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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5> 신의와 명예를 존중하는 로마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1월25일 16시36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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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인은 인간관계에서 신의를 중시했다. 신의는 ‘피호(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라고 불리는 로마인의 특이한 사회제도인 파트로네스(patrones)와 클리엔테스(clientes)에 잘 나타나 있다. 파트로네스는 보호자를 뜻하고,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네스의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피보호자를 의미한다. 클리엔테스는 고객을 뜻하는 영어 클라이언트(client)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이 피호 관계는 로마의 건국 당시부터 존재했다. 로마의 초대 왕인 로물루스가 즉위할 때 100명의 가부장을 소집하여 원로원을 창설했다. 이 100명의 원로원 의원이 파트로네스가 되고 귀족의 주류를 이룬다. 평민들은 클리엔테스가 되어 귀족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상부상조하는 형태를 유지했다. 

 

파트로네스인 귀족은 다수의 클리엔테스와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들의 경제문제, 가정 문제 등에 조언하고 도움을 주었다. 반대로 파트로네스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지면 클리엔테스들이 공동으로 귀족을 지원했다. 또 파트로네스가 공직에 입후보하면 클리엔테스들은 모두 선거에 참여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이 관계는 강자와 약자의 관계라든가 법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윤리적이고 관습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계에서 가장 중시된 것이 신의였고, 가장 악덕시된 것은 배신이었다. 신의를 중시하는 태도 때문에 재판에서 서로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일을 삼갔다. 신의를 중시하는 관계를 고려할 때, 증인으로서 위증하여 벌을 받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관계는 당대에 끝나지 않고 세습되었다. 이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권에서 사례를 소개한다.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이 막판에 이르렀을 무렵의 일이다.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하고 있던 보좌관인 라비에누스가 폼페이우스 편에 붙기 위해 카이사르 곁을 떠났다. 폼페이우스 쪽은 이 소식에 기뻐 날뛰었지만, 라비에누스는 정치적 신조 때문에 카이사르를 버리고 폼페이우스를 택한 것이 아니었다. 라비에누스는 피체도 출신의 평민이었고, 폼페이우스는 그 지방 일대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이었다. 다시 말해서, 라비에누스는 조상 대대로 폼페이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품페이우스 쪽으로 간 것이다.”

 

또한 적과의 약속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로마인들의 생각이었다. 기원전 255년 1차 포에니전쟁 때 집정관 레굴루스는 포로가 되었다. 카르타고에서는 레굴루스를 강화 사절단으로 로마에 보내어 “시칠리아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강화 조건을 수락받게 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로마에 카르타고의 감시단과 함께 돌아온 레굴루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카르타고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강화를 절대 맺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카르타고로 다시 돌아가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그가 죽을 줄 알면서도 적지로 다시 돌아간 이유는 신의와 명예를 중시하는 로마인의 가치관 때문이다. 그렇기에 레굴루스는 신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로마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신의를 중시하는 가치관은 자연스럽게 명예 존중으로 연결된다. 명예란 로마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긍심이다. 명예와 자긍심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함께하며, 신의와 명예와 자긍심이 어우러져 조국애로 발전한다. 명예는 또한 용기로 나타난다. 앞의 레굴루스의 사례처럼, 죽을 줄 알면서도 적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놀라운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전쟁터에서의 용기는 공동체를 위한 헌신으로 이어졌다. 로마인들은 전쟁의 승패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용맹함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도적인 생각을 가졌다. 자신의 행동이 곧 로마 전체의 행동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로마를 성장하는 국가로 만든 원동력이 된 것이다.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패한 장수를 처벌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는 명예를 존중하는 전통과 관련이 있다. 전쟁에서 패한 것이 곧 자신의 잘못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수는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명예가 이미 땅에 떨어진 셈이다. 그러니 두 번 처벌할 이유가 없다. 대신에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었다. 실패하면 반드시 실패로부터 배우려 했던 로마인이었던 만큼, 기회가 주어지면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명예 회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하지만 카르타고나 다른 나라는 달랐다. 전투에 실패한 장군은 본국에 소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1차 포에니전쟁에서도 패전 장군은 사형을 당했다. 이는 로마와의 차이점이었다. 로마는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였고, 카르타고는 실패를 부인하는 문화였다. 군대는 사기를 먹고 자란다. 전쟁에 패하면 사형하는 군대와 실패하더라도 만회할 기회를 주는 군대의 동기 부여 수준은 다르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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