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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 <9> 보이지 않는 손-에피소드 3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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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10월05일 16시37분
  • 최종수정 2023년10월03일 16시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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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옮겼다고? ◇◇?”

“헐~.”

 

  이듬해인 2004년, ○○○ 실장과 함께 만나 저녁을 했던 그 선배가 회사를 그만뒀다. 당시 그는 인사이동으로 사회부에서 정치부로 옮겼고, 열린우리당을 출입했다. 나는 주말 섹션 팀으로 옮겼는데, 간혹 회사에서 그를 마주칠 때마다 “○○○ 만났어? 껄끄럽지 않나? 잘 대해주나?”하고 물으면 “잘해주긴 뭘”하며 씩 웃곤 했다. (1년 선배지만 나이가 같아서 사석에서는 반말과 존대를 섞어 썼다.) ○○○ 실장은 이해 4월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추진에 대한 후 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돌풍을 일으킨 그 총선이다.) 그런데 정치부에 간 지 얼마 안 돼 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쉬웠다. 다혈질이긴 해도 다른 회사에서 옮겨온 나를 많이 챙겨줬으니까. 그런데 그가 이직한 회사가 ‘◇◇’이라는 거다. ○○○ 실장을 만났던 날 인사동 카페로 찾아온 △△△ 부회장이 있는 그 ◇◇ 맞다. ‘아~ 그때 △△△ 부회장이 말한 잘 지내봅시다가 그런 뜻이었나?’ 역시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내게만 안 보였을 뿐.

 

  그리고 다시 한 해가 지나고 나는 서울시청으로 출입처를 옮겼다. 그리고 2005년 5월 19일 오후, 서울시청 본관 기자실 옆 쪽방에서 한창 서울시 관련 기사를 쓰던 중에 정치부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앞서 말한 대로 ○○○ 실장(당시는 국회의원)이 태극기에 혈서를 쓰느라고 스스로 손가락을 잘랐다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다고…. 선배는 기사로 뭘 쓸 수 있는지 물었고, 당시 경기 부평까지 갔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 준 뒤 그 취재 동행기를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창 기사를 쓰고 있는데 여기저기 다른 언론사에서 전화가 와 당시 상황을 물었다. 아마 우리 국회 출입 기자들이 내 얘기를 타사에 좀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설명을 해줬는데, 이것 때문에 그 선배에게 한 소리 들었다. 우리만 쓸 수 있는 건데 왜 알려 주냐고.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이게 뉴스를 더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는 내게는 공장에서 사고로 잃었다고 해놓고, 왜 혈서로 바꾸고, 그걸 또 홈페이지에 올렸을까. 순간적으로 정신이 이상해졌을까. 나와 부평에 간 걸 잊었던 걸까. 만약 혈서가 사실이라면 나를 데리고 부평까지 간 것은 의혹을 잠재우고, 해명의 진실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기자를 대동해 알리바이를 꾸민 것이 된다. 이건 정말 나쁜 짓이다. 기사를 안 썼기에 망정이지 만약 썼다면 그의 ‘공장 사고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됐을 테니까.

  그때 나는 정치부 기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상황은 듣지 못했는데, 아무리 기사를 찾아봐도 왜 그가 홈페이지에 ‘혈서를 쓰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라는 글을 올려야 했는지 동기를 알 수 없었다. 물론 내 동행기 기사가 정치권에서 화제가 된 후 우리 정치부 기자들이 당시 왜 거짓말을 했는지 등을 묻기 위해 여러 차례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지역구로 내려갔다. 뭐라고 해명하겠는가. 이게 맞다고 하면 저게 틀리고, 저게 맞다고 하면 이게 틀린데.

 

  사고 때문인지, 스스로 잘랐는지 어느 쪽이 진실인지 나는 모른다. 단지 검지 한 마디를 스스로 자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손가락이 뼈까지 잘린 상황에서 정신을 잃지 않고 혈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혈서가 목적이라면 굳이 손가락을 뼈까지 자를 필요도 없다. 약간의 상처만 내도 혈서를 쓰기에는 충분하니까. (나중에 내가 열린우리당을 출입했을 때 이 부분이 하도 궁금해서 원혜영 의원에게 “당신도 혈서 써본 적 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1971년 유신헌법 반대 시위를 하다 붙잡혀 강제징집을 당했다. 원 의원은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서 한자로 ‘대한민국’을 써 본 적은 있는데, 선배들이 자기들은 대(大) 민(民) 같이 한자 획수가 적은 글자를 쓰고, 후배들에게는 한(韓), 국(國)을 크게 쓰게 하더라”라고 했다.) 

 

  아무튼 악연이란 게 있기는 한 것 같다. 2006년 1월 나는 정치부로 옮겼고, 국회를 출입하게 됐다. 그리고 출입 이틀째 날 그의 의원실로 찾아갔다. 뭐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어차피 지난 일이고, 또 새옹지마라고 악연으로 시작했지만 좋게 바뀔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성격이 그렇게 모질지 못하다. 그는 마침 방에 있었다. 그리고 인사를 했는데 그는 대뜸 “나는 다 잊었다”라고 했다. 뭐지? 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이 할 말은 아닌데…. 어이없어서 몇 마디 하다 나왔는데 그 뒤로 국회에서 별로 마주친 적은 없다. 그런데 2007년 11월쯤인 것 같다. 국회 앞에서 취재원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밤 10시쯤 나왔는데 길(당시 사보텐이라는 돈가스집 앞이었다)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그는 상당히 취한 듯 벌건 얼굴로 몸을 건들건들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아직도 너의 그 쓰레기 같은 기사는 인정하지 않아!”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서 정말 2단 옆차기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PS.1 ― 그 후 그는 2010년 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도지사에 당선됐지만, ○○○게이트로 기소돼 당선 1개월 뒤인 2심 재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직무가 정지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1년 초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되면서 지사직을 상실했다. 원래 형 확정일로부터 10년간(2021년까지) 피선거권이 박탈돼야 하는데 2019년 12월 특별사면 됐다. 그리고 2020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PS.2 ― 2021년 5월 27일 그는 20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물론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정세균 전 국무총리를 지지하며 사퇴했지만 나는 잠깐, 아주 잠깐 떨었다. 권력은 무서운 것이니까.

<ifsPOST>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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