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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50> 국토를 제대로 지켜라 (VI) 제 2차 파저강 전투 ②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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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12월16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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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신개의 12조 전략 제안]

 

신개와 도승지 신인손과 좌부승지 김돈 세 사람이 밤늦도록 수립한 전투전략은 열 두 가지였다(세종 19년 6월 19일).

 

   (i) 군사의 일은 대장이 결정하고 변방의 소소한 일은 변장이 임기응변

      결정하며 반드시 조정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

    

   (ii) 적은 반드시 토멸해야 하나 여러 번 불의의 습격을 가해야 한다.   

 

   (iii) 본도(평안도)의 군사와 말을 쓰되 세 번으로 나누어 진군한다. 

 

   (iv) 내금위 별시위 갑사 등 중앙의 군사를 7월 보름 쯤 보내되 연변 

       마을에 10명씩 부방하는 목적으로 간다고 동원한다.

 

   (v) 화포 교습관 및 약장을 적당히 더 보낸다.  

 

   (vi) 도내 수령 중 전투에 능하지 않은 자는 교체한다. 

 

   (vii) 탈 만한 말 100여 필을 도내 각 고을로 보내 미리 기르게 한다. 

 

   (viii) 정탐 기병 50, 60명을 은밀히 침투시킨다. 

 

   (ix) 마른 양식을 도절제사가 준비하게 한다.

 

   (x) 건너갈 배를 도절제사가 더 만들도록 한다.

 

   (xi) 사람과 말의 양식과 우비무기를 도절제사 계획에 따라 조달한다. 

 

   (xii) 포상할 포화 돈을 미리 준비하게 한다.  

 

12개 전략을 꼼꼼히 검토한 세종은 대체로 좋으나 부족한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로,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반복적이고 기습적인 타격이 더 효과적인 전략이 되는 전쟁이다. 그래서 세종은 구체적인 전투전략을 상세하게 지시했다(세종 19년 6월 19일). 

 

   (xiii) 당연히 도내 정병 수백 혹은 수천 명을 뽑아 적의 소굴을 수색하되 

        드물게 하고 혹은 자주 하고 무시로 군사를 보내며 강을 건너

        들어가 수렵을 하기도 하고 근처에 주둔도 하여 장차 토벌할 것 

        같이 하면 저들은 반드시 농사를 포기하고 방어하느라 바빠져

        쉴 틈이 없게 되며 적이 군사를 집결하면 우리는 군사를 파하기를    

        반복하고, 이로 인해 저들은 분명히 해이해 질것이고 이 때 아군이    

        잠입하여 습격하면 바라건대 뜻을 이룰 것이다. 

       (當擇道內精兵或百數或千數 搜其賊穴 或疏或數 無時遣兵 渡江而入 

       或獵山野 或徇近地 如張致討 彼必廢農 備禦之不暇 彼集其兵 我便罷     

       兵 如此之久 彼必懈怠 我潛襲之 庶可得志矣)

 

그리고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에 관해서는 무엇보다 말먹이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므로 추수시기와 겹치는 가을이 늦은 겨울이나 이른 봄보다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xiv) 내 뜻은 초목이 쇠잔해지기 전, 말 먹이기 편한 때 군사를 움직여

        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

        (予欲於草木未衰 便於飼馬之時 始發兵以行 卿意謂何)

 

군사의 동원에 관해서도, 

 

   (xv) 수시로 부방군은 파병하되 여름에는 부방군이 모자랄 것이므로 남부 

        군졸을 징집하는것이 가능하겠다.

        (無時派兵 夏節則元赴防軍數少 宜加徵南道軍卒矣)  

 

고 제안했다. 이천이 원래 제안한 12개 지침에다 세종이 추가한 3개 제안을 합해 총 15개 전투지침이 마련된 셈이다. 찬성 신개와 승지들이 그 초본을 써서 올리자 죽 읽어가던 세종이 마지막으로 한 조항을 더 추가했다.

 

(xvi) “경이 위 16개 조항을 다시 생각하여 혹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혹

      늦추어야 할지 서둘러야 할지, 혹 다른 특별한 대책이 있는지 모두

      상세히 비밀리에 보고하라. 

     (卿以上項十六條 反復思之 或可或不 或遲    

      或速 或別有他策 詳悉密啓)”  

 

이어 세종은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에게 또 대책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적을 맞아 적의 예봉을 꺽는 방법을 남김없이 숙고하고 단단히 밀봉하  

    여 보고하라. (其臨機應賊 摧鋒之術 無遺熟計 實封以啓  如有未盡條件   

   則續續啓達 : 세종 19년 6월 21일)”

 

VI.3 이천의 작전계획(세종 19년 6월 30일)

 

이천은 급히 답변을 보내왔다. 16개 조항 중에서 (i), (ii), (ix) 및 세종이 제안한 (xiv)는 전적으로 찬성한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대안을 제시하였다.  

 

    (iii)의 본도(평안도)의 군사와 말을 세 번으로 나누는 문제에 관해서는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고 또 매복에 걸릴 가능성이 높으므로 두 군데   
     로 나누자고 했다.  

 

    (vi)의 전투에 능하지 않은 수령을 교체하는 문제는 소문을 퍼지게 하며   

      이미 15명의 유능한 지방 수령이 있으므로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viii)조항은 지금은 적절치 않고 전쟁에 돌입했을 때 정탐 기병 50, 60   

        명을 은밀히 침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xiii)의 정병 수백 혹은 수천명을 뽑아 적의 소굴을 수색하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작년 귀화한 동두리불화의 정보로 볼 때 이만주 일당은 분명히 올라산 오미부 근처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9월 초순이나 8월 하순 일을 감행하면 된다고 했다. 며칠 뒤 이천이 작전계획을 서울로 보내왔다(세종 19년 7월 17일). 지금까지 정보를 종합하면 이만주 일당은 오미부에 있거나 인근 올라산성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오미부로 진격하는 세 갈래 길이 있는데 강계에서 파저강을 건너 오미부 동쪽으로 진격하는 길(1로)과 이산에서 파저강을 건너 올라산 동쪽 기슭을 따라 오미부 서쪽으로 들어가는 길(2로)과 이산에서 파저강을 건너 올라산 서쪽을 돌아 오미부로 들어가는 길(3로)이다. 

 

이천은 크게 두 가지 전략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8월 10일 경 정예군 50, 60명을 미리 보내 갑자기 습격하여 괴수를 잡은 다음 8월 20일에 다시 공격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8월 10일 3, 4인을 몰래 오미부에 보내 염탐하고 8월 20일 경에 습격하며 논밭을 쑥대밭으로 만든 다음 후퇴하고 다시 공격하기를 반복하는 전략이 그것이라고 보고했다. 필요한 병력은 기병 2천 5백에 보병 5백이면 될 것이고 군사는 세 갈래로 나누면 족할 것이라고 했다. 공격개시 시점은 8월 20일과 9월 초순과 중순 셋 중에서 정해 주시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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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4 세종의 지시(임기작량 임시작량,臨機酌量 臨時酌量) 

 

세종은 이천이 보내온 전투계획을 도승지 신인손과 좌부승지 김돈과 참찬 신개 세 명에게만 의논하도록 한 뒤 그 결과를 토대로 이천에게 말했다. 이천의 계획이 전반적으로 잘 되어있지만 전략에 관해서는 첫 번째 전략인 8월 10일 미리 50, 60 여명의 척후병으로 습격한 뒤 8월 20일 대군으로 진격한다면 적군이 다 알고 도망치지 않겠는가. 그러면 상책이 아니라 하책이다.

 

   “권도는 미리 세우기 불가하고 변화는 미리 그려보기 불가하다.

    경이 반복 숙고하여 임기응변 적절히 시행하라.(權不可預設 變不可先圖

    卿反復熟思 臨機酌量施行 : 세종 19년 7월 18일)”

 

그리고 작전 개시 시점에 관해서도 어떻게 결정하기가 어려우니 이천이 현장에서 잘 판단해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하늘의 도는 미리 예단하기 어려우니 경이 때에 이르러 

    참작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만약 적절한 시기를 얻지 못하면 꼭 이번

    가을이 아니어도 된다. 천천히 전략을 생각하여 다음 봄이라 하더라도 

    늦은 것이 아니다. (然天道難以預料 卿臨時酌量動兵 如未得適宜之期 

    則不須今秋 徐思爲之策 雖來春亦未晩也 : 세종 19년 7월 18일)”

 

세종 19년 6월 11일 이천이 야인토벌을 건의한 지 꼭 한 달 열흘 만에 모든 작전계획이 전격적으로 확정되었다. 이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종과 이천과 참찬 신개와 도승지 신인손과 좌부승지 김돈 다섯 명밖에 없었다. 그전투 계획이 확정되고 난 뒤에야 병조판서 황보인을 불러 평안도 토벌계획을 알렸다. 이번 전쟁은 주무부서 최고 책임자인 병조판서도 모르는 가운데 진행된 셈이다. 평안도 감사 박안신에게 토벌전쟁을 알리면서도 자제나 지친에게 정보가 누설되지 않도록 신신 당부했다.

 

   “대저 병사는 비밀을 귀히 여긴다. 경중에서 의논한 자도 한 두 대신에

    불과하다. 비록 수령관과 자제와 지친이라 할지라도 알지 못하게 하고 

    홀로 깊이 생각하고 힘을 다하여 성공하도록 도모하라.  

    (大抵兵貴秘密 京中與議者 亦不過一二大臣僚 雖領官及子弟至親者 

    毋使知之 卿獨潛心 盡力善圖 : 세종 19년 7월 18일)”

        

전략은 완벽히 수립되었고 현장에서는 평안도 도절제사와 도관찰사가 모든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세종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도절제사 이천에게 편지를 띄워 주의를 환기시켰다. 

    

   “만일 만주를 사로잡는다면 큰 행운이겠으나 만주 소굴만 찾다가      

    동족들 소굴을 수색하지 않는다면 양쪽을 다 잃는 폐단이 없지 않다.   

    대저 토벌에는 소탕이 최고다. 경이 그것을 잘 알아 작량 시행하라. 

    (如擒滿住則幸之大也 惟其一向滿住掘穴 而不探同類之所居 則不無 兩失   

    之弊矣 大抵討伐 掃盪爲最 卿其知之 酌量施行 : 세종 19년 8월 14일)”

 

VI.5 이천의 승전보

 

세종 19년 9월 22일 이천의 승전급보가 서울에 도착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작전은 9월 초 7일 좌군도병마사 이화와 우군도병마사 정덕성이 산양회에서 압록강을 건너갔고 도절제사 이천은 만포구자에서 압록강 여울을 건넜다. 좌, 우군 두 군사는 9월 11일 올라산 서남쪽 고음한 지방으로 들어가 공격을 개시했다. 이천 군사는 오자점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9월 13일 새벽 우군과 이천의 군사가 합류하여 오미부를 포위하였으나 이미 적이 알고 도피한 뒤였다. 도절제사 군대는 즉시 후퇴하고 우군만이 남아 좌군과 합류했다. 그날 여러 번 적의 기습이 있었으나 격퇴하였고 그 다음날 14일 좌우군 모두 퇴각하여 9월 16일 모두 본진으로 돌아왔다. 적 포획 60명에 아군 피해는 사망 1명이었다.

 

[전공 논란과 노한 파면 : 大臣의 체통]

   

세종은 내시 김충을 보내 이번 전투의 공에 대한 포상을 의정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크게 포상해야 한다하고 어떤 이들은 포상할 가치가 없다고 폄하하였다. 의견이 크게 달랐다. 그러나 자기 소견을 말하는 것이니 옳고 그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세종의 생각에 따라 취할 것은 취하고 그러지 않을 것은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시 충이 들어와 말하기를 “이천이 공략한 곳은 농막 한 두 곳에 불과하고 도적들은 이미 다 도주해 버렸으며 무고한 중국 사람들만 잔뜩 죽인 것이다. 여연판관이 군사 2, 3백 명으로 출병해도 이보다 더 큰 전과를 올렸을 것이라.”고 한다고 보고했다.     

 

세종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난 번 1만 5천을 보낸 제1차 파저강 전투에서는 살아 돌아오기만 해도 큰 전공이라던 사람들이 이번엔 겨우 7천의 군사로 포획자 60여명에 한 사람밖에 피해가 없는데도 이 공을 저렇게 얕잡아보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어제만 하더라도 승전을 치하한다 해놓고서는 하루 만에 이제 와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호통치며 물었다. 내시는 우의정 노한이라고 대답했다. 우의정 노한의 부인은 세종의 모친 원경왕후의 여동생이니 세종에게는 이모부인 셈이다. 세종은 다시 내시 충을 보내 그 발언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게 하였다. 우의정 노한은 자기 말뜻은 판관이 홀로 2, 3백을 거느리고 출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군을 거느리고 간 다음에 기동대로 2, 3백을 보내면 된다는 말이었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황희와 찬성 신개도 그렇게 들었다고 노한 편을 들었다. 세종은 도승지 신인손과 우승지 김돈을 보내 다시 확인하게 했다. “‘이종효에게 군사 2, 3백 명만 보내도’ 라고 노한이 말했다는데, 이 말은 ‘이종효 혼자 2, 3백을 끌고 출정한다.’는 뜻이었는가, ‘대군을 거느리고 간 다음에 종효에게 군사를 나누어 준다.’는 뜻이었는지 솔직히 대답하라. 그러면 문제 삼지 않겠다.”고 물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황희는 이렇게 변명했다. “의정대신들이 이천의 공은 상을 줄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서로 상의도 없이 노한이 불쑥 그 말을 하므로 속뜻은 잘 모르겠으나 아마 ‘혼자 2, 3백을 끌고 나가도 그만한 공은 거두었다’는 뜻이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신개도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황희와 같은 생각이라 대답했다. 세종은 노한을 파직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지친으로서 언어와 행동이 존경할만한 사람이지만 말이 많으므로  당연히 우의정직을 파면한다. 전에 김종서가 혐진토벌을 청할 때 한이   와서 말하기를 반드시 임금이 거부할 것을 알고 종서가 요청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떻게 대신이 할 말인가. 성인이 말하기를 상대의 말을  거꾸로 거짓으로 요량치 않는다고 했는데 하필 그렇지도 않은 사람마음을 거꾸로 요량을 하는가. 비록 일의 수미는 잘 모르지만 성공한 후에 하필 중국 사람을 알고서도 죽였다고 의심하는가. 당연히 작은 일이나 재빨리 말을 바꾸어 자기 잘못을 벗으려 엿보는 것은 대신의 체통이 아니다.  

   (予之至親 言語擧止 皆可觀也 然多言當罷職事 向者金宗瑞之請討嫌眞也   

   閈乃曰 宗瑞必料上止之耳 此豈大臣之言乎 聖人云 不逆詐 何必逆料人 未  

   然之情乎 雖不知事之首尾 成功之後 何必疑唐人之見殺乎 當小事 卽變辭以  

   窺免己過 非大臣之體 : 세종 19년 10월 17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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