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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38>국토를 제대로 지켜라.(IV) 제 1차 파저강 전투 ① 새창

    IV.1 여진(女眞) 압록강 이북 만주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 여진족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불렀다. 한 부류는 중국의 흑룡강성 지역에 살고 있는 여진족들로서 이들을 ‘해서여진(海西女眞)’이라 불렀고, 압록강 유역의 북쪽에 살고 있는 여진을 ‘건주여진(建州女眞)’이라 불렀다. 그리고 만주 최북단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여진을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통칭하였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지역에 따른 개략적인 분류로서 이들 여진족 안에는 다양한 여진 부족들이 내포되어 있다. 조선조 세종 때 조선과 가장 …

    신세돈(seshin) 2022-09-23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37>국토를 제대로 지켜라.(III) 대마도정벌과 왜구대책 ② 새창

     [대마도 정벌의 출사표] 지난 번 도체찰사 이종무에게 명하여 대마도 도주에게 한 번 경고를 한 바 있었지만 이제 제대로 된 정벌을 감행하기에 앞서 태종은 정벌의 대의명분을 천하에 포고하였다. 군사를 앞세우는 것이 내키지는 않지만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벌이 부득이 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다.      “군사를 동원하고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예로부터 성현이 경계하는 바요    죄를 토벌하려고 군사를 동원하는 것도 제왕이 노릴 것이 못된다.(중략)     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이나 험한 벽지에 있고 어려움이 많아 그들 원하    는…

    신세돈(seshin) 2022-09-16 17:10:00
  • 대한국 문화자산 국제화 방안 심포지엄 - 김장실 기조연설 새창

    김장실 기조연설 대한민국 문화자산 국제화 방안 심포지엄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문화가꿈포럼 이사장 김장실입니다.   오늘 발표하신 논문들은 서울을 시작으로 국토 전반에 걸쳐 아름답고 사람 살 맛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빛나는 문화를 어떻게 국제화할 것인가 하는 화두를 가지고 저희들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문화 즉, 한류는 지금 번성기에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동의하실 것입니다. 또한, 세계적인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어제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에미상 시상식에서 황동혁 감…

    김장실(kimjangsil) 2022-09-15 12:16:00
  • 혼돈의 국의힘, 그래도 희망을 본다 새창

    대한민국의 자유, 번영, 평화는 전진할 것이다.여야가 다 방향성을 잃었다. 그래서 희망적이다.정치는 파괴 되었다. 여당도 야당도 혼수상태다. 근본적인 변화는 구체제가 붕괴 되어야만 가능하다.새로운 정치와 정치세력을 재편성 할 절호의 기회다.4차 산업 시대를 선도 할 수 있게 당을 현대화 하자. 지금부터 기술하는 내용 중에 독창적 아이디어는 없다.보고, 듣고, 읽고, 체험한 것들의 변형이다. 표절이다.다만 정치 예능은 거부한다. 나름 간절함을 담았다.  여당이 여당답기 위해서는 1. 먼저 현인회의(혹은 지도자 연석회의)를 구성했으면 …

    이정현(leejunghyung) 2022-09-04 17:11: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35>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II) 새로운 땅(新地)을 찾아서② 새창

    II.3 새로운 땅 대신 찾은 삼수군과 체천자민(體天字民)  새 땅을 찾고자 하는 세종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 땅은 발견되지 않았다. 찾았다고 하는 사람을 따라 많은 물자와 인력을 제공해 찾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부임한지 반 년도 되지 않은 함길도 도관찰사 정갑손이 급히 보고를 올렸다. 왕명을 받들어 식량을 대어주고 사람을 붙여 주고 했지만 허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령하신 대로 여진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에게 중국옷을 입히고 중국인 모자를 씌워 찾았지만 소용없었다는 얘기였다.: “도내 담비를 포획하는 자로 길주갑산 지역…

    신세돈(seshin) 2022-09-02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33>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Ⅰ)국토의 북방한계 : 공험진은 어디인가?② 새창

    I.4 세종실록 지리지의 공험진 기록 세종 14년 1월에 새로 편찬된 함길도 편에는 함길도 북계 공험진과 남계 철령 사이의 거리가 천 칠백 여리(약 680km)라고 되어 있다. 이 정도 거리라면 공험진은 두만강(혹은 압록강) 부근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어야한다. 길주목의 경원도호부지에도 그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경원도호부(府)에 두만강과 수빈강의 두 강이 있다고 했다.     “두만강은 부의 동쪽에 있다. 그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오는데 동쪽으로 흘러서 동량북으로부터 사지, 오음회, 수주, 동건, 다온, 미전 등지를 지나 회질가…

    신세돈(seshin) 2022-08-19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31>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⑩안숭선[安崇善(1392-1452), 시호 文肅公] 새창

    V.10 안숭선[安崇善(1392-1452), 시호 文肅公] 안숭선은 고려 때 찬성사를 지낸 안축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의정부찬성사를 지낸 안순이다. 문음으로 관직에 출사했지만 재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세종 2년 3월 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안숭선은 초기에는 주로 사헌부에서 근무했다. 세종 10년 10월 사헌부는 모친의 상중에도 음탕한 일을 일삼는 황상이라는 자를 고발하였다. 이 자는 첩 문제로 다른 사람과 다툰 적이 있었는데 그 첩은 옛날 태종이 총애하여 옹주로 봉했던 여자였다. 따라서 황상의 첩을 비판하는 것…

    신세돈(seshin) 2022-08-05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30>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⑨정초[鄭招(?-1434), 시호 文景公] 새창

    V.9 정초[鄭招(?-1434), 시호 文景公] 정초는 세종의 전반기(세종 즉위년-세종 16년)사람이다. 세종 전반기 치적으로는 어느 누구에도 뒤지지 않은 공적을 남긴 신하였다. 의 개정에서부터 의 편찬과 의 개정과 왕실의 작곡 및 의 발문작성과 혼천의 발명과 병서의 일종인 라는 책을 펴내는 등 법, 악, 농, 병, 예 등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신하였다. [충신과 간신] 정초는 고려시대 사헌집의를 지낸 정희의 아들로 경상도 선산에서 태어났다. 태종 5년 4월 문과복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내자직장으로 관문에 들어섰으며,…

    신세돈(seshin) 2022-07-29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29>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이천 [李蕆(1376-1451), 시호 翼襄公](下) 새창

    [제 2차 파저강 전투] 이천의 가장 잘 알려진 공적은 제2차 파저강 전투일 것이다. 끊임없이 출몰하는 올량합 야인을 방어하기 위해 평안도 도관찰사 박안신은 압록강 연변 적의 은신처를 없애자고 했지만(세종 19년 1월 2일),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은 더 강력한 응징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략질을 일삼는 야인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 자원자가 매우 많을 것이고 적의 숫자도 많아야 수 백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문제는 숲속에 숨어 사는 적의 동태와 소굴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도절제사 이천은 꾸준히 정탐꾼을 들여보냈다. …

    신세돈(seshin) 2022-07-22 17:10:00
  •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畏天本民) <27>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⑦김종서[金宗瑞(1383-1453), 시호 忠翼公](下) 새창

    [읍성이냐 장성이냐]  은퇴로 빠진 영의정 황희를 제외한 대신 여섯 명을 모아 놓고 세종은 장성(長城)과 읍성(邑城) 중 어느 것을 먼저 지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대신들의 의견이 갈렸다. 좌의정 하연과 좌찬성 박종우와 좌참찬 정분과 우찬성 김종서는 읍성을 먼저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큰 도적들이 몰려오면 작은 둑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읍성으로 급히 피해야 하므로 당연히 돌로써 크게 쌓아 사람들로 의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읍성을 쌓자고 했다. 우참찬 정갑손이 반대하고 나섰다. 장성공사가 거의 끝나 가니 중도…

    신세돈(seshin) 2022-07-08 17: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