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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7> 보이지 않는 손-에피소드 1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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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9월28일 16시46분
  • 최종수정 2023년09월28일 17시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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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전에 ○○○ 손가락 단지(斷指) 의혹 취재한 적 있지?”

“네, 왜요?”

“○○○가 홈페이지에 글 올린 게 있는데 한 번 보고 뭘 쓸 수 있을지 얘기해줘.”

“뭔 일인데요?”

“보면 알아.”

 

  서울시청을 출입하던 2005년 5월 19일 오후 정치부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열린우리당 ○○○ 의원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 있으니 보고 어떤 기사를 쓸 수 있는지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바쁜데 에이…’ 하며 시큰둥하게 들어간 그의 홈페이지에는 ‘제 삶의 상처에 대해 밝힙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의 오른손 검지 한 마디가 없는 이유와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던 1986년 봄, 열사의 분신과 고문 소식이 잇따르던 어느 날 손가락을 버렸고, 태극기에 혈서를 썼다는 내용이다. 좀 길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 그대로 소개한다.

 

 <용서를 구하기도 이해를 구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제 삶의 상처에 대해 밝힙니다. 1986년 저는 제 스스로 제 손가락을 버렸습니다. 제 나이 21살 때였습니다. 80년대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제 손가락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85년부터 86년까지 체포와 투옥, 고문과 분신이 줄을 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시위를 주동할 예정이었고, 그 결과 당연히 감옥으로 갈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배들은 운동을 계속해주기를 권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로서의 수치감, 1남 6녀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분노와 두려움 이런 것들이 당시 저를 지배한 정서였습니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전국 학생운동연합 기관지 ‘백만학도’를 만들고 있던 저를 향한 수사망도 점점 더 좁혀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 상황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어느 날 세미나가 끝난 후 너무 착하고 여린 동급 여학생이 성 고문에 대한 공포 때문에 차라리 동급생과 자고 싶다고 울부짖던 암울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망하나, 내가 죽나 한번 해보자’라는 것이 저의 심정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집시법 위반으로 집행유예만 받더라도 실형으로 간주돼 군대에 갈 수 없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던 제게 군 입대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입영을 한다 해도 군에 정상적으로 복무할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군에 가는 즉시 보안사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할 것이고, 고문을 못 이겨 동지의 이름을 불게 되면 동지들이 잡힐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 배신의 기억을 지니고는 영원히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습니다. 때문에 모든 것을 제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결벽증이 있었던 듯싶습니다. 열사의 분신과 고문 소식들이 잇따르던 어느 날, 저는 부모님이 주신 제 손가락을 버렸고, 태극기에 혈서를 썼습니다.

  ‘절대 변절하지 않는다.’ 

  그 피 묻은 태극기는 이화여대 다니던 한 선배에게 주었습니다. 저를 지켜봐 달라고…. 춘천 입영소에서 면제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루 후 집에 전화를 하니 예상대로 저를 잡으러 수사관들이 들이닥쳤고, 저는 도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 충청도에서 막노동을 하고, 부산에서 주물공장 등을 전전하다가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수십 일 동안 조사를 받았고 감옥을 살았습니다. 출소 후 그 선배가 “태극기를 돌려줄까?” 하기에 “다 지난 일인데요. 뭐”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20년간 술잔을 받을 때나, 아이들이 제 손가락이 이상하다고 만져 보려고 할 때나, 그리고 어찌해서 손가락이 그리되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많은 아픔의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저의 단지 이야기는 제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제 상처에 관한 것입니다. 앞뒤의 문맥, 그리고 시대 상황을 다 버리고 이것을 군 기피를 위한 단지라고 비난한다면 그 비난은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제가 힘든 시기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제 자신을 채찍질하는 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주위 몇 분들이 손가락 수술을 권했지만, 저는 그때의 상처와 다짐을 간직하고 살기 위해 그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시절 저의 행동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의 글을 보면서 내 기억은 2년 전 어느 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2003년 3월 사회부 사건팀 기자였던 나는 노무현 정부의 실세 중의 실세로 꼽히던 ○○○ 청와대 모 실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위의 혈서를 쓴 그 분이다. 그는 과거 학생운동 과정에서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는데, 그의 오른손 검지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했지, 대놓고 기사를 쓰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증거는 물론이고 증인도 없었으니까. 

  솔직히 이 취재 지시를 받았을 때 속으로 ‘시발~’하며 엄청 욕했다. 1986년에 벌어진 일이니 17년 전 일이다. 기록이나 현장 목격자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설사 현장 목격자가 있다 해도 같은 편일 가능성이 많아 증언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막 출범한 정권의 실세 중의 실세인데 누가….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보자는 심정으로 부딪혔는데,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1985년 신체검사에서 2급 현역 판정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1986년 5월 102보충대 입영 신검에서 ‘右手(우수) 제2수지 지절 결손’으로 제2국민역(면제)을 받았다는 것뿐이었다. 쉽게 말해 원래 신체검사에서는 현역이 나왔는데 뒤에 어떤 이유에서 오른손 검지를 잃었고, 이후 입대해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면제받았다는 뜻이다. 

 

  취재는 한 치도 진전되지 않았다. 당시 학생운동권에서 함께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은 모두 모른다고 했고, 당사자의 말을 듣고 싶어도 통화 연결은 당연히 되지 않았다. 열흘이 넘게 매일 그의 집 앞(서울 종로구의 한 연립주택)에서 ‘뻗치기(밤새 기다리기)’를 했지만, 그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정권 출범 한 달도 안 된 시기라 대부분 청와대에서 잤다고 한다.) 위에서는 계속 취재에 진전이 없냐고 쪼고, 취재는 안 되고, 팀원이라고 붙여준 후배 두 놈은 물어오는 것도 없고…. 

 

  결국 나는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했다. 더 이상 이 취재를 계속하다가는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지고, 몸도 못 견뎌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3년 3월 13일 저녁 그의 집으로 전화했다. (집 번호로 했더니 아내가 받았다. 날짜까지 적을 수 있는 것은 당시 취재 수첩이 있기 때문이다) “저는 △△일보 이진구 기자라고 합니다. 남편분의 손가락 관련 취재를 하고 있는데, 실례인 줄은 압니다만 공인이기 때문에 손가락 절단으로 인한 병역면제 의혹이 있다면 말끔하게 푸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한 달 가까이 취재하고 있는데 의혹과 관련된 증거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는 포기를 안 하는데 혹시 남편분이 제게 당시 상황을 깔끔하게 설명해주시면 어떻게 든 위에 얘기해서 취재를 접도록 하겠습니다. 거절하시더라도 말은 전해 주시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아내는 내 말을 다 들은 뒤 “○○○ 씨에게 전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경우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끊는 게 보통이라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뭐 그렇더라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화한 게 아니었다. 취재를 접으려고 했다.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었고, 그가 만나줄 리도 없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위에 ‘이 정도까지 해봤는데 도저히 더는 안 되겠다’라고 말하고, 세게 욕먹은 뒤 끝내려고 했다. ‘당연히 전화는 안 올 테고 2, 3일 지난 뒤 위에 얘기하고 접어야지.’ 내 머릿속은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ifsPOST>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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