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45> 서로마와 동로마로 갈라지다 (서기 378~395)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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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다운 마지막 황제 테오도시우스.”

서기 378년 황제에 즉위한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시조이며 동서 양대 로마제국의 마지막 단독 황제였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군사적 수완을 발휘하여 4세기 말의 정치 안정에 기여했다. 그의 공적으로는 야만족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를 들 수 있다. 그는 유능한 장군이었기에 야만족의 침공에 잘 대처했다. 야만족의 침입으로 사기가 저하되고 자신감을 잃었던 로마군 병사들에게 자신감도 심어주었다. 또한 야만족의 정착을 원만하게 이끌었다. 

 

당시 훈족의 이동으로 발칸반도로 밀려오는 고트족을 더 이상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테오도시우스는 그들에게 도나우 강 남쪽에 영지를 주어서 받아들이기로 결단을 내렸다. 고트족의 승인은 이후 로마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로마 군단에 게르만족 병사들이 많이 들어와 로마군이 게르만화되었다. 장기적으로는 자영 농민이 사라지고 농노로 전환되었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평화적인 게르만화’라고 불리지만, 게르만족이 로마 영토로 진입하면서 로마제국의 붕괴 속도가 빨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또 다른 공적은 서기 392년에 정통파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점이다. 그는 로마의 전통 종교, 이교, 이단을 법적으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황제의 칙령에 의해 집회가 금지되었고, 많은 직업에서 추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언의 권리마저 박탈당했다. 그는 3위 일체의 신앙에 입각하여 세례를 받은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정통파 기독교를 로마제국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종교로 공인함으로써 이후 중세로 이어지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그리스정교회라는 기독교의 양대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기독교 부흥 정책과 국교화 때문에 그는 기독교 역사가들로부터 대제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는 서기 395년에 안타깝게 48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았다. 임종의 자리에서 총사령관 스틸리코에게 18세와 10세에 불과한 어린 두 아들을 부탁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큰아들 아르카디우스는 동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고, 둘째 아들인 호노리우스는 서방의 황제로서 서로마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로마제국은 공식적으로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었고 다시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 통치하는 것은 이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분 체제에서 태동했다. 동로마와 서로마는 처한 정치적 상황도 달라서 갈라진 채 고착화되었다. 황제가 평범한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도 로마의 운명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다. 특히 서로마가 그랬다. 10세 황제는 아무것도 몰랐다. 유능한 총사령관 스틸리코가 있어 재위 초반은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스틸리코가 야만족 출신이라는 점이다. 스틸리코는 어머니가 로마인이었지만 아버지는 야만족인 반달족 출신이었는데, 출신 성분이 문제가 되어 스틸리코가 처형되면서 서로마는 쇠망의 길로 들어선다. 호노리우스 황제는 나이가 들어서도 무능해서 자리만 지키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호노리우스는 서기 404년, 서로마의 수도를 로마 대신 라벤나로 옮겼다. 

 

불행하게도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어린이 황제 시대는 다음 대에도 계속되었다.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가 서기 408년에 사망했을 때 7살짜리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서로마제국의 호노리우스 역시 서기 425년 6세밖에 안 된 조카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제위를 계승시켰다. 6세, 7세에 불과한 어린이들이 황제가 되었으니 세도 있는 대신들의 감독을 받지 않고는 통치할 수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황제들이 장성한 후에도 독자적인 통치 능력을 발휘할 수 없어서 정국이 불안해졌다. 대신들 사이에서 권력을 둘러싸고 암투가 계속되니, 제국 전체의 안녕이 신하들의 경쟁과 야심에 의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테오도시우스를 ‘황제다운 마지막 황제’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어린이 황제가 계속해서 제위를 유지하는 게 가능했을까? 군인들이 황제 암살을 밥 먹듯이 일삼던 3세기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현세의 최고 권력자는 신이 원했기 때문에 그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기독교와 동양식 전제군주가 가졌던 ‘왕권신수설’ 덕분이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했을 때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장례식에서 설교한 내용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4권에 잘 나타나 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죽지 않았습니다. 뒤에 남은 두 아들을 통해 살아 계십니다. 아버지는 하늘에 있어도 지상에 남은 두 아들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장병 여러분도, 시민 여러분도 돌아가신 황제한테 충성을 바쳤던 것처럼 젊은 두 후계자에게도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군대를 장악한 사령관이 야만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야만족인 까닭에 이들이 황제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테오도시우스가 스틸리코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아들들을 부탁한 데는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야만족 출신인 총사령관 자신이 스스로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고, 제국의 시민과 관리들도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으므로 어린이 황제의 제위 계승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로마는 서로마와 동로마로 갈라져 각각 다른 환경에서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반면에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한 소종파였던 기독교가 어떻게 400년 만에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성장했고, 그 이후 줄곧 모든 서양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정기문 교수는 『서양사 강좌』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힘이다. 로마의 전통 종교는 공적으로 국가 종교의 형태였고, 사적으로는 현세의 기복에 머물렀다. 하지만 기독교가 현세의 삶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고 내세의 구원을 약속하자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꼈다. 또 기독교는 형식주의나 의례중심주의를 탈피하고, 세상의 질서에 대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고대인은 신분에 따라 사람이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보편적인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가르쳤다. 나아가 기독교는 대단히 윤리적인 종교였다. 로마인들이 숭배했던 종교는 정의롭거나 윤리적인 종교는 아니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한 분이고, 그의 명령을 받고 지상에 온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윤리적 삶을 권장했다. 모든 사람은 심판 받을 것이며, 그때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산 것 혹은 악하게 산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 신자들이 윤리적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많은 로마인이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요인들 덕택에 탄압받던 기독교는 공인을 받고, 국교가 되어 서양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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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22 17:45:00 최종수정 2018-08-22 17: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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