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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값 하락이 반드시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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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5년01월27일 19시06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19시59분

작성자

  • 이덕환
  •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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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원유값 하락이 반드시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국제 원유 시장이 느닷없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원유 가격이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반토막이 나버렸다.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로 비싼 기름값에 시달려왔던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일 수 있다. 실제로 산업부 장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우리 전문가들은 저유가가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다. 기업은 생산비가 줄어들어서 경쟁력이 생길 것이고, 소비자는 연료비가 줄어들어서 내수 시장을 살릴 여유가 생긴단느 것이다.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모처럼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고 야단들이다. 느닷없는 저유가 상황의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모양이다. 당장 기름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던 소비자들이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원유 가격은 반토막이 났다고 하는데 휘발유와 경유값은 왜 반토막이 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고약한 정유사들이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고질적인 의혹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기름값의 절반 이상을 세금을 챙겨왔던 정부가 다급해졌다. 자칫 자신들에게 튈 불똥을 걱정하는 정부가 모든 책임을 정유사에게 떠넘기기 시작했다. 실제로 정유사들에 대한 의혹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주머니가 얇은 서민들을 위해 자신들이 앞장서서 못된 정유사들을 단단히 손봐주고, 기름값을 내리도록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힌다. 정부와 소비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언론의 태도도 어정쩡하다. 기름값이 내려가면 유류세의 비중이 더 커진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언론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간에 낀 정유사의 입장이 난처하다. 중동에서 선적한 원유가 우리나라에 도착하기까지 40일이 넘게 걸리고, 엄청난 양의 원유와 석유 완제품(휘발유, 경유)을 비축해야 하는 제도적 규제가 정유사를 압박하고 있다. 지금처럼 원유 가격이 급격하게 떨어지면 그 부담은 더욱 심각해진다. 선적한 원유가 도착하는 과정에서의 수출 기업에 도움이 되는 고환율 정책도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다.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달러로 표시된 원유 가격이 오늘 떨이지면 당장 내일부터 국내 기름값을 내려야 한다는 소비자의 비현실적인 요구에 덩달아 춤을 추는 정부·언론·전문가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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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기름값이 묘하다’는 대통령의 묘한 발언으로 시작된 정부의 노골적인 정유사 압박과 무리한 석유시장 개입으로 체력이 절대적으로 허약해진 우리 정유사들이 과연 국제 원유 가격 하락에 따른 구조적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조차 불확실하다. 지난 몇 년 동안 호황을 누리는 동안 고도화 시설에 투자했던 엄청난 비용도 정유사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우리 정유사들의 이런 어려운 현실을 외면한 전문가들이 쏟아내는 정부·언론·전문가들의 순진하고 어설픈 장밋빛 전망은 믿을 것이 아니다. 

 

  실제로 정부·언론·전문가들의 섣부른 주장처럼 국제 원유 가격 하락이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도 확인이 된다. 실제로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원유 가격의 지나친 하락으로 발생하는 심각한 디플레이션의 위험을 걱정하고 있다. 기름값 하락에 따른 소비자 물가 인하가 오히려 오랜 만에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있던 시장을 오히려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높은 원유 가격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있던 러시아를 비롯한 산유국들도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국가적으로 디폴트를 걱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원유 가격이 바닥으로 떨어져버리면서 생산비가 높은 셰일 가스가 뱉지도 못하고 삼킬 수도 없는 계륵(鷄肋)의 신세로 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저유가 상황이 유독 우리에게만은 기회가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정부·전문가·언론이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에너지의 97퍼센트를 수입하고 있고, 그 중 상당 부분이 원유라는 사실만 고려하면 저유가가 반가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수입한 원유의 절반 이상이 휘발유·경유·항공유·윤활유·아스팔트·나프타 등의 석유 제품으로 가공되어 수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정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게 된다. 실제로 석유제품의 수출액은 우리가 흔히 효자 수출 품목으로 알고 있는 자동차·조선·반도체를 훌쩍 넘어선 적도 있었다. 섬유·플라스틱·고무를 포함한 석유화학제품까지 포함하면 원유를 기반으로 하는 석유·화학 산업은 생산·내수·수출 모두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는 전통적인 효자 산업이고, 앞으로도 그런 상황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정유와 석유화학 산업의 미래가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전적으로 수입에만 의존해야 하는 형편에 국제 원유시장이 고질적으로 불안정한 것은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데도 널뛰듯 하는 원유 가격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정유 시설 확장에 올인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의 추격도 불안하고, 중동의 산유국들이 정유산업에 직접 뛰어들고 있는 현실도 불편하다. 우리 석유화학 산업이 아직도 첨단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를 추구하는 정밀화학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여전히 범용 제품에 머물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우리 화학산업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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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정유산업과 석유화학산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정유산업은 다른 일반적인 산업 분야와는 특성이 전혀 다른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간산업 중 하나다. 상당한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휘발유와 경유를 전량 수입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 수는 없다. 원유 시장이 불안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휘발유와 경유를 포함한 석유제품의 시장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다. 더욱이 오일 쇼크와 같은 위기 상황이 벌어지면 스스로 석유제품을 생산하지 못하는 국가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신세가 돼버린다. 정유산업은 단순한 경제 논리로 평가할 수 없는 전략 산업이라는 뜻이다. 에너지 안보가 공연한 걱정이 아니다. 
 
  국가 기간산업 육성과 종합적인 에너지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달콤한 유류세의 유혹에 빠져서 에너지 정책을 망쳐버린 어리석음은 하루 빨리 바로 잡아야 한다. 원전에서 생산하는 전기가 펑펑 남아돌던 1990년대 말의 상황은 오래 전에 막을 내렸다. 값비싼 전기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현명하게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20조가 훌쩍 넘는 유류세가 모두 실질적인 세수가 되는 것도 아니다. 농어민에게 제공하는 면세유를 관리하기 위한 비용도 적지 않고, 화물차와 택시에 제공하는 유류세 환급금의 규모도 엄청나다. 가짜 석유를 가려내기 위해 써야하는 비용도 적지 않다. 무차별적으로 거둬들인 간접세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애써 걷은 세금을 투입해서 바로잡겠다는 정부의 어리석음은 혀를 찰 수밖에 없는 황당한 수준이다. 
 
  문제는 그런 어리석음의 파장이 자칫 국가의 기반을 뒤흔드는 심각한 문제로 확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온 나라를 극심한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전력 부족 사태도 산업부의 어설프고 감정적인 에너지 정책의 산물이다. 공허한 녹색의 꿈과 기후 변화의 위협에 굴복하기 전에 가장 현실적인 석유 자원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최대한의 절약과 함께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소비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만 한다. 언젠가는 석유 자원이 고갈될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석유 자원을 포기해버릴 수는 없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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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6년02월26일 19시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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