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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9 : 우문태·우문옹의 업적을 탕진한 북주(北周)의 우문빈<E>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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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10월14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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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25> 하발악의 사마 우문태가 하주(정변)를 장악하다(AD533)

 

관중대행대 하발악은 부하인 풍경을 진양에 있는 고환에게 보냈다. 고환은 심히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하발공은 마치 내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소.“ 

 

그리고 풍경과 삽혈하여 하발악과 의형제를 맺었다. 돌아온 풍경은 하발악에게 고환이 매우 간사하여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하발악의 사마 우문태도 사신을 자청하여 진양으로 가서 고환을 만났다. 고환은 우문태의 기이한 모습을 보고 잡아두려고 했지만 꼭 돌아가서 상관에게 보고해야한다고 하므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곧 크게 후회하여 군사를 보내 추격했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우문태가 추격을 예상하고 놀라운 속도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붙잡히지 않았다. 장안으로 돌아온 우문태는 하발악에게 이렇게 말했다.

 

  ” 아직 정권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공을 형제로 삼자고 한 것입니다.

    후막진열의 무리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공께서는 몰래 대비를 하셔서 고환을 쉽게 도모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문태가 여러 가지 전략을 말하자 하발악이 매우 기뻐하며 그를 낙양에 보내 그 내용을 비밀리에 북위 황제에게 보고했다. 만족한 황제는 우문태에게 위무장군의 칭호를 내렸다. 8월에 황제는 하발악에게 도독옹화등이십주제군사, 옹주자사를 내리고 신뢰의 뜻을 보이기 위해서 가슴 앞의 피를 뽑아서 사자에게 주어 보냈다. 하발악이 말을 먹인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서쪽 평량(감숙성 화정)으로 들어갔다. 곡발이아돌, 흘두릉이리, 비아두만사 등이 하발악에게 호응해 들어왔고 철륵사람 곡률사문등도 투항해 들어왔다. 다만 영주자사 조니는 고환에게 붙었다. 진주, 남진주, 하(河)주, 위주의 네 주가 평량에 모여 하발악의 지휘를 받기로 약속했다. 하(夏,정변)주가 매우 중요하여 누구를 맡길까 고민했는데 모두들 우문태를 추천하므로 하발악이 말했다.

 

  ” 우문좌승이야 말로 나의 오른 팔 왼팔 같은 사람이다.

    어찌 마다할 수가 있겠는가! “       

 

며칠을 즐거워하더니 돌연히 표문을 올리고 그를 기용했다. 고환은 하발악과 후막진열의 세력을 넓혀감에 따라 양 세력 간에 이간정책을 쓰기로 하고 우승 적숭을 파견했다. 적숭은 후막진열에게 가서 조만간 하발악이 공격해 들어올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26> 하발악의 사망과 우문태의 집권 : 하곡(河曲)의 변(AD534)

 

하발악이 고환에게 붙은 영주자사 조니를 토벌하려고 우문태와 상의하였다. 우문태는 조니보다 후막진열을 먼저 공격하자고 했다. 그러나 하발악은 우문태의 말을 듣지 않고 후막진열과 함께 조니를 치러 가기로 했다. 그러나 후막진열은 이미 북제의 첩자 적숭으로부터 하발악이 배반하고 자기를 공격할 것이라는 반간 계략을 믿고서 거꾸로 하발악을 잡을 생각을 품고 있었다. 하발악의 참모 뇌소가 그 가능성에 대해서 경고했지만 하발악은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하발악과 후막진열이 함께 출병하여 북으로 진군하는 도중에 하곡에 이르렀을 대 후막진열이 하발악을 군영으로 초대했다. 식사를 같이하던 중 후막진열이 배가 아프다고 빠진 사이에 그의 사위 원홍경이 들어와 하발악의 목을 베었다. 후막진열은 본거지인 농(감숙성 장랑)으로 돌아갔다. 하발악의 남은 무리들은 우문태를 추대했다. 우문태는 장좌들과 빈객들과 그 문제를 의논했는데 하늘이 준 기회니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우문태가 말했다.

 

  ” 후막진열이 원수(하발악)를 해친 다음 

    승기를 타고 바로 평량으로 가지 않고

    군사를 물려서 본거지 수락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나는 그의 무능함을 알았다. 

    무릇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것이 때(時)다.

    만약 서둘러 부임하지 않으면

    민심이 장차 떠날 것이다.“  

 

우문태가 좌장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고환이 하발악 무리를 위무하려고 후경을 보냈는데 우문태가 화를 내며 말했다.

 

  ” 하발공이 돌아가셨지만 엄연히 내가 있는데 

    경은 무슨 짓을 하자고 온 것이요! “  

 

후경이 실색하며 말했다.

 

  ” 저는 오로지 그대의 활 앞에 있을 뿐입니다.

    마음대로 쏘셔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우문태는 후경을 돌려보냈다. 고환이 다시 후경과 장화원과 왕기를 보내 하발악의 사망을 위로하려고 했다. 우문태는 그들을 억류하면서 사로잡아 두려고 했지만 장화원이 말했다.

 

  ” 밝으신 공께서 저희 사자들을 죽음으로 위협하시지만

    그것은 저 화원이 두려워하는 바가 아닙니다.“

 

우문태는 그들을 돌려보냈다. 왕기가 돌아와서 아직 안정되지 않은 지금 북제를 공격해야 한다고 재촉하자 고환이 말했다.

 

    ” 경은 하발악과 후막진열을 보지 못하고 하는 소리요.

      나는 당연히 꼼꼼히 생각해보고 움직여야 하오.“

 

<27> 우문태의 후막진열 토벌(AD534)

 

위 주군이 하발악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우문태와 후막진열을 조정으로 불렀다. 후막진열은 이미 고환의 반간계에 넘어가 북제 고환 편에 서 있었으므로 소환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소환을 해놓고 거부해야만 토벌의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우문태는 후막진열을 심하게 비난했다. 황제와 함께 북위 종묘사직을 구하기로 맹세했던 후막진열을 반란을 일으킨 수장으로 규명하고 도리어 토멸대상으로 규정했다.

 

우문태는 먼저 후막진열의 영향 하에 있는 원주(영하자치구 고원)자사 사귀를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우문태가 강군을 가지고 쳐들어오자 남진주자사 이필은 후막진열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후막진열은 거절하고 우문태를 막았다. 우문태의 대군이 고원에서 남쪽으로 밀려오자 후막진열은 상규(감숙성 천수)로 후퇴하여 이필과 같이 우문태를 방어했다. 그러나 이미 이필은 이미 질 것을 알고 우문태와 내통하다가 성문을 열고 투항해 버렸다. 후막진열은 도주의 길에 올라 여기저기 방랑하다가 조니에게로 갈 생각으로 영주(영하자치구 은천)로 달아났다. 우문태의 기병들이 빠르게 따라 붙자 목을 매고 자살했다. 이제 황하 이서 관중 지역은 사실상 우문태가 지배하는 영역이 되었고 황하 이동지역은 고환의 세력권으로 양분된 셈이다.

 

고환은 달콤한 말로 우문태에게 편지를 보내 동맹을 하자고 했다. 우문태는 거절했다. 장궤를 시켜 황제에게 고환의 편지를 보냈다. 북위조정에 있던 곡사춘이 장궤에게 물었다.

 

  ” 하발공과 비교하면 우문은 어떻소?“  

 

장궤가 이렇게 답변했다.

 

  ” 문장실력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만하고(文足經國)

    무력으로는 반란을 평정하기에 충분합니다(武足定亂).“

 

위 주군은 만족하여 우문태에게 조금씩 동진하여 고환을 압박하라고 명했다. 신임 옹주자사 양어가 우문태의 명을 받고 군대를 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장안을 접수했다. 조정에서는 우문태에게 시중, 표기대장군, 관서대도독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28> 북위 황제 원수의 고환 제거 책략(AD534)

 

북위 황제 원수에게는 평원공주라는 동생이 있었다. 평원공주를 두고 봉융지와 손등이 다투었는데 결국 평원공주는 봉융지에게 시집을 갔다. 평소 봉융지는 고환과 가까워서 고환에게 곡사춘이 고환을 배반할 가능성이 있다고 귀띔을 했었다. 평원공주를 얻지 못한 손등은 곡사춘에게 봉융지가 고환축출 음모를 고환에게 귀띔한 사실을 알려줬다. 곡사춘은 즉시 황제에게도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봉융지는 고향으로 도망쳤다. 고환은 봉융지를 진양으로 불렀다. 봉융지를 밀고한 손등도 궁궐에서 어사를 때려죽인 죄를 짓고 진양으로 도망쳐 고환에게로 갔다. 

 

북위 황제 원수는 진양을 토벌할 심산으로 계엄령을 내리고 곡사춘을 총책임자로 해서 낙양에서 대군을 사열했다. 겉으로는 양나라를 원정한다고 말했다. 6월 황제는 비밀스럽게 고환에게 편지를 보내서 말했다. 

 

  ” 내가 남쪽 양나라를 정벌한다고 한 것은 사실은 

    다른 뜻을 품은 우문태와 하발승을 토벌하기 위한 변명이었소.

    공도 역시 같이 도와야 할 것이오.

    이 편지는 보는 즉시 태우도록 하시오.“

 

고환은  즉시 표문을 올려서 대답했다. 

 

  ” 형주(자사 하발승)와 옹주(자사 우문태)는 장차 반역할 것이 확실합니다.

    신이 병마 3만을 거느리고 황하 동쪽에서 건너겠습니다. 

    또 항주자사 고적간 등 4만을 보내 내위(산서 하곡)에서 강을 건너겠습니다.  

    영군장군 누소 등은 장병 5만으로 형주를 토벌하고 

    기주자사 울경 등은 산동지역 병사 5만, 돌격기병 5만으로

    강좌(양나라)를 공략하겠습니다.

    모두 정돈하여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제거계략을 눈치 챈 것을 알고 고환이 표문을 띄운 것이라고 보고 대책회의를 소집했는데 고환의 군사를 중지시켜야 한다고 했다. 고환도 병주의 참모들을 모아놓고 의논에 들어간 다음 표문을 올렸다.

 

  ” 신은 조정 간신들의 계략에 희생되어 황제의 의심을 샀을 뿐입니다.     

    신이 만약 감히 폐하께 누를 끼칠 생각이 있다면

    신에게 천하의 재앙을 받게 하시고 자손은 절멸될 것입니다.

    폐하가 만약 저의 충심을 믿으신다면 창과 방패를 움직이지 마시고 

    간신 한 두 명을 폐출하기를 바랍니다.“    

   

조정 회의결과 황제는 전군에 고환에 대한 방비체계를 갖추도록 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긴 편지를 고환에게 보냈다.

 

  ” 하발승과 우문태의 행동을 보니 이상한 흔적은 없소.

    그대의 군사행동은 적절치 않소.

    그대가 말하는 간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겠소.

    봉융지와 손등이 그리로 도망갔는데

    충신이라면 어찌 그들의 목을 베어 압송하지 않소?“  

 

북위 중군장군 왕사정은 걱정에 잠긴 황제에게 우문태에게로 피신했다가 돌아오면 된다고 위로했다. 황제는 산기시랑 유경을 고평(영하자치구 고원)에 보내 우문태의 의견을 물었다. 우문태도 황제를 받겠다고 했다. 황제는 유경의 뜻을 물었다. 유경은 형주 쪽 보다는 고평 쪽이 믿음직하다고 답했다. 그러나 동군태수 배협은 왕사정에게 우문태가 자신의 칼자루를 남에게 주지 않을 사람이라면서 끓는 물을 피하려다 불길에 뛰어드는 격이라고 반대했다. 배협은 고환과 싸우기도 버겁고 또 우문태에게로 가는 것도 위험하니 일단 서쪽으로 이동하여 함곡관까지 간 다음 천천히 결정하자고 했다.    

 

황제는 한번 칙서를 써서 고환의 군사행동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종묘사직을 위해 결단에 나설 것이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내려 보냈다. 고환도 즉시 표문을 올려 우문태와 곡사춘의 죄상을 극력 상주했다. 황제는 상황이 급박하여 하발승을 낙양으로 급히 불렀다. 그 때 그는 형주자사로 남쪽에 있었다. 하발승이 노유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자문을 구하자 노유는 고환의 패역함을 이유로 들면서 올라가서 살든지 죽든지 일전을 펼치는 것이 상책, 동서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1백만 대군을 만든 다음 기회를 엿보는 것이 중책, 양나라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조언했다. 하발승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는 하발승과 우문태 중에서 우문태에게로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29> 북위 황제 원수의 몽진(AD534) 

 

고환은 태원을 동생 고참에게 맡기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어차피 도읍도 진양(태원)에서 업으로 옮길 생각이었으므로 겸사 겸사인 셈이다. 출병의 명분은 곡사춘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북위 황제 원수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하교(황화대교)에 진을 치고 선봉 곡사춘은 망산에 주둔했다. 곡사춘은 기병 2천으로 고환을 기습하고자 했으나 황제는 곡사춘을 믿을 수도 없고 또 고환이 죽으면 또 다른 고환이 생길 것이므로 반대하는 황문시랑 양관의 말을 믿고 허락하지 않았다. 곡사춘은 일개 환관의 어리석은 말에 넘어가는 황제를 보면서 통탄해했다.

낙양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들은 우문태는 이렇게 말했다.  

 

” 고환이 여러 날을 달려 팔, 구 백리를 뛰어 왔는데 

  이는 병가에서 크게 기피하는 일이 이 틈을 타고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

  황제는 분명 움츠리면서 결전하지 못하고 지키기만 할 것이다. 

  황하의 길이가 1만 여리나 되어서

  지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한 곳만 뚫려도 대사는 날아갈 것이다.“

 

이어 대도독 조귀를 행대로 삼아 포판을 건너 병주로 보내 고환의 배후를 공략하게 하고 동시에 날쌘 기병 1천을 대도독 이현에게 주어 낙양으로 보냈다. 고환은 두태를 활대로 보내고 한현은 정주시 북쪽이 석제(하남성 위휘)로 내려 보냈다. 북위군의 활대 방어책임자 가현지는 애초부터 두태에게 투항할 의사였으므로 활현은 맥없이 무너졌다. AD524년 7월 26일 고환은 황하를 건넜다. 

 

 

황하가 뚫린 상황에서 북위황제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다시 물었다. 남쪽 양나라로 가자는 의견, 남쪽 형주 하발승에게로 가자는 의견, 관중(장안 방면)으로 가서 지키자는 의견, 끝까지 사수하자는 의견 등으로 분분했다. 평소 곡사춘과 권력을 다투었던 원빈지가 황제에게 거짓으로 고환의 군사가 황궁 가까이 도달했다고 보고했다. 황제는 도망가기 위해 급히 곡사춘을 소환했다. 7월 27일 황제는 남양왕 원보거, 청하왕 원단, 광양왕 원담 등을 인솔하고 서쪽으로 피신했다. 원담과 원단은 황제가 서쪽으로 도망갈 것을 알고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황제는 우문태가 보낸 대도독 이현을 효(삼문협)에서 만났다. 황제는 우문태가 보낸 조귀와 양어의 영접을 받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우문태에게 대장군, 옹주자사, 겸상서령을 내리고 군국의 모든 정사를 맡겼을 뿐 아니라 여동생 풍익장공주를 우문태에게 시집보냈다. 


<30> 고환의 낙양입성(AD534) 

 

고환은 7월 29일 낙양에 입성했다. 즉시 고오조를 보내 황제를 뒤쫓아 갔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고환은 북위조정 백관을 소집하여 심하게 문책했다.

 

  ” 신하가 되어서 주군을 받들고 

    위급한 것을 바로잡으며 구원해야 할 것인데     

    바른 말로 간쟁해야 할 때 간언하지도 않고

    황제가 나갈 때에는 따라서 좇지도 않고

    좋을 때에는 부귀영화만 탐닉하다가

    어려울 때에는 숨고 피하면 신하의 절개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겸상서좌복야 신웅이 일어나서 말했다.

 

  ” 주상께서 항상 측근들과만 상의하므로 

    우리들은 대소사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황제가 서쪽으로 간다고 들었을 때에도 따라가면 

    간신취급을 받을 것 같아서 머무르면서 대왕을 기다렸지만

    나가든 머물든 죄를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고환이 질책했다.

 

  ” 경과 같은 대신들은 

    마땅히 몸으로 나라에 보답하여야 하는 것이오.

    아첨쟁이들이 용사하는데 경등은 일찍이 한 마디라도 따졌었소?

    국가의 일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었는데

    죄가 어디로 가야할 것 같소?“  

 

고환은 신웅, 개부의동삼사 질열연경, 이부상서 최효분, 도관상서 유흠 탁지상서 양기 산기상시 원사필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였다.

 

<31> 고환이 낙양에 세운 허수아비 동위 황제 원선견(AD534) 

 

고환은 여러 차례 황제 원수를 불러 돌아오라고 했지만 돌아 올 리가 만무했다. 직접 영접하기 위해 삼문협까지 갔지만 응답이 없었다. 고환은 원로 백관들을 불러 황위를 누구에게로 계승할 것인지 물었다. 장안의 북위 조정으로부터 빠져 도망 온 청하왕 원단이 적임자였으나 벌써부터 황제 행세를 하는 것이 추하다고 여긴 고환은 그의 아들 원선견을 세우기로 했다. 효정제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원단은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에 남쪽으로 도주하였으나 고환이 사람을 보내 설득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원선견이 11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이것으로 동위(AD534-AD550)가 태어난 셈이다. 동위 조정에서는 원심을 대사마, 원탄을 태위, 고성을 사도, 고오조를 사공으로 임명하였다. 동위 수도를 업으로 정하고 고환은 태원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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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10월14일 1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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