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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35> 겨울 산을 바라보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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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1월21일 16시4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0일 19시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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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이 희미한 윤곽인 채 펼쳐져 있다. 그냥 펼쳐져 있는 게 아니라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마주 잡아 기도하는 자세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대자대비한 부처 앞에 무릎을 꿇고 염불에 몰두한 불자의 모습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겨울 산이 어떤 모습이냐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겨울 산은 지금 어떤 궁극적 진리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고 있는 구도자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사는 일이 항상 소란스럽고 이해가 상충되는 일들 뿐이어서 피로함을 벗어나기 어렵다. 자칫하면 마음을 상해 괴로워하기 십상이다. 하루하루 사는 일이 예측 불가능한 돌발 사건 만으로 이루어져 가고, 가치마저 혼란되어 있어 우리의 판단까지 혼미스럽게 한다. 그러나 겨울 산은 항상 바르고 정직하며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사는 일에 피곤한 사람, 사는 일에 좌절한 사람, 사는 일에 상처 받은 사람, 사는 일에 소외된 사람, 그런 사람들은 겨울 산을 바라 볼 일이다. 겨울 산은 조용히 인간의 아픔을 감싸주고 보듬어주며 위로해 준다. 그냥 조용히 엎드려 있기만 한 것처럼 보이기만 하는 겨울 산은 인간을 향해 많은 가르침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겨울 산을 바라보며 사는 것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 볼 일이다.

 

지금 이 나라 산이란 산은 깊은 침묵에 잠겨있다. 온갖 풍상을 겪고 난 노인이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스산한 바람에 온몸을 내 맡긴 채 희끗희끗 눈보라에 덮여가는 산을 바라보는 일은 인간의 삶을 향상시킨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을 그냥, 시간적 단위 속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존재할 기간 만을 의미한다고 하면, 노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지극히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퇴락 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고 세상을 살아 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현명한 눈매를 지니게 되는 것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는 말씀 한마디에도 깊은 깨달음과 예리한 판단의 기준이 실려 있게 되는 것이다. 사계절의 산중에서도 유독 겨울 산이 묵중해 보이고 깊은 의리를 지닌 것으로 바라 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절의 소리 없는 순환을 바라보면, 우리가 정연한 질서 속에 던져져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변화무쌍하고 갈등과 단절로 점철된 것처럼만 보이는 인간 세상에 의탁하고 세상을 살다 보면 무질서와 혼란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원한 것도 의연한 것도 없이 순간순간 찰라 만을 딛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눈을 크게 뜨고 깊이 있게 바라보면 우주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순정한 질서의 세계가 가로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 산이 현란한 단풍에 물들어 가슴을 설레게 했었다. 설안산 용대리로 부터 백담사에 이르는 길, 단풍이 지천으로 흐드러져 계곡의 푸른 물과 어우러진 산수풍경은 참으로 일품이었다. 인제로부터 현리를 거치는 내린천 단풍은 또 어땠는가. 바라보아도 바라보아도 눈에 가득 차던 단풍들이 기적처럼 펼쳐진 산비탈을 바라보면서 자연의 위대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선혈처럼 새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까마득한 벼랑을 덮고 있고, 샛노란 빛깔로 구릉 전부를 휘감고 있는 떡갈나무, 참나무 잎들이 한 해의 마지막 절정을 불사르고 있었다.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지는 해의 마지막 열정이 노을이듯이 단풍은 그가 지닌 최상의 열정을 뿜어 올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가을이 깊어지고 차츰 겨울이 다가오면서 단풍은 퇴락해 툭툭 떨어지고 떨어진 채 흙 위에 쌓여 하이얀 서리에 덮여 가는 것이다. 밤새 내린 서리에 덮인 산골짜기에 침묵이 서리고 차츰 차츰 나목이 되어가는 나무들이 앙상하니 서서 겨울을 맞이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다가올 겨울을 앞에 두고 짐승들은 바삐 몸을 숨기고, 새들도 겨울 지낼 채비로 분주히 나르는 것이다. 계절의 순환에 산은 산으로서의 겨울 맞을 채비를 끝낸 셈이다. 앙상한 맨몸으로 겨울 앞에 서서 아득한 먼 곳에 서성이고 있을 봄의 꿈을 꾸는 것이다.  

 

겨울산은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지나간 한 해를 돌이켜 보면서 조용히 삶의 의미를 반추해 보는 것이다. 연초록 새싹에 대하여, 촉촉이 흙을 적시던 봄비에 대하여, 그리고 진달래와 철쭉, 아지랑이와 봄 언덕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는 것이다. 용기와 신념이 부족했던 젊은 날, 충동에 휘몰리기만 했던 청춘의 날들을 생각하면서 겨울 속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산은 또한 지나가 버린 계절들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폭양 속에 짙푸르기만 하던 녹음이며 힘차게 흘러내리던 시냇물, 여치 소리와 매미 소리로 가득했던 젊은 날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리하게 내리던 장마의 계절 청춘의 좌절과 회의, 그리고 열정에 휘몰려 달려가는 청년의 시간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는 것이다.

 

산은 또한 결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의 수확을 베풀어 주신 신의 은총에 대하여, 지상의 여기저기에 쌓인 볏가리와 포대자루에 대하여, 그리고 곳간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엄정한 이 계절의 평가에 대해서 겸허하게 엎드린 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근면하지 못했던 날들에 대하여 그가 아꼈던 땀방울에 대하여 조용히 반성하면서 엎드려 있는 것이다. 겨울 산은 조용히 엎드려 묵상하면서 어김없이 질서의 순환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 산은 조용히 엎드려 묵상하고 있다. 깊은 침묵 속에 자신을 의탁하고 그가 지내온 한 해를 돌이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묵상과 반성의 시간을 지낸 자만이 새로운 질서의 중심에 자신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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