한동안 지속되다가 1989-1991년 인터넷 보급, 천안문 사태, 소련붕괴 등의 대규모 사건과 냉전이라는 이슈의 소멸로 인하여 작가들은 더욱 소규모의 개인으로 타겟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 작가는 개인의 가치관과 삶을 지탱하고 있는 기본 요소들을 일깨우기 위한 충격의 마지막 지점까지 밀어붙이는 실험을 단행하게 된다. 이러한 압박적 충격의 시대가 현재의 미술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미술은 위에서 거론한 방향으로 작가와 대중이 함께 호흡하며 발전하고 흘러왔으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미술은 그렇지 못하다.

서양미술, 동양미술, 한국미술이라는 지역적인 성향을 말하거나 가치의 차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효용성을 말하려한다.

 

현재 우리의 삶은 어디까지가 한국적이고 어디까지가 서양적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정신적인 관념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 많이 나타나지만 삶을 지탱하는 경제 활동은 자본주의 체제안에 있으니 미술의 문화적 활용에서도 취사선택이 되어야하는데 현대미술은 어려운 것이라는 편견으로 접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큰 문제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학습 수준이 뛰어난 우리는 왜?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하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높은 아이큐와 학습 상태를 보이고 있는데 웬만한 나라 사람들은 다 즐기는 현대미술을 어렵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정보의 단절이라고 본다. 봉건주의를 자체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고 이는 왜곡된 정보와 일부 사람을 중심으로한 정보 공유의 비대칭이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광복 후 나라는 공산, 민주 양대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사상적 자유는 억압되거나 박탈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발전하고 있는 모더니즘(현대미술)은 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하였기에 우리나라에 유입되는 미술의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며 사상의 바탕을 배제한 작품의 표현적 결과물만 알게 되었다. 더불어 6.25 전쟁 후 극빈국이라는 가난한 시절에 당장 배워서 생계를 이어갈 기술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정보의 차단은 별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사상적 가치를 판단 할 겨를이 없던 당시에는 부각되지 않던 문제들이 유신체제에서는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었으나 반공법이라는 벽에 막혀 미술의 사회적 기능은 배울 수가 없었다. 


196969일 경향신문 기사

 

당시 초중고 미술교과서에도 현대미술은 탄생배경이나 이념적 내용은 모두 제거되고 대표작가와 표현법을 소개하는 정도로 교육하였다.

이런 왜곡된 교육의 시간이 꾀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는 문제가 있다. 이 정보의 왜곡과 단절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 서서히 회복되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문제는 대중의 전통에 기댄 나름의 해석이다. 우리나라는 한문 문화권으로 시서화(詩書畵)는 동일하다는 관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래서 양반은 누구나 시서화를 하였고 특히 그림은 자기를 정화하고 단련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여 그림 속에 의미를 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독화(讀畫)의 방법인데 그림 속에 스토리를 정해 놓고 그 스토리를 상징하는 사물을 배치하여 그림이 하나의 이야기 책이 되도록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일로연과(一路連科), 한 걸음에 향시와 전시 두 번의 과거에 연속 등과하다.

 

독화의 역사는 오래되어서 서양미술의 가치와 의미가 전달되지 않은 빈 공간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인 해석법으로 그림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 서양화를 감상 할 때 서양화의 본질적 가치를 모르니 동양화의 독화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현재까지도 나타난다.

 

수없이 많은 전시를 하며 감상자에게 무엇을 느꼈냐고 물으면 대체적으로 독화의 기법으로 대답을 한다. 형상이 어떻고, 색상이 어떻고, 배치가 어떻고, 뜻하는 바가 뭐고... , 그림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형상이나 색상이 분명하지 않은 그림은 해석이 안 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효용성 있는 미술의 감상법은?

서두에 언급하바와 같이 현대미술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렵고 쉬울 수가 없다. 동일한 대중문화인 영화를 보면 사건의 크기에 따라 감동의 충격이 차이가 난다. 종결에서 해피엔딩이던 아니던 간에 사건의 크기와 전개의 기발함이 감상자에게 충격을 주기도하고 아니기도 한다. 현대미술도 똑같은 구조 안에 있다.

영화에서 사건과 주인공 그리고 감상자는 동일시되는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전달하려는 주제의식이 감상자의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현대미술은 작가가 감상자의 삶을 근간이 되는 의식을 흔들어 놓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질문을 던지는 형식이 많다. 데미안 허스트로 잘 알려진 영국의 YBA그룹의 작가들은 대체적으로 끔찍한 소재를 이용하여 작품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끔찍한 소재로 만들어지고 그려진 작품들이 현대미술 작품가격에서 탑을 경신하는 경우가 많은데 독화의 방식으로 이 현상을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미술의 가치는 내가 가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젖어 든 어떤 관습이나 편견을 깨고 새로운 나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정신을 혁신하는 기회를 많이 제공한 작가의 작품이 우수한 작품이다. 따라서 작품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따라 내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된다. 마치 멜로영화를 보고 과거에 하지 못했던 사랑을 하겠다고 맘먹거나 액션 영화를 보고 힘을 키워야겠다 거나 나쁜 짓을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현대미술을 보고 삶을 돌아보거나 미래를 상상해보는 계기를 만들면 된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 싶으면 내가 가진 철학적 개념과 작가의 철학을 비교 하며 좀 더 따져보면 충분하다.

 

이런 사고의 전환이 있다면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현상은 사라지고 나를 완성해가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전시장에 가서 발가락으로 그려도 이것보다는 잘 그렸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좋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발가락으로 그린 것 같은 그림은 무엇을 나에게 질문하기 위함인지를 따져보고 스스로 자기의 과거를 또는 미래를 생각해보면 된다.

또 전시장에 가서 아주 혐오스러운 소재로 그려지거나 만들어진 작품을 보고 무엇을 나에게 질문하기 위함인지를 따져보고 스스로 자기의 과거를 또는 미래를 생각해보면 된다.

 

작가는 아주 예민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현상의 재해석을 통해 이 사회를 살아가는 현명함의 힌트를 많이 받아야한다.

 

‘21세기 정신을 전통의 산수화에 담기프로젝트 NO.1은 왜 하는가?

위에서 거론한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우수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미술에 있어 매우 위축된 현상을 보인다. 나는 이런 현상이 일단 유감이고 두 번째는 전 세계의 트랜드를 예측하는 힘을 얻는데 중요한 현대미술을 기피한다는 것은 국력이 새 나간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견해 때문이다. , 한발 앞선 기업의 탄생이 더뎌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전 세계의 우수 기업들은 혁신을 하기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혁신은 사고의 전환에서 나타나는데 고정관념에 얽매여있는 사람이 혁신을 주도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현대미술은 고정관념을 혁파하는 훈련의 최상위 도구라고 본다.

 

나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오랜 기간 작업을 해왔다. 개인적인 성과는 많았지만 본래 가지고 있던 대중에게 혁신의 기회를 주는 큰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수년간 고민을 하다가 나름의 체계를 잡은 것이 단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사고의 혁신 수준을 접근이 용이한 것부터 진행해야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프로젝트 NO.1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화의 해석법에서부터 벗어나는 단계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고 프로젝트 NO.2는 현대미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기법을 알게 하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프로젝트 NO.1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정을 전통의 산수화를 도구 삼아 표현한 작품들이다. 코로나사태로 처진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좋겠다. 또한 작가의 의도가 자신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느껴보면 좋겠다.

 

작품은 624일부터 30일까지 안국역에 있는 고도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Kai Jun, 희망의 창NO.1​​, Oil on Canvas, 116.7cm X 72.7cm, 2011년 작

 

 

정진은 진진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나라가 포지티브 법체계로 발전한 것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광복이후에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세계에서 3번째의 극빈국이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죠. 자원도 없고 힘도 없는 나라는 선택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정치, 행정에 있어 자율성보다는 국가의 발전방향성에 국민이 맞추는 형국이었습니다. 국가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철저하게 규정 지었으며 그 방법 안에서 국민들은 성실히 자기 업무에 최선을 다하여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변하여 지금은 이 방법이 적합도가 떨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정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시민운동가들이 국회의원의 활동을 통제하면서 규제문제는 더 확대 되었습니다. 저도 규제문제를 확대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픕니다. 규제국가, 규제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이유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국회의원의 활동이 너무 적극적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정진의 말에 대부분의 참석자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국회의원이 일을 적극적으로 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도대체 이해가 안 갔다. 숱한 날들을 국회에서 싸움만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무슨 일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했다는 말인지 말이다.

미영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정진에게 질문을 했다.

좀 더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 부탁드립니다. 국회의원이 적극적으로 일을 해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뭔가요?”

 

그때 전 국회의원을 지낸 도호진씨가 일어섰다.

저는 국회의원을 한번 한 사람으로서 지금은 국회를 떠났지만 애국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이 모였다는 말을 듣고 작년부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저의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내는 다시 진지한 분위기가 흘렀다.

 

도호진 전 국회의원은 용어부터 정리해주었다. 포지티브 제도(Positive System)이것만 해라식의 규제우선 제도이며 네거티브 제도(Negative System)이것만 하지 마라식의 자유우선제도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이것만 해라의 제도이므로 자율성이 떨어지는데 이것만 해라제도가 문제가 된 이유는 규제가 너무 많아서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규제가 현재 13천개를 넘어섰다.

 

규제가 많아진 이유는 크게 3가지이며 첫째는 획일화된 국회의원 평가방법이라고 한다. 국회의원이 재선을 위해 선거에 다시 출마하려면 공천을 받아야하는데 일반적인 평가방법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업무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본회의 출석률, 상임위 출석률, 대표 발의건수, 가결건수 등등이 적용된다. 이 정량적 평가의 허점이 문제를 키웠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얼마나 필요한 법안이냐를 신중하게 따지는 정성적 평가가 아닌 수치상으로 얼마나 일을 했냐를 따진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임기 중 마지막 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법안이 발의된다. 그중에서 가결이 쉬운 것이 공업·규격·계량 분야가 대안반영 포함 80%되는데 이런 산업에 관련된 세부 규정들이 많아지면서 현재 산업의 융복합 자율성과 어긋난다는 문제다.

 

두 번째로는 산업이 융복합적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정부의 주무부서 모호성으로 이중적 기준이나 규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현재는 각 산업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나눠져 있지만 앞으로는 모든 산업에 5G 이동통신,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등이 결합되어야하는데 자율주행차, 무인점포, 인공지능 의료, 증강현실 패션 등등 현재 산업이 4차산업혁명의 기술과 결합하여 진화된 산업에서는 주무 부서를 구분할 수 없다는 문제이다. 즉 과도기인 현재는 4차산업혁명에 관련된 산업 대부분은 위법한 상태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아니라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관리해야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국민의 관심분야라고 지적한다. 입법부의 담당자가 국회의원이므로 국회의원을 뽑을 때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을 뽑아야하는데 국민의 관심이 이념이나 사상이 자신의 관심사와 같은 사람을 뽑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이 하는 일중에서 언론에 주로 비춰지는 내용은 이념이나 사상적 바탕을 둔 사건들이 주로 방송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민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경제적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산업을 일으킨 국회의원은 방송에 조명되지 못하고 이념적으로 잘 싸운 국회의원이 부각된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산업을 일으킬 법안을 잘 만들어야 국민의 삶이 좋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국민이 국회의원의 평가를 잘못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도호진 전 국회의원의 발언이 끝나자 장내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국회의원의 잘잘못을 성토하는 사람, 정부의 무능을 성토하는 사람,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 등 여러 가지의 이야기가 장내를 웅웅거리게 만들었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의장인 태성이 발언자를 다시 지목했다. 사업가인 최영석 대표가 발언을 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IMF사태 이후에 벤처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사업을 하고 있는데 빚만 엄청나게 많습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강남의 건물을 팔아 10억 정도 마련하여 사업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만약 그 건물을 팔지 않았다면 지금 몇 백억 원은 되었을 겁니다. 사업을 하면 할수록 빚이 많아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사업의 환경이 참 안 좋습니다. 2000년대 이후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규제개혁을 외쳤지만 한 번도 해결된 적은 없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기대감이 있었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일을 하면서도 정부에 기대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정부에게 바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태 정부 탓만 했습니다. 정부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가 바로 서려면 국회의원을 잘 뽑아야하는군요. 저는 기업을 다시 반석위로 올려야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의 직원들과 관련 기업들의 직원들에게 오늘 들은 내용을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는 기업과 경제를 살리는 후보를 지지하겠습니다. 그동안 뽑은 국회의원들 생각하니 후회가 많이 됩니다.”

 

최대표의 발언이 끝나자 도호진 전 국회의원이 다시 발언하였다.

최대표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비관만 할 것은 아닙니다. 최근 우리 단체 외에도 국회의원의 의정활동 평가를 혁신적으로 만들어 진행하는 청년단체가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의정혁신 평가 방식은 4차산업혁명시대 경쟁력 강화 등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혁신 법안, 국회의원의 대국민 성실도, 국민의 질적인 삶과 밀접한 민생 혁신 법안, 각 분야의 혁신 관련 법안 발의 현황, 국민과 국가를 위해 매우 필요한 법안임에도 제반 여건 미비로 통과되지 못한 폐기 법안, 기타 정량평가, 기타 정성평가 등 7대 부문과 하위 10개 항목, 80개 세부지표를 평가해, 최고평점 국회의원, 창의력우수평점 국회의원, 최우수평점 국회의원 등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에 대한 평가 순위를 매긴다고 하는데 과거의 의정평가보다 정성적 평가를 하므로 많이 개선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청년 단체의 움직임은 더욱 활성화 되어야 하며 구체적으로 경제를 혁신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허가 요건의 구체화 및 명확화, 중복규제의 금지, 국민불편해소적 규제로의 전환, 협력적·자율적 규제방식의 적극 활용, 규제비용의 명확한 반영, 현실적 규제로의 전환, 의원입법의 사전규제영향분석 및 규제일몰제 도입, 규제총량제를 넘어 규제감량제 도입, 청부입법의 원칙적 금지 등을 제안 해야합니다.”

 

도호진 전 국회의원의 발언 이후로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국민들이 어떻게 노력해야하는지 국민의 실천사항은 무엇인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4부 끝-

그들이 만들어 갈 희망의 나라.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희망의 창NO.3​​, Oil on Canvas, 116.7cm X 72.7cm, 2011년 작

창수가 네거티브 법체계 전환의 의견을 내었고 참석자들은 대체적으로 동의를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의 법체계는 포지티브 법체계로 되어있다. 법으로 허락된 것만 할 수 있는 방식이어서 법 환경이 산업보다 선제적인 구성이 되어야하는데 산업의 발달 속도가 더뎠던 과거에는 이 방식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뤄지고 있는 융복합적인 산업과 4차산업 혁명에 포함되는 산업들은 법이 선제적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입법에 관련된 사람들은 국가적 대 혼란을 운운하며 반대를 한다.

 

행정학을 전공한 제훈이 반대 의견을 내었다.

대한민국은 이미 70여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기존 법체계로 모든 국민이 익숙해져 있는데 갑자기 법의 기본 개념까지 바뀌는 변화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인데 이런 큰 변화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또한 우리가 논의하고 결정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제훈의 말에 회의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네거티브 법체계 전환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동의하던 분위기에서 회의장은 순간적으로 무기력해졌다.

이유는 이미 수년 전부터 많은 경제인들이 네거티브 법체계 전환에 대한 의견 개진이 있었고 이에 대하여 규제 샌드박스 등의 개선안을 냈지만 결과적으로 일부의 변화만 있었지 큰 틀은 변함이 없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전반적으로 팽배되어있는 의욕상실의 국가적 분위기였다. 회의장에 나온 사람들조차 의욕이 많이 상실 된 상태였다.

 

술렁이는 회의장 분위기를 의장인 태성이 다시 잡으려 애썼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방금 말씀 주신 내용은 많은 분들이 우려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개선을 위한 깊은 고민이 이 자리에서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야 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힘은 없지만 지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를 통해 힘을 만들면 됩니다. 지혜를 모아 주십시요!”

태성의 말에 이번에는 미영이 발언을 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미 4차산업혁명에서 상당히 밀려있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합시다. 유전공학이나 크리스퍼 기술에서 세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 생명윤리법으로 사업화 하지 못하는 회사가 한둘이 아니며, 선점한 드론 기술이 각종 규제로 사그라든지 오래되었으며 공유경제는 발도 못 붙이는 상태입니다. 청년실업의 문제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대학에서 최첨단의 학문을 연구한 학생들이 취업할 기업이 없습니다. 모두 규제로 인해 연구소의 범위를 넘어가지 못하니 어떻게 취업을 하겠습니까? 중소기업들은 기술을 사업화하지 못하여 결국 해외로 나가고 있습니다. 말기 암 환자와 같은 우리 경제 상황 속에서 못할게 뭐가 있나 싶습니다.”

미영은 강하게 발언을 했다. 미영은 어려서부터 사회 시스템이 국민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강했던 사람이다. 그녀는 로펌에 근무하며 접했던 문제들을 더 열거하였다.

산업의 지형이 변하였습니다. 한 가지만 잘해서 되는 시절은 지나 간지 오래되었으며 융복합이 기본입니다. 또한 누구를 막론하고 사회적 이익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 시스템으로 변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자연스럽고 편안한 환경인 해외 선진국에 비하여 우리나라는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사업화 할 수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업지형도에서 허가를 받기위해 몇 개월에서 몇 년을 기다려야하는 우리나라는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영은 작심한 듯 성토를 하였다.

 

창수도 다시 발언하기 시작했다.

제가 몇 년간 국회의 입법 현황을 분석해보니 접수된 것이 15대국회 1951, 162507, 175024, 18대 국회 13,913, 19대 국회 17,822, 20대국회 23,048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입법 내용 중에서 공업·규격·계량 분야가 대안반영 포함 80%의 가결률을 보였습니다. 그중에서 20대 국회의 경우 규제 법안 발의 건수는 3773건으로 하루에 3개꼴로 규제 법안이 발의됐고, 이 가운데 1개는 통과되었습니다. 모든 법이 규제를 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규제안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산업은 발목을 잡히는 꼴이 되겠지요. 어찌 15대 국회의 총 입법 발의 건수보다 20대 국회의 규제법안 발의가 2배로 많은지 이해가 안 됩니다.”

 

창수의 발언에 미국에서 기업을 하는 종석이 거들었다.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기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유학을 어려서 갔기에 미국식으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미국에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한국에서 펼쳐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가진 신기술을 한국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귀국하여 조그만 기업을 일으켰는데 앞서 말씀하신 분들의 얘기처럼 규제 장벽에 막혀서 3년간 고전하다가 결국 실리콘밸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부모님이 계시는 한국에서 기업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돌아오고 싶은 마음입니다.”

 

종석의 말은 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종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희도 일어나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어려서 생명공학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수십대일의 경쟁률을 뚫고 대학을 입학하여 성실히 공부했으나 지금은 학원에서 생물과 수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속으로는 대학가면 뭐하나 취직할 곳도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마음이 강하게 듭니다. 어서 현실적인 국가 운영의 방안이 나오지 않으면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의장 열기는 다시 뜨거워졌다. 다소 흥분한 사람들도 보였고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중년의 사나이가 일어나더니 발언하기 시작했다.

저는 상당기간 국회에서 보좌관 일을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법안 발의 건수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와 관련 있는 주요국 중에서 법안 발의 건수는 한국이 23048건으로 가장 많고, 미국 115대 의회는 13556, 영국은 2010~2015년까지 890, 일본 3차 아베내각은 626건입니다. 가결 건수 역시 우리나라가 6527건으로 가장 많고, 미국 443, 일본 250, 영국 182건 순입니다. 이 많은 법은 생활환경에 큰 지장을 줍니다. 법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개인이나 기업가들은 환경이 바뀌는 것과 같습니다. 변경되는 대학 입시법으로 학생들이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계시는 모든 분들이 이미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그런 환경 변화가 기업에게 주어지면 기업은 새로 기업환경을 조성해야하니 어려움이 있겠죠. 선진국일수록 법을 바꿈에 있어 신중하게 법을 다룹니다. 그 신중해야 할 법에 규제까지 더해지니 어려움은 심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발언하신 분들의 얘기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보좌관 출신의 정진이 말을 끝내자 태성이 정진에게 질문을 했다.

정진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태성의 질문에 정진은 숨을 고르며 발언하기 시작했다.

 

-3부 끝-

그들이 만들어 갈 희망의 나라. 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소나타 음악이 흐르는 시냇가의 판타지, Oil on Canvas, 90.9cm X 72.7cm, 2019년 작

7

나는 까불이였다. 뭐 재미있는 것이 없나?만 생각하고 장난칠 기회만 살피는 까불이였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늘 뭔가 불만스러웠지만 할머니는 나를 무척 좋아해 주었다. 할머니는 나를 할머니 방의 벽 앞에 세워 놓고 노래를 부르게 하며 내가 까부는 모습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봐 주었다.

 

9

나는 계속 까불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더 심해졌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여자아이들에게 장난을 치고 수업시간에도 괜히 방귀를 뀌는 소리를 내어 선생님의 비위를 건드렸지만 아이들을 웃기는 데에는 특효였다. 선생님께 혼나면서도 난 뭔가 해낸 것 같은 통쾌함이 있었다.

 

11

늘 까불다 보니 혼나는 날이 많아졌다. 남과 똑같이 잘 한 일에도 나는 낮은 평가를 받고 진짜 잘못을 하면 네가 그러면 그렇지 에이 못난 놈이라는 핀잔과 비난을 받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될까?’를 생각하며 내 생각과 다른 타인들의 반응에 속상해 하는 날이 많아졌다.

 

13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는 친구들이 생겼지만 나는 아직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를 생각하는 까불이였다. 재작년부터 다니게 되었던 학원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것을 제외하면 생활이나 생각의 변화는 없었다. 학교에서나 학원에서 난 언제나 장난 칠 기회만 노리는 장난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나는 재미있는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 녀석은 좀 문제가 있어.’ 라는 말을 하는 것을 가끔씩 듣게 되었다.

 

14

중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와 별 차이가 없는 날들이 지나다가 어느 날부터 여자애들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예뻐 보이는 여자애는 꿈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장난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이 없던 나는 조금씩 매사에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치던 장난을 칠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쳤다. 버릇을 고치지 못하여 장난치기는 했지만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큰 변화였다. 그리고 예뻐 보이는 여자애들에게도 장난을 쳐서 정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욕을 먹었다.

 

15

예뻐 보이는 여자애들이 이제 한둘이 아니다. 우리 반 여자애들은 물론이고 대체적인 여자는 다 예뻐 보인다. 심지어 나보다 한두 살 많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런 여자애들에게 환심을 사고 싶었는데 나는 늘 그녀들에게는 함량 미달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들이 뭘 좋아하는지를 살펴보니 남자 아이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열정을 쏟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나를 비교하니 나는 먹는 것을 밝혀 뚱뚱했고 옷맵시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이 들면서 난 어릴 때 할머니 앞에서 노래하던 나를 기억해 냈다. 난 아주 조금 자신감이 생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6

목표가 생기고 나서 여러 가지가 변했다. 먹는 것을 줄여 호리호리한 몸매가 되었고 노래연습을 많이 하여 우리 중학교에서는 제법 노래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장난을 치는 일도 거의 없다보니 여자친구도 생겼다. 대체적으로 행복한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엄마는 내가 공부는 안하고 딴 짓거리만 한다고 성을 내는 날이 많아졌다.

 

18

얼떨결에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것 외에 잘하는 것이 없고 대학을 갈지 안 갈지도 미지수였던 나를 여자 친구는 떠났다. 몇 번을 다시 만나달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자기 인생과 내 인생은 너무나 다른 방향을 가졌다는 모호한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난 내 인생의 방향이 뭔지 그때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난 삶의 목적이나 방향이 있었나?’

난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왜 살았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이나 방식이 없었다. 늘 재미만을 쫓아왔었기에 현재의 이 순간이 중요했을 뿐 과거나 미래를 깊이 있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학업 성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학은커녕 내가 할 수 있는 기술직의 전문 영역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봐도 도대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국문과 4학년 졸업반인 큰 누나는 나를 아직도 귀여워 해줬지만 나머지 식구들은 나를 한심한 놈이라는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특히 한 살 차이인 작은 누나는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내가 주변에 얼씬거리는 것조차 싫어했다.

봄과 여름이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초겨울에 작은누나는 당당하게 치대에 수시입학으로 들어갔다. 치대에 입학한 거지 치과 의사도 아닌데도 누나는 이미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거고 방학 중에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진료 봉사를 할 거라는 식의 얘기를 하며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임을 자주 강조했다.

 

나는 초겨울부터 더 외로워졌다. 삶의 진지함이 없었던 나는 자주 누나들과 비교되는 상황이 많아지면서 더 소외감을 느꼈다. 그럴수록 헤어진 여자 친구가 더 보고 싶어져 가끔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19

3이 되었지만 난 공부에는 도통 진지해 질수가 없었다. 책 펴고 몇 줄 읽다보면 어느새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내 모습이 떠올랐다. 코인노래방에 가서 노래하고 춤추다보면 소외감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얻었다. 그런데 1000원에 3곡 밖에 부를 수 없어서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추위를 이기기 위해 꺼져가는 성냥불 앞에서 안타까워했던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난 마지막 성냥이 타 들어가는 것처럼 3곡 모두를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래했고 춤췄다.

내 외로움과 소외감 그리고 1000원의 한계성이 더해질수록 노래는 느는 것 같았다.

노래가 늘어서 좋기는 했지만 친구도 대화 상대도 없는 나는 늘 외로웠다. 큰 누나는 취업하여 말단 사원이 되었는데 대학생 때와는 다르게 늦게 오는 날이 많아졌고 작은 누나는 아예 기숙사에 들어가 얼굴 볼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부모님과는 얼굴 맞대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잔소리를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름방학이 되고 작은 누나가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마치 파티를 하는 것처럼 온갖 음식을 차려 작은 누나를 위해줬고 큰 누나도 작은 누나가 있는 동안에는 집에 일찍 들어왔다. 며칠간 작은 누나가 집에 있다가 대학교로 돌아가고 나서 큰 누나가 나를 불렀다. 큰 누나는 작은 누나가 내 걱정을 하며 가족회의 비슷한 거를 제안하여 부모님과 함께 논의를 했는데 지금부터 가수를 시켜보면 어떻겠냐를 제안 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나와 가장 잘 통하는 큰 누나가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딱히 뭘 하고 싶은 것이 없었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좋았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진학의 부담이 사라져서 좋았다. 그리고 누나들이 내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도 많이 안정이 되고 힘이 되었다.

매일 노래연습을 하고 인터넷을 뒤져 오디션이 있는 기획사를 찾았다. 몇 개의 공고가 있었지만 기획사가 중소규모여서 가고 싶은 맘이 없었다. 그냥 동네 노래연습실만 다녔다.

 

20

고등학교를 졸업 한 직후 K-POP Soul이라는 대단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나타났다. 나는 여기에 신청했다. 오디션이 진행되기 전까지 나는 자신이 있었다. 왠지 1등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려하게 조명을 받는 내 모습을 상상하였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오디션은 하루 앞으로 다가왔고 그동안 수백 번 불러봤던 노래와 안무를 다시 정리했으며 의상과 헤어스타일까지 큰누나의 코치를 받아 멋지게 준비했다. 행사장에는 예상보다 많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예선은 1소절이나 2소절 정도밖에 부를 기회가 없었다.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기실 주변에는 자기의 기량을 발휘 못하고 나왔다고 안타까워하며 눈물 짓는 참가자들이 많아졌다.

어제까지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초조한 마음이 들고 있는데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깔끔하긴 했어도 무대 의상과는 전혀 거리가 먼 평상복을 입어서 눈에 띄었다.

오디션 많이 봤어요? 저는 처음인데 참가자들이 예상보다 정말 많네요.”

그도 나처럼 긴장이 되었는지 들고 있는 생수를 연신 들이키고 있었다.

. 정말 많이 왔어요. 저도 처음 참가하는데 긴장되어서 죽겠어요.”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왠지 동질감이 생겼다.

저는 자작곡 준비했는데 끝까지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예요. 어떤 곡 준비했어요?”

그는 오디션에 자작곡을 가지고 나왔다는 생각해 본적도 없는 말을 했다. 나는 동방신비의 노래와 춤을 준비했다. 그와 나는 대기시간 내내 여러 가지 얘기를 했는데 그는 음악에 대한 소신이 강했고 싱어송라이터협회의 회원이었다. 또한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여 연세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이름은 진현이고 우리는 서로를 격려해주며 순번이 비슷하니 발표 보고 같이 가자고 약속하였다.

 

어느덧 우리 차례가 되어 오디션 장에 들어갔다. 나는 노래를 조금 부르다가 춤을 춰보라고 해서 춤도 추었다. 두 가지를 별도로 시켜서 내심 기대했지만 떨어졌다. 진현이도 가지고 온 기타로 전주를 다 했으며 노래도 남들보다는 많이 불렀다고 했는데 떨어졌다. 진현이는 자기에게 실망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미안했다. 파이팅을 외쳐주던 큰 누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주 만났다. 진현이는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대중가요에 무슨 철학을 그렇게 많이 담고 싶은지 묘한 말을 많이 했다. 진현이는 오디션을 보지 않고 작곡에 전념했고 나는 수없이 많은 오디션을 봤지만 다 떨어졌다. 나는 그해 겨울 아버지의 권유로 군대에 갔다.

 

23

군에 있는 동안 음악에 대한 나의 생각도 많이 성숙해졌다. 나는 음악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었으며 내 인생에 절대적인 어떤 사명이 있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군대도 갔다 왔으니 밥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고 얘기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타이르듯이 말씀하시다가 내가 음악에 대한 고집을 부리니 말 안 통하는 답답한 놈이라고 나무라기 시작했다. 군대를 가기 전까지 적극 지원해주던 집안분위기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뭔가를 해서 나의 능력을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일단 가수로 인정을 받아야 했기에 다시 오디션 장을 찾아다녔다. 성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떨어지는 이유를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이제 아이돌 연습생하기에는 나이도 조금 많은 편이고 잘 생긴 것도 아니고 해서 그런 것 같았다. 노래는 오디션 보러 온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뒤지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내가 노래를 한 소절 부르다 보면 심사위원들의 숙여졌던 고개가 들리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 괜찮은데...’라는 눈빛을 주곤 했다. 나를 평가하는 눈빛에서 얻은 이런 느낌들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단점을 없애기 위해 감각적인 패션과 몸매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6팩의 복근을 만들고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다시 오디션 장을 찾으니 평가가 조금 달라졌다. 그렇게 몇 번의 오디션을 더 보고나서 중간급 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연습생이 되면 가수가 되는데 있어 한발 전진 한 것은 분명했지만 언제 데뷔를 한다는 기약은 없었다. 또한 데뷔한다고 해서 가수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연습했다. 회사가 요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연습에 매진하였다. 춤 실력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노래는 동료 연습생들에게 가르쳐줄 정도로 잘 하게 되었다.

 

24

춤에 문제가 있었다. 노래는 잘되었는데 노래를 하면서 춤을 추면 다른 연습생과 안무가 맞질 않았다. 안무를 신경 쓰면 노래가 실력만큼 되질 않았고 노래에 집중하면 안무가 또 틀렸다. 아무리 연습해도 잘 고쳐지지 않아 데뷔하는 팀을 짤 때 계속 떨어졌다. 무한반복의 연습이 계속되었다. 겨울이 될 때쯤 춤의 문제가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데 예상치도 못했던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 춤에 몰두하느라고 집에는 신경을 거의 쓰지 못했다. 아버지가 퇴직을 하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는데 완전히 망했다. 큰 누나는 이제 대리고 작은누나는 아직도 치대를 다니고 있어 5식구 중에서 돈 버는 사람은 큰누나 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춤과 노래의 완성도가 생긴 시점인데 깊은 고민이 생겼다. 가수의 길을 걸어야하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얘기했고 어머니도 마트에 가서 일을 하겠다고 했다. 큰 누나는 결혼 자금 모은 것을 내 놓았고 작은누나는 휴학을 하고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가수를 그만두고 직장을 얻겠다고 했는데 집안 식구 모두가 말렸다. 이유는 내가 군대를 제대한 후에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특히 누나들이 나의 변화 된 모습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무언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최근 모습은 다른 사람 같다는 말을 해가며 계속 가수의 길을 걸으라고 격려해 주었다.

누나들의 말이 너무나 고마웠지만 아무 능력 없는 나의 모습이 초라했다. 나는 1년만 지켜봐 달라는 부탁의 약속을 했다. 가족회의 후 나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며칠 보냈다.

 

회사에 집안 얘기를 하고 데뷔를 빨리 할 수 없겠냐는 말을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회사에서 계획한 일과 나의 상황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회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하기로 했다.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대학로에 나가서 버스킹하며 나를 알리기로 했다. 유튜브를 만들었는데 구독자가 없었다. 열심히 동영상을 올렸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버스킹은 그래도 반응이 있어 힘을 낼 수가 있었다.

진눈깨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마로니에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는데 날씨 탓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집에 가야겠다고 짐을 싸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K-POP Soul에 참가했던 현섭이?”

그는 진현이었다. 4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진현이와 나는 식사를 같이 하며 그동안 있었던 서로의 일들을 얘기했다. 진현이도 요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였는데 구독자가 없어서 고민이라고 했다. 그는 예전보다 더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음악성이 무엇인지, 아티스트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등의 얘기를 했다. 우리는 밤이 깊어 가는지 모르게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진현이 작업실에서 잠을 잤다.

 

진현이는 다음날 함께 음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집안 상황을 얘기하면서 1년 안에 뭔가를 만들지 못하면 안 되는 절박함을 얘기했는데 그는 그럴수록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이유는 자기가 그동안 만든 음악이 좋은 게 많은데 자기의 목소리로는 소화가 안 되고 퍼포먼스가 좋은 내가 하게 되면 대박이 날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대답을 하기에는 고민꺼리가 많아서 시간을 달라고 했고 진현이는 자기가 만든 곡을 하나 주며 다음에 만날 때 한번 불러봐 달라고 했다.

진현이의 곡은 사랑노래였는데 부를수록 빠져드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기대감이 생기는 곡이였다. 며칠 진현이의 곡을 내 노래로 만들기 위한 연습을 하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진현이 함께하자는 제안을 다양한 비전을 제시하며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진현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거대한 조직과 자본을 가진 기획사에서도 대박 가수를 만들기 힘든데 우리처럼 아마추어 둘이서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 미지수였고 특히 나에게는 1년이라는 시간의 한계가 나를 더욱 압박했기 때문이다.

별로 말없이 진현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진현이가 갑자기 비장한 각오를 했는지 마지막으로 자기 얘기를 들어보라고 뭔가 신중한 자세를 취하며 말을 꺼냈다.

나도 너처럼 음악으로 성공하고 싶어. 어쩌면 너보다 더 강하게 원하고 있을 거야. 난 음악을 하길 원했지만 집안의 반대를 뚫기가 어려워서 절충안으로 부모님이 만족 할 만한 대학을 간 다음에 내 음악을 하기로 했지. 밤낮으로 공부해서 대학에 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과에 다니고 있어. 그리고 진정 나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돈도 모았어. 학교 다니고 과외나 알바하며 돈을 모아 얼마 전에야 이 작업실도 차리게 된 거야. 이제 모든 것을 걸고 음악을 하고 싶어. 그런데 나는 너처럼 노래나 춤을 잘 출 수가 없다는 한계에 항상 부딪쳤지. 나는 적어도 2-3년간 내가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했는데 너와 함께 한다면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소진 되겠지. 그래도 너와 함께 하고 싶어. 나는 인터넷을 활용한 글로벌 세상에 우리가 함께 한다면 분명 결과가 있다고 생각해.”

진현은 정말 진지했다. 나는 절박함에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하는 성격이었지만 진현이는 자기가 갈 길을 차분하게 준비해왔던 것이다. 나는 진현의 미래에 대한 설계 그리고 준비성과 진지함이 맘에 들었다.

그날 우리는 진지하게 미래를 함께 하기 위한 설계를 했다.

 

25

기획사 연습생을 접고 진현이와 음악을 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다.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고 팬을 만들기 위해 버스킹과 자원봉사 공연도 많이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우리의 팬은 작년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었다.

나는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에 성과가 없는 날들이 지속되면서 짜증이 늘어갔다. 진현이가 하는 말에 괜히 성을 내기도하였다. 그렇게 짜증을 내고나면 재워주고 먹여주고 노래도 주는 진현이에게 뭐 하러 그렇게 했나하는 미안한 마음과 후회가 생겼지만 자제가 안 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런 시답지도 않은 말다툼이 몇 번 있은 후 진현이는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음악작업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네. 지금 보는 책들은 뭐야?”

나는 책상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을 보며 진현에게 물었다.

. 최근에 우리의 음악을 돌아보는 생각을 했어. 우리는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 가수가 되길 갈망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만 했어. 그리고 그 음악이 이미 시대에 뒤처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 현섭이가 좋아하는 음악도 중학교 때 듣던 음악과 별 차이가 없고 나도 그래. 우리가 듣던 노래가 우리의 감성의 바탕이 되어 버렸으니 우리가 하는 노래는 모두 10년 전 음악이라는 생각이야.”

진현의 얘기는 큰 충격을 주었다. 대중가요를 유행가라고도 부르는데 그 단순한 말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너 요즘 공부하는 것이 뭐니?”

나는 진현의 얘기가 무척이나 중요한 말 같았다.

. 요즘은 가요나 팝송, 그리고 가수를 분석한 논문도 많아. 나는 석학들이 분석한 엔터테인먼트의 방법론을 보며 우리가 어떻게 가야하는지 길을 찾고 있어.”

진현이는 한권의 책을 내밀었다.

스타 속성이 스타와 팬 커뮤니티 동일시와 팬 자발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 방탄소년단을 중심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음악은 자기의 감성, 소위 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음악이 관계를 나타낸다는 식의 해석이 충격적이었다. 진현이가 해주는 다른 책들의 주요 내용을 설명 들으니 더욱 충격적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다보면 나와 같은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진현이는 그동안 공부하며 반성한 내용과 깨우친 내용을 말해주었다. 이후로도 진현이는 그 논문을 교인이 성경 들고 다니는 것처럼 매일 끼고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논문의 하드커버가 너덜너덜해졌다.

 

우리는 몇날 며칠을 토론했다. 팬이 좋아할 수 있는 그리고 팬이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찾아가며 분석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팬을 확보하기 위한 그동안의 모색이 순서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팬이 좋아할만한 일을 해야 비로소 팬이 확보되는데 팬이 되어달라고 외치기만 했으니 답이 없었던 것이다.

 

진현과 나는 우리가 토론한 내용을 적용하기 위한 실천 목록을 만들었다. 진현은 조금은 복잡하고 어려운 철학적 얘기를 했는데 나는 어릴 때 봤던 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배달 총재의 어록 실천이 없으면 증명이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으며 신용이 없으면 존경을 받을 수가 없다.’를 나에게 맞게 수정하여 간직했다.

팬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팬의 만족이 없고 팬의 만족이 없으면 팬덤이 없으며 팬덤이 없다면 인기가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실천사항들을 하나하나씩 챙겼고 유튜브에서도 댓글과 커뮤니티에서 팬들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진현도 그동안 고집하던 음악 스타일을 팬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많이 수정하였다. 진현의 음악 변신이 용이했던 이유는 자신이 그동안 추구했던 음악이 과거지향적이라는 판단이 들면서였다. 진현의 음악적 변신은 편곡에서 나타났다. 자기의 감성으로 만든 곡을 팬들이 원하는 스타일로 계속 수정하였다. 마치 완성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처럼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

나도 팬들의 원하는 노래의 스타일과 춤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했다. 하도 춤을 많이 춰서 진현이 작업실 바닥은 반질반질해졌다.

 

우리는 매일매일 팬들의 미래이며 희망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며 팬의 입장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니 팬들은 놀랍게 늘어났다. 아무리 용을 써도 늘어나지 않던 팬들이 마구 늘어났고 팬클럽이 생기기까지 했다. 팬들이 늘어나니 요구사항도 많았다. 이런 것 찍어 달라. 저런 것 만들어 달라. 각양각색의 요구가 있었는데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최선을 다 했다. 몸은 엄청나게 고됐다. 진현과 나는 한 달에 한두 번씩 몸살이 났다. 하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특히 외국 팬들의 요구를 노래와 춤으로 잘 표현해주면 자발적으로 그 지역의 팬덤을 일으켜 주었다.

우리는 늘 팬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 모습이 좋았나 보다. 가족들도 나의 변화에 안정을 찾아갔다.

 

26

국내외의 팬덤이 상승곡선을 그리며 치솟다가 드디어 유튜브에서 다이아몬드 버튼을 받게 되었다. 구독자가 1000만명을 넘으면 주는 상징적 기념물이다.

우리는 이제 누가 봐도 가수다. 그것도 인기 있는 가수가 되었다. 다이아몬드 버튼을 받은 내용이 신문의 연예기사를 장식했고 우리 노래는 노래방 애창곡이 되었다.

 

지금 나와 진현은 팬들이 원하는 희망이 되기 위해 월드투어를 나가고 있다. 여기는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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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uper M의 빌보드 1위 소식이 있었습니다. 싸이, 방탄소년단의 성공을 이어가는 우리 가수들의 눈부신 활약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행운의 꿈​​, Oil on Canvas, 90.9cm X 72.7cm, 2019년 작

 

, 민희야 TV 좀 켜봐.” 미영이가 민희에게 다급한 어투로 부탁을 한다.

민희와 미영이는 TV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밤을 새웠다. TV에서는 소멸지구를 부활시키겠다는 공약을 가진 후보들이 대체적으로 당선 유력후보로 나타나고 있다.

 

2024410일 온 국민의 뜨거운 관심 속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고 있다.

작년부터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소멸고위험지구를 넘어 소멸지구가 나타났다. 불과 5년 전 228개의 지자체가 이제 210개로 줄었다. 2019년부터 인구 3만명 미만이거나 당 인구 밀도가 40명 미만인 전국 24개 군 단위 지방자치단체가 '특례 군 법제화'를 추진하고 별의별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인구가 빠져나가기 시작한 지자체는 걷잡을 수 없이 인구가 줄어들다가 결국 소멸되어 버렸다.

TV에서는 개표방송을 하다가 중간 중간에 2006년 옥스퍼드대학교 데이비드 콜먼 교수가 예언한 것처럼 한국이 저출생으로 사라지는 나라 1의 위기라는 멘트를 앵커는 빠트리지 않고 넣었다. 이 얘기가 나올 때만해도 설마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소멸되는 지자체가 생기고 지역구 통합, 행정구역 및 행정관리 절차를 다시 재편해야하는 전례 없는 일들이 작년부터 벌어지자 이번 22대 국회의원 선거는 국가적 재난에 해당하는 이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민희와 미영이는 밤새 TV를 보다가 아침 무렵 잠이 들었다. 뭔가 행운이 가득 들어오는 꿈을 꾸던 미영은 아이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깨었다. 황급히 아이를 살펴보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민희도 잠에서 깨었다.

민희와 미영이는 다시 TV를 켜고 당선자들을 찾아본다.

미영아! 너 정말 저 국회의원이 공약으로 내건 스마트 어촌에 가서 살 꺼니?”

민희는 미영에게 걱정된다는 말투로 말을 꺼냈다.

, 난 내 아기만 키울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어서 걱정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난 엄마니까 할 수 있어.”

미영은 결의에 찬 얼굴을 해가며 대답했다.

 

. 신안군 당선자가 확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TV에서는 미영이 주목하고 있던 지역구 국회의원이 당선되었다는 개표방송이 나오고 있다.

~! 민희야 당선되었데. 이제 저 국회의원의 공약대로 한다면 나와 우리 아기는 살 수 있어!”

미영은 자기가 당선 된 것 마냥 손뼉을 쳐가며 기뻐했다. 미영은 고사리 같은 아기의 손을 잡고 흔들며 우리 이제 살 수 있다는 말을 연거푸 하며 좋아했다.

난 이제 스마트어촌의 역군이 되겠어. 그리고 우리 아기는 바다의 왕이 될꺼야! 하하하미영은 아기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듯한 동작을 해가며 신나했다.

 

방송에서는 미영이 응원하는 당선자가 당선 소감을 말하고 있다.

어촌과 수산업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새로운 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기존의 어촌특화지원센터와 귀어귀촌센터를 아우르는 현장 밀착지원 조직이 필요하며 특히 부모와 아이가 동시에 귀어한다면 국가를 살린다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 정착 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미혼모들을 복지적 차원에서 각 지자체가 지원했는데 저희 지역은 스마트 어촌에서 일도 하고 삶의 행복도 얻을 수 있는 정주성 높은 고장으로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선자의 당선 소감은 미영을 더욱 들뜨게 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미영은 아기를 바라보며 찬호가 이 모습을, 이런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가 떠올랐다.

 

미영과 찬호의 이야기는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영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취업했다. 취업한 업체는 택배배송 업체였고 미영은 여기에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미영이네 업체는 택배배송 재하청하는 회사라서 거의 대부분의 직원이 계약직이다. 미영이는 연봉은 낮아도 정규직으로 근무한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성실하게 자기 업무를 하고 있었다.

날이 무척 더운 어느 날 선풍기 몇 개에 의지한 채 택배 상자를 이리저리 옮기는 직원들에게 미영은 시원한 물이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의 얼음을 꺼내 열심히 냉커피를 탔다. 여러 개의 종이컵에 나누어 담고 땀 흘리며 일하는 직원들에게 한잔씩 나눠주고 있었다. 아저씨들에게 한잔씩 주고 돌아서려는데 처음 보는 미영이 또래의 찬호가 있었다.

어머, 처음 뵙는 분이네요. 이거 한잔 하세요!”

미영은 찬호에게 종이컵을 건네며 인사를 했다. 찬호는 미영이 주는 커피를 받으며 미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미영은 왠지 쑥스러웠다.

고마워요.” 찬호는 간단한 대답을 하고 다시 상자들을 이리저리 옮겼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미영은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틀 뒤였다. 찬호가 배송한 물건이 파손되었는데 소비자의 항의 전화로 사무실이 아주 발칵 뒤집혀졌다. 생산업체와 중간의 물류센터에서도 제품의 하자가 없었고 미영이네 회사에 물건이 들어왔을 때에도 문제가 없었다. 결국 찬호가 배송하며 파손 한 것인데 제품이 너무 고가라서 분위기는 살벌했다. 배송을 마치고 찬호가 돌아왔을 때 찬호도 이미 전화로 엄청 야단을 맞은 상태여서 기가 죽어 있었다.

찬호는 이사님과 한참을 얘기한 뒤 뭔가의 서류를 작성하고 사무실에서 나오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미영은 또래 친구처럼 보이는 찬호가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이 애잔하게 보였다. 미영은 찬호에게 뭐라도 위로의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기운 내세요. 다친 데는 없어요?”

미영은 제품이 파손되며 찬호가 다치지 않았나? 걱정되기도 했었다.

. 고마워요. 조금 찢어지기는 했는데 괜찮아요.”

찬호는 정말 고맙다는 표정으로 미영에게 대답했다.

미영은 찬호의 말에 깜짝 놀라 그의 몸을 훑어보니 발목에 핏자국이 있었다.

아니 핏자국이... 많이 다친 것 아니에요? 병원가야 할 것 같은데요.”

미영이 찬호의 다리를 살피며 말하자 찬호는 괜찮다고 말하며 병원 갈 돈도 없고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니 걱정 말라고 했다.

 

찬호는 자신의 택배차에 올라 멍하게 앉아있었다. 미영은 사무실 비상 약 상자에 있는 연고와 반창고 등을 챙겨서 찬호에게 건네주었다.

찬호는 자신의 처지가 몹시 괴로웠는데 미영의 친절함에 상당히 큰 위로가 되었다. 찬호는 고맙다는 말을 하며 자신에게 있었던 오늘 일을 얘기해주었다. 찬호가 배달 간 곳은 4층 건물이었는데 상자가 커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4층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커다란 개가 크게 짖으며 다가 왔다고 한다. 목줄이 되어있어 물리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나타난 개에게 놀라 그만 상자를 떨어드렸다고 했다. 찬호의 발목을 부딪치며 굴러간 상자 속에는 유리로 된 제품이 들어있었던 것 같았는데 집 주인이 없었고 개가 하도 짖어서 그냥 물건을 놓고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1시간 정도 지났을 때부터 택배 물건 주인에게서 항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했다. 제품은 100만원이 넘는 물건이어서 며칠 택배일 한 자기로써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라 괴롭다고 했다. 찬호는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자기가 도움이 되려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일만 저질러서 속상하다는 말을 했다. 미영은 찬호가 딱해보였다.

찬호와 미영은 일을 시작한 동기가 같았다.

 

미영의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는데 아버지는 농약 중독으로 몇 년째 누워 지내고 어머니도 남의 과수원에 사과 따는 일하러 갔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후 겨우 움직일 정도 밖에 안 되었다.

미영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일터로 나온 이유도 찬호와 비슷하였다.

미영은 찬호의 얘기를 듣는데 자기 얘기 같아 가슴이 답답하였고 동정심도 생겼다.

그날 이후 미영과 찬호는 서로의 속 얘기를 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미영과 찬호는 서울에 올라와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어서 외롭기도 했고 미영이 성격이 사람 좋아하고 친절하며 정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찬호도 미영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둘은 연애를 시작했고 서로 생활비를 아끼자는 차원에서 자취방을 합쳐 동거를 하게 되었다. 마치 신혼살림을 차린 것 같이 둘은 행복했다. 미영은 조금이라도 돈을 아껴 부모님께 보낼 수 있어서 좋았고 찬호도 매월 회사에 지불해야하는 제품 배상금을 낼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소박한 행복의 시간이 흐르다가 미영이 이상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생리가 없어지고 감기 같은 증상이 나타나며 피곤하여 회사에서도 일에 집중이 안 되는 날이 며칠 있었다. 이러다 말겠지하며 지내는데 뭔가 느낌이 안 좋았다. 약국에 가서 임신진단 테스트기를 사서 진단해보니 두 줄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업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미영이 찬호를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찬호는 아버지가 되기에는 너무나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미영 또한 준비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찬호씨 우리 얘기 좀 해야겠는데... 조금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어...”

미영은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응 뭔데? 말해봐.”

찬호는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나 하는 표정으로 미영을 쳐다봤다.

며칠 전에...... 나 감기 기운 있는 것 같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고 오늘 임신진단 테스트기로 진단해보니 임신이더라고...”

미영은 말을 하다 말고 주머니에서 진단기를 보여주었다.

찬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진단기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크게 내 쉬었다. 그리고 뭔가 비장한 각오를 한 듯한 표정으로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미영아 우린 아기를 가질 형편이 안 돼. 너도 부모님께 생활비 보내야하고 나도 그렇고 나는 내년쯤에 군대도 가야해. 우리가 어떻게 아이를 키우겠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니 병원에 가서 지우자.”

찬호의 단호한 얘기에 미영은 어쩜 저렇게 말을 할까 나에게 위로의 어떤 말도 없이 저렇게 말하나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실은 미영도 현실적인 찬호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왠지 서러웠다. 미영은 그날 밤 등을 돌리고 잠을 청했다.

 

일로 바쁜 며칠이 지나고 둘은 시간을 만들어 산부인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찬호는 아기를 지운다는 것을 몇 번 얘기하며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했고 미영은 그냥 듣기만 했다. 대답은 안했지만 형편을 생각하면 찬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다사랑 산부인과라는 간판이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며 미영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기가 어떻게 생겼을까? 지금 얼마큼 자랐을까? 아기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미영은 머리가 복잡했다.

 

병원 진찰실로 미영은 들어갔고 의사선생님은 기본적인 진료 상담을 마치고 초음파검사를 하였다. 미영은 아직도 머리가 복잡했다. 아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가만히 누워있기조차 힘들었다. 미영의 배에 초음파를 하기 위한 젤이 발라지고 모니터를 통해 미영의 배속에 자라고 있는 생명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크기로 봐서는 6주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정도면 심장소리도 들릴 것 같군요. 아기의 소리 한번 들어보세요.”

의사선생님이 아기소리를 들어보라는 말에 미영의 가슴은 뭐라 형용할 수없는 감정들이 벅차게 일어났다.

? 아기 소리요?”

미영이 대답을 하는 사이 아득히 먼 천상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콩딱콩딱콩딱콩딱....’

이소리가 태아의 심장 소리입니다.”

의사선생님이 소리의 정체를 설명해주었는데 미영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미영은 순간적으로 여러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의 분신, 내 사랑의 결실, 내 모든 것, 나는 이제 엄마다. 나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니고 엄마다!’라는 생각이 지나갔다.

미영은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눈물이 왈칵 흘렀다. 아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이제 전혀 없다. 진정한 사랑을 얻었다는 진실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미영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선생님 저 아기 낳겠어요. 이 아기는 사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알겠습니다. 남편분과 잘 상의하시길 바랍니다.”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마치고 미영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찬호에게 다가갔다.

무거운 얼굴을 한 찬호가 미영을 보며 물었다.

어떻데? 언제 수술할 수 있다고 해? 비용은 얼마나 든데?”

찬호씨 잠깐만. 나 진지하게 할 말 있어.”

미영의 태도에 찬호는 말을 멈추고 미영의 눈만 바라보았다.

난 조금 전에 마음 고쳐먹었어. 난 아기 낳을 거야. 나 그동안 찬호씨 말대로 아기 지울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오늘 그러면 안 된다는 확신이 왔어. 난 어떻게든 아기 낳을 거야. 그리고 아기를 위해 최선을 다 해서 살려고 노력 할 거야.”

미영의 말에 찬호는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화가 났다.

뭐라고 그걸 말이 되는 소리라고 하는 거야! 얼마 전에 다 얘기 했잖아. 왜 그러는데. 우리 형편에 아기를 어떻게 키워. 그리고 그 아기가 행복할 수 있겠어? 무슨 돈으로 키울려고 해!”

찬호는 현실을 생각하지 않는 잘못된 판단이라는 투로 미영을 쏘아붙이고 벌떡 일어났다. 병원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찬호를 쳐다보자 찬호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병원을 나가버렸다. 미영은 찬호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저 모습을 다시 볼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미영과 찬호는 그 날 이후 자주 다투었다. 찬호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미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성애가 깊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둘은 점점 더 간극이 넓어지고 있었다.

 

미영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미영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찬호는 미영을 나무라지만 미영은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다. 미영은 아무것도 없는 찬호를 사랑했고 자기를 희생해가며 주변 사람들을 챙겨왔다. 찬호는 그런 미영을 생활비를 절약하는 동반자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미영은 아기를 위해 태교도하고 자기의 모든 삶의 가치와 생각을 바꾸고 있는 동안 찬호는 스스로 감당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다고 미영을 나무라기만 했다.

 

미영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오던 어느 날 찬호는 짧은 편지를 한 장 남기고 떠났다.

내가 책임질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은 진정 그렇게 밖에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 해주길 바래.’ 미영은 찬호가 남긴 편지를 손에 들고 눈물을 훔쳤지만 한편으로는 그래 나 혼자라도 할 수 있어!’ 라고 다짐을 하였다.

 

미영은 찬호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혼자 아이를 낳고 키울 준비를 하였다. 편찮은 부모님께는 말하는 것부터 부담을 주는 것 같았고 어떻게든 혼자의 힘으로 해결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여기저기 알아보던 미영은 미혼모들을 보호해주는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입소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같은 처지의 민희도 만나게 되었다.

민희도 미영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둘은 함께 많은 것을 의논하였고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었다.

 

미영은 아기를 훌륭하게 키울 생각밖에 없었다. 그저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만한 환경을 만드는 일에 아기가 큰 몫을 하길 바랐다. 미영은 늘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아기도 나중에 자라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길 또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랬다. 그런 미영의 염원을 이루게 될 스마트 어촌의 비전과 아기와의 관계는 소멸되어가는 우리나라 어촌계의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미영은 아기의 생명도 구했지만 이제 어촌도 구하고 나라도 구한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미영은 아기의 가슴에 귀를 대고 뜨겁게 뛰는 심장소리를 다시 한 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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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들꽃처럼 다시 피어난다​​, Oil on Canvas, 90.9cm X 72.7cm, 2019년 작

명동 성당의 종소리.

 

9년 전 철없던 내가 들었던 그 소리가 같은 시각에 울려 퍼지고 있다.

오후 6시에 울리는 만종,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 울리는 종소리는 경건하게 나의 하루를 돌아보게 한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전화 드렸던 한국동물보호협회 미스 김입니다.”

~! 전화 목소리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미녀네요. 반가워요

명동 성당 바로 앞에 있는 카페에서 미스김과 나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번에 저희 협회에서 대표님의 공로를 인정하여 공로상을 드리려고 하는데 대표님의 봉사에 대한 기사도 나가요. 대표님이 봉사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미스김의 요청에 나는 조금 당황 했다. 나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고 계기가 좋아 보일수도 없어서였다.

우물쭈물하는 나에게 미스김은 말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나?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다 이렇게 얘기했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편하게 말씀하시면 제가 걸러서 기사로 내면 되니까요.”

미스김은 사람을 안정시키고 신뢰감을 주는데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인터뷰보다 일상적인 얘기를 꺼내며 나를 안심 시켜주었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한 뒤에 나에게 다시 질문을 했다. 나도 마음이 편안해지니 어떤 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두서없이 막 얘기하더라도 미스김이 잘 정리 해주세요.”

나는 괜히 손에 힘이 들어가고 식은땀이 살짝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대표님이 동물보호에 앞장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미스김은 미소로 나를 계속 안정시켰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녹음기와 메모지를 연신 쳐다보았다.

. . ..”나는 목이 메어오는 것을 참아가며 말을 이어 보려했다.

저는 심각한 우울증이 있어서 한때 자살을 생각했었어요. 자살을 하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갔는데 한걸음 땔 때마다 온몸이 떨리더군요. 난간을 붙잡았는데 다리가 떨려서 발을 난간 위로 올릴 수가 없었어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데 반대편 옥상에서 길고양이 두 마리가 생선 머리 하나를 두고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것을 보았어요. 날카로운 비명 소리처럼 들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쉭쉭 소리를 내며 서로 달려드는 격한 모습에서 저는 충격을 받았죠. 저는 갑자기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살아본 적이 있나? 저 고양이들은 한 끼 식사도 되지 않을 조그만 생선토막 하나에도 목숨을 거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나는 말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러셨군요. 힘든 일이 있으셨네요.”

미스김은 자기도 이런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한 당황한 눈빛이었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 이어가라는 느낌을 줬다.

저는 고양이들이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거는 싸움을 보며 나는 온 힘을 다해 살아본 적이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자 비참했습니다.” 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이쯤에서 멈추고 싶었다.

미스김은 열심히 받아 적다가 나를 다시 쳐다봤다.

... 대표님 계기는 알았는데 좀 더 사연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기사라는 것이 어느 정도 스토리가 구성되어야 독자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에... ... 제가 동생이다 생각하시고 지금 성공하신 대표님의 과거를 거울삼아 배울 수 있는 내용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장 구성이나 정리는 제가 최선을 다해 해볼테니 대표님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미스김이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말해주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만약 동생이 있었다면 말해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한모금 넘기며 나는 진정을 찾아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기 바로 앞에 있는 계성여고를 나왔죠. 종교를 갖지는 않았지만 계성여고를 다니는 동안 천주교의 교리나 우리학교 이사장님인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들이 참 좋았습니다. 대학은 한성대학교를 나왔고요. 저는 강북 시내에서 자라며 명동과 대학로가 저의 보편적인 놀이터였죠. 저는 늘 그랬던 것처럼 9년 전 가을 친구와 오랬만에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어요. 친구 미영이는 오랜만에 만났기에 보통 여자 친구들의 만남이 그런 것처럼 그동안 있었던 사는 이야기와 아이들 이야기 남편 이야기를 하며 공통점을 확인하고 아직도 우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미영이는 가락동시장 청과 경매사에게 시집을 가서 경제적으로는 풍족한데 경매시간이 저녁부터 새벽까지 있어서 낮 밤이 바뀐 삶을 살고 있었지요. 그런데 새벽에 들어오는 남편과 아이 등교 준비로 진짜 낮 밤이 바뀌어 아침 9시나 되어야 잠을 잔다고 하며 푸념 아닌 푸념을 한참 들어주고 내 얘기도 풀어 놨었습니다.”

친한 친구분이셨나 보죠?” 미스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얘기를 흥미있게 듣고 있었다.

. 미영이와는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고 잘 통하는 사이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기는 똑같았는데 그 친구와 저는 남편의 직업이 달랐죠. 저에 전 남편은 의사였습니다.”

미스김은 내가 전 남편이라는 말에 눈을 다시 동그랗게 뜨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상하게 그 순간부터 말이 잘 나오기 시작했다. 큰 사건 두 가지를 얘기하니 못할 말이 없다는 배짱이 생겼다.

저의 삶은 사실 단순했어요. 남편은 개원의 생활을 하다가 병원을 접고 페이 닥터로 큰 병원에 다니고 있었고 딩크족처럼 어떤 이유로 인해 아이를 미루거나 낳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안 생겨서 없었죠. 생활에 특별할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인지 삶이 매우 무료했습니다. 어제도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라는 예상이 되는 삶 말이죠. 미영과 달리 저는 너무 평범하여 재미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영이는 반응이 달랐어요. 제 손까지 잡아가며 흥분해서 말했었죠.”

미스김에게 말하는 사이 나는 타임머신을 탄 듯이 과거의 그 시간에 돌아가 있었다.

 

어쩜 너와 나는 이렇게 공통점이 많을까? 나도 그래. 낮 밤이 바뀌어 살다보니 만나는 사람도 적어지고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더라고... 특히 아이 학교 다니고 나서부터는 낮에도 애 챙겨야하니까 잠을 쪼개서 자야해. 그러다보니 하루가 남편 챙기고 애 챙기고 남는 시간 잠자고 나면 끝이야. 어떤 날에는 왜 사나 싶기도 해. 우리 말이야 예전에 폼 좀 났잖아. 길 가다보면 남자들이 연락처 달라고 쫓아다니고 호호호. 한번 사는 세상, 재미있게 살아야하는데 이게 뭔지 모르겠다.”

미영의 말에 나도 괜히 흥분 되었었다. 나는 계성여고 다닐 때 명동을 지나다 보면 길거리 캐스팅 제안을 여러 번 받았었고 미영은 한성대 퀸카였다. 우리는 옛날 생각에 온몸이 후끈했다.

그렇지. 나도 요즘 참 재미없어. 우리 다시 명동 좀 누며 볼까? 하하하, 호호호

나와 미영은 손뼉까지 쳐가며 서로 좋아했다.

 

그때 미영과 나는 어릴 적 버릇을 못 고친 상태였는데 둘이 다시 만나게 되니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는 멋 부리길 좋아하고 백화점을 구경 다니길 좋아하며 명품을 누가 더 좋은 것 가지고 있나를 경쟁하고 그랬었다.

미영을 오랜만에 만났을 당시까지는 보통 1년에 한번 만날까 말까 했는데 그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었다.

다시 만난 우리는 영화를 봤고 노래방도 갔고 백화점을 여기 저기 돌며 결혼이후에 안 해본 것들을 둘이서 신나게 했었다. 미영이와 나는 왠지 대학생 때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 같아 신이 났었다. 1주일에 한 번씩 만나게 되었고 그동안 안 가본 곳이, 안 먹어본 것이, 안 해본 것이 이렇게 많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것 같고 활력이 넘쳤고 즐거웠다. 미영이와 신나게 노는 시간이 몇 개월 지났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서로 해보고 싶은 일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만나도 뭐하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또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미영을 다시 만났다.

미영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 신나게 놀았으니 다시 집안일 신경 쓰자. 우리 그만 놀자. 이렇게 너와 몇 달 놀으니 속이 다 시원하다. 역시 격 없는 친구가 최고야. 네가 나와 함께 해주어서 참 좋았다.”

미영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왠지 무거웠다. 그러면서 아이 학교생활 얘기를 했다. 아들이 학교에서 회장이 되었고 자기가 이제 뒷바라지를 열심히 할 생각이라고 했다.

미영의 얘기를 듣는데 나는 우리의 만남을 중지해야하는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 그런데 미영이에게 가끔씩은 만날 수 있지 않냐?는 식의 얘기를 꺼내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마음속으로는 , 누구 만날 사람도 특별히 없고 놀 사람도 없어. 미영아 그러지 말고 우리 가끔 보자.’라는 말이 혓바닥 위에까지 올라와 있었지만 나는 엉뚱한 말을 했다.

그래. 우리가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다 보니까 정말 옛날 생각하며 신나게 잘 놀았다. 나도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볼까 궁리 중이었는데...”

말꼬리를 흘리는 내말을 미영이 잘라가며 말했다.

그렇지! 너도 뭔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역시 우리는 호흡이 잘 맞아. 뭔데? 어떤 일을 생각하는데?” 미영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재차 물었다.

. 아직 정한 건 없고, 고민 중이야. 나중에 정리되면 얘기 할게나는 진짜 계획된 일이 없었기에 해줄 말도 없어서 그냥 막 둘러댔다.

 

미영과 헤어지고 집으로 오는데 헛헛한 기분이 가슴속에 꽉 찼다. 친구를 잃어버린 기분 같은 묘한 느낌까지 들었다.

 

대학 졸업하고 선배가 소개해준 남편과 6개월 남짓 연애하고 결혼했으니 내 인생은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여자는 너 위하는 착실한 남자 만나서 사는 것이 최고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인지 내 인생의 설계나 재능을 따져 본 적이 없다. 그냥 학교 열심히 다니고 대학은 성적에 맞춰 적당한 곳에 다녔고 남들 한두 번 받는 장학금도 받았다. 그 정도가 인생의 성적표다. 따져보니 내가 원했던 것이 있었나 싶었다. 어려서 나는 과학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던 것이 고등하교 다니면서 대학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재능도 꿈도 아닌 성적에 맞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쉬운 인생만 쫒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부모님이 말하던 조건과 부합되기에 특별한 고민 없이 선택했고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겉으로만 화려한 나를 선택한 것 같았다. 우리는 열애라는 것이 없었다. 결혼하고 수년이 지났지만 가슴 뛰게 보고 싶고 좋고 하는 기분을 가져본 날이 있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삶의 무미건조함에서 탈출 시켜준 미영이 떠나버린 뒤 나는 평생 생각해보지 않았던 를 생각하게 되었다. ‘는 누구인가? ‘는 어떤 목적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나는...

 

사춘기에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자문자답을 수없이 많이 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나는 초라해졌고 한심했다.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니 중국식 공갈빵이었다. 텅 비어있는 내면에서 나를 찾으라는 울림이 메아리 쳤다.

 

내가 나를 찾는 시간에 남편을 바라보니 예전에는 평범해 보였던 일상이나 그의 태도가 이젠 달라보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조건으로 그를 보았기에 그가 어떤 일을 하던, 언제 귀가를 하던, 누구를 만나던 나는 아무 상관이 없게 보였다. 그저 정해진 날 생활비주고 가끔 보너스 개념의 어떤 것들이 주어지면 나는 불만이 없었다. 그러던 관점이 나를 찾아가고 자기애가 커지며 그와 나의 관계를 따지게 되었다. 나는 남편을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았고, 남편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특별히 내가 일찍 오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남편은 집에 일찍 들어오지 않는다. 와서도 나와 대화하거나 뭔가 공통 관심사를 논하기보다는 서재에 들어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갖는다. 얼마 전까진 남편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나 또한 좋아하는 드라마 방해받지 않고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나를 혼자 있게 하는 그가 야속했다. 그리고 그가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도 궁금했다. 남편이 남긴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켜놓고 끄지 않은 컴퓨터, 그의 카드영수증, 차에 남은 흔적들. 굳이 묻지 않아도 남편은 친구와의 만남이 많았고 취미생활도 다양했으며 나 외에 다른 여자도 만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남편에게 묻고 싶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혹시 내가 생각하는 어떤 것들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더 커서 물을 수가 없었다.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남편에게 더 관심을 갖고 잘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천했다. 일찍 들어오라고 부탁하고 함께 뭘 하자고 제안하고 그랬다. 그렇게 몇 달간 노력하였다. 초기에는 남편도 성의를 봐서 그렇게 따라줬는데 지금은 식탁위의 차려진 음식을 도로 랩으로 싸서 냉장고에 넣는 날이 더 많아졌다.

몇 달이 지난 후 남편은 예전처럼 친구들과 술자리, 취미생활 등등의 시간을 다시 찾아 갔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내 생활은 여전히 편했다. 엄마가 남편에게 노래를 부른 것처럼 손끝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고 키웠으니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을 잘 지켜주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엄마의 말들을 고분고분 들었던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했던 어린 나의 사고가 원망스러웠다. 편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해서, 힘든 일 하는 것이 싫어서 만들어진 나의 삶은 그저 화초 같았다. 이렇게 길들여진 시간이 길어서 인지 나는 남편에게 어떻게 우리의 관계를 개선하자고 제안하기도 따지기도 힘들었다. 점점 무기력해지면서 우울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 날들도 많았다. 마음속으로는 이런 내가 싫었고 이런 날들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가 컸지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더욱 정신적으로 힘든 날들이 많아졌고, 남편의 출근을 챙기는 것도, 퇴근 후에 챙기는 것도 건너뛰는 날들도 많아졌다.

나는 우울했고 남편은 날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내가 힘들어 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고 길어지자 남편은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말로는 새로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며칠씩 밤새워 할 만큼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은 없었다. 남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무미건조하고 무기력한 시간이 지나자 남편은 이혼하자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이때는 그동안 숨겨온 이야기를 모두 했다. 사귀는 여자도 있고 나와의 삶이 불행하고 그냥 시간만 죽이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도 지겹고... 그는 나를 엄청나게 싫어했다. 미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싫어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부족하고 못난 내가 더 미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남편은 통보하듯이 나에게 이혼하자며 위자료와 내가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생활여건을 제시하였다.

돌이켜보니 나는 남편에게 잘해준 것이 없어서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고 그렇게 단순하게 나의 편한 인생은 정리되었다.

 

저 대표님. 하시던 말씀 계속 해주시죠. 미영씨를 만나고 어떻게 되셨나요?”

미스김이 멍하니 회상에 잠겨있던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제가 잠시 옛날 생각에... 미영이 만나서 철없이 놀았죠.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문제 될 정도의 이탈이나 방황은 없었어요. 그냥 허세가 많아서... 그러다보니 남편과 안 좋아졌고 또한 철이 없었기에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이 없었죠. 그렇게 우울증이 왔었어요.”

나는 미스김에게 단순하게 말을 했다. 그때 미스김이 전화를 받는다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또 회상에 젖어들었다.

 

남편과 이혼 후 나는 변두리의 작은 원룸으로 이사를 했고 한동안 집안에만 있었다.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죽고만 싶었고 괴로운 날들을 보내며 자살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용기가 없었다. 뭘 할지를 몰라서 그냥 산송장처럼 그러고 있었다.

몇 날 며칠을 나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다 결국 죽을 마음을 정하고 옥상으로 올라갔을 때 길고양이 두 마리가 생선 머리 하나를 두고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거는 두 마리의 고양이를 보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온힘을 다해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 죽는다고 누가 애통해 할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수습하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도 남에게 도움이 안 되고 죽어서도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왜 이렇게 나약하고 쓸모없는 인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 보다 못난 나는 그날 잠이 오지 않았다. 온힘을 다해 살아봐야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이 들자 실천할 일이 생각났다. 그렇게 하기 싫었던 몸으로 하는 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생각도 한 적이 없는 낮선 곳에서 육체노동으로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도전하다보면 내 삶의 방향이 잡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기술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니 제주도에 가서 귤 따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TV에서 본적이 있어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못해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미스김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협회에서 다음 행사에 대한 얘기가 있어서... 하시던 얘기 계속 해주시죠.”

나는 정리해서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렇게 철없이 무기력하게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남편은 제가 많이 싫었나봐요. 제가 생각해도 그랬겠다는 생각이 지금은 들어요. 당시에는 몰랐지만 겉멋만 알고 할 줄 아는 것은 없으면서 허세나 부리고 요구하는 것도 많고 하니...그렇게 이혼하고도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아까 말씀드린 고양이의 싸움으로 깨우침이 생겨서 평생 해보지 않았던 육체노동을 하게 되었어요.”

내 말을 미스김은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나는 육체노동으로 선택했던 제주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제주에 도착하여 일력사무소를 찾아 귤 따는 일을 찾았다. 제주도에서 재배하는 귤의 종류가 다양하다보니 수확시기가 종자마다 달랐다. 그래서 귤 따는 일은 1년 내내있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 여리여리하던 몸이 근육으로 변해가면서 마음에도 근육이 붙었다. 우울한 기분도 거의 사라지고 사람들과의 대화도 자연스러워졌으며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예전에 편한 삶을 살겠다고 고집할 때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의미하게 살았다.

제주생활 이후로는 매일 똑같은 일을 해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느껴지고 내일 있을 일들에 대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내손으로 돈을 버니 돈에 대한 의미도 달라졌다.

 

제주에서의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붙었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런 경험이 있으셨군요. 어려움을 잘 극복하셨네요.”

미스김은 뭔가 계속 신기한 얘기를 한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리엑션을 했다.

. 제주생활에서 목표도 생겼죠. 일차적으로는 내 재능을 살려보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의미있는 삶을 살자는 것이었어요.”

나는 다시 제주 생활 이후의 삶을 얘기했다.

 

결혼 생활 11년 동안 하루도 안 빼고 TV를 시청한 덕에 보편적인 여자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매력을 느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제주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남편이 준 위자료와 제주에서 번 돈을 합쳐 집 근처에 멀티숍을 차렸다. 무언가 내 상품을 만들고 싶었지만 지식이 없으니 가진 능력을 활용하는 것으로 일단 방향을 잡았다. 나는 TV를 많이 보며 익힌 감각도 있었지만 명품을 고르는 감각이 좋았다.

 

변두리라서 값비싼 물건을 팔아 서는 곤란했다. 그러나 물건의 수준이 떨어져도 곤란했다. 나는 발품을 팔아 남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 등을 누비며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멋진 물건을 값싸게 사들여 진열했다. 의상, 패션잡화, 침구 등등 여자들의 감성에 부합하는 물건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서 진열했다. 처음엔 매상이 거의 없었지만 동네에 소문이 나고 인터넷 매장을 개설하면서 장사는 사업으로 확장되었다. 물론 중간에 사업이 휘청거릴 때도 있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니 이겨낼 수 있었다.

명동에 내 숍을 열고 내 이름으로 된 제품을 팔며 내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당당한 내가 되었다.

 

미스김은 내 얘기를 다 듣더니 질문을 했다.

그럼, 대표님은 지금 목표 중에 어떤 단계이신가요?”

. 저는 지금 일차목표는 이뤘다고 보고 이차목표를 향해서 가는 중이죠. 저의 재능을 발휘해서 이만큼 이뤄냈고 동물보호단체에 기부도하고 있으니 말이죠.”

나는 고양이를 위해 기부하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최근에 하는 일중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였다.

그럼 이차 목표. 즉 앞으로의 포부를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치죠.”

미스김은 이제 정리해도 되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오랜 시간 생각했던 일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길고양이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앞으로 남은 인생은 세계적인 고양이 용품과 식품 사업을 일으키는 것으로 목표를 삼았어요. 그리고 수익은 동물 보호하는데 활용할 생각입니다. 목적과 목표가 있으니 뭘 해도 의욕이 넘쳐요. 앞으로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생각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철없던 내가, 무기력한 내가 세상에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며 자긍심과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미스김이 메모를 모두 마치더니 한마디를 더 한다.

저 이건 개인적인 부탁인데요. 오늘 인터뷰하며 대표님을 존경하게 되었어요. 제가 동생이다 생각하시고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으면 한 말씀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제주에서 깨우친 얘기를 해주었다.

제가 제주에서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삶의 가치나 방법이 모두 변하더군요. 나를 확인하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그때 인생을 살아가는 세 가지를 구분하게 되었어요. ‘, 재능, 책임저는 재능은 있었는데 꿈과 책임이 없었죠. 왜 사는지도 없었고 뭘 책임지는 것도 없었어요. 부모님이 저를 책임졌었고 남편이 책임졌었기에 저는 책임 질 일이 없었죠. 저는 , 재능, 책임하고 싶은 것, 잘 할 수 있는 것, 꼭 해야만 하는 것으로 구분 지을 수 있게 되면서 저를 완성 할 수 있었어요. 참 단순한 명제인데 제주에 가기 전까지 한 번도 생각을 깊이 있게 안했더군요. 그저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미스김은 이미 알고 계시고 생각해봤을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얘기는 이것뿐이네요.”

미스김은 내 얘기를 곰곰이 생각하며 듣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저도 하고 싶은 것, 잘 할 수 있는 것, 꼭 해야만 하는 것을 인생에 대입하여 어떻게 살아야지 되는지 생각 많이 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미스김은 갔고 나는 명동 성당을 다시 찾았다. 마음먹은 사명을 다 하기 위한 다짐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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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Kai Jun, 가을바람에 날리는 순수함​​, Oil on Canvas, 45.5cm X 53cm, 2019년 작

 

 

은혜

은혜의 패션숍에는 손님들의 기분 전환을 위해 늘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은혜도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오후 가을 신상품을 걸기 위한 은혜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랄라~. 기온이 어제 보다 5도 떨어진다고 했지. 이제 가을 손님이 많을 테니 예쁘게 꾸며야지. 어디 보자 이 노란색 코트는 여기에 걸고...” 손님들이 기뻐할 즐거운 상상을 하며 저녁도 건너뛴 채 은혜의 패션숍은 가을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혼자 운영하는 점포라서 할 일이 참 많았다. 은혜는 어제 새벽시장에서 사온 신상품들을 옮기다가 잠시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커피를 한잔 타 와서 TV앞에 앉았다. “어머. 이적이네. 이적의 노래는 참 생각 할 꺼리를 많이 줘. 아니 그런데 저 내용은...” 뮤직비디오를 보던 그녀는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TV를 볼 수도 패션숍에 있을 수도 없게 되어버린 은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점포 문을 닫고 나왔다. 길에 나온 은혜는 걸었다. 목적도 없이 걸었다. 그녀의 트라우마는 길을 배회하고 무한정 걷게 한다.

......

 

 

5살배기 은혜는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과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붉은 벽돌을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고 풀을 뜯어 김치를 담근다. 어린 은혜는 한두 살 많은 언니들이 만들어 주는 가짜 음식을 먹는 담당이다.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과 달리 아침부터 동네는 시끄러웠고 고함소리도 자주 들렸다. “~! 이놈들아 우리보고 어딜 가라고 이러는거야!” 아저씨들은 씩씩대며 이리 몰려가고 저리 몰려갔었다.

은혜야~!” 은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은혜 주려고 때때옷 샀다. 이거 입고 호랑이, 사자, 원숭이 있는 공원에 우리 놀러가자은혜는 신이 났다. 엄마와 집에 가는 내내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노래를 부르며 공원에 놀러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은혜는 어린이대공원에 왔다. 호랑이의 늠름한 모습, 코끼리의 커다란 코, 멋진 갈기가 있는 사자도 좋았지만 은혜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사람과 닮은 원숭이였다. 원숭이는 은혜가 던져 주는 과자를 재주를 부리듯이 이쪽 철망에서 저쪽 나무를 오가며 받아먹었다. 다른 원숭이들도 은혜에게 다가오고 은혜는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조금씩 쪼개서 원숭이들에게 던져 주었다. 달콤한 과자 맛을 본 원숭이들이 은혜에게 잘 보이려는 듯이 왔다 갔다 하며 은혜에게 손을 내밀었다. 녀석들은 노래에 나오는 빨간 엉덩이였다. 그 빨간 엉덩이를 실룩실룩하며 왔다 갔다 하는 모습만 봐도 은혜는 웃음이 나와서 까르르 웃었다. 은혜는 원숭이가 긴팔을 이용하여 이 나무에서 저 나무를 옮겨 다니는 것이 너무 신기해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가득 차있던 과자 봉지의 과자가 없어지자 은혜는 엄마에게 과자를 더 달라고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 ... , 엄마... , , 엉 엉, 엄마~!” 엄마는 없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보이지 않았고 조금 지나자 눈물에 상이 흐려져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은혜는 원숭이 우리 앞에서 하염없이 울고 서 있었다. “~! ~!” 한참 동안 엄마를 부르며 울었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은혜는 자기의 목소리가 작아서, 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자기 소리를 엄마가 못 듣는다고 생각하여 더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 엉 엉! 엄마! ~!” 절규하는 은혜의 울음소리에도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를 찾아 공원을 헤매 다니던 은혜를 어떤 언니가 다가와 미아보호소에 데려다 주었다. 다른 아이들도 있었다. 은혜처럼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얼굴이 엉망이 된 아이들이 있었다. “파란색 상의에 흰색 바지를 입은 4살 가량의 여자 어린이를 찾는 부모님은 정문 앞 미아보호소로 오시길 바랍니다.” 아이를 찾아가라는 방송이 나가고 조금 지나면 넋이 나간 표정의 어른들이 와서 아이들을 데려갔다. “흰색 원피스를 입은 5살 가량의 상계동에서 온 여자 어린이를 찾는...” 어린이대공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은혜를 찾아가라는 방송은 수십 번 넘게 어린이대공원에 울려 퍼졌지만 은혜 엄마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은혜는 경찰서로 넘겨지고 자기가 살던 동네가 상계동, 이름은 은혜, 엄마와 둘이 살았고 엄마 이름은 은혜엄마, 친구는 동수, 유미, 집 뒤쪽에 큰 산이 있고 동네에는 누런 개들이 많으며 고양이들도 많았다고 자기가 아는 모든 정보를 주었다. 그리고 엄마를 찾아달라고 경찰 아저씨에게 울며불며 매달렸다.

경찰아저씨와 은혜는 상계동으로 갔다. 상계동으로 다가갈수록 흰 먼지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1987년 봄 은혜가 살던 상계동의 무허가 판자촌은 모두 허물어지고 있었다. 은혜의 동네도, 집도, 엄마도 없었다.

 

18살이 될 때까지 은혜는 아동양육시설인 보육원에서 지내다가 24살까지 자립관으로 옮겨 살았다. 성인이 되어 남자친구도 사귀어 봤으나 저 남자가 나를 버리면 어떻하나?’가 늘 머릿속에 있어 남자를 사귀면 사귈수록 의심과 불안, 외로움 등의 부정적 감정이 더 커져서 사귈 수가 없었다. 죽을 때까지 혼자 살겠다고 각오하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일을 하여 지금의 패션숍을 열수 있었다.

......

 

 

일에만 몰두하고 싶었고 일만 하고 있으면 잡념이 없었는데 조금 전에 본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뮤직비디오는 은혜의 마음속에 감춰두었던 어떤 것들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은혜는 자기도 모르게 어린이대공원에 와있었다. 공원의 불은 모두 꺼져있고 들어갈 수 없는 공원의 정문 앞에 서서 은혜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직도 남아있는 엄마에 대한 생각은 미움, 원망, 배신감으로 점철되어있지만 그 안에 그리움도 있었다. 은혜는 자기도 모르게 엄마라고 작게 소리를 냈다. 1987년 봄 이후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수천수만 번 불렀을 그 말은 은혜는 32년간 불러보지 못했다. 가냘프게 나온 엄마라는 말은 들을 대상도 없는 허공에 외쳐본 말이라 그 공허한 무게감은 은혜를 더욱 짓눌렀다.

 

은혜는 마치 망부석이 된 것처럼 한참을 어린이대공원 정문 앞에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가을이 되어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다. 이미 마음이 식을 대로 식은 은혜지만 가을의 찬바람은 은혜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다리가 떨리고 손끝이 아렸다. 아까부터 흐르던 눈물은 이제 볼 살을 따끔거리게 하고 있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고 은혜는 주저앉아 기절하였다.

 

언 듯 엠블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났던 기억이 있는 은혜가 눈을 떠보니 차 안이었다. 엠블런스가 은혜를 태우고 병원으로 가려던 것이었다. 여자 구급대원과 남자 구급대원이 보였다. “... 제가 쓰러졌었나요? 저 괜찮으니 내려주세요. 집에 갈 수 있어요.” 정신을 되찾은 은혜는 괜찮으니 집에 가겠노라고 했다. 여자 구급대원은 병원에 가서 조치를 받고 안정을 찾은 다음에 가셔야해요. 그대로 편하게 누워 계세요.” 여자 구급대원이 미소로 안정을 시켜줬다. 은혜는 여자구급대원의 말을 따라 눈을 감고 누워 있다가 다시 눈을 떴다. 남자 구급대원과 눈이 마주쳤을 때 깜짝 놀랐다. 얼굴에 커다란 화상 흉터가 있었다. 은혜는 놀란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은혜의 반응에 남자도 당황한 기색이 영력하였다. 남자는 은혜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를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했지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은혜는 느꼈다. “죄송해요.” 은혜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남자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남자는 은혜가 왜 소리를 질렀는지 다 안다는 듯이 답변하였다.

그렇게 은혜는 자기 삶의 가치관을 바꿀 남자를 만나게 됐다. 자기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을 알아가며...

 

다음 편에 계속-

 

본 작품은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뮤직비디오를 보고 느낌 감동을 단편소설로 엮은 것입니다. 사회적 울림을 준 이적씨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내상과 외상 1 은혜

내상과 외상 2 용식

내상과 외상 3 은혜와 용식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를 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문재인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운영위원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칼럼리스트 Kai Jun(전완식) 소개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를 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문재인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운영위원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