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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46> 회사후소(繪事後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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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6월24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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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말이 있다. 그림 그리기에 앞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바탕이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추사 김정희는 그의 벗 권돈인에게 보낸 글에서 “내 생전 10개의 벼루를 구멍 냈고, 서수필(鼠鬚筆-쥐의 수염을 뽑아 묶어 만든 붓) 1000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술회 한 바 있었다. 먹을 갈아 벼루 10개를 구멍 냈고, 질 좋은 붓 1000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면 예술의 궁극에 이르기 위한 그의 노력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완당에게 있어서 9년 여에 걸치는 제주 대정에서의 유형의 고통과, 혼신을 다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노고가 있었기에 ‘추사체’의 위업이 한층 난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문학 지망생들이 시인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 본격적인 습작기를 거쳐야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급적 치열한 습작기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랭보처럼 어느 날 돌연 혜성처럼 나타나 몇 편의 시를 남기고 사라진 시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천부적인 재능은 매우 특출한 경우에나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고, 습득된 언어를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고급한 능력이다. 관습과 타성은 쉼 없이 언어를 옥죄어오면서 경직된 의미로 이끌고 가려한다. 생성기의 언어는 의미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운 감각과 직관의 언어이다. 보드랍고 유연해서 넓고 깊은 의미와 정서를 두루 지니고 있는 언어가 시의 언어이다. 그러니까 시의 언어는 직관과 영감으로 충만한 언어이다. (반면, 국어사전식 지시 언어는 몇 개의 의미만을 대표하는 좁고 경직된 언어이다) 

 그런데, ‘관습과 타성에 묶이지 않은 언어’,‘직관과 영감의 언어’를 쓸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해도 일상생활 속에서 반복되고, 습관적으로만 사용하게 되면 조금씩 의미의 굴레에 묶이게 되고 관습적 문법의 때에 갇혀간다. 생성기의 생동감도, 직관과 영감도 부단히 갈고 닦지 않으면 그 신선함이 사라져간다. 이것이 언어의 숙명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은 쉬이 낡아가려는 직관과 영감을 불러내 최상의 언어구조로 담아내야 하는 힘든 작업을 해내는 사람이다.

 이런 능력은 수없이 반복되는 습작 훈련을 통해서만 힘들게 얻어지게 마련이다. 소위 문청시대라 부르는 이 시기를 어떻게 보냈느냐의 여부에 따라 성공하는 시인과 실패하는 시인이 나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시기에 자신의 안목과 수준에 맞는 언어 획득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되고, 획득된 언어를 배열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문체를 획득하게도 된다. 이런 능력은 인간이 지닌 지적, 감성적 능력 중에서도 아주 고급한 것이다.

 시인이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다. 300여 개의 문학잡지가 간행되고 있다고 하고, 잡지마다 등단 문인이라는 것을 배출해 내고 있다고 한다. ‘시인’이라는 호칭이 욕스럽게 들리는 경우도 있다. 진짜 시를 향해 하이얗게 밤을 새우고 있을 문청들이 이런 뜨내기 자칭 시인들과 뒤섞여 있다. 나는, 시인협회 회장의 책무를 맡고 있는 동안, ‘신입회원’ 입회 문제로 참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냥, 시 애호가로 남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더 극성스럽게 너도 나도 시인협회 입회원서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시인협회 회원 자격만이라도 선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엄격한 척도를 준용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은 프로페셔널이고, ‘시인’ 자신들이 긍지로 지켜가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한국에서 발표되는 시들 중엔 작품의 길이가 긴 것들이 대부분이다. 동원되는 말들이 많고 수사가 현란하다. 난삽하다. 어떤 시인은 ‘시를 쓰지 않기 위해 시를 쓴다’고도 한다. 본래적인 시적 가치를 파괴하는 일이 스스로의 소명이라고도 한다. 시를 욕스럽게 파괴한 자리에 남을 것은 욕스러운 말의 형해(形骸)일 뿐이다. 시가 아니라 시 이론에 맹종해서 당면한 자가당착일 것이다. 진정의 말은 간명하며, 생략과 함축, 비유의 말이 시어의 근본이라는 사실은 시 이론의 첫 장에 나오는 얘기이다. 

 시가 이렇게 잡다한 수사와 요설로 길어진 현상은 그들의 문학수업이 철저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인이 시 창작 과정에서 간명한 구조를 발견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존재해야 할 유일의 구조에 닿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시인이 평생의 ‘일’로 감당해야 할 과업이다. 시의 형상화란 ‘존재해야 할 유일의 구조’를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시는 짧은 형식이고, 비유와 알레고리, 상징 등을 표현 장치로 하는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고 생략, 단절 등을 통해 커다란 내포를 표현해내는 경우가 많다. 시가 지니는 이런 특성에 편승하여 얼치기 시들이 다수 등장하기도 한다. 미숙한 표현, 억지스런 언어 유희로 난삽해진 짧은 글을 참신한 시라고 강변하는 경우도 참 많은 것 같다. 좋은 시와 얼치기 시를 변별해 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원고지 한 두 장의 짧은 글이 아니라 조금 긴 산문을 씌워 보면 그의 문장 운용 능력이 단박에 들어나게 마련이다.

 화가 장욱진이 자신을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 했다는 말을 들었다. 장욱진이 대상을 극한까지 단순화해 가서 도달한 천진의 세계가 집과 새와 달의 세계였다. 그가 사물 묘사로부터 숱한 습작을 거듭하고, 작가의 전 체험을 합일시켜 ‘까치’의 형태에 도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요즘 한국시엔 숱한 사물 묘사를 거치는 용맹정진을 건너뛴 채 ‘까치’만 그려내는 '자칭 시'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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