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미래연구원은 국민행복에 도움이 되는 사회적 담론 형성에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세검색

민 전체검색 결과

게시판
1개
게시물
370개

10/37 페이지 열람 중


News Insight 게시판 내 결과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30>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⑨정초[鄭招(?-1434), 시호 文景公] 새창

    V.9 정초[鄭招(?-1434), 시호 文景公] 정초는 세종의 전반기(세종 즉위년-세종 16년)사람이다. 세종 전반기 치적으로는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은 공적을 남긴 신하였다. 의 개정에서부터 의 편찬과 의 개정과 왕실의 작곡 및 의 발문작성과 혼천의 발명과 병서의 일종인 라는 책을 펴내는 등 법, 악, 농, 병, 예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신하였다. [충신과 간신] 정초는 고려시대 사헌집의를 지낸 정희의 아들로 경상도 선산에서 태어났다. 태종 5년 4월 문과복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내자직장으로 관문에 들어섰으며,…

    신세돈(seshin) 2022-07-29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29>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이천 [李蕆(1376-1451), 시호 翼襄公](下) 새창

    [제 2차 파저강 전투] 이천의 가장 잘 알려진 공적은 제2차 파저강 전투일 것이다. 끊임없이 출몰하는 올량합 야인을 방어하기 위해 평안도 도관찰사 박안신은 압록강 연변 적의 은신처를 없애자고 했지만(세종 19년 1월 2일),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은 더 강력한 응징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략질을 일삼는 야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 자원자가 매우 많을 것이고 적의 숫자도 많아야 수 백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문제는 숲속에 숨어 사는 적의 동태와 소굴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도절제사 이천은 꾸준히 정탐꾼을 들여보냈다. …

    신세돈(seshin) 2022-07-22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27>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⑦김종서[金宗瑞(1383-1453), 시호 忠翼公](下) 새창

    [읍성이냐 장성이냐]  은퇴로 빠진 영의정 황희를 제외한 대신 여섯 명을 모아 놓고 세종은 장성(長城)과 읍성(邑城) 중 어느 것을 먼저 지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대신들의 의견이 갈렸다. 좌의정 하연과 좌찬성 박종우와 좌참찬 정분과 우찬성 김종서는 읍성을 먼저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큰 도적들이 몰려오면 작은 둑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읍성으로 급히 피해야 하므로 당연히 돌로써 크게 쌓아 사람들로 의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읍성을 쌓자고 했다. 우참찬 정갑손이 반대하고 나섰다. 장성공사가 거의 끝나 가니 중도…

    신세돈(seshin) 2022-07-08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26>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⑦김종서[金宗瑞(1383-1453), 시호 忠翼公](中) 새창

    [사헌부 문책상소] 세종의 명을 받들어 혼신의 힘을 쏟아 북변을 지키고 있던 김종서에게 또 사헌부의 상소가 날아들어 왔다. 지난 해 경원과 회령에서 3천 2백 명이나 죽었는데도 그 지역 책임관들을 전혀 문책하시지 않음이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도관찰사 정흠지, 판회령부사 이징옥, 판경원부사 송희미는 물론 도절제사 김종서의 책임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으므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라는 것이다. 특히 김종서는 책임을 덮으려고 사망자 수를 줄여서 말하기까지 했다고 탄핵했다. 세종은 그들의 책임이 없는 것은…

    신세돈(seshin) 2022-07-01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25>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⑦김종서[金宗瑞(1383-1453), 시호 忠翼公](上) 새창

     V.7 김종서[金宗瑞(1383-1453), 시호 忠翼公]​  황희, 변계량, 허조가 모두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사람으로서 태종의 추천으로 세종이 중용한 사람이라면 김종서는 세종 시대에 들어 와 신임을 받은 사람의 대표라 할 수 있다. 김종서는 태종 5년 에 문과 급제하여 10년 뒤 태종 15년에 상서사(尙瑞司) 직장으로 있었다. 상서사란 인사정보 및 관리의 업무나 정부의 각종 관인을 관장하는 매우 중요한 부서였으나 인사관리 업무가 태종 5년 2월 이조와 병조로 옮겨간 이후 한직이 되어버렸다.  태종 시절에 김종서는 곡절이 많았다…

    신세돈(seshin) 2022-06-24 17:10:00
  • 윤석열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 평가 : 간중심 역동경제를 중심으로 새창

     1. 개요와 핵심구조 윤석열 정부가 첫 경제정책 방향을 6월 16일 발표했다.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 발표한 110대 국정과제를 발표한 지 45일 만에, 그리고 정부가 출범한 지 36일 만에 나온 경제관련 청사진이다. 일단 큰 정책방향은 네 가지로 잡았다.      (1) 민간중심 역동경제,    (2) 체질개선 도약경제,    (3) 미래대비 선도경제, 그리고    (4) 함께하는 행복경제 가 그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100대 국정과제의 1번 과제는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이었고 2번 과제는 반부패 개혁…

    신세돈(seshin) 2022-06-19 06:55: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24>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⑥변계량[卞季良(1369-1430), 시호 文肅公](下) 새창

    [변계량과의 세종의 의견차이] 세종시대에 들어 죽을 때까지 변계량이 좌천되거나 파면된 일이 없다고 해서 세종과의 관계가 원만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임금과의 의견 차이를 보였다. 예를 들어 태종의 국상 중에 과거시험을 볼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가 발생했다. 변계량을 위시하여 이원, 정탁, 유관 등 대부분 대신들은 반대했다. 오직 예조판서 김여지만 과거를 보는 것이 해로울 것이 없으므로 폐하지 말자(無害於義 不可廢也)고 했다. 임금은 과거를 보는 쪽으로 결정했다(세종 4년 10월 18일). 또 세종 6년에 사헌부는 광범…

    신세돈(seshin) 2022-06-17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23>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⑥변계량[卞季良(1369-1430), 시호 文肅公](上) 새창

    V.6 변계량[卞季良(1369-1430), 시호 文肅公] “내게 좋다하고 남 슬흔 일 하지 말며 남 한다고 의 아니면 좇지 마라 우리는 천성을 지켜 삼긴대로 하리라(변계량).”  황희가 세종의 행정의 대들보라면 변계량(호 春亭)은 세종의 학문과 예식의 대들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희의 명성이 의정(영의정,좌,우의정)직에서 돋보임에 비해 변계량은 거의 20여년에 이르는 대제학(문형,文衡)직에서 두각을 보이기 때문이다. 계량은 고려 말 이조판서를 지내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원종공신이 되어 판중추원사를 역임한 변옥란의 둘째아들이다…

    신세돈(seshin) 2022-06-10 17:10:00
  • 6.1 지방선거의 주당 완패와 시험대에 오른 윤석열 정권 새창

    지난 1일 실시된 전국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민주당 김동연 후보가 신승(辛勝)했다. 전국적으로 보면 완패한 형국이지만 그나마 민주당에 숨통을 열어준 승리가 아닌가 싶다.국민은 민주당을 완전히 죽이지는 않은 셈이다. 호남이야 오래된 민주당 텃밭이니 당연히 민주당이 승리할 것으로 모두 예상했다. 호남이외 지역에서 제주도를 빼고 민주당은 모든 지역에서 패배했다. 이러니 경기도에서 마저 졌다면 민주당은 완전히 전멸하는 셈이 되는 것이었다. 굳이 민주당의 경기도 승리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민주당의 잘못이 크지만 회초리 한 번 맞고 정신 …

    황희만(heman21) 2022-06-03 20:4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22>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⑤맹사성[孟思誠(1360-1438), 시호 文貞公,계속](下) 새창

    [세종과 맹사성] 세종은 즉위하자 바로 변계량, 박자청과 함께 맹사성에게 말을 한 필 씩 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경이 관습도감제조로 악사들에게 새 가사를 잘 가르쳐 율조와     합치되므로 부왕이 매우 기뻐하셨소.     (卿爲慣習都鑑提調 敎伶人新詞 合      於律調 父王歡愉 : 세종 즉위년 11월 10일)”   맹사성은 음악에 관해 조예가 매우 깊었으므로 세종은 늘 그에게 음악에 관한 자문을 구했다. 악사의 연주를 지켜 본 세종이 잘못을 지적하며 말했다.   “에는 노래 사이에 를 부른다고 했고 에는 생과 용을…

    신세돈(seshin) 2022-06-03 17: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