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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71>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 Ⅰ.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은 국가의 책무이다.<中>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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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5월12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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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I.3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해주는 제도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상으로 곡식을 나누어 주는 진제(賑濟)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곡식을 빌려주는 환상(還上)제도이다. 원칙적으로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은 진제가 아니라 환상을 받았으며 갚을 수 없는 사람들만 진제를 받을 수 있었다. 진제는 여러 곳에 임기응변으로 설치된 진제소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진제와 환상의 두 제도 모두 의창에 축적된 양곡을 이용하였다. 이외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는 활인원이 있었다.   

 

[진제소 설치]

 

진제소는 태조 4년(1395)에 최초로 설치된 적이 있었다. 그 때 태종의 진제소 설치 명령을 보면 각 고을 마다 마을의 크기 및 거리를 참작하여 여러 곳에 설치하여 창고의 쌀과 콩을 내어 굶는 사람을 살리도록 했다. 청렴한 사람을 책임자(창고감독 감고,監考)로 임명할 것이고 수령은 수시로 감독하라고 지시했다. 특별히 늙거나 병들거나 허약하여 진제소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별도로 찾아가서 구휼하도록 지시했다(태조 4년 7월 30일).

 

세종은 제일 먼저 흥복사(원각사 : 지금 종로 2가 탑골공원 자리)에 진제소를 설치했다(세종 4년(1422) 8월 3일).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가뭄으로 농사를 망친 모든 고을에 진제소를 설치하라고 명하였다(세종 4년 12월 1일).서울에는 기존에 있던 동서활인원으로 하여금 굶주리는 백성을 먹여 살리라고 지시했다(세종 10년 1월 26일). 고려시대에 있던 동서대비원이라는 구제기관을 태조 1년 동서대비원이라고 불렀는데 태종 14년에는 이를 동서의 둘로 나누어 동활인원, 서활인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설치하였다. 그러나 원래 활인원은 병자를 구호하는 곳이므로 굶는 사람들은 활인원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경중과 성 밑에 사는 기민들을 진제하기 위해 활인원에 보냈더니 과연 

     병을 옮길 것이 두려워 도망간 자가 있구나. 앞으로 유입인구가 심히

     많아 활인원 관사가 좁아 장차 다 수용 못할 것이므로 보제원과    

     이태원 두 곳에 별도로 진제장을 설치하고 한성부가 5부관리와 함께

     검찰하도록 하라. (京中及城底飢民 皆送活人院賑濟 然畏染病逃散者有之 

     且流移人甚多 屋舍將不能容 於普濟 利泰兩院 別立賑濟場 府與五部官吏  

     同加檢察 : 세종 18년 8월 5일)”

 

이런 지시에도 불구하고 현장 관리들의 무성의와 무관심으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 나갔다. 몹시 화가 난 세종은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성 밑 보제원, 이태원, 동서활인원 등 진제 장소 소관 관리들이 전혀 깊이신경 쓰지 않아서 굶어 죽는 자가 파다하게 발생했으니 매우 측은하다. 이제부터 한성부와 5부가 진제장 네 곳을 분담하되 만약 구휼을 태만히 하여 아사자가 나오면 매월 말 그 숫자의 다소에 따라 각도의 예를 적용하여 결단할 것이며 속죄를 허용치 않을 것이다. (城底 普濟院 利泰院 東西活人院等 賑濟場所管 官吏 全不致慮 使民飢死者頗多 予甚惻然 自今 令漢城府五部官吏分掌四處賑濟場 如有慢於救恤 致令飢死 每於月季 隨其 多少 依諸道例斷決 勿許贖罪 : 세종 19년 2월 9일)” 

 

이북지역 4개도(강원, 황해, 함길, 평안)에 가뭄이 특히 심해 수많은 백성들이 남쪽으로 이주해갔다. 감사와 수령들이 백성의 이동을 금지하자고 했으나 세종은 해당 각도에 진제소를 설치하여 구휼을 적극적으로 하되 백성의 이동을 막지 말라고 했다. 

 

[진제 양식의 양]

 

굶는 사람에게 지급되는 양식의 양은 나이에 따라 달랐다. 15세 이상의 남녀는 쌀 4홉, 콩 3홉, 장 1홉을 주었고 11세에서 15세까지는 쌀 2홉, 콩 2홉, 장 반 홉을 주었으며, 5세에서 10세는 쌀 2홉과 장 반 홉을 주었다(세종 5년 1월 28일). 이것이 계묘년 구휼 규정이다. 1 홉은 약 180그램이므로 성인 남녀가 하루에 받는 쌀의 양은 720그램이고 콩은 약 540그램이었다. 

 

세종 5년(1423)의 흉년은 세종 33년 치세 중 11번째로 심한 흉년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취임한 이후로는 세종 1년(1419)에 이어 발생한 심한 가뭄이었으므로 정부는 매우 민감하게 대처했었다. 호조는 세종 6년 2월 1일부터 모든 지방정부가 굶는 사람들에 대한 구제 지원에 나설 것을 지시하고 그 결과를 중앙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 때 보고된 자료를 보면 그 당시 굶는 사람의 수와 지원 규모를 잘 알 수 있다. 세종 6년 각 도가 보고해 올린 진제 자료를 보면 대체로 한 달 동안 1인당 지급된 구휼곡식은 가장 적은 함길도의 1.2두에서 가장 많은 평안도 2.4석 정도였다. 물론 연소자들도 있었을 것이므로 실제로 성인 남녀가 받아간 곡식은 좀 더 많았을 것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매우 적었던 양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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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창 확충방안]

 

진제에 들어가는 곡식은 의창에서 나왔고 의창곡은 대부분 군자곡에서 조달하였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의창의 곡식이 고갈되면 다시 군자곡에서 메워야 했는데 군자곡이 고갈되면 군사적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창 확충 방안을 내 놓았다.

 

먼저 충청도 감사 정인지의 안은 이러했다. 토지 1결마다 정포로는 2필, 면포로는 1필의 토지세를 물리고 이를 자본으로 하여 풍년에 쌀을 매입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풍년에 쌀이 흔할 때 1말에 쌀 시세가 동전 10문일 때 15문으로 매입한 다음 가지고 있다가 흉년이 들어 쌀값이 20,30문으로 오를 때 15문의 가격으로 쌀을 방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쌀값도 안정되고 또 가뭄이나 흉작 때 쌀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으므로 진제 정책으로서도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이 정인지의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상평창으로써 진제정책을 삼자는 것이었다(세종 18년 7월 21일). 이 안은 보기에는 매우 매력적이다. 가격도 안정시키고 쌀의 공급도 원활하게 하며 동시에 유사 시 국가적인 군자미로 활용할 수도 있다. 제안을 의정부 토론에 부쳤으나 모두들 어렵다고 말했다. 세종도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나라는 원래 축적이 없는 나라라서 거뒀다가 풀었다가 하는 방법을

    쓸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방법에 따르는 수송의 폐단도 간단치가 않아서

    그 법이 불가능한 것이다. 외방의 환상도 어려운 것이 적게 주면 환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안정된 삶을 살기 어렵고 많이 주면 되갚기 어  

    려운 것이다. 이번에 환상을 전부 면제해 주면 국고가 텅 비게 되어 흉  

    년이 들 때 진제할 방법이 없게 된다. 또 꼭 상환 받고 싶어서 채찍으로  

    독촉하면 불만과 탄식 소리만 커질 뿐이다. 환상을 풀고 거두기 위해 엄  

    벌과 무서운 법을 만들면 원성의 소리가 사방에서 들릴 것이니 실로 용  

    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我國本無蓄積 不可施斂散之法 有無相換 輸轉之弊亦多 此法不可行矣

    外方還上 斂散甚難 小給之則 仰食還上者 不得聊生 多給之則斂之亦難

    今多受還上者全免之 則國庫虛喝而凶年無以賑濟 必欲賑斂 則須用鞭撻

    生民 愁嘆益甚 蓋以還上斂散之故 嚴刑峻法 使愁嘆之聲聞于四野 

    實爲不忍 將何以處之 : 세종 18년 9월 7일)”

 

이 방법의 핵심적인 조건은 ‘축적’이었다. 소비보다 생산이 많아서 축적할 만한 쌀이 있어야만 국가가 이를 거둬들임으로써 가격안정과 쌀의 원활한 공급을 동시에 성취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쌀 생산 능력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세종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축되는 환상 곡식은 장차 백성을 위해 지출될 것이므로 탕감해주지 않고 엄격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미래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판단했다.

 

[약자에 대한 배려 : 예고 없이 화매하라(出其不意和賣 强弱均受矣)]

                 

세종 8년(1426)부터 매월 군자미 백석을 동전을 받고 쌀을 대신 주는 거래, 즉 화매(和賣)를 해왔었는데 이 해에는 백성에게 쌀도 공급하고 동시에 동전사용도 촉진하기 위해 특별히 3천 석을 공급하였다. 그런데 이 화매거래에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거래 규모에 관계없이 자원자가 몰려들다보니 힘 있는 자는 쌀로 바꿔 갈 수 있지만 노약자나 과부는 종일토록 혜택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세종은 여러 신하에게 해결 방법을 자문하였다. 김종서와 안숭선 등은 하루에 40석씩 2개소로 나누어 각각 남녀에게 나누어 화매하자고 건의했고 우대언 남지는 하루 미곡 100석을 풀되 인원의 많고 적음에 따라 5-6일 간격 혹은 7-8일 간격으로 탄력적으로 화매하자고 했다. 송인산은 미곡 40석을 격일 간격으로 두 곳으로 나누자고 했다. 세종의 결정이다.

 

   “남여를 구분하지 말고 세 곳으로 나누되 한 곳에 쌀 사십 석으로 혹

    3-4일 간격으로 혹 10여일 간격으로 불시에 예고 없이 화매하여

    강한 자나 약한 자나 고루 받게 하라. (不分男女 只分三處 每一處米各  

     四十石 或隔三四日  或隔十餘日  出其不意和賣 强弱均受矣 

    : 세종 13년 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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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안은 1일 화매량에 있어서는 다수의 의견을 좇아 40석으로 했으나 화매장소는 한 두 곳이 아닌 세 곳으로 했고 화매 간격은 훨씬 탄력적으로 넓게 잡아 3-4일 혹은 10여일 마다 화매를 하도록 했다. 특히 화매를 예고 없이 하도록 하여 약자를 배려한 점이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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