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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0 : 정통의 전량(前涼)을 실질적으로 무너뜨린 장조(d)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17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6월20일 12시14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20) 유요의 성고관(호뢰관) 전투(제1차 전-후조 전쟁) 패배와 와병(AD325)

 

AD320년대 초 유요가 동쪽의 강력한 석륵의 후조에 막혀 오로지 서쪽 전량(지금의 감숙성)으로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는 동안 석륵은 무서운 기세로 중원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남쪽으로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동진의 서주(안휘성)지역 영토를 침략했고 북쪽으로는 요동지역을 놓고 우문걸득귀 및 모용외와 다투었다. 이제 전조와 후조의 마찰은 불가피해졌다. 두 나라 군대의 접촉점은 지금의 낙양 부근인 호뢰관이었다. 당시 낙양은 석륵의 부하 석생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조 유요는 유악과 1만5천 군사를 보내 동쪽으로 진군시켜 맹진(하남성 맹진현. 낙양 북쪽)에 도달한 뒤 석생의 낙양을 포위했다. 

 

석호는 4만 군사를 보내 석생을 지원했다. 석호의 군대는 압도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유악의군대를 성고관(하남성 호뢰관)에서 유악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유요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군사들이 야략(夜掠,알 수없는 야간공포감)에 휩싸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석호는 의기양양 낙양을 점령하였으며 사로잡힌 전조 장수 유악 등 80여 명은 형태로 압송 되었다. 석륵은 장안 지역을 제외한 황하 이북의 거의 모두를 장악하게 되었다. 전조 내부에서도 후조에게 귀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장안으로 돌아 온 유요는 소복을 입고 교외에 나가 7일 동안 곡을 하다가 돌아왔다. 그의 분노가 병이 되었다.

 

유요는 영안왕 유윤을 대사마, 대선우 남양왕으로 고쳐 책봉하고 모든 관직은 호족, 갈족, 선비족, 저족, 및 강족의 이민족 만 임명했다. 그것은 아마도 호뢰관 전투에서의 패전이 한족 관리들의 무능함과 나태함, 그리고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1) 장준의 전조 배반과 하남 실지(AD327)

 

유요가 후조의 석륵에게 호뢰관에서 패배하자 장준은 전조가 AD323년 내려 준 작위를 버리고 대신 동진의 작위인 대장군과 양주목을 채택했다. 그리고 무위태수 두도, 금성(감숙 난주)태수 장랑, 무흥(무위부근)태수 신암 및 양열장군 송집을 보내 금성에 있는 한박과 만나서 유요를 공격했다.(AD325년 5월) 전조 장수 유요의 아들 유윤은 적도(감숙 임조)에서 주둔하며 전량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가을) 부한에 있던 호군 신안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보내왔다. 장준은 급히 한박과 신암에게 구원을 명령했다. 신암은 공격을 미루는 한박에게 공격을 재촉하자 한박이 이렇게 말했다.

 

  “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해와 별자리에 자주 변화가 있어서

    가볍게 움직일 수 없소. 

    또 전조는 석륵과 대치하는 형편이니 

    오래 우리와 대치할 수 없을 것이요.“

 

한박과 전량 군사는 유윤과 70여일 대치했다. AD327년 10월 한박은 신암을 보내 금성의 곡식을 운반시켰다. 전량이 대규모 군량을 이동시킨다는 정보를 입수한 유윤이 이렇게 말했다.

 

  “ 한박의 무리는 우리 열 배다.

    양식이 달리는 우리는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지금 저들이 옮기려는 곡식은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다.

    신암만 물리치면 한박은 자연히 궤멸될 것이다.“

 

기병 3천을 이끌고 옥천령에서 신암을 습격했다. 신암을 격파한 다음에는 한박을 압박하여 패퇴시켰다. 유윤의 군대는 이긴 기세를 몰아 황하를 건너 영거(감숙성 영등)를 공격하여 탈취하고 2만여급을 참수한 뒤 진무(감숙성 영등부근)에 주둔했다. 전량의 장수 장랑과 신안 등은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전조에 항복했다. 이로써 장준이 하남 땅을 크게 잃었다. 

 

 

(22) 장준의 엉뚱한 장안공격 계획(AD328) 

 

유요가 석호의 4만 대군을 고후(산서성 안읍)에서 격파하고 이어 동쪽 낙양으로 진군했다. 지난번 호뢰관 전투에서 뺏긴 낙양을 탈환하자는 전쟁이다. 장준은 이 틈을 타 텅빈 장안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삼년 전 빼앗긴 하남 땅도 이 기회에 수복할 생각이었다. 이조낭중 색순이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 유요가 동쪽 정벌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장안은 유능한 아들 유윤이 방어하고 있습니다.

    쉽거나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조금 얻는 것이 있다손 친들 

    그들이 다시 동쪽을 수습하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돌아온다면

    어떤 경우든 우리로써는 화란의 크기를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장준이 장안 공격계획을 접었다. 

참조:<35> 석호의 복수와 성고관(호뢰관) 전투(3차 전-후조 전쟁) 승리(AD328년 11월)

 

 

(23) 전조의 멸망(AD329)

 

제1차 전후조 전쟁(호뢰관전투,AD325)에서 낙양을 점령했다가 제2차 전후조 전쟁(AD328년8월)점령했던 낙양을 다시 유요에게 뺏긴 석륵은 낙양을 다시 탈환할 생각이었다. 정하가 반대하고 나섰다.

 

  “ 유요가 군사를 천리 가까이 벌여 놓았으니

    가만 두어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왕은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움직이시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석륵은 정하를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장수 서광에게 물었다.

 

  “ 유요는 분명히 지금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

    모두들 그가 승세를 타니 예봉을 피하자고 하는데

    갑옷 정병 10만을 가지고 포위하고서도

    100일이 지나도록 함락을 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군사는 늘고 게으른 것이 분명하다.

    내가 정예병을 가지고 공략하면 한 번에 격퇴가 가능하다.

    지금 낙양을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양국(후조의 수도)이 위태로워 질 것이고 

    황하 북쪽에서부터 자리를 밀 듯 밀려 내려오면

    내 할 일은 구름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정하는 공격을 반대하고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 

 

서광이 웅크리며 말했다.

 

  “ 유요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석륵이 서광을 칭찬하며 말했다.

 

  “ 자네의 말이 옳다.”

 

석륵은 전쟁에 반대하는 자들의 목을 즉각 베어 버리고 군대를 규합했다. 석감, 석총, 도표 등의 군사를 모두 형양 부근에 모았다. 중산공 석호에게 석문을 지키라고 하고 석륵 본인은 4만 군사를 이끌고 유요가 점령하고 있는 낙양 금용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부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약 유요가 성고관에 많은 군사를 집결시켜 놓았으면 우리로는 하책이고,

    낙수를 막고 있으면 중책이며,

    낙양을 지키고 있으면 상책이다. 들어가서 사로잡으면 끝이다.“

 

석륵의 후조군사가 성고관에 집결했다. 보병 6만에 기병 2만 7천의 대군이었다. 유요는 낙수에 집결해 있었다. 유요의 군대는 10만 이었다. 석륵은 웃음을 띠며 축하할 만 하다고 중얼거리며 낙양으로 진격했다. 석륵의 군사와 유요의 군사는 낙수를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이 때 유요는 술에 취해 있었다. 젊어서도 술을 좋아 했지만 말년에 가서는 더욱 심해졌다. 전쟁을 앞두고도 몇 말씩 술을 들었다. 말에 올라타고도 술에 취해 고개를 숙이기 일쑤가 되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말을 아예 조랑말로 바꾸어 버렸다. 석감의 공격을 받은 전조의 군사들이 퇴각하면서 술에 취한 유요는 달아나다 말이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떨어졌고 10여군데 칼과 창을 맞은 뒤 석감에게 사로잡혔다. 전조의 군사는 대패했다. 석륵이 명령을 내렸다.

 

  “ 잡고자 하는 사람을 잡았으니 

    적군이 도망가게 내버려두라. “ 

 

사로잡힌 유요가 석륵을 보자 말했다.

 

  “ 석왕은 중문에서의 맹세(重門之盟, 하남성 휘현의 북문)를 기억하시오?”

 

중문에서의 맹세란 18년 전 유총과 유요와 석륵이 서진 태수 배정을 포위하면서 맺은 우호의 맹세를 말한다. 석륵은 서광을 시켜 유요에게 말 하였다.

 

  “ 오늘의 일은 하늘이 만든 것이오.

    다시 옛 일을 말해 무엇 하겠소.“

 

석륵은 유요를 다그쳐 빨리 항복하라는 편지를 아들 유희에게 띄울 것을 재촉했다. 유요는 유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와 사직을 바꿀 생각을 하지마라.”

   

석륵은 이마를 찌푸리며 화를 냈다. 한 참 지나서 유요를 처단했다.(AD328년12월) 낙양이 석륵에게 재점령되고 아버지 유요가 잡혀 죽자 태자 유희는 남양왕 유윤과 함께 당장 서쪽, 즉 지금의 감숙성 방향으로 도망가려 했다. 거기는 정량의 땅이다. 상서 호훈이 말리며 나섰다.

 

  “ 비록 주군을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국의 강토는 건재하고

    장수와 병사들 또한 배반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땅히 힘을 합하여 막을 생각을 않고 먼저 도망갈 생각부터 하십니까?

    힘으로 막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때 도망을 생각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   

 

남양왕 유윤은 호훈이 자신을 막아서는 것에 분함을 느끼고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전조의 백관을 이끌고 상규(감숙성 천수)로 달아났다. 조정이 떠나버린 전조의 도읍지 장안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몇 몇 잔당들이 장안을 점거하다가 결국 석륵에게 모두 투항하고 말았다. 

 

다음해 남양왕 유윤은 수 만 군사를 이끌고 천수를 나와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AD329년8월)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살고 있던 여러 이민족들이 모두 유윤에게 호응했다. 군사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유윤군은 서안 북쪽 50KM 지점인 중교(섬서성 예천)까지 도달했다. 석륵 휘하 석생은 굳게 성문을 닫아걸고 방어에 치중했다. 석륵의 부하 중산공 석호가 2만 군사로 지원을 오고 있었다. 9월 석호의 군사가 의거(감숙성 영현)에서 유윤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일격을 당한 유윤군사는 황급히 상규(천수)로 도망쳤다. 석호는 끝까지 뒤를 쫓아 결국 태자 유희, 남양왕 유윤, 그리고 공경 이하 3천여 명을 체포하여 모두 살해하고 유민 9천 명을 수도 양국(산서성 임분)으로 압송했으며 여러 지역에 흩어 져 살고 있는 흉노무리 5천여 명을 낙양까지 끌고 와 거기서 산 채로 묻어 버렸다. 이로써 AD304년 선비족 유연에 의해 건국된 전조는 25년 만인 AD329년 9월 같은 선비족 석륵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24) 전량의 영토 확장과 후조에 칭번(AD330)

 

전조가 망하자 전량 장준은 전조가 장악하고 있던 황하 이남 땅을 모두 거두어들일 수가 있었다. 전량의 주력군은 적도(감숙성 임하)에 주둔하면서 후조와 경계를 삼았다. 후조는 AD330년 6월 맹의를 파견하여 장준에게 정서대장군과 양주목과 구석을 내렸다. 후조로써는 전량을 제거하고 싶었지만 망한 전조의 영토를 수습해야하고 또 강남 동진의 북벌정책을 막아야 했으므로 지금 전량과 전투를 벌일 형편은 되지 못했다. 따라서 전조 조정이 내렸던 것과 거의 같은 지위를 전량에게 내려서 일단은 안정시키자는 계획이었던 셈이다. 장준은 후조의 관작을 수치로 여겨 사신 맹의를 가두어버렸다.(AD330)

 

전조를 멸망시킨 석륵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AD330년9월) 휴도왕 석무는 AD322년 전조에 투항했었는데 그 아들 휴도왕 석강은 후조에 복속하지 않았다. 하동왕 석생이 석강을 공격하자 석강은 전량으로 도망갔다. 석강이 자신의 나라로 들어오자 장준은 당혹했다. 후조의비위를 건드리면 좋을 것이 없었다. 즉각 억류하고 있던 맹의를 후조로 돌려보냈고 동시에 장사 마선을 보내 신하를 자칭하고 조공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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