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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 #8K 37년 만에 망한 수(隋)나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2월14일 17시24분
  • 최종수정 2017년12월15일 14시5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53) 이밀의 위징과 세력확장(AD617)

 

이밀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다. 적양의 잠재력을 꿰뚫은 것도 그렇지만 위징을 발탁한 것도 놀랍다. 위징(AD580-AD643)은 원래 무양군(하북 대명현) 군승 원보장의 빈객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고아로써 너무 가난하여 출가 도사(道士)가 되었다. 책을 좋아했고 살림살이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속으로 큰 듯을 품고 있었다. 이밀이 원보장, 서세적, 학표덕, 이문상, 장승, 조군덕 등을 포섭하여 세력을 확장할 때 원보장을 따라 이밀 진영에 가담했다. 이밀이 위징의 문사를 매우 좋아 불러서 등용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미 20만 대군으로 하남 일대에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된 이밀의 인물 됨됨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밀에게 투항하여 왔다. 무안(하북 영년), 영안(호북 신주), 의양(하남 신양), 익양(하남 광산), 제군(산동 제남) 등은 물론 두건덕과 주찬마저 사자를 보내 이밀에게 항복해 들어왔다.  

 

 

(54) 왕세충과 이밀의 대치(AD617)

 

수나라 왕세충의 군대는 월왕 양동의 군대와 함께 10만 병력으로 이밀의 대군과 낙구(하남성 공현)에서 대치했다. 수나라 양제 양광은 군사통수권을 왕세충에게 주었다. 그리고 특사 풍자명을 동도에 보냈는데 도중에 이밀에게 잡혔다. 이밀은 명성과 능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풍자명을 극진히 대접하며 물었다.

 

“ 수의 운명은 이제 다 한 것 같소.

  나를 도와 큰 공적을 세움이 어떠시오?“

 

풍자명의 대답이다.

 

“ 공의 집안은 두루 수나라 조정을 섬기고 영화와 부귀를 누려왔습니다.

  문벌을 잘 지키지 못하여 양현감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켰으나

  우연히 그물을 벗어나 오늘이 있게 된 것인데,

  거꾸로 씹는 것(반역)을 도모하니 큰 뜻이 무엇인지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왕망, 동탁, 왕돈, 환현이 강성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다 하루아침에 멸족되고 죄는 조상까지 미쳤습니다.

  저는 한 몸 죽으면 그만이니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밀이 화를 내며 가두었는데 간수를 설득하여 요행스럽게 풀려나 동도로 갔다. 가는 도중 이밀의 장수에게 잡혔으나 이밀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또 옛 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밀 군영의 문에서 지키는 장수에게 피격되어 죽었다. 왕세충 부대의 군기문란과 혼란을 틈타 이밀의 군대는 낙구를 함락시켰다.(AD617년 2월) 

   

 

(55) 이연의 장안함락(AD617)

 

이연-이세민의 군대는 AD617년 9월 12일 황하를 건넌 뒤 아무런 저항없이 남쪽으로 내려가 관중을 장악했다. 9월 21일 포진(섬서성 대협)에 들어갔고 다음 날 임진에서 위수를 건너 영풍창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휼했다. 이세민은 군사를 나누어 장안 북쪽 경양에 주둔했다. 이 때 이세민은(AD599-AD649) 습현(산서성 습) 현령 방현령(AD578-AD648)을 만났다. 스무 살 위 방현령이 거의 500KM의 먼 길을 찾아와 이세민을 알현한 것이다.

 

양견이 AD589년 진(陳)을 멸망시키면서 사람들은 곧 태평성세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감찰어사 방언겸은 이렇게 예언했다.

 

“ 주상은 시기하고 각박하며 가혹하고

  태자는 비굴하고 연약하며 여러 친왕들이 서로 권력을 다투는 지경이니

  바야흐로 언제 위태롭고 어지러워질지 모르는 형국이다.“

 

방언겸의 아들 방현령은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다.

 

“ 주상은 원래 공덕이 없이 거짓으로 천하를 빼앗은 것이고

  여러 아들은 교만하고 사치하며 어질지 않아서 곧 서로 죽일 것이니

  지금은 비록 편안하다고하나 그들이 망하는 것은 

  발돋움하고 기다릴 만큼 가까울 것입니다.“

 

이부시랑 고효기는 사람을 잘 알아보았는데 방현령을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아왔지만

  이와 같은 젊은이를 본 적은 전에 없었다.    

  훗날 반드시 큰 인물이 될 텐데 내가 그것을 못 보는 것이 한스럽구나.“

 

이세민은 방현령을 처음 보았으나 마치 오래전에 아는 사이처럼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를 기실참군에 임명하고 참모로 기용하였다.

 

산서성 분음(만영) 사람 설거는 금성(감숙성 난주)에 웅거하면서 반란 세력 약 30만을 거느리면서 서진패왕이라고 했다가 진제(秦帝)라고도 바꾸면서 도읍을 금성에서 장안에 더 가까운 천수로 옮겼다. 설거는 옛 진나라를 부흥시키려는 목적으로 장안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연은 이세민을 보내 설거를 부풍(섬서 부풍)대파시켰다.(AD617년12월) 설거는 AD618년 사망하고 그 아들 설인과가 나라를 계승했지만 당이 건국(AD617년 5월)하고 난 다음해 AD618년 11월 당에 투항했다.

 

산서의 요충지 동관은 굴돌통이 지키고 있었다. 이연-이세민 군대가 황하를 건너 장안으로 진겨하는 요충지가 동관이었다. 이연-이세민의 부장 유문정은 동관을 포위한 채 한 달 이상 대치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굴돌통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울면서 자신은 은혜를 입은 수나라를 절대로 배반할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응당 받아야 한다면 두려움 없이 칼을 받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부하들이 모두 감동하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이연이 항복을 권유하는 가동을 보냈지만 즉시 그 가동의 목을 베어버렸다. 장안의 모든 가족 친척들이 이연의 포로가 되었다고 알려오자 부장 상현화에게 동관을 맡기고 동쪽 낙양으로 향했다.상현화는 곧바로 유문정에게 투항했다. 

 

유문정은 상현화와 굴돌수를 보내 굴돌통을 따라 잡아 투항을 설득했다. 굴도통은 아들 굴돌수을 크게 꾸짖었다.

 

“ 이 도적 같은 놈이 지난날에는 나의 아들이었으나

  지금은 나와 원수가 되었다.“

 

형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깨달은 굴돌통의 부하와 군졸들은 모두 유문정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굴돌통은 말에서 내려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 신의 힘이 부족하여 이곳까지 밖에 못 왔습니다.

  그러나 감히 나라를 배반하지는 않았습니다.

  천지신명이 그것만은 아실 것입니다.“

 

장안으로 굴돌통을 압송했는데 이연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사 병부상서에 임명하고 진공 이세민의 장사를 겸하게 하였다.

 

 

 

(56) 이밀의 적양살해(AD617)

 

적양의 사마 왕유신은 이밀을 믿지 못했다. 이밀의 군권을 뺏아야 된다고 지적했다. 적양의 형 적홍도 자신이라도 가서 이밀을 제거하겠다고 서둘렀다. 그러고 보니 적양도 불쾌했다. 부하들이 이밀에게만 선물과 뇌물을 갖다 바치면서 자신에게는 그런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적양이 좌장사 방언조에게 그런 불만의 심정을 털어 놓았다. 방언조는 즉각 이밀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 적양은 탐욕스럽고 어질지 않으며

  주군을 언짢게 생각하며 몰아 낼 생각을 하는 듯 합니다.

  서둘러 도모하셔야 합니다.“

 

이밀은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았으니 기다리자고 했다. 정정이 나서서 재촉했다.

 

“ 독사가 손을 물면 팔을 속히 자르는 것은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밀이 동의했다. 잔치를 베풀어 적양을 유인한 다음에 그 친인척과 측근들을 모두 제거했다.(AD617) 적홍, 적마후, 왕유신이 이 때 제거되었다. 그러나 적양의 참모 서(이)세적, 선웅신, 왕백당은 죽이지 않았다. 아마 꼭 필요한 인재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 부터 이밀의 부하들은 이밀의 속 마음을 의심하며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왕세충은 은근히 이밀과 적양이 서로 다투면서 세력의 균열을 바랐으나 전격적으로 적양세력을 제거하면서 더 강력한 통치를 하게 되자 매우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57) 양광의 양위와 양유의 황제등극(AD617)

 

AD617년 양광은 황위를 열 세 살짜리 아들 대(代)왕 양유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태상황이 되었다. 장안으로 들어 온 이연에게 대도독내외제군사 및 상서령 겸 대승상의 직책을 내렸다. 이연의 승상부는 배적이 장사, 유문정이 사마, 이강이 사록, 두위가 사록참군, 이건성이 세자, 이세민은 경조윤에 봉해졌다.  

 

 

(58) 양광 조정의 내부 붕괴 : 강도 천도 문제(AD618)

 

양광은 자신이 내려와 있던 강도(강소성 양주)로 아예 천도하고 싶었다. 서도 장안은 이미 이연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고 동도 낙양은 왕세충과 이밀이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니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 나을 것은 분명했다. 왕세충이나 이연이나 이밀 어느 누구도 수나라 조정을 무너뜨리겠다고 공언한 것은 아니니 적어도 몸을 보전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대가 많았으나 간신 내사시랑 우세기는 찬성했다.  우세기는 양광의 강도 천도는 마치 우임금의 천도와 같은 것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반대자를 모멸했다. 양광은 단양궁을 짓도록 명령했다. 그런 황제를 따라서 장안에서 온 군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처자를 두고 이곳에 눌러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양식도 거의 다 떨어진데다가 황제마저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안 군사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어느 궁인이 군사들의 반란결의를 황후에게 밀고를 했고 황후(소씨)는 양광에게 전했다. 양광은 화가 나서 궁인을 찾아내어 죽였다. 어떤 사람이 또 반란징후를 보고하자 소호가 말했다.

 

“ 천하의 일이 여기에 이르렀지만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말 한 들 무슨 유익이 있겠소.

  헛되이 황제 걱정만 끼치는 일이 아니겠소?“

 

반란세력들은 아둔하고 겁이 많고 모자라는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을 주군으로 세웠다. 그를 통해 좌지우지 하자는 주모자 사마덕감 등 제장들의 속셈이 깔려있는 선택이었다. 사마덕감의 치밀한 계획아래 수만 명의 관군을 이끌고 심야에 양광의 침실로 난입했다. 놀란 양광에게는 화재가 발생했다고 거짓말 했다. 영호행달과 배건통과 원례가 양광을 체포했다.

마문거는 양광의 죄상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 폐하는 종묘를 어기고 버리어

  사방 돌아다니며 놀기를 그치지 않았고

  밖으로는 정벌과 토벌을 그치지 않았으며

  안으로는 사치하고 음란하기 그지없고    

  장정과 화살과 칼이 모두 없어지고

  여자와 약한 사람들을 구덩이 빠지게 하여

  사민은 직업을 잃고 도적들은 벌떼처럼 일어났으나 

  오로지 망령되고 아첨하는 무리들만을 신임하고

  바르게 간언을 올리는 사람들을 멀리하셨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양광은 천자에게는 죽는 법도가 따로 있다고 하면서 짐독을 요구했다. 마문거는 허락하지 않았다. 영호행달이 양광을 꿇어앉히자 양광은 허리띠를 풀어 넘겨주었다. 영호행달이 그 끈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양광의 나이 49세. 황위에 오른 지 13년 이었다. 양광의 아들 조왕 양고와 촉왕 양수와 그리고 그의 일곱 아들도 모두 처형되었다.(AD618년3월) 그리고 두 달 뒤 AD618년 5월 14일 수나라 공제 양유가 양위하고 20일 이연이 태극전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마침내 수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이다. 양견이 AD589년 수나라를 건국한 지 꼭 19년 만이다.   

 

 

(59) 수나라 멸망의 원인 : 지도자 양광

 

AD301년 서진(西晉)이 허약해짐을 틈타 장식이 전량을 세우면서부터 쪼개지기 시작한 중국을 280년 만에 통일 시킨 것은 수(隋)나라 양견이다. 수나라가 300년 가까운 혼란과 분열의 5호16국 시대를 종결시키고 한 나라로 통일되게 된 데에는 양견을 빼 놓을 수가 없다. 사마광이 평한 것처럼 양견은, 

 

“ 엄하고 무거웠다. 

  영을 내리면 반드시 행했고 금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조회를 하여 들었고 해가 기울도록 피곤한 줄 몰랐다.

  재물에는 인색했지만 공로 있는 사람에게는 아끼지 않았다.  

  죽은 사람에게는 후히 상을 내렸고 그 가족들도 끝까지 돌보았다. 

  농잠을 권장하면서 요역을 줄였고 본인 스스로도 수레를 고쳐 탈 정도로

  매우 검소 질박하였다.

  그런 까닭에 국가 창고는 넘쳐났으며

  인구도 두 배 이상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 

 

거기에다가 훌륭한 측근을 많이 얻었다. 고경, 우경칙, 조경, 이덕림, 소위는 수나라 개황의 치(AD581-AD600)을 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한지 40년이 채 되지 않아 망한 것은 양광이라는 인물의 리더십 때문이었다. 양광은 첫째로 거의 대부분의 개국공신들을 처단해 버렸다. 물론 아버지 양견도 개국당시의 공을 세운 측근들을 견제하고 물리치기는 했지만 죽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양광은 많은 사람을 아예 죽여 없앴다. 양광은 간신과 충신을 구별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자신에게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가까이 하고 쓴 소리를 하는 사람은 철저히 차단했다. 고경, 하약필, 우문필, 설도형, 양소가 다 양광에 의해 제거되었다. 소위만이 죽음은 면하고 폐서인 되는데 그쳤다. 1세대 공신들이 처참하게 제거되면서 그 후예들은 수나라의 대들보가 아니라 오히려 수나라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규합되어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의 반란과 이연-이세민 세력의 반항이다. 두 번째로는 양광의 주변에 간신들이 우글거렸다. 배온-배구-우세기-우문술-탁온-왕세충의 여섯 명은 양광의 주변을 막고서 충신들의 간언은 물론 전국의 불안한 반란 상황을 철저히 차단하면서 나라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물론 과도한 운하공사나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도 수나라 멸망에 큰 기여를 했겠으나 그로인한 재정 혹은 군사력 고갈로 인한 멸망이라기보다는 지도자의 무능과 무모함에 따른 민심의 이반과 지방 반발이 수나라 멸망에 더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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