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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전망> 좌파는 왜 노동개혁에 침묵하는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9년12월31일 18시20분
  • 최종수정 2020년01월08일 23시00분

작성자

  • 조준모
  •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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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우파, 좌파는 영국의 토리(Tory; 보수)당과 휘그(Whig; 진보)당의 의회 좌석배치에서 유래한다. 후에 휘그당은 노동당에 의해 대체가 되지만 대체로 좌석배치에서  유래해 보수당은 우파, 진보당은 좌파라고 칭해진다. 영국의 최근 정치를 보면, 보리스 존슨이 이끄는 보수당은 브렉시트(Brexit)의 우파 포퓰리즘을 정치메뉴로 내걸고 최근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반면 코빈 노동당 대표는 극좌성향의 유사혁명사회주의(quasi-revolution socialism) 공약을 내걸었지만 중산층이 외면하여 결국 보리스 존슨의 대승만 도와주는 형국이 되었다.

 

   민주주의에서 보수와 진보 모두 자유와 기회균등, 투명하고 효율적인 정부, 시장에 대한 신뢰를 중시 여긴다. 다만 우선순위가 다르며 진보는 이 셋 중 자유와 기회균등을 더 중시 여긴다. 경제정책측면에서 보수는 부국강성(富國强盛)과 같이 경제파이(economic pie)를 크게 하는 정책을 강조한다. 경제효율성과 생산성을 제고하여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파이가 커지면 낙수효과가 발생하여 공평성도 자연스럽게 개선된다는 입장이다. 

 

 물론 직접적으로 최소한의 공평성을 개선하기 위해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정책을 마련하는 것은 어느 보수정부에서도 취하는 정책이다. 진보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경제약자에 대한 소득분배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책을 취한다. 민주주의 하에서는 선거를 통해 국민이 보수, 진보정부를 경제상황에 따라 선택해 가는 것은, 결국 국민이 효율성과 공평성의 최적 조합(optimal mix)을 취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별로 보수, 진보의 개념은 달라서 외국의 개념을 우리나라에 그대로 차용할 경우 왜곡되기도 한다. 남북분단의 상황에서 보수, 진보 개념에 이데올로기가 개입하고 현실에서 보수는 수구, 진보는 강남좌파, 종북 좌파로 매도되기도 한다. 

 

   많은 국민들은 문재인 정부가 강남좌파, 386 정부가 아니라 진정한 진보 정부이길 바랬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에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합니다”와 “지역, 계층과 세대 간 갈등을 해소할 것입니다”는 문구를 강조했는데 사회갈등은 도리어 악화 되어 왔다. 개혁하지 못하는 보수도 문제지만, 진보는 진보스럽지 못하고 친위세력만 챙기는 수구집단이 된 것이 아닌지 반문하게 된다. 정권 초기의 좌파연합으로 시작하여 중반을 지나면서 각종 정치적 사건사고가 겹치기로 발생하면서 성골 좌파, 육두품 좌파, 소모품 좌파로 분화되며 좌파 내 신분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임기 전반전을 넘어선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가짜 진보(fake progressive)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차라리 최상위 소득계층인 귀족노동을 위한 수구정부에 가깝다는 평가가 많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하위층 영세 자영업자와 비정규직의 일자리를 파괴했고, 근로시간 단축, 통상임금 등 제도변화는 최상위 층 소득을 끌어 올렸다. 

 

결과적으로 저소득층에 더 가혹한 정책을 펼쳤고 소득분배는 도리어 악화되었다. 최하위 계층 중 노인들의 일자리를 위해 막대한 세금을 살포하였지만 150만원의 임금 일자리를 잃고 30만~40만원의 정부 보조금 일자리에 얹혀서 ‘병(病) 주고 진통제 주었다’고 하소연하는 노인들이 많다. 정부 내 장관들과 청와대 수석들은 “이마저 안 나누어 주면 노인들이 어떻게 추운 겨울을 나겠느냐?”고 국민 감성에 호소 하지만 애초부터 하고 있던 150만원 일자리들은 어디로 갔느냐고 노인들은 반문한다. 

 

 총선이 치루어지는 2020년 4월까지는 막대한 예산이 지자체를 통해 청년일자리, 노인일자리 명분으로 지역에 살포될 것이다. 이때 제 아무리 일자리 지원정책이라고 할지라도 선거법을 광의로 해석할 경우 위반될 소지가 큼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이를 면밀히 모니터링 해야 한다. 

  

   작년 12월19일 발표한 2020년 경제정책방향에 있는 노동혁신 계획에는 임금체계개선과 300인 이하 사업장 근로시간 단축조치의 연착륙을 담았다. 그러나 임금체계개선은 3년 전 문재인 대통령 후보 시 공약사항이었고 지난 3년간 성과가 지지부진하다. 또한 주52시간 근로시간 규제는 성급한 입법에 대한 부작용 해소의 성격이어서 혁신 또는 개혁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기에 민망하다. 주택정책은 또 어떠했는가? 결국 강남 집값 상승을 시발로 수도권 집값을 상승시켜 청년들이 평생 쓰지 않고 모아도 주택구입의 희망은 삭아버렸다. 

 

   좌파 정치권에서 경제정책에 지나치게 개입하여 경제정책이 좌파 이데올로기 색채를 띠며 반(反)경제·반(反)기업 정책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노동존중이니 노동조합을 잘 설득하고 양보교섭을 유도해서 노동개혁을 해낼 것이라고 막연한 기대를 하는 학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는 매우 순진한 생각이었다. 현 정부의 지배구조 내에 좌파가 아니라 강남좌파 세력이 이미 깊숙이 들어와서 이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마련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혹자는 문재인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친문, 친노 하면서 같은 진보정부라 평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노동계와 각(角)을 세워서, 노동계는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했다”고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고, 당시 정부는 투쟁적 노동계를 기득권으로 여기고 개혁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었다. 집권 이전에는 친노동조합의 성향을 띠었지만 집권하고는 공익에 반하며 이익 집단화하는 투쟁적 노동조합의 행태를 과감히 비판하였다. 설사 노동조합이라는 정치적 동지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청년들의 희망 사닥다리를 걷어찬다면 이들에 대한 개혁의지를 끝내 굽히지 않았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좌파는 진보가 아니며, 강남좌파는 수구에 가깝지 진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필자는 좌파는 진보라는 아름다운 외피(外皮)를 입고 있는데 대해 심히 유감이다. 간단한 수치로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국민의 5분위 소득분위별(최하위층 1분위 20%; 2분위 20~40%, 3분위 40~60%, 4분위 60~80%; 최상위층 5분위 80~100%)로 나누어 보자. 

 5분위는 현재 상태에 만족하여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의 성향을 띠기 쉽다. 보수는  분위별 %보다 전체 소득파이를 크게 하고 결과적으로 1분위, 2분위에 낙수효과가 발생하는 정책을 선호한다. 

 반면 진보는 경제약자인 1분위, 2분위로 직접적인 분배가 돌아가는 정책을 선호한다. 진보와 다르게 좌파는 상위 1%를 공격하여 나머지 99%의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재벌개혁, 재벌의 비리를 고발하는데 열정을 쏟게 된다. 

 

 강남좌파는 좌파를 넘어서 이러한 1%에 대한 공격 속에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여 자신들이 속한 5분위 집단을 공고히 하는 정책을 선호하게 된다. 자신들과 최상위 1% 집단과의 차별을 호소하지만 본인들도 상위1%가 되길 원한다. 가끔씩 진보스럽게 하위층인 1분위를 걱정하는 척하지만 5분위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1, 2분위의 이익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 

 일단 좌파는 이분법을 좋아하여 총자본 대 총노동으로 나누어 대결국면을 잘 조장한다. 전체주의 목적 달성을 위해 개인희생, 비효율적인 정부, 반시장적 정책수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라는 아름다운(?) 외피를 입고 있으면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의 구조를 보면 왜 좌파는 노동개혁을 거부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현장의 노동은 매우 이질적이고 다층구조를 가지고 있다. 크게 노동시장을 이중구조로 분해해 보면 핵심부 노동시장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정규직, 유(有)노조와 주변부 노동시장으로 불리는 중소기업, 비정규직, 무(無)노조가 뚜렷하게 구분된 상태에서 두 집단 간의 이동이 제약된 경직된 노동시장 구조를 의미한다. 한국의 대기업은 주로 원청의 지위에서 중소기업에 하청을 주는 방식으로 아웃소싱 한다. 하청을 받은 중소기업은 중소기업 내 또 다른 벤더에게 하청을 준다. 이처럼 이중 노동시장 내에서는 다단계 하청구조가 고착화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가 굳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원청과 하청의 협상력은 동등할 수 없으며, 이것은 원하청 근로자 간의 임금수준, 상여 및 보너스, 복리후생, 근로조건 등에서의 격차를 벌리는 결과로 나타난다. 여기에 생산성과는 관계없이 호봉이 쌓일수록 임금이 증가하는 호봉제 임금체계에 각종 수당과 보너스가 추가되면서 원청의 임금 상승에 따른 부담을 하청업체가 전가 받음에 따라 원하청 근로자 간의 근로조건 격차는 더욱 심화된다. 

 

경직적인 단체협약, 관행, 인사관리와 장시간 근로 등에 있어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은 노동조합 조직 집중도가 높아 핵심부 노동시장 내 근로자들이 가지는 협상력은 상당히 크다. 이로 인해 근로자들에게 유리한 단체협약 조항, 임금상승률 조정 등 요구안이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진다. 상위 4분위, 5분위의 소득을 받는 근로자는 핵심노동시장에 위치하며 하위 1분위와 2분위 근로자 혹은 영세자영업자는 주변부 노동시장에 위치한다. 

 

과거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양질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많은 중산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분리된 노동시장 간 이동이 제도적 ․ 실질적 차원에서 활성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우리나라 노동 시장 간의 분단이 고착화되어가고 있으며, 사회경제적 거리가 멀어지고, 노동시장 간 이동은 매우 어려운 상태로 진입하였다. 이에 신규 진입하는 청년들의 희망 사닥다리가 무너지고 있다. 

 

한편 386세대는 여러 세대 중 가장 입김이 세며 사회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세대이다. 이러한 원인에는 첫째, 단순 인구수를 기준으로 볼 때 386세대는 860만 명으로 50년대 생(629만 명)과 2000년대 생(482만 명)보다 훨씬 많다. 또한, 386세대(60년대 생)는 민주화를 능동적으로 쟁취하였으며 세계화 기류에 발맞춘 시장 개방, 정보화 기류에 적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네트워크의 수평적 연대와 연공에 기반을 둔 수직적 위계가 결합한 사회적 연결망인 네트워크 위계 집단이 형성되며 다른 어떤 세대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가지고 더 많고 긴 지대(地代)를 향유해 왔다. 

 

이러한 결과, 현실에서 386세대는 정치권력과 시장 권력을 장악하고 불평등의 해결사가 아닌 불평등의 생산자인 동시에 수혜자로 등극하며 외피(外皮)는 386 진보의 모습을 띠지만, 이면은 586 수구로서의 면모를 가진다. 최근 논의되는 2022년 65세 정년 논의는 386세대의 장기집권용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진보정부의 핵심정신 중 한 가지는 국민 개개인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이다. 주52시간 근로시간 단축을 하는데 들고 나온 공약 사항은 ‘저녁이 있는 삶’이다. 왜 모두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강요하는가? 수요일 아침이 있는 삶, 목요일 오후가 있는 삶 등 내가 설계하는 다양한 삶은 왜 보장받지 못하는가? 

‘저녁 있는 삶’은 또 다른 전체주의적 슬로건이다. 근로시간제도의 개혁 방향은 근로시간의 경직된 규제의 틀에서 집단 자치를 확대하고, 그 틀 내에서 개인의 자치 결정권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획일적인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캐런시아(나만의 안식처)”시간대를 보장해야 한다. 밀레니얼 청년들도 근로시간 선택 폭을 높여 거주, 문화 향유, 결혼 준비 등에 차질이 없도록 개선해야 한다. 

 

 유연근무제 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정규직의 자발적 선택형 파트타임 일자리 확대를 통한 근로시간의 실질적 단축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데도 획일적인 주52시간 단축에다가 기존의 전체주의적 집단자치 절차로 개인의 자기결정권의 폭이 확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탄력근로, 선택근로, 재량근로 등의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려는 정부의 의지도 약하다. 다만 전국단위 노동계의 반대 입장에 따라 정치적 상황의 유불리(有不利)계산에 더 몰입하고 있다. 

“건강권은 국가가, 노동 총량은 집단적 자치로, 근로시간의 선택은 개인이”의 정책방향으로 근로자의 시간 주권이 존중받도록 근로시간 제도의 획일주의 문화를 개혁해야 한다. 

 

 생명 주기에 따라 시간제와 전일제를 옵션으로 선택하고 학령기-학습, 성인기-일, 노령기-여가의 정형화된 분절 트랙을 학습, 일, 여가가 동시에 배분될 수 있도록 자기 결정권이 강화된 시간선택제를 실시하여 평생학습체제를 지원해야 한다. 

여성 근로자의 경력단절 방지 및 저출산·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근로시간 단축 청구권과 부성(父性)휴가를 획기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저출산·고령화에 대응 및 개인의 시간 결정권 강화 차원에서 법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2020년 경자년(更子年)이 되면 문재인정부의 남은 임기는 2년에 불과하다. 현재로서는 큰 개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다만 좌파정부, 강남좌파정부, 민주노총 정부, 친문정부, 수구정부라는 별칭이라도 떼어내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하다. 강자인 귀족노동 집단이 지지를 철회하더라도 대한민국 청년들의 미래를 위해서는 과감히 등을 돌릴 수 있는 진보정신을 포기한다면 스스로 수구정부라 칭하길 바란다. 

 진보가 건강해야 보수도 수구로 추락하지 않는다. 전통을 지키고 미래를 개혁해야 보수도 수구와 차별된다. 이익집단에 휘 둘리는 강남좌파와 수구에게 노동개혁을 주문하는 것은 ‘생선가게에 고양이를 맡기는’ 격이다. 

 

   올해 총선이후 건강한 진보와 보수가 들어서서 청년들의 일자리 희망의 사닥다리를 위해 노동개혁이 재차 논의될 수 있다. 그때 노동개혁의 슬로건이 유연성이든지, 안정성이든, 유연안정성이든지 슬로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의 일자리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노동개혁’의 초심만은 유지해야 한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보다는 자화자찬에 급급한 정부의  수구적이자 강남좌파적인 모습에 지난 3년간 국민들은 실망해 왔다. 남은 임기 2년만이라도 문재인 정부는, 지지세력을 잃더라도 국익을 위해 개혁하고자 했던, 노무현 정부의 고민을 반추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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