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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76>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 IV. 진정한 복지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다.<上>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6월16일 17시10분
  • 최종수정 2023년04월21일 10시5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2

본문

IV.1 백성을 바로 깨우치게 하자(훈민,訓民) 

 

세종 25년 12월 30일 언문 28자가 세종에 의해 창제되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고 선언한 시점(세종 28년 9월 29일)보다 약 3년 전이었다. 언문이창제되었다고 발표하기 이전 그 어느 구석에서도 언문이나 훈민정음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세종 25년 그 한 해 가장 마지막 날 전광석화처럼 혜성처럼 훈민정음이 탄생되었다고 선포하였다. 비밀리에 작업이 진행되었다는 말이다. 누가 한글 창제 작업에 참여했는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최측근이 한글 창제를 도왔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협력자 중에는 집현전의 최측근과 함께 문종과 진양대군(세조), 안평대군 등 세종의 아들도 참여했을 것이 분명하다.  

 

훈민정음 28자를 세종이 직접 창제했다고 했다(上親制彦文二十八字). ‘간단하면서도 쉽지만 무궁하게 전환하는 것’이라 했다(字雖簡易 轉換無窮). 왜 세종이 직접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을까.  <훈민정음 어제(訓民正音 御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상통하지 못하여 백성이 말하고자  

 

    해도 끝내 제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어 쉽게 배워 편리하게 사용하게 하고 싶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 便於日用耳 

 

    : 세종 28년 9월 29일)”

 

여기서 말하는 ‘백성들의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일용의 편리함이란 무엇일까. 말하는 데에는 문자가 필요 없다.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이나 혹은 생각을 편하게 말함에 있어서는 문자가 필요 없다. 세종이 창제한 것은 말이 아니라  ‘문자’라는 점이다. 세종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문자였다. 말과 문자가 달라서 불편하다고 했다. 왜 문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 했을까. 세종은 백성이 꼭 알아야 할 지식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말이 아니라 ‘알기 쉬운 문자’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위 <훈민정음 어제(訓民正音 御製)>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변경해서 해석해도 틀리지 않는다.

 

   “나라 말과 글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상통하지 못하여 ‘백성이 알고 싶어 

 

    도 끝내 그 지식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知 而終不得知其識者  

 

     多矣)”

 

세종의 문자창제의 목적은 “백성들로 하여금 필요한 정보를 알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훈민(訓民)’의 뜻이었다. 법률 지식, 의약 지식, 예절 지식 이 모든 필수 지식을 위해서는 한자보다 훨씬 간편한 문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백성에게 정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세종이 생각한 가장 분명한 증거는 세종 14년 11월에 처음 보인다. 세종이 백성들의 법지식이 부족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사실을 이때 지적한 것이다.

 

[백성이 법을 알고 피하게 하자(細民知禁 而畏避)]

 

하루는 세종이 좌우 가까운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록 사리를 잘 아는 사람도 반드시 법을 해석한 다음에야 죄의 경중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일반 백성들이야 어찌 범죄의 경중을 알아 스스로  

    고치겠는가. 율문을 모두 알게 할 수는 없어도 큰 범죄의 초록을 만들어

    이두문(吏讀文)으로 번역반포하여 평범한 백성들이 알고 범죄를 예방하

    도록 하면 어떻겠는가. (雖識理之人 必待按律 然後知罪之輕重 況愚民何

    知所犯之大小而自改乎 雖不能使民知之律文 別抄大罪條科 譯以吏文 

    頒示民間 使愚夫愚婦知避何如 : 세종 14년 11월 7일)” 

 

 세종의 국정철학의 핵심은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고 백성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有邦本 本固邦寧)는 것이다. 백성이 근본이면 백성이 마땅히 법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법을 모르고 죄를 짓게 된다면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이 일관된 세종의 확신이었다. 허조가 반대하고 나섰다. 백성이 법을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알게 되어 법을 농간하는 폐단이 발생할 것이라는 반론이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고 사리를 분간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논리였다. 세종이 다시 반박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법을 모르고 죄를 범하는 것이 옳은가. 죄를 모르고 

    법을 범하는 것은 조사모삼의 술책과 뭐가 다른가. 더욱이 조종께서 율 

    문을 읽게 하신 의도가 백성이 모두 알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이다.

    (然則使民不知 而犯之可乎 民之不知法 而罪其犯者 則不幾於朝四暮三之術  

    乎 況祖宗立讀律之法 欲人皆知之也 : 세종 14년 11월 7일)” 

 

세종은 신하들에게 고전을 찾아서 어떻게 백성들에게 법을 익히도록 했는지 살펴보고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허조가 물러가자 세종은 이렇게 말하였다.

 

 

   “허조의 생각은 백성들이 율문을 알면 쟁송이 그치지 않아 윗사람을 

    능욕하는 일이 증가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소시민에게 반드시 

    금법을 알게 하여 두려워 피하게 해야 하겠다. (許稠之意以爲 民知律文

    則爭訟不息 以有凌上之漸 然須令細民知禁 而畏避也 : 

    세종 14년 11월 7일)” 

 

 법을 앎으로써 백성이 법을 위반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을 세종이 하게 된 이유는 실제로 많은 백성들이 죄가 되는 줄도 모르고 죄를 짓고 있으며 더구나 어떤 형벌이 내려지는 줄 전혀 모르고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재판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용길, 김을부 사건]

 

백성들이 금법을 알게 하여 두려워 피하게 해야겠다는 말을 세종이 하기 며칠 전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 김용길과 김을부라는 사람이 길을 가다가 숲에서 가마솥 같은 것을 주워 기뻐하며 집으로 가져 온 일이 있었다. 그 마을 이장이 이 사실을 의금부에 고해 바쳤고 해옥이라는 제3자가 그것이 명화적의 물건이라는 말을 믿고 의금부는 그 물건이 장물이며 김용길, 김을부 두 사람이 명화적 일당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만약 그렇다면 참형에 해당하는 죄이다. 세종은 말이 이렇다.

 

   “용길 등이 주운 물건이 초막적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었다면 도적이라  

    간주할 만하다. 그러나 천하의 이치는 무궁하다. 만약 도적들이 수풀에 

    버렸고 용길 등이 그것을 우연히 주웠다면 그 행위로 명화적으로 단정  

    하여 극형을 가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 아닌가. 내가 이런 경우  

    를 대비하여 이미 형법교서를 반포하기를 죄가 확실하지 않으면 가벼운

    쪽으로 죄를 주라고 했다. 곤장을 때리고도 확증을 얻지 못했으면 이는

    벌을 주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지 않겠는가 (龍吉等所得之物 乃草幕之賊  

    之去臟也 則似爲賊人矣 然天下之理無窮 賊若持此物 棄之林中 而龍吉偶  

    得之 則以爲明火賊而置之極刑 無乃不可乎 予創若是 己頒恤刑之敎 書曰 

    罪疑惟輕 若杖訊證佐 而猶未得其實 則不若不罪之爲愈也 

    : 세종 14년 11월 2일)”

 

세종은 김용길과 김을부가 명화적이 아니라 주운 물건을 집으로 가져 왔을 뿐이라고 믿었다. 명화적이라고 믿을 확증이 도무지 없었다. 그리고 주운 물건을 집으로 가져온다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들은 분명히 집으로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주운 물건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 죄가 되는 줄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법을 알게 해야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지신사 안숭선은 이런 세종의 마음을 읽었다.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을 우리말로 번역하자고 건의했다. 세종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이미 태조 때 <元六典>을 이두문으로 번역한 적이 있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고 또 방대한 <대명률>을 다 이두문으로 번역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중대한 범죄에 대한 초록만 일단 이두로 번역하기로 했다.    

 

[백성이 약과 처방을 알게 하자 :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백성들이 법을 알아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할 바로 그 즈음 세종 14년(1432)에 또 하나 주목할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세종의 지시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는 책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종 13년 가을에 세종은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과 전의 노중례에게 향약에 대한 내외 모든 저서를 종합하여 빠짐없이 하나의 책으로 모을 것을 지시하였다. 이들이 일 년 동안 작업하여 기존에 있던 병 증세 338개를 959개로, 기존 질병에 대한 처방 2803가지를 10706가지로, 그리고 침구법 1476조와 향약본초 및 포제법을 모두 망라하는 85권의 책을 발간하였다(세종 14년 가을발간). 

 

세종이 <향약집성방>을 발간하게 한 근본목적은 백성을 구휼하자는 것 이었다. 권채가 쓴 <향약집성방>의 서문을 보면, “이 책으로 인하여 약을 먹어 효력을 얻고 앓는 사람이 일어나고 일찍 죽는 것이 변하여 수명이 길어지며 무궁하게 화기를 얻는 것”이 진정으로 세종이 바랐던 것이다. 세종은 법령을 알게 하여 범죄를 짓지 않도록 하자는 마음과 함께 이 <향약집성방>도 알게 하여 병을 치유하고 장수하며 화기를 만세 누리게 하기를 바랐다. 이 책을 바로 전라도와 강원도에 나누어 인쇄하라고 지시했다(세종 15년 8월 27일). 그러나 이 책 또한 한문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한문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작업이 되었다. 세종은 법과 함께 약방지식을 알게 하기 위해서도 훈민정음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백성이 예를 알게 하자 :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향약집성방>이 완성되고 <율문초록>을 이두문으로 번역하라고 지시하는 그 저간에 세종은 또 다른 중요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삼강오륜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할 책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집하도록 명령하던 시기였다. 세종은 인륜, 즉 삼강오륜이 확실하게 지켜져야만 밝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교육과 교화가 없어 군신과 부자와 부부의 삼강대륜이 무너지고 따라서 천성이 자꾸 각박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종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설순을 불러 말했다.

 

    “내가 특히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서 그림과 설명을 덧붙여 중외에 널리

    반포하고자 한다. 모든 평범한 백성들이 쉽게 보고 느끼고 마음을 움직

    이게 하여 좋은 풍속을 이루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予欲使取特異者 作爲圖讚 頒諸中外 庶幾愚婦愚夫 皆得易以觀感而興起 

    則化民成俗之一道也 : 세종 14년 6월 9일)” 

 

<삼강행실도>는 충효절의(忠孝節義)의 삼강에 중점을 두었다. 내외 고금 서적을 모두 조사하여 뛰어난 효자, 충신, 열녀 각 110인의 행적을 그림과 함께 설명했으며 외우기 쉽도록 시까지 붙였다. <향약집성방>도 그랬듯이 이 책도 집현전에서 주로 집필했다. <삼강행실도>의 서문도 <향약집성방>과 같이 권채가 썼다. 그러나 이 책도 제대로 뜻을 이해하려면 한문을 이해해야만 했다. 물론 그림이 이해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백성들이 글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나중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세종은 그 생각을 했던 것이 밝혀졌다.

 

   “내가 만약 <삼강행실도>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반포하면 모든 백성들이 

    쉽게 깨우쳐  반드시 충신, 효자, 열녀들이 무리로 나올 것이라.

    (予若以諺文譯三綱行實 頒制民間 則愚夫愚婦皆得易曉 忠臣孝子烈女

    必輩出矣 :세종 26년 2월 20일)”       

 

법률 지식과 약에 관한 정보와 삼강오륜과 같은 필수적인 예의 지식을 백성들에게 꼭 전달 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세종은 거의 같은 시기, 즉 세종 13년과 14년 사이에 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비밀리에 훈민정음의 창제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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