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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기대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됐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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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8월23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23일 14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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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라를 제대로 세워보지도 못했던 구(舊)한말 혼란기부터 일제 강점의 폭압에 짓눌려 수 십년 암울한 시대를 보냈다. 2 차 세계 대전 끝머리가 되어서야 겨우 해방을 맞았고, 어렵사리 나라를 다시 세운 뒤에는 참혹한 동족 상잔의 비극도 겪었다. 이어서 숨돌릴 틈도 없이 몇 차례 군사 정변을 거쳐 80년대 말이 되어서야 민주주의의 틀을 되찾은 소위 ‘87년 체제’도 이루었다. 

그 동안, 독재 폭정에 맞서 수많은 지사들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그 뒤로는 몇 차례 선거를 치르며 염원했던 평화적 정권 교체도 맛봤다. 무엇보다도,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 먹고사는 걱정은 잊고 살 만한 형편도 됐다. 그러고도 한참 더 세월이 흘렀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아직도 이 나라는 여전히 혼란과 질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대적 사명보다 진영 논리에 함몰된 집권 세력의 몰(沒)염치한 행각들 


사실, 현 정권이 들어선 것은 전례가 없는 일대 정치적 사변의 후사였고 그만큼 권력을 넘겨받은 세력에게는 뜻밖에 주어진 천재일우의 횡재였다.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이 현직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해임된다는 것은 일찍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러니, 뒤이어 등장한 현 집권 세력은 그런 비상한 정변의 당위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정치 이념에서 어떤 세력에 견주어도 탁월하고, 국정 운영도 보다 효율적이고, 윤리적으로도 더할 수 없이 청명했어야 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   

허나, 작금의 돌아가는 실상을 보자면, 그런 시대적 당위성은 고사하고, 국가 운영을 책임진 세력으로써 지켜야할 기본 책무도 아예 저버린 게 아닌가 싶어서 일종의 배신감이 들기도 한다. 오랜 습관처럼 저돌적 행태에 익숙한 정치인들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국가 운영을 책임진 고관 대작들이 아무 개념도 없이 사적(私的) 영달을 좇아 가벼이 흔들리는 행각은 심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비무장 민간인이 군사분계선을 제 집 울타리처럼 드나든 상상도 못할 일이 터져도, 국방을 책임진 사람이 예하 부대장들은 추상같이 질책하고도 어찌된 영문인지, 정작 자기는 어쩌겠다고 말 한 마디 없다. 한심하다 못해 절망적이다. 그 뿐인가? 법 집행을 총괄할 책임자는 엄정하고 진중한 언동으로 법 집행의 권위를 세워야 할 판에, 되지못한 천박한 언행으로 날마다 새로운 논란을 불러오고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경제 정책 최고책임자가 아무 정견도 없이 세류처럼 휘둘리는 행태란 ‘목불인견(目不忍見)’ 그대로다. 자신이 주장했던 정책을 하루 아침에 뒤집고도 아무런 변명도 없다. 최근 뉴스를 보니, 하다 못해 전세/월세 전환 비율을 몇 %에서 몇 %로 내리겠다고 열을 올리며 설명한다. 이런 일이라면 동네 부동산 중개소가 어련히 잘 계산해 줄 일 아닌가. 하다하다 이건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요즘 세간에 뜨거운 이슈가 된 부동산 문제를 살펴보면 그저 말문이 막힌다. 현 정권 출범 이후 수도 없이 ‘무슨 대책이랍시고’ 조치를 취하고 나서, 지금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는 게 앞선 정권들이 잘못한 때문이라고 탓한다. 이런 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들만이 옳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르다는 자기편집(偏執)적 진영 논리에 함몰된 결과로 보인다. 더욱 가관인 것은 권력 심장부 고위직들이 여벌로 가진 아파트를 당장 팔라는 둥 못 팔겠다는 둥 하며 보기에도 민망한 치졸한 싸움질을 벌이고 있으니, 이건 무슨 저질 코미디도 아니고 불쾌하기가 그지없다.

 

시장은 오기에 찬 힘으로 제압(制壓) 하는게 아니라 시장 논리로 길들이는 것 


여기에 현 집권 세력이 범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오류를 하나 지적하자면, 너무 겁없이 ‘시장(市場)’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시장이란 오직 시장의 힘으로 움직일 뿐, 아무런 인정도 감정도 없는 냉정한 현실일 뿐이다. 그렇게 행정 권한으로 위협하고 법률로 강제하면 순순히 따라올 것이라고 믿는 순진함은 대단히 위험한 착각이다. 아무리 정교한 법망도 빠져나갈 방도는 얼마든지 생겨나게 마련이고, 정부가 아무리 선의로 시장(가격 형성)에 개입해도 암(暗)시장은 생겨난다. 강력히 단속한다지만 비용이 몇 배 더 들어가면 그건 이미 효율을 상실한 것이다. 아무리 유능한 정부도 완벽하게 단속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시장과 정부. 이들은 무슨 관계인가? 정부는 기본적으로 재화의 생산, 교환이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총칭하는 ‘시장’에 참여하는 큰 손일 뿐이다. 여기에, 법에서 위임된 권한으로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고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 임무다. 따라서, 때로는 불가피하게 개입하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장의 실패에 대한 보완 내지 시정(是正)이지 이념과 사상을 강요할 대상은 아니다. 한 마디로, 시장은 힘으로 압제할 대상이 아니라 단지, 시장 논리로 길들여 갈 뿐이다. 

 

요즘 정부 여당이 모두 나서서 아파트 가격을 잡겠다고 마치 ‘두더지 게임’ 하듯이 야단법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근본 과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하나는 어느 가격이 적정한가를 책정하는 기술적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를 위해 어떤 방도로 가격 안정을 도모할 것인가 하는 수단과 목적의 문제다. 아닌 말로, 강남에 아파트 한 채 수 십억을 하던, 수 백억을 하던 그것이 우리네 서민들 생활과는 거의 별개의 문제다. 겉으로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이라고는 하나 사실 따져보면 이것 또한 가진자들에 대한 오기에서 비롯한 편향된 논리의 결과이다. 

 

그런 건 다 그들 만의 노름일 뿐, 내버려 두면 결국 제 풀에 사그라들 것  


그들은 지금 ‘삶의 터’를 논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돈 놓고 벌이는 그들 만의 ‘투전 판’이다. 공중에 떠있는 콘크리트 상자 하나에 수 십억 수 백억을 깔고 앉아 뽐내는 것은 흡사, 명품차를 몰고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얼빠진 족속들의 저급한 심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러니, 시간이 흘러 그들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그냥 놔두는 게 낫다. 설령, 기발한 묘책으로 강남 아파트 값을 때려잡는다 한들, 그 아파트들이 집 없는 서민들 앞으로 우수수 떨어질 리도 만무하지 않는가? 다급한 상황에 겨를이 없겠으나, 정책 담당자들은 왜 정부가 나서서 고가 아파트 값을 통제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근본 명제를 다시 한번 깊이 자문해 보길 권한다. 

 

기왕에 사는 집 얘기가 나왔으니, 이웃 나라 일본에서 21세기에 위대한 유산을 남긴 경영자로 칭송을 받는 도코도시오(土光敏夫) 회장 일화 한 가지를 소개한다. 당시 굴지의 대기업 도시바(東芝) 회장을 지냈고, 뒤에 경단련(經團連) 회장도 역임한 그는 생전에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회장님을 모시는 비서들은 늘 요코하마(橫濱)시 교외 큰 길가에 있는 10여평 남짓한 허름한 회장님 댁 걱정을 하느라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마침,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인근에 고속도로가 새로 건설되고 집채 만한 트럭들이 연신 집 옆을 질주하게 되자 혹시 회장님 댁 지붕이 날아가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는 대기업 회장을 지내며 적지 않은 보수를 받았으나, 일본이 잘되려면 여성들이 깨쳐야 한다고 가르친 모친의 유훈에 따라 최소 생활비를 제하고는 모두 고향에 있는 여학교에 기부했다고 한다. 

 

무시로 회사 돈을 횡령해 몇 백억원 가는 고대광실을 짓고 들어가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네 재벌 회장님들과는 전혀 품격이 다른 이야기라 실감이 덜할 것이지만, 잘되는 나라에서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인사들이 주거 생활과 관련해서 어떻게 모범을 보여주는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본다. 솔직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는 집을 가지고 별 희한한 허영을 부리며 요란을 떠는 건 큰 병폐다. 이런 병폐가 요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배경이 되고 있는 것도 틀림이 없다고 본다. 

 

기왕 내친 김에 한 마디 더 보태자면, 우리 사회 저변에는, 절대적 부족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남들에 편중된 차이도 참아내기 어려운 속성이 다분히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지적(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지독한 시기심에 기인한 것이어서 하루 빨리 떨쳐버려야 할 악습임이 분명하다. 최근 들어 좀 살만 해지니 더욱 기승을 부리는 이런 겉치레에 현혹되는 우리네 주거 문화 인식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면 아마 아파트 가격 문제도 상당히 수월히 해결될 수가 있을 터이다. 

 

진정으로 서민들을 위한다면 그들이 ‘꿈’을 잃지 않게 할 정책을 펴야 


당장 지지율이 떨어진다고 하니, 집값을 잡겠다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불쑥 내밀고 나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드러나자 뒤늦게 땜질하느라 허둥대는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는 가련하다는 생각도 든다. 재삼 강조하지만, 무슨 정책을 내놓기 전에 ‘누구’를 위해, ‘왜’ 이런 정책을 만들고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를 거듭거듭 숙고할 일이다. 그래야, 지금 같은 볼썽사나운 모습을 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서민들은 당장 강남으로 들어가 살지 못해 분노하는 게 아니다. 그런 꿈을 갖기도 어려워지는 세태에 절망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강남 사는 그들도 대부분 ‘서민’ 출신이다.

 

한편, 사람들은 개인마다 기호나 능력이 각양각색이다. 대부분 서민들은 열심히 모아서 아담한 집 한 채를 지니고 살려는 꿈을 키우며 살아가지만, 누구는 수 십억을 주고도 전세를 산다. 이들을 ‘세입자’라는 한 부류로 묶어 일률적으로 보호하거나 계약 행위를 규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런 사람들은 세를 놓는 사람이나 세 들어 살려는 사람이나 다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다. 정부가 나서서 이들이 거래하는 집 값을 내려라 말아라 간섭하는 것은 불필요한 행정력 낭비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부동산 얘기만 나오면 막연하게 ‘투기’ 세력을 탓한다. 그러나, 투기라는 경계가 어디부터인지는 이 세상 누구도 명확하게 선을 긋기 어렵다. 다소 현학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가치 변동에 대해 보험되지 않은 자산을 가지는 것은 그 자체가 모두 투기하는 것이다. 집이 한 채냐 여러 채냐는 상관이 없다. 이들은 값이 오르면 즐거우나 사려는 사람들은 시름이 커지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이 세상에 값이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가격이 변동하고 이것을 소유하는 자는 그 만큼 투기에 노출되는 셈이다.

 

그러니, 정부가 진정으로 집 없는 설움을 겪는 서민들의 주거 대책을 마련하고자 한다면, 그냥 놔두어도 어련히 알아서 잘 할 수 있는, 아니면 그렇게 하기를 스스로 택한 부류는 그냥 놓아둘 것을 권한다. 대신에, 서민들 주거 보호를 위해 애써 노력을 집중할 일은 따로 있다. 집 없는 서민들이 나도 언젠가는 꿈에 그린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고, 그 꿈을 단계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시장 사다리’ 를 마련하는데 집중하자는 것이다. 이건 자연스러운 이치다. 

 

지금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이 9억원을 넘었다는데 그런 수준에 10년, 20년을 붙들어 매어놓는다 한들, 평균적인 서민들이 몇 십년이나 저축해야 그런 거금을 주고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지 계산이라도 한번 해 보길 권한다. 그러니, 당장은 어렵더라도 그런 ‘꿈’을 키워갈 통로를 터주고, 그런 길로 인도하는 그런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비록, 느리고 힘들지 모르나, 서민들이 원하는(혹은, 힘이 닿는) 다양한 조건의 주택 공급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유일한 방도라고 본다. 원래 자유 시장경제라는 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조화롭게 겨루고 또한 어우러져 사는 것이지 위정자의 한 마음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서민주택 전담 공단(公團)을 통해 다양한 조건의 서민용 주택 공급에 매진


이제 많은 이들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터이지만, 한 때 우리는 먹을 식량이 부족해 무시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시절이 있었다. ‘절량(絶糧) 농가’ 라는 말이 유행했듯이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는 매년 추수가 끝나면 재정으로 수확량 일부를 수매했다가 춘궁기에 방출하는 등, 아예 공급 자체를 통제했다. 당시 정부가 쌀값 안정을 위해 쏟은 노력은 아마 현 정부가 아파트 가격 잡는데 쏟는 것보다 몇 배는 더했을 터이다. 그러니, 당시 쌀값 안정을 위해 쌀 생산을 늘리는 방도를 택했던 정책은 지금 아파트 값 폭등에 대응하느라 무척 고심하고 있는 정부 당국에 분명히 소중한 교훈이 될 것으로 보아 한번 꼼꼼하게 되돌아 보기를 권한다.

 

짧은 시일 내에 공급을 늘리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점, 그리고 수요가 가격에 대해 지극히 비탄력적이라는 점에서 주택 문제는 방금 소개한 당시 쌀값 문제와 아주 흡사하다. 그런 쌀 절대 부족 상황을 타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다른 부차적인 요인도 있었겠으나, 바로 재래 품종에 비해 소출이 몇 배나 많은 신품종 ‘통일벼’를 개발 보급한 결과, 쌀 생산이 획기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이제는 경작 면적이 훨씬 줄었음에도 생산량이 넘쳐나 처리가 곤란한 지경이 됐다.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하자면, 정부 주도로 서민 전용 ‘공단형(公團型)’ 주택 공급 시스템을 구상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도심에서 여의치 않으면 좀 떨어진 지역에 교통, 교육, 문화 인프라가 월등한 차세대형 주거 단지를 집중적으로 개발하는 것이다. 다들 경험했듯이 신도시 건설 초기에 분당, 일산, 산본 등은 다들 허허 벌판에 서있는 황량한 동네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흐른 지금 보면, 이 신도시들은 강남 어디에 견주어도 못하지 않은 훌륭한 주거 단지로 변모한 것 아닌가? 

 

이를테면 서민 주택 공급을 전담할 ‘국민주택공단(公團)’을 설립해 서민들 사정에 맞춰 월세 혹은 전세로 임대하거나, 장기 할부 상환형 ‘주택 모기지 론(housing loan)’부 주택을 다양하게 공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택 관련 공적 기구들은 민간 건설업자들과 마찬가지로 아파트 분양에만 전념해 왔으나, 이들을 다양한 조건으로 주택을 공급하는 ‘종합주택공급전문기구’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소요 자금은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장기채권 발행 등을 통해 각종 공기금이나 보험사 등 민간 부문에서 조달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부문이 바로 정부가 공개념을 가지고 적극 나서서 ‘공공 사업’ 성격의 주택 서비스를 폭넓게 제공할 필요가 있는 창의적인 사업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방안은 시장 원리에 충실한 ‘공급’ 확대를 주축으로 하는 정책이고, 잘 만 운영된다면 다양한 유형의 주택시장의 지표가 되어 시장을 선도하는 역할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부수적으로, 이런 주택 연관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면,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고질적인 취약 부문이기도 한 장기금융 시장 발전에도 일조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같은 저금리 시대에는 이런 장기금융부 주택공급 제도를 시도하는 것이 좀 더 용이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른 나라에는 유사한 사례들이 참 많던데 유독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널리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참으로 의아하다. 

 

아무리 선한 규제도 공짜는 없어, 반드시 ‘비용(부작용)’을 치를 각오를 해야 


각설하고, 정부가 시장을 규제하는 것은 절대로 공짜가 아니어서, 반드시 상응하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하물며 잘못된 법령이라면 치러야 할 비용이 몇 배나 더 커질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때로는 상상하지 못한 재앙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번에 전월세 임차인을 보호한다고 제정한 ‘부동산 3법’ 역시 필경 엄청난 비용을 치러야 할 것임은 이미 전세 물건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면 쉽게 짐작이 간다. 전세가 됐건 매매가 됐건 간에 시장에서 가격을 제한하면 공급이 줄어든다는 것은 경제 이론의 기초다. 법 제정 과정에서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세 입주자들에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 정권 담당자들이 명심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정권은 유한하나 시장은 영구하다는 점이다.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곧바로 버림받을 법령을 만드는 것은 지금부터 바로 자신들을 얽어 맬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법안을 제정해서 시장을 일률적으로 규제하면 기존 시장 구조에 충격을 주어 자발적 교환 체계가 흐트러지고 종국에는 예기치 않은 폐악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전부터 ‘가장 좋은 통제는 가장 적은 통제’ 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만사 정부가 개입해 재단하려는 ‘통제 만능’ 사고도 극단적인 진영 논리에 집착하고 있는 현 집권 세력이 빠지기 쉬운 대단히 순진하고 위험한 함정일 뿐이다.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는 것은 집권 세력에게는 일종의 잘 베이는 보검(寶劍)을 차지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거의 모든 법률을 고치거나 새로 만들 수 있으니, 든든히 기댈 수 있는 ‘최후의 수단(the last resort)’이 될 만하다. 다양한 반대 의견과 대안을 올려놓고 충분히 토론하고 협상한 다음에 정말 마지막 수단으로 의존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 생각하면 이 최후의 수단을 ‘최초의 수단(The first resort)’으로 착각하고 전횡하기 쉽다. 흔한 비유로, 잘 베이는 칼은 숙련된 요리사의 손에서는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명기가 되나, 분별없는 서툰 손에서는 선량한 사람들을 해치는 흉기가 될 뿐이다.

 

또 하나, 지금 집권 세력의 행동 패턴 가운데 대단히 위험한 것은 우리 사회에 계층간 대립을 조장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점이다. 자본가는 범죄자들이고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소득은 불평등해지고 빈곤이 심화된다는 논리는 자칫 정부가 자본 및 자원 소유자들로부터 소득 혹은 부를 듬뿍 몰수해서 복지 지출이나 서비스 제공에 투하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적으로 정부가 중앙집권식으로 통제하는 경제 체제가 나라를 얼마나 황폐시키는지 잘 보아 왔다. 

 

시장경제가 자본가들에 의해 조작되고 불평등, 불공정을 낳는다고 하나 정작 조작되는 것은 사회주의 경제이고, ‘사회주의 기적’은 이미 허공으로 날아간지 오래다. 구(舊) 소련, 마오(毛沢東) 시대 중국, 카스트로 치하의 쿠바, 지금 나라 전체가 도탄에 빠져 전 국민들이 신음하고 있는 베네수엘라가 좋은 사례다. 이들의 공통점은 반대 진영을 철저히 배척하려는 성향을 가진 것과 오직 자기들만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착각에서 광포한 행동으로 달려간다는 점이다. 구 소련 붕괴 후 현대 사회주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도 이미 개혁 · 개방 초기인 1978년 말 중국공산당 11차 3 중전회에서 계급 투쟁을 강령으로 삼지 않을 것을 과감히 결정했다.   

 

이제, 지지하지는 않아도 마음 속에 품어왔던 마지막 기대를 버릴 때다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처지에 속속들이 알 수가 없지만, 단순한 짐작만으로도 일단 정권을 잡은 세력은 권력의 효험에 과도하게 의존하기가 쉬울 성싶다. 특히, 위로 올라 갈수록 더하지 않을까 짐작된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시장’의 영역에서는 어떤 권력도 매사 그리 간단치가 않다. 자유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란 시장 참가자들의 자유 경쟁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도록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방임된 자유주의가 만능도 아니고, 시장경쟁이 낳는 부작용도 당연히 존재한다. 정부는 이런 시장경제의 본질적 폐단을 보완하고, 내재적인 모순을 해소하여 ‘공정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 법률로 위임받은 ‘선량한 규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시장에 개입함에 있어서는 위임된 본지(本旨)를 헤아려 근신하고 또 근신해야 한다. 

 

이 정권 탄생을 전후해서 이런저런 말들이 참 많았다. 그러나, 올곧은 의식이 살아있는 이들 중에는 前 정권에 대한 탄핵 절차가 적법하게 이루어졌다면 사법 시스템의 탄핵 판결에 무턱대고 도전하는 것은 국민들이 뽑은 정권을 부정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이 되고, 이는 곧 기존 체제와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보수’의 근본 가치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함께, 내심으로는 새로 들어선 정권이 언젠가는 당초 가졌던 위험한 선입견을 분연히 떨쳐버릴 것을 기다리며 지금에 이르렀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소설에 나오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말이다. 

 

한편, 지금 이 사회는 보수니 진보니 하며 스스로도 헷갈리는 낡은 이념에 함몰되어 극한적으로 대립하고 어지럽게 충돌하고 있다. 상대편은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자기편은 맹목적으로 감싼다. 이런 형국에, 근자에 보아하니 집권 세력은 만사에 상대방의 ‘다른’ 의견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원하는대로 막무가내로 밀어부치는 행태를 서슴없이 감행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들이 갈라지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화합하고 치유해야 할 처지에, 오히려 진영 논리를 따져서 이를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이렇게 해서, 이 나라에는 조화로운 민주주의니, 공정한 시장경제니 하는 건 근본부터 무너지는 지경이 됐다는 우려가 엄습해 올 뿐이다. 그리고, 이제 집권 세력이 됐으니, 과거에 모진 폭압 정권들에 맞서 투쟁하던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며 태생적으로 몸에 뱄을 법도 한 편향된 이념을 혹시나 담대하게 벗어던지는 대전환이 있지 않을까 하고 품어오던 실낱 같은 희망도 이쯤에서 내려놓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한 여름인데도 가슴에 스며드는 바람은 싸늘하기만 하고, 해가 중천에 걸려 있는데도 날은 어둡다. 불그스레 저무는 석양녘엔 왠지 불길한 구름 떼가 쉼없이 몰려든다. 그러다가, 앞으로 남은 세월을 앞에 지나온 그 어느 때보다 어둡고 답답하게 이어가야 할 생각을 하니, 문득 평생을 별 인연 없이 살아온 처지에 어설프게 이런 성경 구절까지 떠올린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Quo Vad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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