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에서 바라본 세계

국가의 미래를 향한 첫 걸음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상국 교수의 생활과 경제이야기 <45> 시진핑의 3연임; 미래 중국은 어떻게 변화할까? 어떻게 될까?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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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3월19일 10시31분
  • 최종수정 2023년03월19일 10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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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이번 3월 4일 양회를 통해 시진핑의 3연임이 결정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혹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북한에서는 3대에 걸쳐 권력을 세습하고 있고, 그밖의 수많은 독재자들이 수십년을 권좌에 있었는데 겨우 11년째 3연임을 하는 시진핑의 집권이 무슨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집권체제는 다른 독재국가와는 매우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그 특징을 이해하면 시진핑의 3연임이 왜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모택동과 등소평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모택동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것처럼 대장정을 통해 무능한 장개석을 몰아내고 공산주의 중국을 만든 사람이다. 그리고 등소평은 그 지지리도 못살던 중국을 세계 두번째 경제대국으로 만든 기초를 닦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시진핑과 관련된 중요한 사람은 등소평이다. 모택동이 혁명가이고 동시에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라면, 등소평은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등소평은 중화 인민공화국의 『영원』한 발전을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두가지 사실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는 중국을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당 상위 권력자들 간의 『내부 권력투쟁』을 막는 일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통찰하고 있었던 등소평은 중국의 왕조가 망하는 것은 모두 이 두 가지 사실에 기인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등소평은 모택동과는 다른 미래 중국의 경영전략을 짰다. 그리고 모택동과 등소평 이 두사람의 견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중국의 현재와 미래를 짐작하는데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 중요 내용을 살펴 보기로 하자. 

 

첫째; 경제발전의 중요성에 대해 두사람은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탁월한 이론가이고 혁명투사였던 모택동은 공산주의 사상의 순수성을 매우 중시여겼다. 그리고 이 혁명의 순수성에 반(反)하는 어떤 시도도 철저히 거부하였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할 정도였다. 공산주의의 인민 중시 정신에 어긋난다고 과거 화려한 중국의 문화와 전통을 비판하였고, 공자를 내동댕이 쳤으며 문화대혁명신문화운동을 펼쳤다. 물론 이런 운동들은 정적을 제거하자는 모택동의 숨은 계략도 있었지만 공상적 공산주의자(空想的 共産主義者, 김상협 총장의 ‘모택동 사상사’ 참조)인 모택동은 진실한 마음으로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교는 중국뿐만 아니라 동양의 통치 이념이었다. 물론 그 가운데는 공자가 있었다. 하지만 신해혁명으로 봉건군주체제가 무너지고 공산당이라는 인민이 주인이 되는 (정말 주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체제하에서는 군주에 대한 절대적인 충효(忠孝)를 강조하는 유교는 반드시 부정해야 할 도덕이었다. 

 

1910~20년대 신문화운동은 유교를 시대착오적인 이념으로 간주하였고, "공자를 타도하자"라는 구호 아래 공자는 전면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폐해와 광란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저질러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었다. 오죽이나 그 폐해가 컸으면 중국인들도 그 기간을 십년동란(十年動亂)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 벌어진 일들이 우리가 잘 아는 자아비판(自我批判)을 한다며 선생, 지식인들을 ‘인민의 적’이라는 간판을 씌우고 조리돌림을 하거나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반동분자라며 부모의 뺨을 때리고 자기부모를 자기 자식이 삽으로 때려죽이는 일까지 벌어졌었다.

 

이 때 그 사건들을 주도하며 역사도 천륜(天倫)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 지금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 중에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중국 정부 특히 외교부, 언론들의 상식을 너무나 초과하는 발언들이 나올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部類)의 사람들에게는 논리나 도덕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힘과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중요할 뿐이다.

 

이런 광란의 시기에 등소평(鄧小平)은 모택동의 박해를 피해 지방 군부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사망하자 1904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 지도자로 복귀하였다.

 

공산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실용주의자』였던 등소평은 이상적인 공산주의(영구혁명론)자인 모택동과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영구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모택동처럼 순수한 공산주의 이론에 집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인민이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부정부패 또는 천재지변 등으로 인민들의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지 못했을 때 중국 황제들이 민란(民亂)으로 망했다는 것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발전 정책에 대해 모택동은 인민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잘 살게되면 공산주의의 순수성을 잃어버림으로 끊임없이 공산주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혁명을 영구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일으켜야 한다는 “영구혁명론(永久革命論)”을 주장하였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등소평은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되었으니, 이제 부터는 경제를 부흥시키는 것이 다음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등소평은 선부론(先富論)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주장하였다. “검정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먼저 부자가 되게 하자. 그래서 중국을 빠르게 잘 살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등소평의 경제 발전 희망은 세계 정세와도 일치하였다.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중국의 개방화에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 공산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의 소련식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이 어느 정도 잘 살게 해주어야 한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핑퐁외교와 판다외교”다. 중국은 개방 이후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미국 자본과 기술이 중국으로 유입 되었고, 그것들이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결합됨으로써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I. 시진핑 경제정책의 핵심과 문제점

 

그러나 이러한 등소평의 경제개발 이론은 시진핑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시진핑은 등소평 이론과는 대립되는 공동부유론(共同富裕論)내수경제이원론(內需經濟 二元論)을 채택했다. 시진핑의 경제이론은 등소평보다는 모택동의 생각과 훨씬 더 가깝다. 시진핑은 ‘공산주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고, 선부(先富)가 아닌 ‘모두가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그의 경제 정책의 핵심이다. 즉 모두가 잘 사는 소강사회(小康社會, 샤오캉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겠다.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바로잡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2020년 ‘중국은 소강사회(小康, 샤오캉 사회)를 이룩하였다.’고 시진핑은 발표하였다. 바로 그 때 총리인 리커창은 “14억 인구 중 거의 절반인 6억명의 수입이 월(月) 1,000위안(17만 원)에 불과하며 집세를 내기조차 힘들다.”고 밝혔다. 즉 중국인 절반 정도가 빈곤층이며 빈부격차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고 하였다.

 

- 또한 리커창은 “중국의 10%가 넘는 GDP 성장 수치를 나도 믿지 못한다. 다만 전력소비량과 열차 화물량 그리고 은행 대출액 세 가지는 과세 목적으로 확실한 수치이기 때문에 경제성장 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비교적 정확한 근거”라고 말하였다. 

 

- 또한 시진핑은 모두가 『고루』 잘 사는 공동부유론(共同富裕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등소평의 선부론(先富論)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상이다. 그러나 그의 공동부유론은 경제 『발전』을 통해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잘 나가는 산업을 억제하고, 현재 부자들의 재산을 기부 받아 나눠줌으로써 다 같이 하향 평준화하여 잘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잘 나가는 산업 즉 ‘IT 산업계와 연예계, 부동산계 그리고 사교육계’의 지나친 부가 노동자 계층과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그들의 활동을 제한하였다. 

 

그 결과 텐센트는 미성년자 게임금지라는 철퇴를 맞았고, 500억 위안(8,500억원)을 기부하는 처벌을 받았다.

 

- 또한 그는 세계 두번째 GDP 국가로서 미국과의 경쟁을 공식화하였다. 즉 미국의 세계 독주는 정당치 않으며 미국과 중국이 세계를 공동지배하는 2극체제(二極體制)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태평양은 미국과 중국의 공동 관리지역이며, 동남아시아의 모든 바다는 자기들의 영해라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중국과 중동,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여 중국이 세계를 다시 지배하는 신(新)실크로드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등소평이 강조하였던 도광양회(韜光養晦)와 정반대되는 행동이었다. 등소평은 마지막 유언으로 “중국의 힘이 충분히 자라기 전까지는 절대로 미국과 다투지 말고, 나의 힘을 조용히 어둠속에서 키워라.”라고 했었었다. 

 

- 또한 시진핑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대한민국은 옛날 자기들의 속국”이라고 하였으며, 자기들의 역사책에도 중국의 만리장성 끝은 산동반도의 산해관인데도, 어느 날 갑자기 평양이라는 동북공정을 시도하였다. 중국이 이런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는데도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는 우리나라 역사학계는 도대체 무엇하는 단체인지 모르겠다.

 

- 그리고 중국의 외교부장과 외교부 대변인은 다른 나라에 대한 상식 밖의 발언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가장 극적인 예로 호주에 대해서는 “발가락 속의 만도 못한 나라” 라는 표현을 쓰기 까지 하였다. 너무 상식 밖의 그들의 외교에 대해 세계국가들은 중국외교를 ‘싸우는 늑대외교,랑외교(戰狼外交)’라는 이름을 부치기 까지 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기 부모의 뺨을 때리고, 죽창으로 자기를 가르친 선생님을 찔러 죽인 막창세대의 모습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 그리고 2017년 제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은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新时代中国特色社会主議)를 주창하였는데, 그 첫 번째 조항은 ‘중국 내 모든 형태의 작업에서 중국 공산당의 지도력을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021년부터는 초등, 중등 교과서에 시진핑 사상을 추가하여 개인숭배를 전 인민에게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 또한 시진핑은 미래 국가 발전전략으로 수출과 함께 내수위주 발전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 인민의 절반 이상이 한달 17만원 이하로 살고 있고, 중국의 과거 높은 발전이 수출에 의한 것임이 너무나 명백한데도 내수위주의 경제발전이 성공할 수 있는지는 더 크게 논의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논의되고 있지 않지만 그가 실시한 두가지 매우 위험한 경제정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①국진민퇴와 ②중기업 이상 기업에 대한 정치간부의 파견이다.

 

국진민퇴(國進民退)는 미래 중국에서는 ‘국영기업은 더욱 발전시키고, 민영기업은 그 비중을 줄여 나간다.’는 내용이다. 기업에 대한 정치간부의 파견이란 중기업 이상의 기업들에는 공산당 정치간부를 파견하여 ‘회사 내의 주요 의사결정 시에는 반드시 이 정치간부의 허락을 얻어야 하고, 그가 허락하지 않은 기업 경영정책은 시행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나는 이 두가지 정책이 중국기업들의 경영활동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시진핑의 경제정책과 그 예시를 말하였고, 그 정책들이 가져올 수 있는 미래 영향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분석과 함께 다음에 논의할 중국의 정치구조변화(집단지도체재)를 이해하면 중국의 미래에 대한 좀 더 명확한 모습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II. 집단지도체재(集團指導體)의 무력화

 

전기한 바와 같이 실용주의자이면서도 역사에 매우 밝은 등소평은 자기의 후진들에게 권력의 순환구조인 집단지도체재(集團指導體​)를 크게 강조하였다. 사실은 강조한 것이 아니라 맹세시켰었다. 우리나라 왕조는 대부분 5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왕조는 대부분 150년 또는 길어야 200년 정도다. 진시황 같이 절대적인 왕조도 수명이 겨우 2대 50여년에 불과하다.

 

등소평은 이런 너무 잦은 왕조의 변화 요인을 두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폭정과 가렴주구, 천재지변에 의한 ①경제붕괴와 다른 하나는 권력 내부자 간의 ②권력다툼이었다. 그래서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해 선부론(先富論)을 주장하였고, 공산당 내부 권력 다툼을 막기 위해 집단지도체제(集團指導體)를 주장하였으며, 『섣부른』중화사상(中華思想)의 발현을 막기 위해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부도옹(不倒翁) 등소평은 정말로 희대의 드믄 인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면 중국 공산당 내에서 권력을 다툴만한 세력은 무엇이 있을까? 그 결과 그는 세 개의 집단을 생각하였다. 그것은 곧 ①상해방(上海帮)과 ②태자당( 太子黨) 그리고 ③공청단(共靑團)이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상해방(上海帮)은 강택민(江澤民, 장쩌민)을 수장으로 하고, 중국 최대의 도시이고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상해시를 배경으로 하는 정치세력이다. 이들은 천안문사태를 막는데 큰 공헌을 세웠으며, 어찌 보면 중국 전래의 집권 세력을 대표하는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태자당(太子黨)은 말 그대로 태자들 즉 세력 있는 아버지를 둔 자식들의 그룹이다. 쉽게 말해 금수저 출신들이다. 그 힘든 대장정을 거쳐 중국인민공화국을 건설한 공산주의 원로들은 매우 끈끈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의 자식 사랑도 매우 진하다. 그래서 중국 원로들의 자식들은 큰 어려움이 없이 권력의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들의 세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들이 바로 태자당이다. 시진핑도 처음에는 태자당의 일원으로 출발하였다.

 

다음은 공청단(共靑團)이다. 이들의 정식 명칭은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中國共產主義青年團)’이다. 이름 그대로 이들은 중국 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에 태어난 공산당 엘리트 청년들이다. 어찌 보면 엘리트가 아니라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이다. 후지타오나 리커창 총리가 바로 이 그룹에 속한다. 중국의 미래라고 등소평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집단이다. 

 

나이가 들어 죽음이 가까워 오자 이 세 그룹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또한 상당한 기존 세력을 가지고 있는 상해방 대표인 강택민(장쩌민)을 불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너를 다음 후계자로 지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나에게 맹세(盟誓)해라. 반드시 2기 연임을 마치고 너는 공청단에게 다음 서기장 자리를 넘겨라. 그러면 너에게 권력 자리를 주겠다.” 당연히 강택민은 맹세하였고 권력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등소평은 이 맹세 사실을 만인에게 공표하였다. 혹시 강택민의 마음이 변할 것을 염려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사람의 마음은 무한한 것이다. 결국 공청단에게 세력은 승계되지 않았다. 상해방이 태자당과 결합하여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시진핑을 권좌에 앉힌 것이다. 시진핑은 당시 너무 알려지지 않은 미미한 존재였기 때문에 자기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아 시진핑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 발등을 찍는 정도가 아니라, 호박의 뿌리가 뽑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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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서 다시 시진핑의 국가운영정책을 등소평과 비교해 보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등소평의 정책은 ①선부론(先富論)  ②집단지도체제(集團指導體制) ③도광양회(韜光養晦)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반해 시진핑은 ①공동부유론(共同富裕論) ②1인 독재체제 ③전랑외교(戰狼外交)로 대표될 수 있다. 즉 등소평의 유시와는 정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고, 그가 선택한 길은 모택동의 길과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택동은 어느 면에서 공산주의 혁명 그 자체에 순수하였지만, 시진핑은 공산주의를 자기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삼고 자기 세력의 확대 수단으로 삼았다는데서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III. 시진핑 3기 집권 이후의 중국은 어떻게 될까?

 

중국과 같이 거대한 나라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부정확하지만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부정확한 미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고, 우리나라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진핑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또는 그의 권좌가 많은 내부 반대세력 때문에 불안할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시진핑의 미래는 상당히 탄탄하리라고 본다. 단 중국의 미래는 매우 불안할 수 있다.

 

시진핑의 권좌가 안정되고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나의 의견은  다른 일반 사람들과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견해가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경제의 파탄은 곧 정권의 붕괴를 가져온다. 그러나 이것은 독재국가에서는 거의 적용되지 않은 논리다. 5천만 명을 굶어 죽인 모택동의 사진은 아직도 천안문 광장에 걸려있고, 천만명 이상을 굶어 죽인 김일성 가족은 지금도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다. 스탈린도 마찬가지고 스페인의 프랑코도 죽을 때 까지 자기의 권좌를 누렸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공산세계 내지 독재주의 사회를 보아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 세계에서의 이론은 독제체재에서는 맞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독재주의가 살아남는 데는 두가지 도구가 있다. 하나는 ①철저한 감시,  둘째는 ② 철저한 사상교육이다. 그리고 세 번째쯤 해서 ③ 경제발전이 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사실은 독재세계에서 경제발전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경제발전이지 절대로 인민들이 잘 살게 하는 경제발전이 아니다. 

 

모택동도 김일성도 똑 같은 발언을 하였다. “경제가 너무 발전하여 인민들이 정말 잘 살게되면 그들은 자유(自由)를 원한다. 그러나 겨우 먹고 살 정도로 잘 살게되면 국가와 지도자에게 감사를 느끼고 충성을 바치게 된다.” 

 

모택동의 영구혁명론(永久革命論)도 바로 이런 생각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사고(思考)이다.

 

그러므로 모택동을 롤모델로 삼는 시진핑도 아마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시진핑의 장기집권 가능성을 분석해 보자. 중국의 2022년 인당 GDP는 12,600 달러다. 6억명의 사람들은 지독히도 가난하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다. 특히 서해안(西海岸)가와 동북3성 사람들은 선진국 수준의 삶을 살 수 있을 정도다. 

 

부자와 빈자간의 차이는 엄청 나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독재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충분히 발전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발전은 ‘자유를 요구하는 소리가 더 커지고’, 자기의 권력기반을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경제발전의 속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민들 간의 너무 다른 소득격차는 민란(民亂)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겠는가? 다음 정책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소득을 하향평준화 시키더라도 인민들 간의 소득을 어느 정도 균분시켜야 하며, 자유 욕구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잘 나가는 사기업(私企業)의 발전을 제한시켜야 한다.

 

그래서 나온 정책이 바로 ①공동부유론이고 ② 잘 나가는 사기업(IT, 부동산, 연예계, 사교육 분야)의 활동을 제한시켜야 하며 ③ 국가가 운영하는 기업은 발전시키고 민영기업을 후퇴시키는 국진민퇴(國進民退)인 것이다. 그리고 ④ 중기업 이상의 민영기업에는 정치국원을 파견하여 그들의 활동을 감시하여야 한다. ⑤ 그리고 인민들의 감정(感情)을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대기업 경영자들을 부정부패로 몰아 그들의 재산을 압류하거나 거액의 기부금을 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보면 중국의 이해되지 않는 경제정책들이 일목요연하게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4억 인구의 불만을 모두 잠재울 수는 없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과거 왕조들이 몰락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14억 인구가 아니라, 원하면 70억 전 세계 인구도 감시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하였다. 바로‘정보기술, IT’다. 감시카메라, 인공지능(AI) 그리고 무엇보다 은행에서의 컴퓨터 시스템은 더할 나위없이 전(全) 인민을 24시간 365일 감시를 가능하게 하였다. 

 

1970년대에 미국 CIA에서 모의시험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구소련이 미국국민들에 관한 자료 중에서 단 하나의 자료를 빼간다면 그들은 어떤 정보를 원할까? 라는 시뮬레이션이었다. 그때 나온 답은 미국인들의 『신용카드 정보』였다. 

 

우리가 현금을 사용하면 아무도 그 현금을 사용한 사람을 추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하면 ① 누가 ② 어디서 ③ 언제 ④ 무슨 물건을 ⑤ 얼마만큼 구입했는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중국에는 14억 인구에 7억대의 감시카메라가 있다. 인구 두명 당 한 대다. 기가 막히는 수치다. 그리고 그 중 상당수에는 얼굴 인식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다. 즉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중국에서는 ⑥ 누가 ⑦ 어디에서 ⑧ 누구를 ⑨ 얼마동안 만났는지, 그리고 원격 마이크가 장치되어있는 경우에는 ⑩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까지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중국은 국방비보다도 ‘국내 치안유지비(경찰비)’가 더 많은 전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그렇게 큰 비밀도 아닌데도 백도어가 있는 중국제 드론과 카메라, 그리고 5G 시스템을 아직도 국가 일부 공공기관과 은행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정말로 이해되지 않는다. 더욱 가관인 것은 우리나라 3대 재벌 그룹중 하나이고 3대 통신사 중 하나인 회사가 그 많은 국내의 우려와 미국 정부의 직접적인 지적이 있었었음에도 중국 화웨이의 5G 통신 장비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국가의 기밀과 산업관련 정보 그리고 개인의 비밀 정보가 적성국에 부당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달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지 방법도 의외로 간단할지 모른다. 곧 정보 불법 유출의 출처가 확인되면 일정 규모 이상 기업의 경우에는 유출 개인 건수별로 벌과금을 내게 하는 것이다.

 

아마 이 방법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겠지만, 그 기업으로 하여금 그 장비를 사용하지 않아도 될 대외적 이유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활약하는 인기있는 중국인 여자 교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조언을 대중매체에서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중국식의 은행제도와 코인제도를 도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국의 정보를 적당히 제공하여 인기를 끌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이 우리나라를 감시하기에 너무 좋은 방법을 끊임없이 조언하고 있다. 

 

특히 국영방송인 KBS 등에서 폭 넓게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려의 심정이 강하게 든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라면 다행이고, 그분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중국제 로봇청소기에도 내장 카메라와 백도어가 있다는 소문이 있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중국제 전자제품은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현대 기술의 발달 정도는 정말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쳇GPT를 보고 우리는 놀라고 있다. 더욱이나 그 쳇GPT가 변수 하나를 바꾸자 인간의 명령을 거역하는 심각한 정도의 발언을 하였다는 최근의 NYT 기사도 있었다. 

 

우리 정부의 현명하고 빠르며 정확한 조치가 정말로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IV. 그럼 결론은 무엇인가?

 

그 답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1. 우선 시진핑의 장기 집권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반대세력을 추적, 감시할 수 있는 IT 기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시진핑의 장기 집권은 결국 중국을 과거 죽의장막(竹의 帳幕, Bamboo curtain)으로 고립화할 가능성이 있다. 

; 그 이유는 중국의 GDP는 클지 몰라도 그것은 매우 높은 대외 의존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발전은 중국 내부 기반 보다는 수출을 통해서 그리고 해외 기업들의 투자와 기술교류 등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전랑외교와 미국과의 승산 없는 전쟁은 세계 무역망에서 중국을 상당 정도 제외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중국의 성장동력이 미래에 유지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서부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3. 우리나라의 대외무역관계에서는 오히려 플러스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무역은 분명히 감소한다. 그러나 그 감소폭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와 중국의 관계는 6,70년대의 한일무역관계와 유사하다. 즉 우리는 그들로부터 값싼 소비재를 수입하지만 그들은 우리로부터 반도체, 정밀부품, 중간재들을 수입해 가기 때문이다. 무역이 줄어들어도 그것은 중국이 수입을 안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수출금지 규정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대외무역 분야에서도 우리나라와 중국은 상당히 강한 경쟁관계에 있다. 그들도 우리도 거의 동일한 제품을 수출한다. 다만 품질과 가격에서 차이가 날뿐이지 종목에는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중국이 세계 공급망에서 제외된다면 중국 수출 상품의 상당 정도는 우리나라 수출 상품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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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3월19일 10시31분
  • 최종수정 2023년03월19일 10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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