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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전쟁 부른 쌀 산업, 지속가능한 미래의 선택은? <5> 우리 쌀의 정치경제 77년사​ (1945-2023) (中)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5월25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3년05월25일 11시18분

작성자

  • 최양부
  • 흙살림 고문, 전 대통령 농림해양수석비서관

메타정보

  • 1

본문

<쌀 자급을 위한 증산농정시대 13년 (1961-1977)>

 

5.16 혁명정부와 ‘시급한 기아선상의 민생고 해결’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는 군사혁명이1) 일어났다. 헌정은 중단되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혁명정부가 전권을 장악했다. 최고회의는 ‘5.16 혁명 공약’을 발표하고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선언했다. 국민의 주곡(主穀)인 쌀과 보리의 절대 부족으로 춘궁기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기아선상에 있는 국민과 농민이 겪는 민생고 해결은 혁명정부가 당면한 시급한 과제였다. 

 

  1961년 6월 1일 군사정부는 시급한 민생고 해결과 자주 경제 재건이란 혁명 공약의 실천을 위해 식량 증산 등 근본적인 농어촌 진흥대책과 자립경제 구축을 위한 장기종합개발계획 수립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경제정책의 기본방향 및 시책을 발표했다. 7월 22일에는 ‘경제기획원’을 설립하고, 1962년 1월 5일 국가 경제의 자립 성장과 공업화 기반 조성의 2대 목표와 농업 부문 중점개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을 발표했다. 

 

  1차 계획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서는 투자 재원확보가 시급했다. 혁명정부는 미국과 일본, 독일 등으로부터 차관 도입 등 경제협력 지원을 얻어내야만 하는 현실에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시급했다. 1960년 4월 민주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하고 수립된 장면 정권이 군사혁명으로 무너지면서 혁명정부는 미국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혁명정부는 미국의 불신을 해소하는 한편 미국의 무상원조 (잉여농산물) 감소로 인한 국방비 부담증가와 식량부족 문제를 최우선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11월 12일부터 25일까지 일본과 미국을 차례로 방문했다. 11월 12일 일본을 방문한 박 의장은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국교 정상화와 경제협력 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박 의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11월 14~15일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방문 두 차례 정상회담을 하였으며, 러스크 국무장관, 프리맨 농무장관과 별도 회담을 하고 1차 계획에 필요한 1억 7천 8백만 달러 규모의 차관과 경제원조를 요청했다. 

 

  또한 박 의장은 1960년부터 무상원조 감소로 인한 군사비 부담증가 때문에 한국군의 현상 유지가 어렵다며 무상원조 증액을 요청했다. 박 의장은 그 대신 1963년까지 군정종식을 약속하고, 미국이 필요한 경우 한국군 월남파병을 제안하며 미국을 설득했다. 

  한·미 정상은 “우리는 모든 가능한 경제원조와 협력을 계속하겠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이로써 박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면서 혁명정부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해소하고 한·미관계를 정상화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로써 혁명정부가 추진하는 1차 계획 추진도 탄력을 받게 되었다. 

  박정희 의장은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새 헌법에 따라 1963년 10월 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1963년 12월 17일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3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중농제일을 표방했던 혁명정부는 1차 계획에서 식량 증산과 농촌소득 증대 등 농촌 부흥을 농정목표로 정하고 1차 계획기간 동안 쌀은 1960년 기준 1, 595만석에서 1966년까지 2,057만석으로 29.0%, 보리는 721만석에서 848만석으로 17.6% 늘리는 증산목표를 세웠다. 농림부는 1차 계획 목표 달성을 위해 쌀과 보리증산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3차 농업증산 5개년계획(1962-66)’을 별도로 수립했다. 

 

“제3차 증산계획(의)...주요 목표는 식량증산이었다. 이를 위한 정책 수단으로 농지의 확장과 단위면적당 생산력 제고 등을 채택하였다. 목포 및 영산강·섬진강·동진강 유역의 간척사업과 전국에 걸친 개간사업을 통하여 계획 기간 중에 12만 정보의 농경지를 확장하고, 미완공 수리사업의 완성, 종자 갱신, 비배관리(肥培管理)의 개선, 병충해 방제의 철저, 농사시험 및 지도사업의 강화, 영농방식의 합리화 등을 통해 단위면적당 생산성을 제고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2)  

제3차 증산계획의 효과적인 추진을 위해 1962년 농림부는 ‘농업생산국’을 신설 증산농정 추진체계를 확립하는 한편 1962년 농업기술 연구기관인 ‘농사원’을 ‘농촌진흥청’으로 확대 개편하고 작물시험장, 호남 및 영남 작물시험장을 설치 등 미곡 등 식량 증산을 위한 시험연구체계를 확립했다. 이 들은 1970년대 초 미곡 다수확신품종(‘통일’)을 개발 주곡 자급을 달성하는 ‘녹색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혁명정부의 농업증산 정책은 시작부터 발목이 붙잡혔다. 1962년 대 가뭄으로 쌀 생산량이 전년 대비 15.7%나 감소하는 대흉작이 들었고, 이어서 1963년 여름 보리(하곡)마저 흉작이 들면서 극심한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하고 곡가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해방 후 일찍이 없었던 살인적인 쌀값이 국민을 절망케 하자, 농림부 장관이 물러나고, 주미 한국대사는 미국에 잉여농산물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보도했다. 

 

  정부는 식량 파동 해결을 위해 혼·분식 장려 등 범국민적 절미(節米)운동을 추진했다. 요식업체와 학생 도시락의 쌀과 잡곡 혼합비율을 30%이상으로 고시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까지 했으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무미일(無米日)’로 정했다. 1963년 3월부터는 막걸리 제조 시 쌀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곡식을 축내는 쥐잡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도 했다. 6월에는 서울 시내 식량부족으로 하숙이나 자취를 하는 지방 학생들을 귀향시키기 위해 대학 조기 방학을 실시했다. 그해 우리나라 최초로 ‘삼양라면’이 출시되어 부족한 식량난 해결에 힘을 보탰다.

 

주곡자급을 위한 ‘증산농정’의 전개 

 

 1963년 6월 27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식량난 타개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정부는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국민을 굶기지 않도록 책임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고 비장한 각오를 밝히는 한편,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64년 1월 8일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식량 증산과 자급자족을 위한 장단기계획’의 수립을 농림부에 지시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무상원조로 들여오던 미 잉여농산물이 1963년부터 장기차관으로 (1971년부터는 다시 현금구매로) 바뀌면서 외환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나라 경제에 식량 수입은 큰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외화 절약을 위해서라도 식량 증산이 절실했고 최소한 주곡의 자급달성을 이루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박 대통령은 그해 3월 13일 가진 ‘식량증산 연찬대회’에서 ‘경제적 자립은 식량의 자급자족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며 식량자급을 위한 ‘범국민 증산운동’의 전개를 선언하고 정부 주도의 강력한 ‘증산농정’을 시작했다. 

 

  1964년 8월 박 대통령 지시를 받은 농림부는 미곡, 맥류, 두류, 서류, 잡곡류 등 식량의 자급달성을 목표로 하는 ‘식량증산 7개년계획(1965-1971)’을 발표했다. 7개년계획(은) “식량(주곡인 쌀)의 자급자족을 지상목표로 설정하고 기준연도의 식량작물 31,680,000석을 목표연도인 1971년에는 48,510,000석까지 생산하는 등 7년간 53%를 증수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3)  이로써 마침내 국가적인 ‘미곡 자급목표 4,800만석’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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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림부는 목표 달성을 위해 기존에 추진하고 있는 농경지 확장과 유휴농경지 적극 활용, 수리시설 개선 확충, 토양개량, 비료, 농약사용 증대, 종자 개량 등 연구개발과 지도보급강화 등과 함께 작물별 증산왕, 퇴비 증산왕 선발 포상 등 적극적인 ‘증산농정’을 펼쳤으나 증산계획은 1967년과 1968년의 극심한 한발로 인한 벼농사의 대흉작으로 난관에 부딪쳤으며 1971년의 양곡 생산은 1966년에 비해 오히려 감소하였다. 주곡자급의 꿈은 여전히 힘겨운 희망이었고 우리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1977년까지 더 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했다.4)

 

  1971년 2월 청와대는 새로 육종된 다수확 신품종 벼 IR667로 지은 ‘쌀밥 시식회’를 열었다. IR667의 육종은 허문회 서울대 교수와 농촌진청 연구진들이 국제미작연구소(IRRI, 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의 지원을 받아 1964년 연구에 착수하여 4년여의 각고의 노력 끝에 1967년에 성공한 우리 농업과학기술사는 물론 세계 벼 육종사의 새 장을 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IR667은 한국과 일본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 벼와 동남아지역에서 재배하는 다수확 종인 인디카 벼를 수백 가지 조합으로 교배하는 무수한 ‘원연교잡(서로 특성이 다른 품종 간 교배)’ 실험 결과로 얻은 잡종 가운데서 우수 품종을 선발하고 이를 다시 우리 기후환경에 맞게 조생종 자포니카 벼와 교배하는 ‘3원 교잡’을 통해 얻은 ‘기적의 볍씨’였다. 

 

  정부는 새 볍씨 이름을 ‘통일’로 정하고 1968년부터 농가 보급을 위한 4년여의 시험 재배를 했다. 1971년에는 총 550개(2,750ha) 시험 단지에서 재배한 결과 10a 당 평균 550.9kg 라는 획기적인 수량을 수확했다. 정부는 1972년부터 통일벼 보급을 위한 강력한 증산 농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1977년 마침내 쌀 생산량 4,000만 석을 돌파하며 국가적 숙원인 주곡 자급을 달성하는 ‘녹색혁명’을 달성했다. 늘어난 생산량에 ‘고미가(高米價)정책’까지 더해져 농가 소득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는 춘궁기 보릿고개를 벗어나게 되었고 쌀 부족 걱정에서 해방되었다. 1964년 자주적 독립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쌀 만큼은 자급해야 한다며 증산농정을 펼친 박정희 대통령의 주곡 자급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주곡 증산과 소득 안정을 위해 생산자로부터 고가에 사들여 (‘고미가정책’) 매입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소비지 시장에 판매하고 그 차액(적자)을 정부 재정으로 부담하는 ‘이중가격제(二重價格制)’ 라는 양곡관리정책을 추진했다.

  정부는 “1968년산 쌀부터 수매가격을 전년 대비 17% 인상하기 시작하여 1968~1971년에 연평균 25.1%씩 수매가격을 인상함으로써 이른바 ‘고미가정책’을 실시하였다. 정부는 통일벼 재배면적 확대를 위한 유인 수단으로 통일벼를 우선 수매하고 수매량을 크게 확대하였다. 그 결과 쌀 수매량은 1972년의 507,000천톤(쌀 전체 생산량의 12.8%)에서 1976년에는 1,043,000톤(쌀 전체 생산량의 20%)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고미가정책에 뒤이어 1969년부터는 보리증산을 유도하기 위한 ‘이중맥가제’를 실시하였다. 정부는 매년 수확기에 농민이 생산한 양곡의 일부를 매입함으로써 수확기의 곡가 하락을 방지하고, 공급 부족으로 양곡 가격이 급격히 상승할 때에는 정부가 보관 중인 양곡을 시중에 풀어 곡가를 조절하는 한편, 보관 양곡을 군량미나 생활이 어려운 영세민에 대한 구호양곡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5)  

  그리고 양곡의 매입·보관·수송·도정 등의 관리를 위해 소요되는 비용과 양곡의 판매대금 수입을 별도로 관리하기 위하여 ‘양곡관리기금’을 설치·운용하였다. 그러나 이중곡가제로 재정결손이 발생하자 정부는 ‘양곡관리특별회계(양특)’의 적자를 일반회계로 메우는 재정보전 작업을 했다. 그러나 매년 양특 적자가 누적되면서 이중곡가제 폐지 등 ‘양정전환론’이 제기되었다.  

 

<양정와 농정 전환시대 11년 (1978-1989)> 

 

  1977년 4차 5개년계획의 출범을 전후한 2~3년간 대한민국은 박정희 18년의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등장하는 정치의 격변기였으며, 1962년 이후 지속되어온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이란 경제정책 기조를 ‘안정성장’으로 혁신하는 경제정책의 전환기였다. 그리고 문명적으로는 전통적 ‘농경사회’가 ‘도시산업사회’로 탈바꿈하는 ‘문명 전환기’였다. 이러한 문명과 경제정책 전환의 중심에 농업․농촌․농민 문제가 있었고 ‘전환기 농정’의 시대적 과제가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농업․농촌,농민 중심 농경사회는 1962년 이후 지난 15년간 진행된 급격한 공업화․도시화로 촉발된 ‘산업화의 충격’으로 무너지고 해체되고 있었다. 농민들은 불투명한 미래로 동요하고 있었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농업․농가 인구의 급격한 ‘탈농이촌(脫農移村)’으로 농업 노동력 과잉이 부족으로 바뀌고 있었다. 농업도 빠르게 시장경제 질서에 편입되면서 시장화, 상업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농촌은 도농 간의 벌어지는 발전격차 속에 전통적 농촌공동체 사회와 전통가치가 무너지고 희망이 없는 떠나야 할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부는 1975년 6월, 4차 5개년계획 수립에 착수하면서 1962년 이후 지난 15년간의 한국경제의 압축성장의 성과와 과제에 대한 진단과 평가를 했다. 경제기획원은 우리 경제가 1977년을 전후로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에 이르면서 빈곤에서 벗어나고, 국민 의식과 소비구조 변화로 기대 욕구가 상승하고, 시장경제가 확립되고, 국제수지가 만성적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는 등 구조 전환기에 들어선다고 진단했다. 

  특히 국제수지가 흑자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외환증가로 발생하는 통화팽창과 재정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외환을 국내 물가안정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4차 계획은 성장·형평·능률의 이념 아래 자력 성장구조를 확립하고 사회개발을 통하여 형평을 증진 시키며 기술을 혁신하고 능률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중화학공업구조조정, 수입자유화와 경제 안정화 정책 등을 주요 추진시책으로 제시했다.

 

  한국은 산업화의 성공으로 국민총생산에서 농림수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63년 42.2%에서 1977년 23.7%로 크게 줄고, 총인구에 대한 농가 인구 비중도 1963년 56.0%에서 1977년 33.8%로 감소하면서 산업국가로 구조가 바뀌고 수출을 견인하는 재벌 기업들이 등장하고 시장경제체제가 구축되고 있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한 이후 1976년까지 15년간 3차례의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제4차 계획 (1977-81)을 준비하면서부터 주곡 자급달성 이후 양특 적자누증에 따른 ‘양정전환론’이 제기되고, 주곡 증산 일변도의 증산 농정에 대한 비판과 함께 ‘농정전환론’이 제기되면서 우리 농정에 변화와 개혁의 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경제기획원이 있었다. 

  경제기획원은 특히 한국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해서는 지난 15년간 추진해온 고도압축성장을 ‘안정성장’으로 바꾸는 경제정책의 기조 전환이 필요하다며 ‘경제안정화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6) 그것은 돌이켜보면 경제안정화을 위한 사회적 비용을 고스란히 농민들의 고통분담으로 전가하는 조치였다. 다시 말하면 농업, 농촌, 농민의 3농이 대한민국 정치경제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려났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농경시대의 종언과 산업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역사적 선언이기도 했다

 

  경제기획원은 1977년부터 ‘양정(糧政)개혁’에 뒤이어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농산물 수입자유화’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1977년 12월 10일 한중 경제장관회의 참석차 방문 중인 타이베이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우리나라 고미가정책은 막대한 재정 부담으로 한계점에 도달했다. 정부는 내년부터 고미가정책을 지양하고 농외소득증대, 축산진흥, 농촌인구 감소 등을 통해 농민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한 농촌경제구조를 전면 개편할 방침이다”라고 말했다. 남 부총리의 발언은 기획원의 안정론자들이 쏘아 올린 양정전환론, 농정전환론, 개방농정론으로 이어지는 농정개혁의  신호탄이었다.7)  

  1977년 제4차 5개년계획 시작과 함께 정부는 ‘농정전환론’을 제기하며 새마을운동을 떠받쳐온 친 농민적 고미가정책을 중단하고, 친 소비자의 물가안정을 위한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농산물수입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기획원은 국민소득향상에 따라 쌀 이외, 특히 육류, 유제품, 과일 채소 등 고급 농식품에 대한 소비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소득 탄력성이 높은 품목에 대한 소비자 수요증대에 대비 물가 안정을 위해서 농업보호를 폐지하고 비교우위론에 입각하여 농산물시장을 개방하고 농업무역을 자유화하는 한편 농가소득증대도 농업소득보다는 농촌공업개발을 통해 농외소득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며 농업포기적인 ‘개방농정론’을 제시했다.8)

  1976년 쇠고기, 1978-79년 돼지고기 수입을 시작했으며, 1978년 2월에는 ‘농산물 수입자유화 기본방침’을 확정하고 1978-79년간 3차 (1차, 1978. 5, 75개 품목; 2차, 1978, 9월, 3차 1979. 1월, 87개 품목 자유화)에 걸쳐 753개 품목에 대한 수입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농민은 정부의 급진적인 농정전환에 충격을 받았고 1978년 가뭄과 1980년 냉해 등의 자연재해로 인한 소득 감소와 부채증가로 정부에 대해 배신감마저 가지게 되었다. 

  특히 주곡 증산 농정 수행과정에서 농민의 품종선택권을 박탈한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인 증산농정에 지친 농민들의 불만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고, 급격한 개방농정으로 농정 전환과 그에 따른 저곡가정책과 농산물수입자유화, 그리고 계속된 자연재해로 농가부채는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고 농촌경제는 파탄을 맞고 있었다. 

 

  1978년 신품종 노풍벼의 냉해 피해에 뒤이은 1980년 통일벼 냉해 피해로 사상 유례가 없는 대흉작이 발생했다. 당초 4,200만석 생산 목표의 42%나 되는 1,764만석 벼가 치명상을 입고 감산되면서 쌀 공급 부족으로 쌀값은 폭등했다. 1981년에도 저온 현상이 반복될 것이란 기상예측으로 정부는 만일의 쌀 부족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쌀 1,000만석 비축을 목표로 11개국으로부터 1,700만 석의 쌀을 수입했다. 9) 그러나 1982년부터 쌀 생산이 예년 수준을 회복하게 되자 1981-82년간 외미(外米) 과다수입은 쌀값 폭락으로 이어졌다. 

 

  농가들은 1978-80년 3년 연속 흉작과 쌀 과다수입으로 인한 가격폭락의 피해을 입게 되었고 이는 농가 부채의 급격한 증가를 가져왔다. 더욱이 1982년 이후 계속된 풍년으로 미곡 생산이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정부는 고미가정책에서 저미가정책으로의 양정전환,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농산물 수입자유화 등 개방농정 추진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부의 양정전환과 개방농정의 추진은 농민의 집단적인 저항을 불러왔다. 그리고 농민 저항의 중심에는 김재익 청와대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 있었다. 이처럼 양정전환과 개방농정 추진을 둘러싼 정책적 갈등으로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1983년 10월 9일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미얀마를 공식 방문 중인 전두환 대통령을 노린 북한의 ‘아웅산 묘역 테러사건’으로 김재익 수석을 비롯한 정부 요인 다수가 사망했다.10)  김 수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양정과 개방농정에도 큰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쌀 부족시대의 양정은 풍요시대의 양정으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질적 구조변화를 겪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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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그동안 5.16을 ‘군사 쿠데타’로 불러왔다. 그러나 이번 글부터는 ‘군사혁명’으로 고쳐 적는다. 성공한 ‘군사 쿠데타’를 ‘혁명’으로 적는 일반 관행에 따르기 위해서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5.16 군사 쿠데타 당시인 1961년 국민 1인당 소득 82불을 18년 후인 1979년 1,693불까지 끌어 올리면서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대한민국을 근대화시키고 도시화, 공업화, 산업화시키는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성공한 군사혁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농정분야에서 주곡 자급과 고미가정책을 통한 농가소득 향상, 농촌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촌근대화, 그리고 산림녹화 성공 등 3대 업적은 역사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자랑스러운 박정희 군사혁명의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국가기록원 식량 증산 시기별 정책과 특징 > 1960년대 (archives.go.kr)

3) 2)와 동일 

​4) 2)와 동일 

​5) 국가기록원,식량 증산 주요 식량증산사업 이중곡가정책 (archives.go.kr)

6) 당시 안정화 정책을 이끈 주역은 1976년부터 4차 계획수립을 총괄한 김재익 경제기획국장을 비롯하여 강경식 기획차관보, 김만제 KDI 원장 등이었다. 이들은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비교우위론을 앞세우며 ‘국제수지 흑자로 발생한 외환으로 농산물을 수입함으로써 통화팽창을 막고 물가안정도 기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도시노동자 임금인상억제를 위해서 고미가(高米價)정책의 재검토와 농산물 수입자유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7) 1978년 12월 남덕우 부총리 뒤를 이어 새로 취임한 신현확 경제부총리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더욱 탄력을 받았다. 1979년에는 김기환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자문관으로 부임하면서 안정론자의 대열에 합류했고 개방론자의 선봉에 섰다. 

8) 한국농촌경제연구원, 80년대 새 농정방향의 구상: 한국농촌경제의 기본문제와 대책, 정책협의회 시리즈 6, 1981.

9) 첫 쌀 수입 당시와 지금은?-이병기 전 농림수산부 차관 < 기획 < 기획 < 농업 < 기사본문 - 농수축산신문 (aflnews.co.kr), 2006.5.22

10) 아웅산 묘역 테러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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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5월25일 16시30분
  • 최종수정 2023년05월25일 11시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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