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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73>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 II. 효(孝)는 백가지 행동(百行)의 근본이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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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5월26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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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II.1 <효행록(孝行錄)>과 효열표창


[김화 사건과 <효행록>]

 

진주에 사는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하였다. 법에 따르면 능지처참형에 해당되는 범죄였다. 세종은 이 사건 소식을 듣고 낯색이 변할 정도로 깜짝놀라 자신을 책망했다. 

 

   “이제 아버지를 죽이는 자까지 나왔으니 이는 필시 내 덕이 부족한

    때문이구나.

    (今乃有殺父者 此必予否德所致也 : 세종 10년 9월27일)”   

 

판부사 허조는 패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법의 형벌이 낮기 때문이므로 형법규정을 더욱 엄격하게 고쳐야한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법이 아무리 엄격해도 패륜을 예방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대신에게 불쾌한 느낌이 들도록 면박을 줄 수는 없었다. 부드럽게 허조를 칭찬하며 말했다. 

 

    “경이 늘 상하의 구분을 엄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내가 그 말을   

     듣고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일을 보니 과연 경의 말이 맞구나.

     그러나 율문을 고쳐 가감하는 것은 옳지 않다.   

     (卿每言嚴上下之分 予聞而嘉之 今有此事 卿言果驗矣 

     然加減律文 予以爲不可 : 세종 10년 9월 27일)” 

 

세종은 여러 대신들을 불러 부모에 대한 효도(孝)와 형제간의 우애(悌)를 돈독히 할 대책을 물었다. 변계량이 <효행록>과 같은 좋은 책을 널리 펴서 항상 그것을 읽고 외우게 하여 점차 예의를 갖추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세종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엄벌보다는 교육과 교화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바로 집현전 직제학 설순을 불러 말했다.

 

   “이번 풍속이 매우 천박해져 자식이 자식 노릇을 못하는 일이 벌어지니

    <효행록> 같은 책을 발간하여 백성을 깨우치고 싶다. 비록 폐단을

    없애는 급한 업무는 아니지만 교화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할 일이다.   

    (今俗薄惡至有子不子 思欲刊行 孝行錄 以曉愚民 

    此雖非救弊之急務 然實是敎化所先 :세종 10년 10월 3일)”

 

<효행록>은 이미 발간된 적이 있었다. 고려 때인 1346년 권준이 중국의 이름난 효자 24명의 효도를 그림으로 그려 아버지 권부에게 보이자 권부가 다시 38명의 효자를 첨가한 뒤 이제현의 서문을 달아 엮었던 것이 초간본이고 여기에다 권근이 주와 해설을 달아 태종 5년(1405)에 발간하였다. 세종은 전에 편찬했던 24인의 효행에다 20인의 효행과 고려 및 삼국시대의 효행을 더 첨부하여 한 권의 책으로 편찬하도록 지시했다.

 

[효열 표창]

 

세종은 충효절의(忠孝節義)가 풍속처럼 넘쳐나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의로운 사람을 발굴하여 표창하고 적극적으로 등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허조가 말한 징악(懲惡)의 엄벌정책이 아니라 선한 일을 장려하는 권선(勸善)의 정책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세종은 전국의 효자, 순손, 절부, 의부를 찾아내어 예조가 직접 방문하도록 명하였다(세종 10년 1월 21일). 예조는 24명의 효자와 17명의 열녀와 1명의 순손을 찾아내어 임금께 보고했다(세종 10년 10월 28일).

 

그 중에서 돋보이는 사례는 전라도 순천의 유학 ‘정강의 사례’이다. 정강의 모친이 죽자 부친은 후처를 맞아 집을 나가 살았다. 부친의 집은 정강의 집에서 5리(2km)나 되는 곳에 있었지만 하루 세 번 꼭 문안을 드렸으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거나 덥거나 한 번도 이를 빠뜨린 적이 없었다. 부친이 아침에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을 본 다음부터는 새벽에 와서 미리 마당을 쓸었으며 부친이 있을 때에는 일부러 멀리 가지를 않고 대기하였다. 마을 모임에는 항상 나중에 오고 일찍 떠났는데 사람들이 더 머무르기를 요청하면   “가존의 안부를 알 수 없으니 굳이 사양하는 바라.”고 대답하고는 자리를 떴다. 항상 주머니를 갖고 다니다가 별미를 얻으면 꼭 부친께 갖다 드렸으며 부친 사후에는 3년을 거적을 깔고 죽으로만 연명하였다고 한다.

 

황해도 곡산 지군사 이태경의 아내 강씨는 나이 27세에 남편이 죽자 3년간 분묘를 지켰으며 3년 뒤에도 매 때마다 제향을 올렸다. 판사 조윤명이 그를 취하려고 하자 머리를 깎고 거부했으며 상산군 강계권의 아들 강진이 또 그를 강제로 취하려고 하자 그의 집 문 앞에서 다시 도망하여 숨고는 친족들이 다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깎았다. 서울에서 한동안 피신한 다음 돌아와 다시 예전처럼 남편 제사를 지냈다.  

 

II.2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세종은 하은주 삼대의 전설적인 태평치적은 모두 인륜이 밝은 데서 나왔다고 확신했다. 즉 삼강오륜이 확실하게 지켜졌기 때문에 밝은 정치를 했다고 믿었다. 후대에 와서 교육과 교화가 되지 못해 군신과 부자와 부부의 삼강대륜이 무너짐에 따라서 천성을 잃고 자꾸 각박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간혹 뛰어난 행실과 높은 절개를 보인자(卓行高節者)가 있어도 모범으로 간주하여 보고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기만 하고 듣고 보는 자만 많을 뿐이다. 세종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설순을 다시 불러 말했다.

 

   “내가 특히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서 그림과 설명을 덧붙여 중외에 널리

    반포하고자 한다. 모든 평범한 백성들이 쉽게 보고 느끼고 마음을 움직

    이게 하여 좋은 풍속을 이루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予欲使取特異者 作爲圖讚 頒諸中外 庶幾愚婦愚夫 皆得易以觀感而興起 

    則化民成俗之一道也 : 세종 14년 6월 9일)” 

 

<효행록>이라는 책이 효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면 삼강행실도는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삼강에 중점을 두었다. 중국과 본국의 고금 서적을 전부 조사하여 탁월한 효자 충신 열녀 각 110인의 행적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외우기 쉬운 시를 붙여 발간하도록 했다. 집현전에서 나누어 집필했다.  특히 충신과 열녀는 나라가 위태롭고 남편이 죽었을 때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신하가 국가를 자기 집처럼 생각하고 직무에 충실한 것이 바로 본질적인 충성이요, 온 가족을 은혜로 대하고 가업을 융성케 하는 것이 부인의 참된 절의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문은 <효행록>의 원저자 권부의 후손인 권채가 썼고 마지막 발문은 예문대제학 정초가 썼다.

 

II.3 효는 백가지 행동(百行)의 근본이다

 

[효자의 등용]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삼강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성이요 참 마음이다. 이중 효(孝)는 ‘모든 행동(百行)의 근본’이다. 효는 충(忠)과도 같은 것이며 의(義)와도 통하는 정신이다. 효가 있으면 충과 의가 저절로 있고 효가 없으면 저절로 충과 의도 없다. “부모를 지극히 모시는 성품으로 임금을 똑같이 공경히 섬긴다.(資於事父 以事君而敬同)”고 했다. 또  “부모를 효도해야 임금께 충성을 바칠 수가 있다.(事親孝 故忠可移於君)”고도 했다.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집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왕촉도 말했지만 “사람은 반드시 신뢰가 있어야 일을 이룰 수가 있고 여자는 반드시 정숙하고 행동이 돈독해야 한다.(人無信則事不成 女必貞而行必篤)”고 했다. 세종에게 효는 관리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었다. 효성이 극진하면 높은 자리를 맡겼고 효도를 못하는 사람은 관리의 자격이 없다고 판단했다. 효자에게 직책을 맡기는 것은 변함없는 ‘국가의 법도(孝子除職 國之常典)’라고 했다. 

  

이정간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왕년에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는  마구간에 들어온 호랑이를 잡은 일로 태종에게 상을 받은 일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되던 태종 18년(1418) 억울한 무고로 감옥에 잠깐 갇힌 적이 있었는데 무죄로 판명되었지만 곧 세종이 즉위하기까지 제대로 된 관직이 없이 지내고 있었다. 이미 73세가 되었는데에도 91세 어머니를 위해 생일마다 춤을 추고 노래를 물러 모친을 즐겁게 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허조가 그를 등용하기를 간청했으나 나중에 정기인사 때 다시 말하라고 하고는 그냥 지나쳤다. 

이정간에 대한 자신의 무관심을 세종은 바로 후회했다. 그런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스스로 책망했다. 허조가 건의한 지 일주일 만에 안숭선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정간은 나이가 칠십이 넘었음에도 효행이 뛰어나므로 자헌대부를

    삼아 종신토록 직을 가지게 하며 또 궤장을 특별히 내리고 그 효행을

    자세히 기록하여 그대로 본받을 교서를 삼는 것이 어떠냐. 

    (李貞幹 年過七十 孝行超群 欲加資憲 以爲終身之職 特賜几杖 備論孝行  

    仍致敎書 何如 : 세종 14년 4월 15일)” 

  

자헌대부면 정2품 자급이고 궤장은 퇴직한 원로대신에게만 주어지는 매우 특별한 하사품이다. 이정간 외에도 성균박사 엄간은 효행이 매우 뛰어나 동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경상도 상주 사람으로 태종 14년(1414)에 과거에 급제하여 6년 뒤에는 봉상부록사 겸 성균학록의 직에 있었으나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갔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 6년이나 묘소에 여막을 치고 살았으므로 온 동네에 칭송이 자자했다. 성균관 모든 동료들이 임금께 상서하여 파격적인 등용을 요청했다(세종 11년 9월 24일).그가 무슨 직으로 제수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엄간의 품성으로 보면 어변갑처럼 제수직을 사양했을 가능성이 많다.  

 

[불효자의 불용(不用)]

 

효행이 뛰어나 특별히 임용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효행이 부족하여 직책을 제수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예조판서 신상이 남계원을 사유(師儒)라는 직책에 임명하기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가 사서오경과 모든 역사(經史)에 뛰어나 통달했고 또 그 밑에서 배운 자 100여명이 연명하여 예조판서에게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남계원은 일찍이 효령대군의 아들의 스승이었으므로 효령대군도 세종에게 등용을 간청한 적이 있었다. 

 

   “모친상 삼년 이내에 처를 얻으면 선비의 행실에 일그러지는 일이라고

    했다. 계영은 변명하기를 부친의 명령 때문에 부득이하여 처를 얻었지   

    자기 본심이 아니라고 하지만 올바름을 주장하여 끝내 고사했으면 어찌 

    아비가 강제로 요구했겠느냐. 설혹 아비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치더라  

    도 아비가 어찌 국법을 어기며 모친상을 짧게 줄일 수가 있겠는가. 계영  

    이 비록 역사를 가르치는 작은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효행이 없으면 

    어찌 추천으로 등용하는 국가의 좋은 풍속에 누를 끼칠 수 있겠는가. 

    (母喪三年內取妻 士者之行虧矣 季瑛自言 迫於父命 不得已而取妻 

    非予心也 然以義固辭 則父安得强之乎 假使父命爲不可拒 則父亦安得

    違國法而擅短其者之喪乎 季瑛雖有訓誥末藝 殊無孝行 豈可薦用 

    以累風化乎 : 세종 14년 10월 10일)”


[표.5-6] 세종 때 효행으로 서용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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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5월26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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