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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 혼군(#6A) 후조(後趙)의 석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3월06일 23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3월06일 22시56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9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 후한이 망하고 진(晉)나라가 통일하다.

 

후한(AD25-AD220)이 망할 즈음 중국은 조조의 위(魏)나라와 손권의 오나라와 유비의 촉나라로 삼국이 분열되었다. 이 상태에서 후한은 AD220년 조조 아들 조비에게 황제자리를 강제로 물려주자 다음해(AD221년) 유비가 독립하고 9년 뒤(AD229) 오나라 또한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중국은 사실 상 위, 촉, 오 세 나라의 분열시대(AD229-AD280)가 열린 것이다. 유비가 세운 촉한은 42년 뒤인 AD263년 위나라 정서장군 등애에게 멸망당함으로써 중국은 위와 오 두 나라의 양립 상태가 되었다. 촉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등애와 종회는 각각 태위와 사도로 승진했지만 교활한 종회가 군권을 장악한 등애를 시기하여 무고로 제거시킨 다음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죽었다.(AD264) 결국 촉한을 정벌한 두 공신이 서로 싸우다가 자멸한 셈이 되었다. 정적이 사라진 위나라 조정은 이제 완전히 사마소가 장악하였고 스스로 지위를 진공(晉公)에서 진왕(晉王)으로 올렸다(AD264). 그러나 다음 해에 사마소가 죽자(AD264년 8월9일) 세자 사마염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위나라를 윽박질러 원제(元帝) 조환으로부터 황제자리를 물려받았다.(AD264년12월13일) 진나라 무제 사마염은 4년 뒤인 AD279년 대도독 가충의 지휘아래 대군을 보내 오나라의 손호를 멸망시키고 AD280년 중국을 다시 통일한다. 
   

(2) 사마염의 사망(AD290)과 다시 혼란에 빠지는 중국과 석륵 등장

 

중국을 통일한 54세 무제 사마염은 AD290년 연초부터 위독하더니 결국 3월 20일 죽었다. 황태자 사마충이 자리를 이었지만 병중인 사마염 곁에서 홀로 병 수발을 들던 황후 양지의 아버지 양준이 정치를 완전히 장악했다.
후조(後趙,AD319-AD351)의 창업자 석륵(石勒)은 AD274년 지금의 산서성 태원 남쪽 100여 KM 아래 무향현에서 갈(羯)족 소추장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다. 원래의 성은 석씨가 아니라 복(匐) 혹은 배(㔨)였을 것이라는 학설이 있다. 석륵은 다섯 이민족(五胡)의 하나인 갈족은 지금의 감숙성을 주된 무대로 이리저리 떠돌던 유목민 월지국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석륵이 이십 대 젊은 청년이었던 AD300년경 고향 병주(幷州,지금의 산서성 太原)에 큰 기근이 들었다. 생계가 어려운 석륵과 갈족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고 난민처럼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8왕자의 난(AD292-AD306) 한 가운데 있던 서진(晉)나라의 지방정부는 유랑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판돈으로 군비를 충당해야할 정도로 궁핍했다. 석륵도 이때 서진 군대에 잡혀서 사환(師懽)이라는 산동현 치평 사람에게 팔렸다. 그러나 석륵이 똑똑하고 무예가 출중했으며 담력이 크기가 보통 사람을 뛰어 넘는 것을 보고 사환은 그를 풀어주었다.

 

마침 사환의 집은 군대의 목장 부근에 있었으므로 풀려난 석륵은 목장의 팔왕자의 난의 여섯 번째 실권자(AD304.1-AD304.11) 사마영의 측근이었으나 사마영이 사마옹에게 실각하면서 내쫓겨 목장을 관리하고 있던 급상(汲桑)과 쉽게 어울렸다.[팔왕자의 난에 관해서는 본 칼럼 2016년 11월30일, 나라를 삼켜버린 혼군(#1) 참조 바람] 울분에 찬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여 수백 명의 도적떼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AD305년). 이 때 사마영의 측근이다가 쫓겨난 장군 공사번이 무리를 모아서 실세 사마옹에게 대항하는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급상과 석륵도 공사번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때 급상이 처음으로 석씨라는 성과 륵이라는 이름을 준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3) 공사번의 사망(AD306)과 떠오르는 급상과 석륵


태재 사마옹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실권자 성도왕 사마영은 공사번이 하북에서 무리를 모아 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로 도망가다가 잡혀서 업성에 유폐되었다. 공사번은 그 소식을 듣고 사마영을 구출하기 위해 즉각 군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려 했으나 서진나라 연주자사 구희에게 잡혀 목이 날아갔다. 공사번을 따르던 급상은 스스로 대장군이라고 부르며 나머지 무리를 모아 곳곳을 떠돌며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면서 공공연히 성도왕 사마영을 위해 복수를 갚겠다고 떠들어댔다. 급상의 선봉에는 항상 석륵을 세웠는데 석륵은 가는 곳마다 대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급상은 석륵에게 토로장군이라는 직함을 주고 무리를 이끌고 사마영이 갇혀있는 업성(하북성 한단)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사마영은 가짜 조서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죽은 뒤였다. 격노한 급상은 업성을 무자비하게 공략하여 성을 지키던 사마등 일당을 무참하게 죽이고 업궁에 불을 놓았다. 기록에 의하면 조조가 AD117년 세웠던 업궁은 190년 만에 소실되는데 궁이 얼마나 컸던지 열흘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했다.(AD307년 5월) 급상은 사마영의 관을 싣고 다니면서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관을 향하여 정중히 신고를 한 뒤에야 나섰다. 

 

(4) 구희에게 패하여 도망다니는 급상과 석륵(AD307)

 

업성을 불태우고 수만 명을 죽이기는 했으나 급상과 석륵의 군대는 잘 짜인 조직과 규율이 없는 오합지중에 불과했다. 지난 해 말 사마옹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은 사마월과 서진 조정은 국력을 기우려 급상과 석륵 소탕에 나섰는데 그 중심에 연주자사 구희가 있었다. 석륵과 구희는 지금의 산동성 평원(덕주 남쪽)과 하북성 대명현 부근에서 30여 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 사마월은 7월 대군을 이끌고 하북성 관도로 올라와 구희를 지원하였다. (AD307년 7월1일) 사마월의 지원을 받은 구희는 급상을 산동성 동무양에서 대파하였다. 급상의 무리를 남겨두면 후환이 생길 것으로 판단한 구희는 끝까지 쫓아가 1만 여명 이상을 죽였다. 다급해진 급상과 석륵은 나머지 잔당을 거느리고 유연이 세운 전조(前趙, 漢趙라고도 함)로 도망가려 했으나 이 또한 도중에 적교(산동성 임청현)에서 정소에게 막혀 실패했다. 급상은 할 수 없이 고향인 치평으로 돌아갔고 석륵도 고향부근인 낙평(산서성 석양)으로 도망갔다.


(5) 석륵을 품은 흉노추장 장배독과 풍막돌(AD307년 9월)이 유연에게 투항(AD307년 10월)

 

치평으로 돌아간 급상은 그 지역에서 일어난 또 다른 반란세력인 전견, 전란 등에게 피살되었다.(AD307년 12월2일) 이 반란세력은 사마영에게 죽은 사마등을 지지하던 세력이었으므로 사마영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을 우물에 던져 버렸다. 태원지방으로 도망간 석륵은 상당(산서성 장치)에서 세력을 모아가던 흉노족 추장 장배독과 풍막돌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지금 유선우(유연을 말함)께서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와 다투고 있는데
  장군들께서는 동족이면서도 유선우와 대적하시려고 하시니
  결국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십니까? “

 

장배독과 풍막돌이 대답했다.

 

“ 어렵긴 할 것이오.”

 

석륵이 다그쳤다.

 

“ 그렇다면 어찌 일찌감치 유연장군에게 들어가시지 않으시오.
  지금 모든 부락들이 속속들이
  상을 주고 우대하는 유연 아래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장배독도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결정했다. 장배독과 석륵이 단기로 말을 달려 유연에게로 가서 투항했다. 유연은 장배독에게 친한왕, 풍막돌을 도독부대, 석륵을 보한장군∙평진왕에 임명했다.(AD307년 10월)

 

오환(烏桓:북방이민족)족 추장 장복도리는 낙평(산서성 석양)부근에 성을 쌓고 저항하고 있었는데 유연이 여러 번 초청했었지만 응하지 않아고 버티었다. 석륵은 자기 고향이기도 하여 거짓으로 유연에게 죄를 얻었다고 하면서 장복도리에게로 접근했다. 장복도리도 능력과 진심을 믿었으므로 석륵과 의형제를 맺고 우대했다. 장복도리가 석륵을 보내 일으킨 전쟁을 모두 이겨서 돌아오자 주변 여러 부락들은 석륵을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민심을 얻게 된 석륵은 마침내 장복도리를 가두고 여러 부족들에게 물었다.

 

“ 나와 장복도리 중에서 누가 무리를 이끌어가는 것이 좋겠소?”

 

모두 석륵을 추천하였다. 석륵은 장복도리를 풀어주고 모든 무리를 이끌고 유연의 전조에게 항복하였다. 유연은 석륵에게 독산동정토제군사(督山東征討諸軍事)라는 직책을 수여했다. 산동지역을 정복하고 토벌하는 최고군사지휘자라는 직책이다. 


(6) 틀어지는 사마월과 구희(AD307)

 

서진 실권자 사마월은 원래 연주자사 구희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그러나 산동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실력자 구희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핵심이 사마 반도(潘滔)였다. 반도가 사마월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연주(지금의 개봉일대)는 그야말로 요충지입니다.
  과거 위나라 조조가 이 지역을 거점으로 창업했습니다.
  지금 이 지역을 관장하고 있는 구희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큰 뜻을 품은 사람으로서
  뱃속의 걱정거리 같은 사람입니다.

  만약 청주자사 자리를 주면 반드시 기뻐 받을 것입니다.
  공께서 직접 연주지역을 다스리시면서 실력도 키우고
  동시에 강력한 경쟁자 구희를 제거할 수 있는 묘책입니다.“

 

사마월도 그렇게 생각하고서 구희에게 정동대장군과 함께 도독청주제군사라는 지위를 내렸다. 연주에서 청주로 자리를 옮기라는 명령으로써 사실상 좌천인 셈이었다. 사마월 본인은 승상과 영연주목 및 도독연예사기유병제군사의 직책을 가졌다. 도독연예사기유병제군사란 연주, 예주, 사주, 기주, 유주 및 병주의 6주 군권 총책임자 자리다. 구희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을 쫓아낸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로부터 구희는 사마월과 벌어졌다. 동생 구순에게 청주를 맡기고 스스로 산동 일대를 관장하면서 왕미, 유령과 같은 강력한 반란군들을 몰아내었다. 대부분의 반란군들은 구희와 구순에게 밀려서 쫓겨 다니다가 대부분 유연의 전조에 투항하고 말았다. 유연은 항복한 왕미에게 진동대장군 및 도독연해제군사라는 직책을 내렸다.(AD307)            <다음에 계속>

 

[그림. 1] 구희와 석륵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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