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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47>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V) 동북방 경략과 6진 설치②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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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11월25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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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3 경원부의 이전 반대론

 

거의 모든 의정육조 대신들이 경원을 남쪽 용성으로 옮기는 것을 찬성했지만 반대하는 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마도 정벌에서 좌군절제사로 무공이 있는 전 좌군동지총제 박초가 경원이전의 반대론을 강력하게 들고 나섰다. 그는 경원을 옮기지 말아야 하는 네 가지 조건을 들었다(세종 9년 9월 29일 <세조 7년 3월에 첨부되었음>).

 

   (i) 왕은 천명을 받아 선대로 부터 물려받은 인민과 땅을 끊임없이 지켜   

      하는데 조종이 전한 땅을 내어주어 적들이 탐내도록 한다는 것은     

      국가에 이득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해를 끼치는 것이며,        

     

   (ii) 우리 국경은 공험진 남쪽이었는데 고려 때 공주로 옮겼다가 또 옮겨   

     경원으로 이전하였는데 국경을 북쪽 공험진으로 옮기기는커녕 두 번    

     이나 아래로 내려온 것도 모자라 또 용성으로 물리자니 말이 되는가,

        

   (iii) 방어하고 혹 다독거리고 혹 제압하여 적을 다스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임금의 깊은 뜻도 헤아리지 않으며, 적이 공격해 올 것만 우려하여     

     자꾸 뒤로 후퇴하고 지키기만 하려고 하는 그들이 과연 국가를 생각    

    함이 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용성까지 물러서면 적의 우환이 없다고    

    과연 장담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iv) 용성으로 옮기면 방어가 쉽다고 하나 경원을 포기하는 것이 되고 따    

     라서 용성이 새로운 국경이 되는 것 아니냐. 바로 이런 현상을 두고    

     입술이 없으니 이가 시리다고 하는 것이다. 멀리 변방방어를 위해 부     

    임해 가는 것(부방,赴防)이 힘들다고 하는데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변경 요충지는 다 그렇게 먼 길을 가서 방어를 하고 있다.   

 

세종의 뜻도 단호했고 또 박초와 같은 무신이 동조하고 나니 경원을 용성으로 이전하는 문제는 결론이 났다. 이제는 경원의 수비상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V.4 경원부(慶源府) 수비전략

 

함길도 경차관으로 파송된 송인산이 함길도 도관찰사 및 도절제사와 함께 의논하여 올린 경원수비전략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세종 10년 2월 13일). 

 

 (i) 경원의 옛 땅에 목책 대신 석성을 쌓는다.

 

 (ii) 주변 여러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수시로 군인들이 순찰 방어한다.

 

 (iii) 경원 경내에서 땅을 경작하는 사람은 3년간 세금을 면제한다.

 

 (iv) 경원과 용성의 방위군은 정군으로 각 150명으로 1개월 단위로 

     머무르나, 12월과 2월 사이에는 춥고 말먹일 풀이 없어 적군이 나오지   

    못하므로, 유방군 수를 100명으로 줄여 휴식하게 한다.

 

세종은 정부와 육조가 이 방안을 검토해보도록 하였다. 먼저 이직은 석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목책을 더 넓은 지역에 쌓아 방어하되 용성에는 더 큰 성을 쌓아 군대와 백성이 다른 구역으로 분할해 같이 거주케하자고 했다. 맹사성도 비슷하게 대답했다. 요충지에 별도로 목책을 더 쌓고 사람을 보내 방어하자는 것이다. 황희는 12월 2월 사이에 유방군 수를 100명으로 줄이고 두 읍에 각각 남는 50명으로 상번과 하번으로 나누자고 했다. 세종 10년 10월 함길도 순심사로 나가 그 지역의 성곽을 둘러본 이천도 경원을 옮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 보고 했다(세종 10년 10월 20일).   

     

V.5 경원이전 문제 재 점화

 

경원부 땅은 원래 척박하여 농사짓기가 힘들고 또 수시로 야인들이 공격해 들어오므로 적이 두려워 개간을 하지도 못한다. 그러니 백성들 생계는 점점 어려워져 옛 경원과 용성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라와 선왕의 근본 뜻을 생각하면 옮길 수가 없고 고통 받는 백성을 생각하면 옮겨야 한다. 여러 해 논란이 있었으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세종이 황희를 함길도도체찰사로 보내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 마음은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겨 큰 진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흩어져

    농사를 짓도록 하고 지금 경원의 땅에는 석성을 쌓고 비장과 군사 

    2,3백 명을 파견하여 성을 지키고 적변을 방어하며 적의 통로를 차단  

    하고 연대를 쌓아서 좀도둑의 동태를 망보게 한다면 이 두 가지 이론을 

    동시에 얻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내가 직접 보지 못하여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워 경을 보내 가능성 여부를 심사한 뒤에 결정하겠다.  

    (予心以爲移慶源於龍城 以爲巨鎭 使良將固守 民人布散業農 

    築石城于今慶源之基 令裨將率兵二三百 守城禦變 且於賊路 

    築煙臺以侯鼠竊 則於此二論 庶得兼全矣 然予未得目擊 難以遙度 

    欲遣卿審定便否 : 세종 14년 3월 6일)”

 

영의정이 된지 6개월 밖에 안 된 황희는 ‘노약하고 병든 몸이라 국가 억만년 무궁한 계책을 수행하기 부족한 점이 많으므로 함길도 길을 호조판서 안순과 동행하기를 요청’하여 승낙을 받아 함길도로 출발하였다(세종 14년 3월 6일). 황희가 함길도 도체찰사가 되어 경원용성지역을 둘러보고 세종에게 올린 보고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i) 용성의 장항, 승가원, 요광원현은 적의 침략 경로이다. 따라서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기고 용성에 석성을 쌓아야 한다. 경원에는 임시 벽성을 

    쌓고 적당한 수의 군인으로 주둔케 한다.

 

 (ii) 함길도 도절제사 관영인 길주는 경성의 용성까지 약 218리이고 

    경원부까지는 278리이므로 만일의 경우 군사이동에 너무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따라서 도절제사 관영을 길주에서 경성으로 옮겨야 한다.      

 (iii) 경원부를 용성의 근동 부리로 옮기고, 경성군은 주촌동 옛 성터로 이전   

   하는 것이 좋다. 

 

세종의 기대는 또 사라졌다. 이번에는 뭔가 경원을 옮기지 않아도 될 이유를 제시할 것으로 황희에게 내심 기대했는데 더 또박또박하게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겨야 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황희의 제안을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세종 14년 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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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의 의견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경원부의 용성 이전에 관해서는 황희를 포함하여 14명이 찬성했고, 조계생과 성엄 단 두 명이 경원이전을 반대했다. 세종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황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함길도 방어의 요충지가 어디인가.

     (何以咸吉道防禦要害之地乎 : 세종 14년 4월 12일)”

 

황희는 용성이라고 대답했다. 세종은 다시 간단하게 되물었다. 

 

   “대장이 진을 설치할 때 진을 깊숙한 곳에 두며 극도의 바깥(후방)에 

    두지 않는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或以爲大將置鎭 宜在深邃 不宜極邊 此意何如 : 세종 14년 4월 12일)”

 

황희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자기를 함길도로 보내놓고는 경원부 이전 문제를 묻고 또 다시 되묻는 세종의 속내를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경원부를 함길도 방어의 요충지로 생각하는 세종은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길 생각이 전혀 없음을 황희가 알았다. 황희는 그 동안의 주장을 일순간에 뒤집었다. “극도의 바깥(용성)에 진을 두면 오가는 적을 따라가 잡기 곤란하므로 방어하는 진지는 당연히 깊숙한 곳(경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이제 경원의 용성이전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경원부를 용성으로 옮길 것이 아니라 경원부의 방어를 한층 더 강화함과 동시에 경성의 방어능력도 동시에 개선시켜야 한다. 세종의 확고한 뜻을 간파한 병조도 경성 이북에 있는 석막 상평에 석성을 쌓고 인근 군인을 들여와 영북진을 세워 길주에 있는 함길도 도절제사의 관영을 옮겨오도록 요청하였다(세종 14년 6월 14일).       

[절호의 기회 : 동맹가첩목아 부자의 피살]

 

세종 15년 11월 동맹가첩목아와 그 아들 동권두가 올적합에게 피살되는 변고가 발생했다. 동맹가첩목아와 그 아들 동권두는 이만주와 함께 동북방면 여진족의 두 거두였다. 동씨 부자는 두만강유역을 무대로 하는 알타리계 여진의 두목이었고, 이만주는 파저강 저변을 석권하는 올량합 여진의 두목이다. 파저강 유역의 올량합을 토벌하기 위해 연초부터 동맹가첩목아 무리의 동태를 유심히 감시하고 경계해 왔는데 올적합 여진의 습격을 받아 부자가 사망한 것이다. 세종은 이것을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잃어버린 옛 지역을 회복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가 확실했다. 직접 그렇게 말하였다. 마치 “하늘이 멸망시킨것 같다.”고 했다(若天亡之也).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세종은 즉각 신하를 불러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목하는 원래 본국의 영토 내에 있다. 범찰 등이 딴 곳으로 가서 살고   

    또 강한 적이 들어와 알목하에 살게 되면 국토를 잃을 뿐만 아니라 새   

    강적이 나타나는 것이다. 내 이번 기회를 활용하여 영북진을 알목하로    

   옮기고 경원을 소다로로 이동하여 옛 강토를 회복하여 조종의 뜻을 

    계승하고자 하는 데 어떤가. 

   (斡木河本是我國境內 儻或凡察等移居他處   

   又有强敵來居斡木河 非但失我國之境 又生一强敵也 予欲乘其虛移寧北鎭  

   於斡木河 移慶源府於蘇多老 以復舊疆 以繼祖宗之志 何如

    : 세종 15년 11월 19일)”

 

사실 경인년(1410)의 난 이후 태종이 경원부를 경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부거참에 옮기는 것을 보면서, 선왕은 경원부를 더 북쪽에 두고 싶은 염원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세종이 계속 이어서 말했다.

 

    “내가 옮기고자 하는 것은 큰일을 좋아하거나 공을 기뻐해서가 아니다.

     조종께서 번리(국경방어진지)를 설치하셨으면 자손은 이를 마땅히 보완   

    해야 한다. 처음 양진을 설치하시고 옛 국토를 개척하셨을 때 이미 법     

    은 성립된 것이다. 그것이 어찌 나의 공이란 말인가. 

     (予欲移排者 非好 大喜功 如祖宗設藩籬 爲子孫者 從而補之耳 始置兩鎭 開拓舊境 是祖宗    

     己成之規 夫豈予之功也 : 세종 15년 11월 19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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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11월25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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