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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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주 연재에서 거론한바와 같이 현대미술은 신, 왕족, 귀족 등등의 계급사회 체제에 반기를 들면서 발전해왔다. 그 정신의 발전은 거대한 사회 담론에서 분화되고 미세화 되면서 최근의 현대미술은 개인의 사고를 일깨우는데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이번 연재는 현대미술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자기를 혁신하는 훈련도구로 삼을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현대미술의 탄생 배경

1789714일부터 1794728일까지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 앞서 계몽사상은 프랑스의 사회적 변화를 견인하였다. 특히 루소의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인민주권론이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에 의해 배양된 의식들이 프랑스 혁명을 만들었다면 에두아르 마네1863풀밭위의 점심’, 1865올랭피아의 두 작품으로 특수계층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작품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당시 미술계의 의식은 신, 왕족, 귀족 등등의 대상이나 아름다운 형상들을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풍으로 그려야하는데 마네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들로 그림을 제작하였다.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올랭피아' 캔버스에 유화 130х1901863년 오르세미술관

올랭피아는 당시 대중에게 3가지의 충격을 줬다. ‘여신이 아닌 매춘부의 나체, 매춘부가 수치심도 없이 뻔뻔하게 관람객을 응시하는 시선과 표정, 아카데미 화풍과는 너무나 다른 입체감 없는 시체 같은 표현으로 프랑스 시민들에게 분노를 사게 되었다. 이 분노를 창출한 그의 반항적이고 돌출적인 생각들이 미래를 만들었다.

현대미술을 의식적으로 표출하고 조직화한 첫번째 그룹이 인상주의 화가들인데 모네·피사로·르누아르·드가 등등의 작가들이 마네의 의식과 표현법에 자극을 받아 자신만의 새로운 방식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간략하게 말하면 1886년까지 단체 활동을 했던 수십 명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제 각기 새로운 표현법이나 소재를 찾았고 결과적인 그림도 다를 수밖에 없었으나 그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시대가 원하는 것을 앞장서려는 태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시대와 주변에서 소재를 찾고 그 대상을 자기만의 해석법으로 솔직하게 시각화 하려는 점은 이후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현대미술 화가들은 대중에게 무엇을 묻고 무엇을 말하는가?

인상주의 화가들의 의식은 현대미술의 뿌리가 되었다고 누구나 생각한다.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보통 얘기하는 100년전, 150년 전의 서양미술사를 말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수천 년간 닫혀있고 금기시되었던 개인의 생각과 권리를 표출한 사람들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뿌린 씨앗은 잘 자라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특히 1960년대 이후 팝아트의 출현은 재크와 콩나무처럼 엄청난 속도로 자라 대중에게 인식되었으며 현재 미술계의 흐름을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150년 전 인상주의 화가에서부터 현재의 화가들까지 주장하는 것은 시대가 원하는 것을 앞장서려는 태도이며 그 목적은 모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전편에서 거론하였지만 우리나라사람들이 미술을 이해하는 주된 방법인 독화(讀畫)의 방법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여 모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현대미술의 최고인기 작가인 제프 쿤스의 작품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싸구려 고무풍선으로 만들 수 있는 토끼나 강아지를 거대한 스테인레스로 만들고 수천억에 달하는 가치로 인정하는 서구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의 작품이 인정을 받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심미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것들이나 싸구려 물품도 우리의 삶에 모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일깨워 줌에 있다. 소위 이발소 그림이라는 식의 저급하고 조악한 작품이라는 뜻을 가진 키치(Kitsch)’를 고급문화로 탈바꿈 시킨 점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자극이고 충격이었으며 인류가 가져가야하는 큰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다. 


jeff koons with Rabbit 184억원에 낙찰​(왼쪽)

 

현대미술은 고정관념을 혁파하는 훈련의 최상위 도구

현대미술은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싹을 틔웠기 때문에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理性)에 의해 의식이 형성되어야한다는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성적 의식은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이 하는 사고법이 아니다. 미자각상태(未自覺狀態)에서 잠들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理性)의 빛을 비춰주는 일이다. 현대미술은 이런 자각을 느끼게 하는 자극제로 작동하고 있다. 현대미술을 설명할 때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이유는 잘 설명되지 않고 있다. 새로움의 추구 원인은 자각을 통한 이성적 인간이 되기 위함이다.

신학과 계몽사상이 대비되는 것도 죽음과 삶이다. 계몽사상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실천적 물음을 주되게 한다. 이러한 사상을 줄기차게 이어온 장르가 현대미술이다.

 

현대미술은 자연, 인간, 지혜, 교양, 삶의 태도 등등의 인간이 살아가며 접해야하는 모든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겠느냐?’라는 물음을 더해서 묻고 있다.

 

필자는 이런 물음들이 현시대의 문제를 관통한다고 본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면서 4차산업혁명이 가져오는 변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피해의식을 피력하는 경우가 많은데 4차산업혁명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발전한 현상의 호칭일 뿐이다.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겠느냐?’라는 물음의 앞에는 이성(理性)적 인간이 원하는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고 이런 가치가 4차산업혁명의 산업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4차산업혁명을 주도하는 가치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혁신이라고 바로 답을 낼 사람이 많을 것이다. ‘혁신의 원인은 산업을 발전시키고 돈을 벌기위한 수단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겠느냐?’라는 질문 때문에 있다고 본다. 결국 질문과 답은 돌고 돈다.

 

혁신은 나를 인정하고 이해한 상태에서 남을 또는 외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 현시대를 잘 살기 위해서는 타자(他者)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훈련이 필요하다. 현대미술은 이런 훈련의 도구로는 안성맞춤이다. 미술이론적 배경이나 미학적 판단력이 전혀 없어도 된다. 편안한 마음으로 현대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그 작품이 나에게 어떤 자극을 주는지만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그 자극에 의해 내가 무엇을 생각해봐야하는지를 따져보면 충분하다. 이런 경험이 누적되다보면 자연스럽게 이성적 인간이 되고 현시대가 가고 있는 방향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계속> 

 

전통을 현대적 재료와 기법으로 재해석한다.

‘21세기 정신을 전통의 산수화에 담기프로젝트 NO.1

 

Kai Jun  등용문01  150호M 227.3cm X 145.5cm  Acrylic on Canvas  2020년

 

프로젝트를 왜 시작하였는가?

현대미술은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인 장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은 어려운 것이다.’ 또는 나는 문외한이다.’라는 식으로 기피하려한다. 전시장에서 보이는 감상의 상태도 매우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이 적음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관념 변화를 꾀하려는 시도를 안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사회는 대체적인 나라가 자본주의의 사회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정의로 볼 때 사유재산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윤획득을 위해 상품의 생산과 소비가 이뤄지는 경제체제이다. 따라서 생산과 소비의 원활한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공감과 소통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공감과 소통은 남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데 일반적인 생활환경에서는 자기의 경험과 관습적인 사고의 고착화로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데 거북함이 많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좋은 장르가 현대미술이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좋은 환경 제공 말이다.

 

미국은 자본주의와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국가이다. 현대미술이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현대미술의 꽃을 피운 작가의 대부분은 미국 출신이거나 미국 거주인들 이다.

 

Kai Jun  등용문12  100호F 162.2cm X 130.3cm  Acrylic on Canvas  2020년

 

현대미술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충격적인 것이다.

1863년 에두아르 마네는 풀밭위의 점심이라는 작품을 발표하며 봉건주의적, 관습적 표현에서 탈피하여 모더니즘을 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인상주의, 큐비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등 다양한 이즘들이 나타나며 작가들은 당시의 사회에 필요한 정신적 요소를 작품에 녹여 넣는 실험적 경향을 띠게 된다. 수많은 작가들은 스스로 전위예술가(아방가르드avant garde)를 자처하며 시대정신과 문명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제시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모더니즘에서 나타난 두 가지의 흐름은 조형적 순수 예술사회적 담론으로써의 예술로 정리할 수 있는데 두 흐름 모두 신, , 귀족 등의 봉건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자기 본연의 가치관을 갖게 하려는 목적이다. 그 누구도 누군가에게 귀속 될 수 없고 스스로 완전하며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스스로의 모색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일깨우려는 태도의 산물이다.

19세기까지 사회전반에 깊이 물들어 있는 봉건주의적 사고의 혁명 또는 혁신을 위하여 기존 이념을 개선하기 위한 시도가 매우 많았다. 당시 유럽에서 활동이 많고 잘 알려진 화가들의 대부분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개선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이념적 배경을 두고 작품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참여도가 낮은 피카소의 경우도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당시 유럽의 대체적인 철학, 문학, 미술, 과학 등등의 창작자들은 이념적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활동의 변화가 세계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승전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수많은 창작자들과 자본주의 결합이 사회적 이념이 아닌 개인의 사고에 초점이 맞춰지며 자유로운 사고의 환경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추상표현주의 잭슨폴록, 팝아트의 앤디워홀, 색면추상의 마크로스코, 미니멀리즘의 프랭크 스텔라 등등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나타난다. 이 작가들의 출현은 감상자 대상이 다수의 대중을 타겟으로 하는 경향을 띤다. 이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한동안 지속되다가 1989-1991년 인터넷 보급, 천안문 사태, 소련붕괴 등의 대규모 사건과 냉전이라는 이슈의 소멸로 인하여 작가들은 더욱 소규모의 개인으로 타겟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 작가는 개인의 가치관과 삶을 지탱하고 있는 기본 요소들을 일깨우기 위한 충격의 마지막 지점까지 밀어붙이는 실험을 단행하게 된다. 이러한 압박적 충격의 시대가 현재의 미술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미술은 위에서 거론한 방향으로 작가와 대중이 함께 호흡하며 발전하고 흘러왔으나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미술은 그렇지 못하다.

서양미술, 동양미술, 한국미술이라는 지역적인 성향을 말하거나 가치의 차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효용성을 말하려한다.

 

현재 우리의 삶은 어디까지가 한국적이고 어디까지가 서양적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정신적인 관념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 많이 나타나지만 삶을 지탱하는 경제 활동은 자본주의 체제안에 있으니 미술의 문화적 활용에서도 취사선택이 되어야하는데 현대미술은 어려운 것이라는 편견으로 접근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큰 문제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학습 수준이 뛰어난 우리는 왜?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하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높은 아이큐와 학습 상태를 보이고 있는데 웬만한 나라 사람들은 다 즐기는 현대미술을 어렵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몇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정보의 단절이라고 본다. 봉건주의를 자체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고 이는 왜곡된 정보와 일부 사람을 중심으로한 정보 공유의 비대칭이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광복 후 나라는 공산, 민주 양대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사상적 자유는 억압되거나 박탈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발전하고 있는 모더니즘(현대미술)은 사상을 바탕으로 발전하였기에 우리나라에 유입되는 미술의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며 사상의 바탕을 배제한 작품의 표현적 결과물만 알게 되었다. 더불어 6.25 전쟁 후 극빈국이라는 가난한 시절에 당장 배워서 생계를 이어갈 기술을 익히고 배우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에 정보의 차단은 별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사상적 가치를 판단 할 겨를이 없던 당시에는 부각되지 않던 문제들이 유신체제에서는 사회적으로 이슈화 되었으나 반공법이라는 벽에 막혀 미술의 사회적 기능은 배울 수가 없었다. 


196969일 경향신문 기사

 

당시 초중고 미술교과서에도 현대미술은 탄생배경이나 이념적 내용은 모두 제거되고 대표작가와 표현법을 소개하는 정도로 교육하였다.

이런 왜곡된 교육의 시간이 꾀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는 문제가 있다. 이 정보의 왜곡과 단절은 2000년대 들어오면서 서서히 회복되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문제는 대중의 전통에 기댄 나름의 해석이다. 우리나라는 한문 문화권으로 시서화(詩書畵)는 동일하다는 관념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래서 양반은 누구나 시서화를 하였고 특히 그림은 자기를 정화하고 단련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여 그림 속에 의미를 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독화(讀畫)의 방법인데 그림 속에 스토리를 정해 놓고 그 스토리를 상징하는 사물을 배치하여 그림이 하나의 이야기 책이 되도록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일로연과(一路連科), 한 걸음에 향시와 전시 두 번의 과거에 연속 등과하다.

 

독화의 역사는 오래되어서 서양미술의 가치와 의미가 전달되지 않은 빈 공간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인 해석법으로 그림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 서양화를 감상 할 때 서양화의 본질적 가치를 모르니 동양화의 독화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현재까지도 나타난다.

 

수없이 많은 전시를 하며 감상자에게 무엇을 느꼈냐고 물으면 대체적으로 독화의 기법으로 대답을 한다. 형상이 어떻고, 색상이 어떻고, 배치가 어떻고, 뜻하는 바가 뭐고... , 그림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형상이나 색상이 분명하지 않은 그림은 해석이 안 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효용성 있는 미술의 감상법은?

서두에 언급하바와 같이 현대미술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렵고 쉬울 수가 없다. 동일한 대중문화인 영화를 보면 사건의 크기에 따라 감동의 충격이 차이가 난다. 종결에서 해피엔딩이던 아니던 간에 사건의 크기와 전개의 기발함이 감상자에게 충격을 주기도하고 아니기도 한다. 현대미술도 똑같은 구조 안에 있다.

영화에서 사건과 주인공 그리고 감상자는 동일시되는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전달하려는 주제의식이 감상자의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현대미술은 작가가 감상자의 삶을 근간이 되는 의식을 흔들어 놓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질문을 던지는 형식이 많다. 데미안 허스트로 잘 알려진 영국의 YBA그룹의 작가들은 대체적으로 끔찍한 소재를 이용하여 작품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끔찍한 소재로 만들어지고 그려진 작품들이 현대미술 작품가격에서 탑을 경신하는 경우가 많은데 독화의 방식으로 이 현상을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미술의 가치는 내가 가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젖어 든 어떤 관습이나 편견을 깨고 새로운 나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정신을 혁신하는 기회를 많이 제공한 작가의 작품이 우수한 작품이다. 따라서 작품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따라 내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된다. 마치 멜로영화를 보고 과거에 하지 못했던 사랑을 하겠다고 맘먹거나 액션 영화를 보고 힘을 키워야겠다 거나 나쁜 짓을 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현대미술을 보고 삶을 돌아보거나 미래를 상상해보는 계기를 만들면 된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 싶으면 내가 가진 철학적 개념과 작가의 철학을 비교 하며 좀 더 따져보면 충분하다.

 

이런 사고의 전환이 있다면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현상은 사라지고 나를 완성해가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전시장에 가서 발가락으로 그려도 이것보다는 잘 그렸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좋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발가락으로 그린 것 같은 그림은 무엇을 나에게 질문하기 위함인지를 따져보고 스스로 자기의 과거를 또는 미래를 생각해보면 된다.

또 전시장에 가서 아주 혐오스러운 소재로 그려지거나 만들어진 작품을 보고 무엇을 나에게 질문하기 위함인지를 따져보고 스스로 자기의 과거를 또는 미래를 생각해보면 된다.

 

작가는 아주 예민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현상의 재해석을 통해 이 사회를 살아가는 현명함의 힌트를 많이 받아야한다.

 

‘21세기 정신을 전통의 산수화에 담기프로젝트 NO.1은 왜 하는가?

위에서 거론한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우수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미술에 있어 매우 위축된 현상을 보인다. 나는 이런 현상이 일단 유감이고 두 번째는 전 세계의 트랜드를 예측하는 힘을 얻는데 중요한 현대미술을 기피한다는 것은 국력이 새 나간다는 것과 동일하다는 견해 때문이다. , 한발 앞선 기업의 탄생이 더뎌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전 세계의 우수 기업들은 혁신을 하기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혁신은 사고의 전환에서 나타나는데 고정관념에 얽매여있는 사람이 혁신을 주도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현대미술은 고정관념을 혁파하는 훈련의 최상위 도구라고 본다.

 

나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오랜 기간 작업을 해왔다. 개인적인 성과는 많았지만 본래 가지고 있던 대중에게 혁신의 기회를 주는 큰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수년간 고민을 하다가 나름의 체계를 잡은 것이 단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사고의 혁신 수준을 접근이 용이한 것부터 진행해야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프로젝트 NO.1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화의 해석법에서부터 벗어나는 단계를 느끼게 하기 위함이고 프로젝트 NO.2는 현대미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기법을 알게 하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프로젝트 NO.1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정을 전통의 산수화를 도구 삼아 표현한 작품들이다. 코로나사태로 처진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좋겠다. 또한 작가의 의도가 자신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느껴보면 좋겠다.

 

작품은 624일부터 30일까지 안국역에 있는 고도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Kai Jun, 소나타 음악이 흐르는 시냇가의 판타지, Oil on Canvas, 90.9cm X 72.7cm, 2019년 작

7

나는 까불이였다. 뭐 재미있는 것이 없나?만 생각하고 장난칠 기회만 살피는 까불이였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은 늘 뭔가 불만스러웠지만 할머니는 나를 무척 좋아해 주었다. 할머니는 나를 할머니 방의 벽 앞에 세워 놓고 노래를 부르게 하며 내가 까부는 모습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봐 주었다.

 

9

나는 계속 까불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더 심해졌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여자아이들에게 장난을 치고 수업시간에도 괜히 방귀를 뀌는 소리를 내어 선생님의 비위를 건드렸지만 아이들을 웃기는 데에는 특효였다. 선생님께 혼나면서도 난 뭔가 해낸 것 같은 통쾌함이 있었다.

 

11

늘 까불다 보니 혼나는 날이 많아졌다. 남과 똑같이 잘 한 일에도 나는 낮은 평가를 받고 진짜 잘못을 하면 네가 그러면 그렇지 에이 못난 놈이라는 핀잔과 비난을 받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될까?’를 생각하며 내 생각과 다른 타인들의 반응에 속상해 하는 날이 많아졌다.

 

13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서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는 친구들이 생겼지만 나는 아직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를 생각하는 까불이였다. 재작년부터 다니게 되었던 학원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것을 제외하면 생활이나 생각의 변화는 없었다. 학교에서나 학원에서 난 언제나 장난 칠 기회만 노리는 장난 사냥꾼이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나는 재미있는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저 녀석은 좀 문제가 있어.’ 라는 말을 하는 것을 가끔씩 듣게 되었다.

 

14

중학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와 별 차이가 없는 날들이 지나다가 어느 날부터 여자애들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예뻐 보이는 여자애는 꿈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장난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이 없던 나는 조금씩 매사에 신중해지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치던 장난을 칠까? 말까?를 고민하면서 쳤다. 버릇을 고치지 못하여 장난치기는 했지만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큰 변화였다. 그리고 예뻐 보이는 여자애들에게도 장난을 쳐서 정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욕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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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 보이는 여자애들이 이제 한둘이 아니다. 우리 반 여자애들은 물론이고 대체적인 여자는 다 예뻐 보인다. 심지어 나보다 한두 살 많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런 여자애들에게 환심을 사고 싶었는데 나는 늘 그녀들에게는 함량 미달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들이 뭘 좋아하는지를 살펴보니 남자 아이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열정을 쏟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나를 비교하니 나는 먹는 것을 밝혀 뚱뚱했고 옷맵시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이 들면서 난 어릴 때 할머니 앞에서 노래하던 나를 기억해 냈다. 난 아주 조금 자신감이 생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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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가 생기고 나서 여러 가지가 변했다. 먹는 것을 줄여 호리호리한 몸매가 되었고 노래연습을 많이 하여 우리 중학교에서는 제법 노래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장난을 치는 일도 거의 없다보니 여자친구도 생겼다. 대체적으로 행복한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엄마는 내가 공부는 안하고 딴 짓거리만 한다고 성을 내는 날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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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결에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것 외에 잘하는 것이 없고 대학을 갈지 안 갈지도 미지수였던 나를 여자 친구는 떠났다. 몇 번을 다시 만나달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자기 인생과 내 인생은 너무나 다른 방향을 가졌다는 모호한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난 내 인생의 방향이 뭔지 그때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난 삶의 목적이나 방향이 있었나?’

난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왜 살았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원칙이나 방식이 없었다. 늘 재미만을 쫓아왔었기에 현재의 이 순간이 중요했을 뿐 과거나 미래를 깊이 있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학업 성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학은커녕 내가 할 수 있는 기술직의 전문 영역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봐도 도대체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국문과 4학년 졸업반인 큰 누나는 나를 아직도 귀여워 해줬지만 나머지 식구들은 나를 한심한 놈이라는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특히 한 살 차이인 작은 누나는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내가 주변에 얼씬거리는 것조차 싫어했다.

봄과 여름이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초겨울에 작은누나는 당당하게 치대에 수시입학으로 들어갔다. 치대에 입학한 거지 치과 의사도 아닌데도 누나는 이미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거고 방학 중에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진료 봉사를 할 거라는 식의 얘기를 하며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임을 자주 강조했다.

 

나는 초겨울부터 더 외로워졌다. 삶의 진지함이 없었던 나는 자주 누나들과 비교되는 상황이 많아지면서 더 소외감을 느꼈다. 그럴수록 헤어진 여자 친구가 더 보고 싶어져 가끔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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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 되었지만 난 공부에는 도통 진지해 질수가 없었다. 책 펴고 몇 줄 읽다보면 어느새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내 모습이 떠올랐다. 코인노래방에 가서 노래하고 춤추다보면 소외감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얻었다. 그런데 1000원에 3곡 밖에 부를 수 없어서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추위를 이기기 위해 꺼져가는 성냥불 앞에서 안타까워했던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난 마지막 성냥이 타 들어가는 것처럼 3곡 모두를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래했고 춤췄다.

내 외로움과 소외감 그리고 1000원의 한계성이 더해질수록 노래는 느는 것 같았다.

노래가 늘어서 좋기는 했지만 친구도 대화 상대도 없는 나는 늘 외로웠다. 큰 누나는 취업하여 말단 사원이 되었는데 대학생 때와는 다르게 늦게 오는 날이 많아졌고 작은 누나는 아예 기숙사에 들어가 얼굴 볼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부모님과는 얼굴 맞대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잔소리를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름방학이 되고 작은 누나가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마치 파티를 하는 것처럼 온갖 음식을 차려 작은 누나를 위해줬고 큰 누나도 작은 누나가 있는 동안에는 집에 일찍 들어왔다. 며칠간 작은 누나가 집에 있다가 대학교로 돌아가고 나서 큰 누나가 나를 불렀다. 큰 누나는 작은 누나가 내 걱정을 하며 가족회의 비슷한 거를 제안하여 부모님과 함께 논의를 했는데 지금부터 가수를 시켜보면 어떻겠냐를 제안 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나와 가장 잘 통하는 큰 누나가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딱히 뭘 하고 싶은 것이 없었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좋았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진학의 부담이 사라져서 좋았다. 그리고 누나들이 내편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도 많이 안정이 되고 힘이 되었다.

매일 노래연습을 하고 인터넷을 뒤져 오디션이 있는 기획사를 찾았다. 몇 개의 공고가 있었지만 기획사가 중소규모여서 가고 싶은 맘이 없었다. 그냥 동네 노래연습실만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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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 한 직후 K-POP Soul이라는 대단한 오디션 프로그램이 나타났다. 나는 여기에 신청했다. 오디션이 진행되기 전까지 나는 자신이 있었다. 왠지 1등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려하게 조명을 받는 내 모습을 상상하였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오디션은 하루 앞으로 다가왔고 그동안 수백 번 불러봤던 노래와 안무를 다시 정리했으며 의상과 헤어스타일까지 큰누나의 코치를 받아 멋지게 준비했다. 행사장에는 예상보다 많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있었다.

예선은 1소절이나 2소절 정도밖에 부를 기회가 없었다.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기실 주변에는 자기의 기량을 발휘 못하고 나왔다고 안타까워하며 눈물 짓는 참가자들이 많아졌다.

어제까지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초조한 마음이 들고 있는데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깔끔하긴 했어도 무대 의상과는 전혀 거리가 먼 평상복을 입어서 눈에 띄었다.

오디션 많이 봤어요? 저는 처음인데 참가자들이 예상보다 정말 많네요.”

그도 나처럼 긴장이 되었는지 들고 있는 생수를 연신 들이키고 있었다.

. 정말 많이 왔어요. 저도 처음 참가하는데 긴장되어서 죽겠어요.”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왠지 동질감이 생겼다.

저는 자작곡 준비했는데 끝까지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 예요. 어떤 곡 준비했어요?”

그는 오디션에 자작곡을 가지고 나왔다는 생각해 본적도 없는 말을 했다. 나는 동방신비의 노래와 춤을 준비했다. 그와 나는 대기시간 내내 여러 가지 얘기를 했는데 그는 음악에 대한 소신이 강했고 싱어송라이터협회의 회원이었다. 또한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여 연세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이름은 진현이고 우리는 서로를 격려해주며 순번이 비슷하니 발표 보고 같이 가자고 약속하였다.

 

어느덧 우리 차례가 되어 오디션 장에 들어갔다. 나는 노래를 조금 부르다가 춤을 춰보라고 해서 춤도 추었다. 두 가지를 별도로 시켜서 내심 기대했지만 떨어졌다. 진현이도 가지고 온 기타로 전주를 다 했으며 노래도 남들보다는 많이 불렀다고 했는데 떨어졌다. 진현이는 자기에게 실망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미안했다. 파이팅을 외쳐주던 큰 누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주 만났다. 진현이는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이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대중가요에 무슨 철학을 그렇게 많이 담고 싶은지 묘한 말을 많이 했다. 진현이는 오디션을 보지 않고 작곡에 전념했고 나는 수없이 많은 오디션을 봤지만 다 떨어졌다. 나는 그해 겨울 아버지의 권유로 군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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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있는 동안 음악에 대한 나의 생각도 많이 성숙해졌다. 나는 음악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었으며 내 인생에 절대적인 어떤 사명이 있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군대도 갔다 왔으니 밥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고 얘기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타이르듯이 말씀하시다가 내가 음악에 대한 고집을 부리니 말 안 통하는 답답한 놈이라고 나무라기 시작했다. 군대를 가기 전까지 적극 지원해주던 집안분위기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뭔가를 해서 나의 능력을 입증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일단 가수로 인정을 받아야 했기에 다시 오디션 장을 찾아다녔다. 성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떨어지는 이유를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이제 아이돌 연습생하기에는 나이도 조금 많은 편이고 잘 생긴 것도 아니고 해서 그런 것 같았다. 노래는 오디션 보러 온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뒤지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내가 노래를 한 소절 부르다 보면 심사위원들의 숙여졌던 고개가 들리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 괜찮은데...’라는 눈빛을 주곤 했다. 나를 평가하는 눈빛에서 얻은 이런 느낌들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단점을 없애기 위해 감각적인 패션과 몸매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6팩의 복근을 만들고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다시 오디션 장을 찾으니 평가가 조금 달라졌다. 그렇게 몇 번의 오디션을 더 보고나서 중간급 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연습생이 되면 가수가 되는데 있어 한발 전진 한 것은 분명했지만 언제 데뷔를 한다는 기약은 없었다. 또한 데뷔한다고 해서 가수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연습했다. 회사가 요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연습에 매진하였다. 춤 실력은 특별하지 않았지만 노래는 동료 연습생들에게 가르쳐줄 정도로 잘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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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에 문제가 있었다. 노래는 잘되었는데 노래를 하면서 춤을 추면 다른 연습생과 안무가 맞질 않았다. 안무를 신경 쓰면 노래가 실력만큼 되질 않았고 노래에 집중하면 안무가 또 틀렸다. 아무리 연습해도 잘 고쳐지지 않아 데뷔하는 팀을 짤 때 계속 떨어졌다. 무한반복의 연습이 계속되었다. 겨울이 될 때쯤 춤의 문제가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데 예상치도 못했던 집안에 문제가 생겼다. 춤에 몰두하느라고 집에는 신경을 거의 쓰지 못했다. 아버지가 퇴직을 하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는데 완전히 망했다. 큰 누나는 이제 대리고 작은누나는 아직도 치대를 다니고 있어 5식구 중에서 돈 버는 사람은 큰누나 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춤과 노래의 완성도가 생긴 시점인데 깊은 고민이 생겼다. 가수의 길을 걸어야하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얘기했고 어머니도 마트에 가서 일을 하겠다고 했다. 큰 누나는 결혼 자금 모은 것을 내 놓았고 작은누나는 휴학을 하고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가수를 그만두고 직장을 얻겠다고 했는데 집안 식구 모두가 말렸다. 이유는 내가 군대를 제대한 후에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특히 누나들이 나의 변화 된 모습을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무언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최근 모습은 다른 사람 같다는 말을 해가며 계속 가수의 길을 걸으라고 격려해 주었다.

누나들의 말이 너무나 고마웠지만 아무 능력 없는 나의 모습이 초라했다. 나는 1년만 지켜봐 달라는 부탁의 약속을 했다. 가족회의 후 나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며칠 보냈다.

 

회사에 집안 얘기를 하고 데뷔를 빨리 할 수 없겠냐는 말을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회사에서 계획한 일과 나의 상황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회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하기로 했다.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대학로에 나가서 버스킹하며 나를 알리기로 했다. 유튜브를 만들었는데 구독자가 없었다. 열심히 동영상을 올렸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버스킹은 그래도 반응이 있어 힘을 낼 수가 있었다.

진눈깨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마로니에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는데 날씨 탓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집에 가야겠다고 짐을 싸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K-POP Soul에 참가했던 현섭이?”

그는 진현이었다. 4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진현이와 나는 식사를 같이 하며 그동안 있었던 서로의 일들을 얘기했다. 진현이도 요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였는데 구독자가 없어서 고민이라고 했다. 그는 예전보다 더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음악성이 무엇인지, 아티스트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 등의 얘기를 했다. 우리는 밤이 깊어 가는지 모르게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진현이 작업실에서 잠을 잤다.

 

진현이는 다음날 함께 음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집안 상황을 얘기하면서 1년 안에 뭔가를 만들지 못하면 안 되는 절박함을 얘기했는데 그는 그럴수록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다. 이유는 자기가 그동안 만든 음악이 좋은 게 많은데 자기의 목소리로는 소화가 안 되고 퍼포먼스가 좋은 내가 하게 되면 대박이 날것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대답을 하기에는 고민꺼리가 많아서 시간을 달라고 했고 진현이는 자기가 만든 곡을 하나 주며 다음에 만날 때 한번 불러봐 달라고 했다.

진현이의 곡은 사랑노래였는데 부를수록 빠져드는 느낌이 있었다. 뭔가 기대감이 생기는 곡이였다. 며칠 진현이의 곡을 내 노래로 만들기 위한 연습을 하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진현이 함께하자는 제안을 다양한 비전을 제시하며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진현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거대한 조직과 자본을 가진 기획사에서도 대박 가수를 만들기 힘든데 우리처럼 아마추어 둘이서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 미지수였고 특히 나에게는 1년이라는 시간의 한계가 나를 더욱 압박했기 때문이다.

별로 말없이 진현의 얘기를 듣고 있는데 진현이가 갑자기 비장한 각오를 했는지 마지막으로 자기 얘기를 들어보라고 뭔가 신중한 자세를 취하며 말을 꺼냈다.

나도 너처럼 음악으로 성공하고 싶어. 어쩌면 너보다 더 강하게 원하고 있을 거야. 난 음악을 하길 원했지만 집안의 반대를 뚫기가 어려워서 절충안으로 부모님이 만족 할 만한 대학을 간 다음에 내 음악을 하기로 했지. 밤낮으로 공부해서 대학에 갔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과에 다니고 있어. 그리고 진정 나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돈도 모았어. 학교 다니고 과외나 알바하며 돈을 모아 얼마 전에야 이 작업실도 차리게 된 거야. 이제 모든 것을 걸고 음악을 하고 싶어. 그런데 나는 너처럼 노래나 춤을 잘 출 수가 없다는 한계에 항상 부딪쳤지. 나는 적어도 2-3년간 내가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자금을 확보했는데 너와 함께 한다면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소진 되겠지. 그래도 너와 함께 하고 싶어. 나는 인터넷을 활용한 글로벌 세상에 우리가 함께 한다면 분명 결과가 있다고 생각해.”

진현은 정말 진지했다. 나는 절박함에 당장 무엇이라도 해야하는 성격이었지만 진현이는 자기가 갈 길을 차분하게 준비해왔던 것이다. 나는 진현의 미래에 대한 설계 그리고 준비성과 진지함이 맘에 들었다.

그날 우리는 진지하게 미래를 함께 하기 위한 설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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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사 연습생을 접고 진현이와 음악을 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다.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고 팬을 만들기 위해 버스킹과 자원봉사 공연도 많이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우리의 팬은 작년과 비교하여 큰 차이가 없었다.

나는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에 성과가 없는 날들이 지속되면서 짜증이 늘어갔다. 진현이가 하는 말에 괜히 성을 내기도하였다. 그렇게 짜증을 내고나면 재워주고 먹여주고 노래도 주는 진현이에게 뭐 하러 그렇게 했나하는 미안한 마음과 후회가 생겼지만 자제가 안 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런 시답지도 않은 말다툼이 몇 번 있은 후 진현이는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음악작업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네. 지금 보는 책들은 뭐야?”

나는 책상위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을 보며 진현에게 물었다.

. 최근에 우리의 음악을 돌아보는 생각을 했어. 우리는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 가수가 되길 갈망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만 했어. 그리고 그 음악이 이미 시대에 뒤처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 현섭이가 좋아하는 음악도 중학교 때 듣던 음악과 별 차이가 없고 나도 그래. 우리가 듣던 노래가 우리의 감성의 바탕이 되어 버렸으니 우리가 하는 노래는 모두 10년 전 음악이라는 생각이야.”

진현의 얘기는 큰 충격을 주었다. 대중가요를 유행가라고도 부르는데 그 단순한 말의 의미를 깨우치지 못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너 요즘 공부하는 것이 뭐니?”

나는 진현의 얘기가 무척이나 중요한 말 같았다.

. 요즘은 가요나 팝송, 그리고 가수를 분석한 논문도 많아. 나는 석학들이 분석한 엔터테인먼트의 방법론을 보며 우리가 어떻게 가야하는지 길을 찾고 있어.”

진현이는 한권의 책을 내밀었다.

스타 속성이 스타와 팬 커뮤니티 동일시와 팬 자발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 방탄소년단을 중심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음악은 자기의 감성, 소위 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음악이 관계를 나타낸다는 식의 해석이 충격적이었다. 진현이가 해주는 다른 책들의 주요 내용을 설명 들으니 더욱 충격적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다보면 나와 같은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진현이는 그동안 공부하며 반성한 내용과 깨우친 내용을 말해주었다. 이후로도 진현이는 그 논문을 교인이 성경 들고 다니는 것처럼 매일 끼고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논문의 하드커버가 너덜너덜해졌다.

 

우리는 몇날 며칠을 토론했다. 팬이 좋아할 수 있는 그리고 팬이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찾아가며 분석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팬을 확보하기 위한 그동안의 모색이 순서가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팬이 좋아할만한 일을 해야 비로소 팬이 확보되는데 팬이 되어달라고 외치기만 했으니 답이 없었던 것이다.

 

진현과 나는 우리가 토론한 내용을 적용하기 위한 실천 목록을 만들었다. 진현은 조금은 복잡하고 어려운 철학적 얘기를 했는데 나는 어릴 때 봤던 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배달 총재의 어록 실천이 없으면 증명이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이 없으며 신용이 없으면 존경을 받을 수가 없다.’를 나에게 맞게 수정하여 간직했다.

팬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팬의 만족이 없고 팬의 만족이 없으면 팬덤이 없으며 팬덤이 없다면 인기가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실천사항들을 하나하나씩 챙겼고 유튜브에서도 댓글과 커뮤니티에서 팬들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진현도 그동안 고집하던 음악 스타일을 팬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많이 수정하였다. 진현의 음악 변신이 용이했던 이유는 자신이 그동안 추구했던 음악이 과거지향적이라는 판단이 들면서였다. 진현의 음악적 변신은 편곡에서 나타났다. 자기의 감성으로 만든 곡을 팬들이 원하는 스타일로 계속 수정하였다. 마치 완성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처럼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

나도 팬들의 원하는 노래의 스타일과 춤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했다. 하도 춤을 많이 춰서 진현이 작업실 바닥은 반질반질해졌다.

 

우리는 매일매일 팬들의 미래이며 희망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며 팬의 입장에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니 팬들은 놀랍게 늘어났다. 아무리 용을 써도 늘어나지 않던 팬들이 마구 늘어났고 팬클럽이 생기기까지 했다. 팬들이 늘어나니 요구사항도 많았다. 이런 것 찍어 달라. 저런 것 만들어 달라. 각양각색의 요구가 있었는데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최선을 다 했다. 몸은 엄청나게 고됐다. 진현과 나는 한 달에 한두 번씩 몸살이 났다. 하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특히 외국 팬들의 요구를 노래와 춤으로 잘 표현해주면 자발적으로 그 지역의 팬덤을 일으켜 주었다.

우리는 늘 팬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 모습이 좋았나 보다. 가족들도 나의 변화에 안정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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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의 팬덤이 상승곡선을 그리며 치솟다가 드디어 유튜브에서 다이아몬드 버튼을 받게 되었다. 구독자가 1000만명을 넘으면 주는 상징적 기념물이다.

우리는 이제 누가 봐도 가수다. 그것도 인기 있는 가수가 되었다. 다이아몬드 버튼을 받은 내용이 신문의 연예기사를 장식했고 우리 노래는 노래방 애창곡이 되었다.

 

지금 나와 진현은 팬들이 원하는 희망이 되기 위해 월드투어를 나가고 있다. 여기는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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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Super M의 빌보드 1위 소식이 있었습니다. 싸이, 방탄소년단의 성공을 이어가는 우리 가수들의 눈부신 활약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Kai Jun(전완식)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 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 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 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운영위원, 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 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 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

 

우리는 예술가!

대한민국은 국민 모두가 예술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사진을 찍어 SNS에 온라인 전시를 하고 모임이 있으면 으레 노래방에서 노래 한가락 불러야 마무리가 된다.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콘테스트에 100만명이 넘게 지원하는 것을 봐도 예술이 생활이고 삶 자체이다. 그런데 예술적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예술가라고 자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예술가임을 인정하며 전문적인 예술가들이 어떤 생각과 어떤 경험을 하는지를 제주도를 통해 1년간 매주 연재하는 여정을 떠난다. 

 


 


 


작가: Kai Jun 제목: 제주의 아름다움NO.4(부분) 크기: 116.8cm X 91cm 재료: Acrylic & Mixed Media 제작년도: 2018년

 

우리의 삶이 왜? 예술인가?

고대로 갈수록 조형적 시각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노예들이 하는 기술이었다. 고대의 여러 나라 중에서 예술을 가장 높이 평가 했던 고대 그리스도 미술은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 범주는 요즘 미국과 한국의 일부 대학에서 시행하는 자유과(自由科, liberal arts)와 유사한 형태이다. 고대 그리스의 liberal arts는 교양있는 사람이 되어 신과 교감 할 있는 수준의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교육이다. 이 교육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이 하는 행위와 사고가 예술이다.

 


작가: 이유진 촬영지: 제주도-차귀도 제작년도: 2015년

 

교육 내용은 문법, 수사학, 변증학(논리학), 산술, 기하학, 점성술, 음악 등이다. 미술이나 건축이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이고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미술(표현 기술)에 인문학과 과학을 결합하여 liberal arts적 관점의 예술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표적인 예술이 미술인데 과거의 상황에서는 멸시 받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땀 흘려가며 생산되어야하는 미술의 특성을 보면 이해 할 수가 있다.

이후 예술의 범주 안에 다양한 장르가 편입되다가 18세기 산업혁명을 전후하여 폭발적으로 장르의 확대가 이루어 졌다. 이는 7-8세부터 피땀 흘려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가지지 않아도 교양 있는 인간이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표현해내는 삶을 만들어 내면 예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시대는 4차산업혁명의 시대 안에 들어왔으니 거의 모든 것이 예술로 편입되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해율(97.9%)의 나라이며 중학교까지가 의무교육, 대학 진학률이 60%에 달하며 국민들이 가장 관심 있는 분야가 교육이다. , 교양교육이 거의 되어있다고 보며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 국민인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미 예술가임을 인정한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술가의 사고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실천하면 된다고 본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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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내용

(01)당신은 예술가입니다! - 1010

(02)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곳. 제주! - 1017

(03)유레카! 영감을 얻다!- 미술의 심봤다! - 1024

(04)자연감상과 미술감상의 공통점 - 1031

(05)우리는 왜? 힐링에 목마른가? - 117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2018년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최대규모의 인물화전을 열었으며 ‘KOREA Renaissance Art’를 선언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前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작품 소개

정조 이산이 살던 시대에 대한 궁금증으로 그 시대의 실상을 보여주는 신윤복의 그림을 여러 번 살폈던 적이 있다. 신윤복은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때 태어나서 정조때에 왕성한 활동을 했던 화원이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지칭된다. 특히 양반층의 풍류와 남녀 간의 연애, 기녀와 기방의 세계를 보여주는 그의 그림은 현시대에서 당시를 이해하는데 매우 큰 자료가 된다. 그의 아버진 신한평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원이다. 영조, 정조, 순조 초년까지 활동했으며 특히 초상화와 속화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신한평의 이름이 정선강세황김홍도심사정등과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정조 시대의 생활상을 알고 기뻐했던 감흥을 그에 대한 오마주로 미인도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하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8- 신윤복 미인도 재해석/ 유화/ 162.2cm X 130.3cm/ 2018

 

신윤복 [申潤福]

1758 ~ ?

"신윤복(申潤福). 자 입보(笠父), 호 혜원(蕙園), 고령인(高靈人). 첨사(僉使) 신한평(申漢枰)의 아들, 화원(畵員).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는 오세창(吳世昌)[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기술되어있는 것이 신윤복에 대한 문헌상 기록 내용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와서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아마도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춘화와 기생 그리고 양반의 이탈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해학적 표현을 거침없이 했다는 틀에 박힌 조선시대를 깨보려는 그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림의 수준은 그 누구와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그렸으며 다른 화원들과 다르게 색채의 다양성과 표현의 섬세함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신윤복은 아버지 신한평과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친척들이 중인이어서 다양한 계층의 일을 한 것도 영향을 받은듯하다. 특히 구하기 어려운 채색 안료를 사용한 점도 친척들의 지원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과거보다 오히려 현대적 감각이 넘쳐나는 그의 표현은 해학적 구성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가늘고 유연한 선과 원색의 산뜻하고 또렷한 색채사용, 현대적인 구도와 독특한 상황 설정으로 조선시대 풍속화의 격과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제작 방식

신윤복의 미인도를 좌측 벽면에 배치하고 방안에 미인이 환생한 것과 같은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신윤복의 미인도에서 보이는 복식과 포즈를 동일하게 하였으나 인체 비례의 안정감을 만들기 위하여 두상의 크기는 일반적인 서양화 방식과 유사하게 7등신으로 하였다. 얼굴 내부의 눈코입 비례도 가능한 선에서 동일 비율로 구성하였으나 모양의 마무리는 현재 인기 아이돌들의 눈코입 모양을 활용하였다.

배경인 방은 중인 가정의 방을 상상하여 표현하였다. 화려함이 없이 수수한 방안 가구 등으로 배치하였으며 핵심인 신윤복의 미인도와 환생한 여인의 모습이 크게 부각되도록 구성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화원 : 도화서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종사하는 잡직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도화서의 화원들이 실제로 맡아서 그려낸 일들은, 감계화(鑑戒畵교민화(敎民畵장식화(裝飾畵사대의례도(事大儀禮圖제례도(祭禮圖의장도(儀仗圖세화(歲畵경직도(耕織圖지도(地圖불화(佛畫포응견본도(捕鷹見本圖초상화(肖像畵지형실경도(地形實景圖실경산수사생도(實景山水寫生圖감상화(鑑賞畵모사(摹寫사생(寫生) 등이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가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그들을 현재와 비교해보면 다큐멘터리 작가나 사진가 등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인 시리즈 NO.8- 신윤복 미인도 재해석작품의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18314일부터 20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Kai Jun의 인물전'을 한다. 본 연재 작품도 포함된 전시이다. 

작품 소개

인물화를 그리며 우리나라 미녀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우리는 미녀를 논할 때 남남북녀(강계·회령·함흥미인)라는 속설을 말한다. 그런데 전래되어 내려온 속설과는 별개로 현대적 미의 기준으로 보면 대구미인이 으뜸으로 뽑히고 있다. 근대 이후 연예계나 미의 사절 역할을 휩쓸고 있다.

? 속설과 다르게 대구미인이 주목받는지에 호기심이 생겼다. 과학적 검증이나 역사적 검증이 안 된 시절에는 사과를 많이 먹어서 사과 미인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역사서를 보면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신라의 자장이 중국유학시절 문수보살에게 불법을 전수받을 때 문수보살이 한 말을 보면 신라의 왕족은 인도의 왕족이라는 말이 나온다. 문수보살이 황룡사에 9층 석탑을 지을 것을 권유하여 자장이 이를 전하고 선덕여왕이 건설한 일화는 삼국유사황룡사찰주본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또한 KBS방송으로도 널리 알려진 신라인은 흉노족의 후예인가?’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신라인의 지배계층이 스키타이인과 매우 흡사한 DNA구조를 가졌다고 방영하기도 했었다.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의 중심 내용은 멸망한 페르시아의 왕족이 망명생활을 하다가 연관성이 있는 신라로 와서 신라공주와 결혼하고 그의 아들이 지금의 이란으로 돌아가 전쟁을 일으켜 다시 왕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이다. 쿠쉬나메를 연구하는 한양대 이희수교수의 경향신문 기고를 보면 매우 흥미롭다. 이뿐만이 아니라 삼국사기를 보면 서기 342년 흉노족의 일파인 선비족 모용황55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북쪽으로 침공 15천 남쪽으로 침공한 4만 중 북쪽 부대가 남하하여 신라의 김씨 왕조를 만들었다는 가설도 제기되고 있다.

 

각설하고 현재 경상도에 미인이 많고 빼어남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법 한데 이런 저런 이유를 생각하여 신라의 미인 설화 중 선덕여왕을 사모한 지귀전설을 모티브로 신라의 미인을 그려보았다. 골격과 기본적인 인체 구조는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 당염립본왕회도의 신라 사신도를 참고하였다. 신라사신의 모습은 다른 사신보다 젊고 오뚝한 코와 큰 눈, 두상 및 골격 구조가 조금은 서양인스럽다. 지귀설화의 등장하는 선덕여왕의 나이는 50세이지만 매우 뛰어난 미모로 지귀가 짝사랑했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동안으로 제작하였다. 배경 및 전체적인 색상은 지귀가 불의 화신이 된 모습을 연결하여 표현하였다.

 


화가: Kai Jun/ 제목 : 한국인 시리즈 NO.6-신라의 미인/ 유화/ 90.9cm X 72.7cm/ 2018

 

선덕여왕과 지귀 설화

선덕여왕은 너무나 많은 자료가 나와 있으므로 생략하고 본 작품의 모티브인 지귀 설화만 요약한다.

 

지귀가 서라벌에 갔다가 지나가는 선덕여왕을 보았다. 그런데 여왕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단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고, 끝내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도중 지귀가 쫓아오고 여왕은 지귀가 자신을 사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절에 함께 가도록한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쳐있던 지귀는 탑 아래에서 잠이 들고 만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지귀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금팔찌를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간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발견하고 더욱 더 사모의 정이 불타올라 불귀신으로 변한다. 지귀가 불귀신이 되어 선덕여왕의 지나간 자리를 떠돌아다니다가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이 불귀신을 쫓는 주문을 지어 문에 붙이도록 하였다.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志鬼心中火, 燒身變火神, 流移滄海外, 不見不相親)’ 이후 선덕여왕의 뜻을 따른 지귀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당염립본왕회도>에 나타난 신라 사신도와 신라의 미인 작품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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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이순신 장군이라는 설정으로 그린 작품이다. 12척의 배로 국가를 지켜야 했던 장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심각한 상황에서도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정신력의 원천은 무엇이었나를 생각하며 작업했다. 

 

“勿令妄動(물령망동) 靜重如山(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했던 말은 장군의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군은 수없이 많은 시간동안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세상을 비춰보는 시간을 가졌던 같다. 장군의 업적과 위대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통찰력과 침착함은 그가 난중일기와 서간첩, 임진장초를 적으며 망중한의 여유를 가진 덕분이 아닌가 한다. 역사에 길이 남는 명장 이순신의 정신을 생각해봤다.

 

화가: Kai Jun/ 제목 : 이순신 장군/ 유화/ 116.8cm X 91cm/ 2017년 

 

제작 방식

방식은 빛과 어둠을 극적으로 배치하는 ‘테네브리즘’적인 표현으로 제작되었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유화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질감 효과를 내는 임파스토 기법을 주된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미술 용어의 이해

테네브리즘 : 서양 17세기 화파. 카라바조 작품의 영향을 받아 격렬한 명암대비로 극적인 연출을 하는 방식을 말한다. 대표화가로는 만프레디, 칼라치오로, 혼트호르스트, 피테르 판 랄, 조르주 드 라 투르, 호세 데 리베라 등이 있고, 벨라스케스와 귀드 레니도 일시적으로 그 영향하에 있었으며 렘브란트 역시 이 영향 하에 있었다.

 

 화가 : 카라바조/ 제목 : 그리스도의 매장/ 유화/ 300 x 203cm/ 1602~1604년

 

키아로스쿠로 : ‘명암’이라는 뜻. 빛에 의해 사물이 밝은 면에서 어두운 면까지 점진성을 가지며 변하는 변화를 통하여 삼차원성을 획득하는 방식을 말한다. 고대에도 사용되었지만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 많은 활용이 있었으며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활용이 되었다. 

 

임파스토 : ‘반죽된’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유화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을 일컫는다. 붓이나 팔레트 나이프, 또는 손가락을 사용해 색을 칠하거나, 직접 튜브에서 물감을 짜 바르는 방식으로, 붓자국 등을 그대로 남겨 표면과 질감에 다양한 변화를 주려할 때 이 기법을 사용한다. 렘브란트, 루벤스, 넬러의 작품 중에서 중요 부위는 이 기법을 활용하여 강조성을 주었다.

 

 

이순신 장군 작품의 임파스토 표현 1. 투구의 금동 장식 부분 / 2. 투구 귀덮개의 털 부분

 

Kai Jun(전완식)

르네상스시대부터 신고전주의 시대까지 활동했던 유럽 궁정화가들의 기법을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만들어 냈던 화려한 기법을 활용한 독특한 인물화의 표현법을 개발하였다.

이에 대한 평가는 2009년4월 미국 최대 미술 산업 그룹 Redwood Media Group의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에 선정되었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이미지 변환에 대한 표현을 510년 만에 재현한 화가이다.

 

2015년12월에는 광복 70주년 국가 행사의 대표작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전시를 했었다. 현재 한성대학교 교수이며, 前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산업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칼럼리스트 Kai Jun(전완식) 소개

30여 년간 인물화를 중심으로 회화 작업에 열중하였다인물화에 많은 관심을 둔 것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었다또한 인물을 그리기 위해 대상의 정신세계를 그림 안에 투영하려 노력하였다인물화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다룬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주요 미술경력은 국내외 개인전 27회 단체전 80여회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의 위치에 따른 형상 변화 신비를 510년 만에 재현 -대한민국 7번째 대통령 인물화 작가(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소장 문재인트럼프 대통령 청와대 소장) -Redwood Media Group 글로벌 매거진(뉴욕 발행) ‘아트비즈니스뉴스표지 작가 및 뉴트랜드 작가 15인 선정 -미국 행정/정책학 대학원 석,박사 과정 강의 자료로 작품 선정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운영위원기획위원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장 -광복70주년 국가 행사 대표작가(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및 서울도서관 전시)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전시행사 대표작가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학력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및 산업대학원 졸업하였다.

현재 한성대학교 ICT디자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설치미디어아트분과 부위원장국가미래연구원 문화예술체육 연구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