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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동의 문화시평 <25> 달항아리 증후군과 한국의 미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4년01월08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4년01월09일 09시10분

작성자

  • 김찬동
  • 전시기획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초빙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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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조선시대 달항아리가 456만 달러(60억)에 팔렸다 한다. 200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열풍은 달항아리를 이제 가히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만들고 있는 듯하다. 달항아리를 소재로 작업하던 작가들도 과거엔 7-8명에 불과했지만, 최근 들어 20여 명으로 늘었다. 작품 판매가 늘면서 이를 소재로 작업하는 작가들은 계속 늘고 있다. 작년엔 리움미술관에서의 대규모 백자전을 통해 국보급 달항아리가 전시되었고, 김포공항엔 10미터에 달하는 대형 달항아리가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RM이 달항아리를 구매한 일은 세계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달항아리는 조선 후기 광주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그 용도는 분명치 않으나 참기름이나 꿀 등을 저장하는 생활 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까지는 백자원호(白磁圓壺) 또는 백자대호(白磁大壺)로 불리다가 이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 김환기나 미술사가 최순우 등이 넉넉한 보름달 모양을 닮았다가 하여 ‘달항아리’라고 칭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것은 지름이 40센티가 넘는 크기인지라 통으로 구워내기가 쉽지 않아 상하를 따로 제작하여 붙이는 방식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형태적으로 완벽한 기하학적 대칭을 이루고 있지도 않고, 이어 붙이는 기법 또한 그리 정교하지 않다. 어찌 된 연유인지 현재 국내 남아있는 작품 수는 40여 점에 불과한 실정이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난을 겪으면서 백자에 그림을 그리는 코발트를 구하기가 어려워 무늬 없는 백자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완결성도 미흡한 달항아리가 국보로 지정되고 국민적 관심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달항아리에 대한 미적 가치를 처음으로 알아본 이는 홍콩 출생의 영국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였다. 그는 1912년 일본의 인문학자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함께 우에노에서 개최된 척식박람회를 참관하면서 조선의 백자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달항아리가 가진 특성을 ‘자연스러운 무심함(natural unconsciousness)’이라 평가했고, 그가 구입 기증한 달항아리는 현재 영국의 브리티시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99년 방한 시 다양한 백자를 보기 위해 인사동의 전문 매장을 찾기도 하였다.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버나드 리치와 교류하며 자신의 ‘민예론’을 발전시켰고, 이를 통해 일본의 공예품보다도 원류가 되는 조선의 그것들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조선의 문화적 우수성을 찾는 일에 열중했고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1922년 총독부 건물의 건립을 위해 광화문을 헐고자 하는 일본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등 식민지 조선을 사랑하고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의 ‘민예론’은 서양과 차별화된 동양의 미적 규범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서양(자유와 개인)을 극복하기 위해 ‘민예’(동양 전통의 자연과 민중)개념을 도입하여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함으로써 일본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그는 동양의 미를 대표하는 조선미의 핵심을 ‘선적(線的)인 미’와 ‘비애미(悲哀美)’로 규명한 바 있다. 아울러 조선미의 특성을 무작위성,무심 등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민예론’은 고도의 식민사관을 바탕으로 일본이라는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을 식민지 조선에 투사했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조선의 미와 미술사에 관한 연구는 베네딕트회 선교사로 최초의 <조선미술사>를 썼던 안드레 에카르트(Andre Eckardt)와 같이 독일의 미학과 미술사학의 학문적 기초를 가진 학자들은 물론, 서구에서 유학한 경성제국 대학의 일인 교수진들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리고 고유섭과 같이 그들로부터 배우게 된 1세대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가 이루어지지만, 한국의 미에 관한 정체성을 규명하기엔 일본의 학문적 그늘이 너무 크고 길었다. 

 

   한국 미술사의 1세대 학자인 우현 고유섭은 한국의 미를 ‘구수한 큰 맛’,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등으로 규정한 바 있다. 조선의 미는 순박하고 온화한, 질박하고 담소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고유섭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한 비애미를 비판하고 있지만, 조선 미의 정수를 ‘민예’로부터 찾고 있어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제자인 최순우 같은 학자들 역시 스승의 입장에 영향을 받아 대동소이한 범주의 개념들로 한국의 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해방 후 식민사관의 탈피를 위해 노력했지만, 큰 틀에서는 일본의 식민사관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근자에 들어 한국미의 요소로서 고구려 미술의 웅혼한 기상이나 샤머니즘적인 요소 등에 관한 논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학습되어 온 한국의 미론은 무기교의 기교. 소박함. 순박함. 온화함 등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달항아리의 미적 범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문화의 권위자들 역시 꾸미지 않은 소박한 백색과 완벽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스러운 형태, 백의민족의 정서… 등등을 말한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는 달항아리에 대해 ‘어리숙하고 순진한 아름다움, 무심한 아들다움, 원의 어진 맛 때문에 넉넉한 맏며느리 같다’라고 하고,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한국미의 극치’라고 평하고 있다. 달항아리가 가진 백색의 담론과 무념무상의 정신은 ‘단색화’의 연원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최근 들어 달항아리는 복을 담고 있고, 달처럼 소원을 비는 대상으로써 마치 부적과도 같은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기까지 하다.

 

  우리가 자랑하는 달항아리를 둘러싼 한국미의 정체성 담론은 K-아트의 존재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서구인들이나 외국인들에 의한 평가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주체성 없이 무조건 따를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가 정교한 논증을 거쳐 우리의 미적 규범을 만들어야 할 터인데 그동안 우리가 즐겨 사용해 온 미적 규범들은 매우 추상적이고 모호할뿐더러 비학술적이며 감상적 표현들뿐이다. 이것들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무비판적으로 학습되어 온 것들인데,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와 논리로 이를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일반적인 서구의 학문적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양식사와 정신사적 맥락이 전부라 할 수 없지만 그것을 무시할 수 없고 그것을 넘어서는 역사나 정치. 사회적 맥락의 문제들을 결부시킨 우리만의 철학과 사유가 반영된 미적 규범이 규명되어야 한다. 

 

 일본은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 처음으로 참가하면서 유럽 무대에 아시아의 선진 국가임을 과시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 일게된 ‘자포니즘’의 선풍에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서양과 다른 일본만의 독자적인 미적 규범을 만들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규범은 부분적으로 공예 분야의 수출에 초점을 맞춘 전략의 극대화이기도 했는데,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으로 변질되어 스스로가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자 하는 일그러진 야망으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처럼 새로운 문화적 가치와 규범을 만드는 일은 국가적 차원의 역량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사용하여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K-컬처나 K-아트의 담론의 정체성과 전략을 냉정하게 다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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