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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畏天本民) <57>국가위기와 행정개혁 V. 수령육기법(守令六期法)을 도입하자. 새창

    V.1 수령육기법의 채택 (세종 5년 6월 5일)[수령(守令)의 역할]수령(守令)은 지방 행정기관인 부(府), 대도호부(혹은 목), 도호부, 군, 현 각각의 최고 책임자인 부윤(府尹), 대도호부사(혹은 목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또는 현감)을 통칭하여 말한다. 이들 지방행정기관의 최고 책임자는 백성들을 가까이에서 직접 대하는 관리라고해서 근민지관(近民之官)이라고 불린다. 감사(都觀察事)는 이들 수령을 감독하는 직책이므로 수령이 아니다. 다만 감사도 감사의 영이 소재해 있는 군현의 장을 겸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수령이라고 볼…

    신세돈(seshin) 2023-02-03 17:0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畏天本民) <56> 국가위기와 행정개혁 IV. 식례상정소(式例詳定所)가 필요하다. 새창

    IV.1 음식을 줄이겠다.(감선,減膳)세종 22년 경신년 4월에 전국이 한참 동안 가물었다. 4년 전 세종 18년의 병진년(1436) 대가뭄 이후 2년 연속 큰 가뭄이 없는가 싶더니 세종 21년에는 병진년 이후 최악의 가뭄이 왔고 올해에도 심각한 가뭄이 들 징조가 역력했다. 세종은 백성들이 근신하게 할 목적으로 금주령을 내리고 감옥에 갇힌 죄수 중 일반사면에 제외되지 않는 자와 잡범 수형자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명했다. 그리고 궁핍한 사람들을 먹이고 장례를 못 치른 사체를 후히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세상이 이렇게 가문 것은 항상 자신…

    신세돈(seshin) 2023-01-27 17:10:01
  • 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畏天本民) <55>국가위기와 행정개혁 III. 용관(冗官)을 줄이고 비용을 줄여라. 새창

    III.1 쓸데없는 관리를 없애라 (용관혁파,冗官革罷)가뭄이 계속되고 백성과 삶과 국가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세종이 단행한 조치중 하나가 ‘필요 없는 관리’, 즉 용관(冗官)을 줄이는 것이었다. 세종이 즉위하고 5년 뒤인 계묘년(1423)에 수해와 한해가 번갈아 닥치자 신하들은 불필요한 관직을 대폭 없애자고 요구하였다. 심지어 40여명에 달하는 재상급 자리도 줄여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그때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계묘년에 수재와 한재가 겹쳐 백성이 기근에 처해있고 적절히 처리함 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어 불필요한 관리를 줄이자는…

    신세돈(seshin) 2023-01-21 16: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畏天本民) <54>국가위기와 행정개혁 II. 가뭄과 가뭄대책 새창

    II.1 계속되는 가뭄의 원인 : 무능과 부덕[왕의 무능과 부덕의 소치]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하늘이 가뭄을 내리는 근본적인 이유는 왕의 잘못, 정치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금이 부덕하고 정사가 고르지 못하면 하늘이 가뭄 같은 재앙으로 왕을 경계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세종 5년 4월 가뭄이 심해지자 모든 신하들에게 하교(下敎)하여 말하였다. “내가 아주 작은 몸으로 신민의 윗자리에 의지하고 있으나 총명함으로 세상을 밝히지 못하고 덕이 백성을 편안케 못하였으니 해마다 홍수와 가뭄의 흉년이 그치질 않는다. 백성이 고…

    신세돈(seshin) 2023-01-21 13: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畏天本民) <53>국가위기와 행정개혁 I. 국가위기의 해법을 신하에게 묻다. 새창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태종은 이종무와 김효손과 환관 김용기를 불러 술상을 차려 놓고 자기에게는 세 가지 눈물이 있다고 고백했다. 하나는 아들이 적지 않았으나 눈앞에 다 있지 않음이 첫째 눈물이고, 효령과 충령이 조석으로 출입하며 안부를 묻곤 했는데 이제 충령이 왕이 되어 자주 보지 못함이 둘째 눈물이요, 재위 19년 동안 가뭄 없는 해가 한 해도 없었음이 셋째 눈물이라 한 적이 있다. 가뭄은 국사에 관한 한 태종에게 최대의 어려움이었다는 말이다. 세종 때 들어와 가뭄은 더욱 심했다. 세종 재위 전반기 …

    신세돈(seshin) 2023-01-21 12:15:39
  • 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畏天本民) <53> 국가위기와 행정개혁 I.국가위기의 해법을 신하에게 묻다 새창

    I. 국가위기의 해법을 신하에게 묻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태종은 이종무와 김효손과 환관 김용기를 불러 술상을 차려 놓고 자기에게는 세 가지 눈물이 있다고 고백했다. 하나는 아들이 적지 않았으나 눈앞에 다 있지 않음이 첫째 눈물이고, 효령과 충령이 조석으로 출입하며 안부를 묻곤 했는데 이제 충령이 왕이 되어 자주 보지 못함이 둘째 눈물이요, 재위 19년 동안 가뭄 없는 해가 한 해도 없었음이 셋째 눈물이라 한 적이 있다. 가뭄은 국사에 관한 한 태종에게 최대의 어려움이었다는 말이다. 세종 때 들어와 …

    신세돈(seshin) 2023-01-06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52>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VI) 제 2차 파저강 전투 ④<2부 끝> 새창

    [황보인의 비변대책 : 연변 석성 구축] 세종의 장성 특명을 받고 평안도와 함길도로 떠난 황보인이 올린 계책은 대부분 석성을 쌓자는 것이었다. 갑산군의 지항포 동구와 감음파와 삼수리, 삭주군에서는 소삭주, 강계군에는 만포구자, 여연군에는 상무로, 그리고 경원군에는 오롱초 동구가 석성에 적당하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목책지로는 의주군의 방산과 인산, 벽동군에는 벽단, 이산군에는 산양회 그리고 회령군 공수산 등지였다.  [표.2-10] 황보인이 성을 쌓자고 건의한 군읍 축성종류 군  읍  구자​   석성​      갑산군 : 지항포 동구…

    신세돈(seshin) 2022-12-30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51>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VI) 제 2차 파저강 전투③ 새창

     VI.6 평안도 방어와 4군 설치 김종서의 함길도 경략과 두 번에 걸친 평안도 야인 토벌에도 불구하고 압록강 및 두만강 연변 북방지역의 방어는 여전히 불안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세종은 그렇게 생각했다. 야인들이란 은혜를 모르는 짐승과 같아서 아쉬우면 나와 구걸하다가도 배부르면 노략질과 도적질을 그치지 않으니 언제 또 침략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지속적으로 평안도 도관찰사나 도절제사에게 구체적인 방어대책을 지시하거나 방어의 큰 틀을 제시하였다. 특히 경솔하게 전투를 일으켜 뜻하지 않은 패배를 당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신세돈(seshin) 2022-12-23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50>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VI) 제 2차 파저강 전투 ② 새창

    [신개의 12조 전략 제안] 신개와 도승지 신인손과 좌부승지 김돈 세 사람이 밤늦도록 수립한 전투전략은 열 두 가지였다(세종 19년 6월 19일).    (i) 군사의 일은 대장이 결정하고 변방의 소소한 일은 변장이 임기응변      결정하며 반드시 조정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       (ii) 적은 반드시 토멸해야 하나 여러 번 불의의 습격을 가해야 한다.       (iii) 본도(평안도)의 군사와 말을 쓰되 세 번으로 나누어 진군한다.     (iv) 내금위 별시위 갑사 등 중앙의 군사를 7월 보름 쯤 보내되 연변 …

    신세돈(seshin) 2022-12-16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48>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V) 동북방 경략과 6진 설치③ 새창

     V.6 6진 완성 : 김종서를 함길도로 보내다  함길도, 경원, 경성 등 북방지역에 관해 세종이 확고한 국경방어 및 국경확장의지를 갖고 있음에 반해 대다수 대신들은 매우 소극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신하들과 함께 북방지역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나아가 공험진 옛날 국토를 다시 되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세종 본인만큼 적극적으로 함길도 북방영토 문제를 추진해 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이것이 세종의 고민이었다. 그리고 그 답은 김종서였다. 승지 및 대언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임금의 뜻을 잘 알고 있는 김종서가 그 역할을 잘…

    신세돈(seshin) 2022-12-02 17: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