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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17 광개토대왕과 후연(9)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2월19일 18시01분
  • 최종수정 2019년12월19일 17시3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46) 동진 사현의 업성의 부비 지원 결정(AD384)

 

궁지에 몰린 부비는 마침내 사신 초규에게 편지를 주어보내 동진의 사현에게 구원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 장안을 지키기 위해 출병하려고하니

   지원군이 먼저 도착한다면 업을 넘겨 드리겠습니다.

   만약 장안 가는 길이 막혀서 함락된다면   

   업이라도 지켜주시기를 바라오.“

 

부비는 사실상 양다리 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당장 장안이 서연 모용충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다가 자신 또한 후연의 공격을 받고 있는 처지에 동진에게 솔직하게 지원을 요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허세만 부리면서 뻣뻣하게 지원을 요청한다고 하면 동진이 호응해 올 리가 만무했다. 부비의 사마 양응과 사신 초규는 마침내 편지를 고쳐서 간곡하게 지원을 요청하고 동진에게 귀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부비가 귀순을 거부하더라도 부비의 손위 처남이었던 양응은 강제로라도 그럴 생각이었다. 동진의 도독서연청서기유병칠주제군사 사현은 처음에는 부비의 아들을 인질로 요구하였으나 초규가 간곡히 설득하는 바람에 생각을 바꿔 유뢰지와 2만 군사를 보내 궁지에 몰린 부비를 돕기로 했다.

        

(47) 모용위의 부견 암살 모의(AD384년11월)

 

당시 모용충의 공격을 받고 있던 장안에는 선비족이 약 천 여명 살고 있었다. 모용숙이라는 사람은 모용위와 모의하여 부견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모용위의 아들 결혼식이 있었으므로 부견을 집으로 초대하여 그 때 죽이자는 계획이었다. 부견도 아무 의심 없이 갈 생각이었으나 큰 비와 벼락이 치면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모용위의 암살 계획이 드러나자 부견이 그들을 꾸짖었다. 모용숙과 모용위는 부견의 개인적인 은혜는 고마우나 전연나라의 미래 문제를 눈감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답변했다. 부견은 모용위와 모용숙과 성안의 모든 선비족들을 몰살시켰다.(AD384년 11월) 모용충은 아방궁에서 공식적으로 서연 창건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용렬했다. 상벌에 기준이 없이 제멋대로였다. 모용충의 사촌 모용유가 이렇게 내뱉었다.    

 

“ 열 명 중의 우두머리는 나머지 아홉보다 재주가 뛰어나야 안정될 것인데

  중산왕 모용충은 재주도 못 미치고 공적도 없으면서    

  교만과 사치가 극심하니 거의 일을 풀어나가기 어려울 것 같구나.“

 

(48) 모용수의 업 장악(AD385)

 

포위를 풀어도 부비가 도망가지 않고 업성을 지키자 모용수는 다시 업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해를 넘겨 AD385년이 되어도 업성이 떨어지지 않자 모용수는 업을 수도로 삼을 생각을 접고 북쪽으로 갈 생각을 굳혔다. 모용수에게 호응하던 군사들도 모용수의 능력을 의심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모용농과 모용온이 흔들리는 이민족을 잘 설득하고 규합하여 모용수의 군대가 분열되는 것을 잘 막았다. AD385년 4월에는 동진 유뢰지의 지원군이 업성 부근에 당도했다. 업성을 두고 모용수의 포위군과 동진 유뢰지의 지원군과 전진 조정 부견이 보낸 지원군 간에 치열한 공방이 지루하게 지속되었다. 

유뢰지의 공격을 받고 패한 모용수는 일단 포위를 풀고 퇴각하여 신성(하북성 비향) 주둔했다. 유뢰지는 도망가는 모용수를 끝까지 따라갔다. 부비도 유뢰지의 뒤를 쫓아왔다. 모용수가 말했다.

 

 “ 동진과 전진은 깨진 기와 같아서 절대로 같은 마음이 아니다.

   저들이 합치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 “

 

급하게 달려오던 유뢰지의 군대를 역습하자 유뢰지 군대가 크게 깨어졌다. 유뢰지는 단기로 도망가다가 전진의 부비군대를 만나고 나서야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유뢰지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서 건강으로 소환되었다.  

 

업성 안의 기근은 더욱 심해졌다. 부비는 곡식을 채우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업성을 나와 주변을 경략하고 다시 들어왔다. 기근이 심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부비는 마침내 업성을 버릴 결단을 내렸다. 애초에는 장안으로 가려고 했으나 8월 호관(산서성 장치북쪽)에 와있던 전진의 유주자사 왕영이 초청하자 부비는 업의 주민 6만 명을 이끌고 성을 나와 서쪽으로 향해 태원쪽으로 나아갔다. 연왕 모용수는 그제야 모용화를 보내 업에 진수하게 하였다.(AD385년 8월) 

 

(49) 부견과 서연 모용충의 격돌(AD385)

 

AD385년 정초 아침에 부견은 여러 신하들을 불러 향응을 베풀었다. 당시 기근이 심하고 또 세금을 걷기가 어려웠으므로 성안의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음식을 본 장수들은 입안에 음식을 넣고 집으로 돌아가 토해 낸 음식으로 식구를 먹일 정도로 사정이 악화되었다.

 

아방궁에서 황제자리에 오른 서연의 모용충은 수시로 전진의 부견 군사와 전투를 벌여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모용충은 상서령 고개를 보내 야밤에 장안성 남쪽을 습격했으나 태자 부굉이 훌륭하게 고개의 군사를 격퇴했다.(AD385년1월) 이어서 부견은 아방궁을 공격하여 모용충을 크게 격파하였으나 후방습격이 두려워 아방궁으로 진입하지는 않았다. 부견이 모용충과 각축하는 동안 부견의 아들 부휘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예주(낙양)에서 자주 모용충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부견이 그런 부휘를 몹시 꾸짖었다. 

 

“ 너는 나의 재주 있는 아들이 아니냐.

  큰 군대를 가지고도 백로(선비족)에게 

  자주 패배하니 살아도 어디에 쓰겠느냐?“ 

 

부휘는 분개하여 자살하고 말았다.(AD385년 3월) 두 달 뒤 5월 모용충은 장안을 습격했다. 부견은 전쟁을 독려하는 중에 온 몸에 화살을 맞았다. 장안성은 모용충 군대의 폭행과 약탈로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도망가고 없었다. 도로가 끊어지고 집에는 연기가 없었다.  

 

모용충의 군영에 속했던 사람이 부견에게 와서 몰래 군사를 파견해주면 모용충의 군문을 열어 주겠다고 제안해 왔다. 말하자면 결사대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부견은 자신의 군사를 죽을 것이 확실한 적지로 차마 보낼 수가 없어서 망설였다. 계속해서 결사대 요청이 오자 부견은 700명 기병을 골라 보내 모용충의 군영내로 들어가 불을 놓았는데 모두 빠져 나오지 못하여 불에 타 죽었다. 슬픔에 잠긴 부견은 도참서의 말에 “황제가 오장산(섬서성 기산 동쪽)으로 나오면 오래 간다.”는 말을 믿고 부인과 기병 수 백 명을 거느리고 장안을 빠져 나갔다. 아들 부굉에게 장안 수비를 맡겼다. 부굉은 장안을 수비할 능력이 없었다. 부굉은 장안을 나와 서쪽 하변(감숙성 성현)으로 달아났다. 전진의 백관은 뿔뿔이 흩어지고 사예교위 권익 등 수 백 명은 요장의 후진에게로 갔다. 부굉이 하변에 도착했지만 남진주자사 양벽은 부굉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양벽은 부굉의 누나 순양공주의 남편이니까 매형인 셈이다. 순양공주는 배신한 남편을 버리고 부굉을 따라 방랑의 길을 나섰다. 

  

(50) 요장의 부견 체포와 부견 죽음(AD385)

 

약 두 달 뒤인 7월 부견은 오장산에 도착했다. 끝까지 따라온 호위기병은 10여기였다. 후진 요장은 오충을 보내 부견을 체포했다. 요장은 부견에게 전국새를 요구했다. 그렇게 하면 은혜를 베풀 수도 있다고 회유했다. 부견은 눈을 부릅뜨고 요장에게 욕했다.

 

[그림] 후연의 세력도(AD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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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강족 놈이 감치 천자를 핍박하느냐?

  옥새는 이미 동진으로 보냈으니 내게는 없다.“  

 

요장은 다시 윤위를 보내 양위하라고 유세했다. 부견이 요장을 꾸짖었다.

 

“ 선양이란 성현의 일이다.

  너 같은 반란 도적에게 어찌 선양할 수가 있겠느냐!“

 

부견은 윤위에게 전에 직책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윤위는 상서령사로 있었다고 대답했다. 부견이 탄식했다.

 

“ 경은 왕경락의 무리이고 재상의 자질을 지녔는데 

  내가 그동안 그것을 몰라 봤으니 망해도 마땅하구나! “

 

평소 부견은 요장을 매우 아끼고 후대한 까닭에 자신의 처지에 더욱 화가 났다. 자신의 딸들이 욕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보와 부금을 죽였다. 그리고 요장에게 빨리 죽여 주기를 간청했다. 요장은 사람을 보내 부견을 신평(섬서성 빈현)의 절로 옮겼다. 부견은 절 안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AD385년7월26) 부견의 나이 48세 였다. 부인 장씨와 어린 아들 부선은 자살을 택했다.      

 

(51) 모용수의 천도(AD385)

 

AD385년 경 후연의 세력은 북쪽으로 용성(요녕성 조양)으로부터 서쪽으로는 태원 그리고 남쪽으로는 산동성의 제남과 임청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으로 펼쳐져 있었다. 북경과 업을 오가던 모용수는 북경이 너무 북으로 치우쳐있고 또 과거 전연의 영토가 회하까지 뻗어져 있었으므로 수도를 북경 남쪽으로 옮기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청하(산동성 임청)에 주둔하던 모용수의 넷째 아들 모용린이 박릉(하북 안평)을 지키고 있던 전진의 평주자사 왕연을 공격해 왕연과 부장 부감을 체포했다. 양식이 다 떨어진 성 안에서 왕연의 부하 장의가 무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는 바람에 손쉽게 박릉을 장악한 것이다. 박릉은 중산에서 남동쪽으로 60여 KM 떨어진 곳으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중산은 낙랑왕 모용온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모용준의 넷째 아들로 모용수에게는 조카인 셈이다. 모용수가 그에게 중산을 맡기자 그는 선한 정치를 펴서 많은 사람들이 귀속하여 들어왔고 창고는 넘치고 군사는 강해졌다. 중산지역 방위를 위협하는 왕연 세력을 무너뜨리고 모용수는 새 도읍으로 중산(하북성 정주)을 택했다. 다음 해인 AD386년 정월에 모용수는 중산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대사면을 내림과 아울러 연호를 건흥으로 고쳤고 종묘사직을 수리하였다.

 

(52) 서연의 내분(AD386)

 

장안을 장악하게 된 서연의 모용충(冲)은 장안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좀 부서지기는 했지만 모든 시설도 제대로 잘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동쪽의 모용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약 17년 전 AD370년경 부견에 의해 장안으로 옮겨진 많은 선비족 사람들은 모두들 동쪽 고향(주로 요동지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이런 불만을 잘 알고 있던 좌장군 한연이란 사람이 모용충을 시해하고 단수라는 사람을 세워서 왕으로 삼고 연호를 창평으로 고쳤다. 쿠테타인 셈이다. 이 때 모용충은 27세였다. 서연 복야 모용항과 상서 모용영은 즉각 단수를 습격하여 죽이고 모용충의 사촌동생(모용환의 아들) 모용의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40여만 명 선비족 인구를 이끌고 장안을 떠나 동쪽으로 이동해 나갔다. 

 

실권을 잡은 모용항의 동생 모용도는 형의 이런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몰래 모용의를 불러내 길에서 죽이고는 무리를 다시 장안으로 돌리려 했다. 형 모용항은 동생 모용도를 크게 꾸짖고 내쫓아버렸다. 모용항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모용영이 모용도를 습격하자 모용도가 패하여 형님 모용항의 군영으로 도망갔다. 모용항은 시해된 모용충의 어린 아들 모용요를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선비족 무리들은 모두 모용항-모용요를 버리고 모용영에게로 달아났다. 모용영은 모용요를 잡아 죽이고 대신 모용홍의 아들 모용충(忠)을 새 황제로 옹립했다. 모용충은 모용영을 국정 최고책임자 태위 및 수상서령으로 삼고 하동공의 자귀를 내렸다. 모용영은 법을 관대하고 공정하게 시행하여 민심을 크게 얻었다. 무리들이 산서성 문희에 이르렀을 때 모용수가 황제 다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 부근에 성을 쌓고 머무르기로 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조운이라는 자가 모용충을 살해하고 대신 모용영을 추대하여 대도독중외제군사로 삼고서는 후연에 번속하겠다고 약속해 들어왔다.

 

[그림] 후연 및 서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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