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17> 노블레스 오블리주, 성장의 원동력이 되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2월08일 16시55분
  • 최종수정 2018년02월08일 17시04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메타정보

  • 25

본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로마의 성공 요인을 논의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이고, 리더십을 설명할 때도 반드시 등장하는 말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함께 남다른 의무가 지워졌다. 지도자가 평민과는 달리, 특권을 양보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솔선수범하면서 부를 사회에 환원할 때 존경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앞에서 소개한 많은 사례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좋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정이 출범할 때 브루투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 되었다. 공화정을 반대하는 젊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고 추방된 왕을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자 음모에 가담한 두 아들을 냉정하게 신문한 후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했다. 최고 권력자가 아들을 법대로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로마 시민들은 법 앞에 평등한 공화정 건설에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브루투스는 해외로 추방된 왕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오자 전선으로 달려가 맨 앞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후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은 전쟁터에서 항상 앞장서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공화정 500년 동안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집정관은 수없이 많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리더십 전통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2차 포에니전쟁 중 한니발과 싸운 17년 동안 최전선에 나가 싸운 집정관 25명 중 전사자 수만 해도 8명에 달했다. 로마 건국 이후 500년 동안 원로원에서 귀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15분의 1로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전쟁이 계속되면서 귀족들이 수도 없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리더의 솔선수범과 희생에 힘입어 로마는 고대 세계의 맹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지도자가 특권을 양보하는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중요한 덕목이다. 귀족과 평민은 대립과 갈등을 겪은 후에 서로 타협하여 새로운 법을 탄생시키곤 했다. 기원전 367년에 제정된 리키니우스 법은 모든 공직을 평민층에 개방했다.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 법은 평민회에서 의결된 사항은 그대로 국법으로 삼는다고 결정하여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 

 

로마가 가진 또 하나의 전통은 유력자가 공공건물을 자비로 건축하여 헌납함으로써 부의 사회 환원을 실천한 점이다. 전쟁터에서 강적을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될 정도의 인물은 공공건물을 지어서 국가에 기증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로마의 공공건물은 이렇게 지어진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포로 로마노 북서쪽에 있는 아이밀리우스 회당은 기원전 179년에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를 물리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기증한 것이다. 그 맞은편에 있는 셈프로니우스 회당은 기원전 170년 그라쿠스 형제의 아버지인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기증했다. 기원전 80년 독재자 술라도 공문서 보관소인 타불라리움을 카피톨리노 언덕에 건설했다. 이처럼 유력자가 공공건물을 기증하는 전통은 공화정, 제정시대에도 이어져 내려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야말로 로마 사회를 하나로 통일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최초의 간선도로인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312년 아피우스가 사유재산을 들여 건설한 도로다. 공화정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와 후임 황제와 유력자에게도 전승되어 로마 지도자의 훌륭한 덕목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산의 사회 환원을 국가 정책으로 만들어 스스로 솔선수범했고 유력자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는 “내가 물려받은 로마는 벽돌로 되어 있었지만, 내가 남기는 로마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라고 공언했고, 실제로 사재를 털어 공공건물을 지어 희사하는 데 앞장섰다.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경기장으로,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세운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사재를 내놓아 공공건물을 건설하여 희사한 리더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무엇이었을까? 건물의 명칭에 가문의 이름을 새기거나 송덕비에 이름을 남기는 게 전부였다. 

 

지도층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통해 솔선수범하고 시민들에게 신뢰를 심어주었기에 로마 시민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야말로 로마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 

25
  • 기사입력 2018년02월08일 16시55분
  • 최종수정 2018년02월08일 17시04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