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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오늘 한국전쟁의 은인 트루먼을 생각해야 하는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01월14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1월14일 14시53분

작성자

  • 장성민
  •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이사장

메타정보

  • 18

본문

미국의 33대 대통령 트루먼

그는 누구인가? 나는 왜 지금 그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는가?

그것은 조국 대한민국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이래로 최대의 안보위기를 맞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안보가 최대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는 것은, 지난 70년 동안 우리의 안보 축이었던 한미동맹이 최대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금 남북의 지도자가 만나면 만날수록, 평화의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그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혼란을 예고하는 것이다. 
남북한 간의 군사적 합의가 이뤄지면 질수록 그것은 남북화해와 평화공존의 긴장완화가 아니라 새로운 전쟁과 긴장강화의 먹구름을 떠올리게 한다. 남북 간의 교류협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은 화해상생과 민족통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남남갈등과 국제고립의 심화된 상황을 예상케 한다.

왜 그럴까?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현 정권은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대북정책을 주도할 수 있는 정책, 전략, 비전이 없다. 또 그렇게 추진할 의지, 능력,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 정권은 남북관계에 관한한 주도자가 아니라 철저한 종속자이다. 그래서 모든 남북관계는 교류협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리고 접촉이 잦으면 잦을수록 북한의 지배력은 커지는 반면에 한국의 영향력은 그 만큼 작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적으로 장기화되면 한국은 완전히 북한의 지방정부화 되거나 꼭두각시로 전락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통일의 주도권이 북한으로 넘어가는 ‘노예와 같은 신세’에 처하게 된다.

둘째, 김정은은 어떤 경우에도 핵포기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종국에는 북한의 핵무력은 강화되면서 한미동맹은 약화되고 한국의 안보는 무력화되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평화라는 이름하에 한국의 무장은 해제되면서 북한의 핵무력은 날로 강화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한 간의 군사합의가 이뤄지면 질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위협이다.

셋째, 북한은 원래 국가의 창건 자체가 거짓 위에 세워진 나라이고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약속을 지켜 본 적이 없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소굴이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할 수 없다. 북한은 항상 약할 때 평화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일차적으로 시간을 번 다음에 자신들의 약점을 보강한다. 그리고는 상대방보다 더 강한 힘을 급성장 시킨다. 그래서 마침내 상대방보다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판단한 순간, 상대방의 허점을 뚫고 들어와서 순식간에 장악해 버린다. 이것이 북한의 대남통일전략전술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지금 북한이 자신들의 핵무력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들이 절대 열세에 있는 재래식무력은 전체적으로 해체하자는 전술적 제안을 한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북한 친화적인 현 정권의 담지자들이 북한과의 화해협력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것은 곧 평화가 아니라 위협인 것이다. 모두가 남북화해, 평화협력, 무력철수라는 이름하에 한반도 평화의 노래를 제아무리 목이 터져라 불러도, 나는 이 노래를 침략의 서곡(序曲)이자 전쟁의 전주곡(前奏曲)이며, 우리의 미래에 핵폭풍을 몰고 올 핵위협의 저주곡으로 듣는다.

한마디로 지금 남북한 간의 이뤄지고 있는 모든 합의는 지워질 수 없는 진실의 핏방울로 써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위선과 거짓의 잉크로 써지고 있는 주홍글씨이다. 내가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의 노래를 김정은의 전쟁의 전주곡이라 듣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한미동맹이 위기에 놓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남북관계의 모든 주도권을 김정은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이제 평화의 나팔을 불면서 올 봄이면 서울을 내려 올 것이다. 김정은이 평화의 노래라며 북과 장구를 치면 문재인 정권은 여기에 장단을 맞춰 춤을 출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2중창 듀엣으로 평화의 노래를 합창할 것이다. 이 노래를 모든 공영방송이 생중계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를 듣는 국민 모두는 마침내 평화가 왔다고 착각할 것이다. 환상에 빠질 것이다. 그러면서 다 같이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단지 평화의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각오해야만 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을 때만이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김정은 답방에 앞서 트루먼을 생각하고 찾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그는 조국 대한민국을 구해준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다. 그는 왜 조국 대한민국에 잊을 수 없는 인물일까? 
그것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2시에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켜 남침을 해왔을 때, 전쟁 상황을 보고 받은 즉시 한국전쟁에 참전 결정을 내려 대한민국을 김일성 공산 치하로부터 구해준 ‘은인’이기 때문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무초 주한 미대사와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받자마자 바로 그 다음날인 6월 26일 아래와 같은 ‘대통령 성명서’를 즉각 발표했다. 

 

다음은 트루먼 대통령 성명서(한글 번역본)이다.


                  트루먼 대통령 성명서

즉각 발표
                                      1950년 6월 26일 

본인은 일요일 저녁에 국무장관, 국방장관과 이들의 수석 고문관, 그리고 합동 참모본부와 함께 정당한 이유 없이 한국정부를 향한 전쟁이 발발한 극동지역의 상황에 대하여 협의를 하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우선 안전보장이사회에 38도선 북방지역의 침략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명령에 신속한 결정을 취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미국은 평화를 파괴하는 세력을 종식시키려는 이사회의 모든 노력에 아낌없는 원조를 다할 것입니다.

북한의 무력 사용으로 발생한 불법적인 행동에 대한 우리의 우려와 이러한 사태에 놓인 한국 국민에 대한 우리의 동정과 원조는 한국 영토 안에 있는 미군의 합동작전으로 가시화 할 것입니다. 또한 상호 방위 원조계획에 따라 이러한 유형의 사태에 대비하여 단계적으로 병력의 파견과 원조 증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격 행위에 책임이 있는 세력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이 같은 세력을 미국 정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바라보는지를 깨달아야만 합니다. 유엔의 지위를 유지하는 국가들은 평화유지의 의무를 완전히 무시하는 세력을 묵인할 수 없습니다.


필자는 이 한 장의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서가 곧 미군을 한국전쟁에 파견하게 한 위대한 결단이었고, 트루먼 대통령의 파병결정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은 십중팔구 김정은의 노예상태에 예속되어 있었을 것으로 믿고 있다. 트루먼 대통령이 미군의 한국전쟁 파병결정을 내리는 과정에서 미 군부는 “한국은 지킬 수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나라”라고 판단해서 주한미군을 1년 전에 철수시켰는데, 이런 이름도 모르는 미지의 땅에 무엇 때문에 미군을 다시 파병하려는 것이냐는 비판 섞인 비웃음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애틀리 수상도 트루먼 대통령과의 미·영정상회담을 하면서 한국을 포기하라고 건의했다. 그러자 바로 이때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을 포기하면 우리를 믿고 싸웠던 이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애틀리 수상의 ‘한국포기 건의'를 거절했다. 국가 간의 의리와 신뢰란 어떤 것인가를 트루먼 대통령은 보여 줬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발발소식을 맨 처음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보고 받았을 때의 상황을 트루먼 대통령의 딸 마가렛은 그녀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버지는 매우 격앙됐고 걱정스런 표정”이었으며 김일성의 남침 소식을 전해 듣고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은 저지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에 엄청난 숫자의 미군을 파병한 것은 국가 간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를 지키려는 그의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자유를 침략하고 짓밟는 행위에 대해서 모른 체하고 넘어간다면 앞으로도 민주국가들은 계속해서 그런 침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부터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서 한국을 침략할 수 있게 된다면 강한 공산국가를 이웃으로 두고 있는 작은 나라들은 협박과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공격을 방치한다면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지금 한미동맹의 관계는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안보를 지켜준 한미동맹은 한국전쟁 당시의 피눈물을 뿌리고 얻은 희생의 위대한 열매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과 이 나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1,789,000명의 미군을 파병시켰고, 이중에 36,940명의 전사자와 92,134명의 부상자, 3,737명의 실종자와 4,439명의 포로가 발생하는 엄청난 희생을 감수했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통해서 맺어진 한미동맹과 한국안보는 위장된 평화의 노래 앞에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알지도 못한 나라의 만나 본 적도 없는 국민들”과 '자유'를 김일성 공산치하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트루먼 대통령의 위대한 참전결정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 평화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위장된 평화의 노래가 하늘을 찌를수록 참된 평화를 더욱 갈구한다. 그 참된 평화는 북한의 핵포기, 북한의 비핵화 완결 위에 부르는 평화의 노래 속에서만 부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찾을 수 있다. 북한의 핵포기 없이 부르는 평화와 번영의 노래는 거짓 평화의 노래다. 우리가 찾고 있는 참된 평화, 알갱이 평화가 아니라, 거짓으로 위장된 가라지 평화, 쭉쟁이 평화, 껍데기평화일 뿐이다. 

북한은 우리를 70년 동안 속여온 나라다. 그들에겐 진실의 DNA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을 검증하고 신뢰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김일성의 남침 소식을 접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이 했던 다음의 말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은 저지해야 한다.”는 말과 “하나님에게 맹세코 그자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해 주겠어”라는 이 두 마디를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트루먼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으로 얻은 ‘한미 간의 국가적 신뢰와 자유’를 우리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미동맹의 초위기상황에 필자가 트루먼 대통령을 생각하며 찾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다음은 트루먼 대통령의 출생약력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1884년 미주리주(州) 라마(Lamar)에서 출생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 후 1906부터 12년간 가족과 함께 농장에서 일하였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포병소위로 참전하여 1919년 소령으로 전역하였고, 그 해 엘리자베스 월러스와 결혼하였다. 1923년 캔자스시티 법대 야간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한 후, 민주당의 도움으로 잭슨 카운티 법원의 행정담당 판사로 선출 되었고, 1934년 미주리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0년에는 상원 ‘전쟁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1944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945년 취임 3개월 만에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취임 직후,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으나, 연합군에 항복을 거부하는 일본에 대하여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하였다. 결국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다. 그 후, 소련이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의 합의 사항을 위반하며 터키와 그리스를 위협하는 등 세계질서를 어지럽히자, 반소·반공을 내세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하였다. 또한, 유럽부흥을 위해 '마셜 플랜'으로 불리는 마셜원조계획을 실시하면서 파괴된 유럽을 재건하고, 자본주의 질서를 공고히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국제 사회가 냉전 체제로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8년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1949년 소련으로부터 서유럽을 보호하기 위하여 12개국 군으로 구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탄생시켰다. 한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트루먼 정부는 즉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참전을 결정했다. 그러나 중국공산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길어지자,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주장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면서 중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53837&cid=40942&categoryId=3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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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9년01월14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9년01월14일 14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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