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미신에 빠지고서도 망하지 않은 한(漢) 무제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6년10월31일 17시18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2

본문

 

1. 한 무제 생모 왕지(王娡)의 어머니 장아(臧兒)가 점을 보다. 

 

한 무제(유철, BC157-BC87)의 생모는 왕지라는 사람이다. 연왕 장도의 손녀 장아는 첫 남편 왕중에게 아들 한 명과 두 딸을 낳았는데 양지가 큰 딸이고 둘째 딸은 왕식후다. 장아의 친 할아버지 장도는 진(秦)나라 장수로써 진의 봉국 연나라(북경부근)의 왕이었는데 항우가 연왕으로 한광을 봉하자 쿠테타를 일으켜 한광을 죽이고 연왕이 되었던 사람이다.(BC205년) 그 후 한나라가 일어나서 전국을 통일했을 때 장도는 북경에서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직접 정벌에 나선 유방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었다. 그러니까 장아는 몰락한 진(秦)나라의 벌족가문이었던 셈이다. 남편 왕중이 죽자 장아는 전(田)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전분과 정승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큰 딸 왕지(王娡)는 금왕손이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금속을 낳았다.

 

 한 문제(재위 BC180-BC157) 당시 장아는 딸과 그 아들 금속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가 궁금해서 점쟁이를 불러 점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점쟁이는 금속이 아니라 왕지와 왕식후가 크게 될 것이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깜짝 놀란 장아는 딸 왕지를 사위 금왕손으로 부터 빼앗아 황태자(유계, 한 경제, 재위 BC157-BC141)궁궐로 들여보냈다. 물론 금왕손은 거부했지만 이미 왕지가 황태자 궁궐로 들어가 황태자의 총애를 받고 아들 유철을 낳게 된 다음에야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이 유철이 한 무제(재위 BC141-BC87)다.

 

2. 한 무제 생모 왕지의 태양을 품는 태몽(BC157) 

 

양지는 태자궁으로 들어와 태자의 사랑을 받아 아이를 가졌는데 이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어 그 아이를 매우 소중히 생각하였다. 이 아이가 경제의 열 번째 아들 유철이고 나중에 한 무제가 된다.(BC157) 

 

 

3. 황태자 유영(劉榮)을 제치고 황태자가 되는 한 무제 유철(劉徹)(BC 150)

  

한나라 경제에게는 태자시절 결혼한 첫 번째 황후 박황후가 있었지만 아이가 없었으므로 한나라 경제의 애첩 율희(栗姬)에게서 난 장자 유영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었다.(BC153) 한 경제에게는 누나 장공주 유표가 있었는데 장공주 유표는 동생 경제에게 온갖 어린 미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한 경제의 애첩 율희가 이를 싫어했다. 그런데 장공주 유표는 남편 진오와 사이에서 낳은 딸을 율희의 아들, 즉 황태자 유영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는데 사이가 좋지 않은 율희가 이를 극구 반대하므로 일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화가 난 장공주 유표는 유철의 생모인 왕부인 왕지에게 다가 갔고 왕지도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유철은 장공주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사촌지간의 결혼인 셈이다.(BC150) 

 

한나라 경제의 환심을 사고 있던 장공주는 지속적으로 율희에 관한 험담을 경제에게 늘어 놓으면서 왕부인의 미모와 지혜를 치켜세웠다. 경제도 왕부인의 미모와 지혜 겸비함을 느끼고 차츰 율희를 멀리하게 되었다. 율희에 대한 황제의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확인한 왕부인은 결정적인 계략을 실행에 옮긴다. 대행(황궁예절담당관)을 시켜 황제에게 폐위된(BC151년 9월) 박황후 자리에 율희를 황후로 승격시켜야 한다고 주청을 올리게 한 것이다. 격노한 경제는 그 자리에서 대행을 주살했다. 경제는 곧바로 율희가 낳은 황태자 유영을 폐위시켜 버렸다.(BC150년 11월23일) 유영의 태자태부 두영이 힘껏 반대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율희는 화병으로 곧 죽었다. 유영은 사소한 잘못으로 탄핵을 받았고 결국 자결을 택하게 된다.(BC148년3월) 한 경제는 다섯 달 뒤인 4월 17일 왕지를 황후로 올려 세웠고 보름 뒤 그의 아들 유철을 황태자로 세웠다.(BC150년 4월29일)  

 

 

4. 황제가 되어 미신을 좇은 한 무제

 

한 경제가 미앙궁에서 사망하자 황태자 유철이 16세의 나이로 제위를 계승했다.(BC141년1월27일) 한 무제 유철은 71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55년이라는 한나라 역사상 최장기 집권한 사람인데 그는 사냥과 전쟁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미신을 매우 신봉하기로 유명한 황제였다.

 

 

<1> 이소군(李少君)의 방술에 빠진 한 무제(BC133, 24세)

 

원래 이소군은 심택후라는 사람의 심부름꾼이었다. 심택후라는 사람은 한 고조 유방의 공신 중의 한 사람인 조장석이라는 사람인데 그 손자가 죄를 지어 작위가 박탈되었다. 이소군은 나이와 생장과정과 신분을 모두 숨긴 채 방술(方術, 즉 요술)을 가지고 여러 제후들과 지역유지와 교류하였는데 그의 방술이라는 것은 부엌 신(竈)에게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가려 먹으면 늙지 않을 수가 있으며 기교한 물건(鬼物)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유혹했다. 소문이 퍼져 나가자 그의 음식처방과 귀물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와 그에게 재물을 주었으므로 뚜렷한 직업이 없이도 항상 넉넉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자치통감에서는 ‘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몰랐으므로 더욱 그를 믿었고 다투어 섬겼다(不知其何所人 愈信争事之, 권18, BC133)’고 했다.

 

이소군은 무엇이든지 잘 알아내는 신통력으로 유명했다. 일찍이 무안후 전분(한 무제 생모양지의 동복이부 형. 한 무제의 외숙)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아흔 살 한 노인에게 이소군이 다가가서는 그 노인이 할아버지와 어렸을 때 사냥하던 곳과 따라다녔던 곳을 알아내어 주변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동복외숙 전분이 전하는 이소군의 신통력의 말을 들은 한 무제는 의심할 수가 없어서 이소군을 불러 그에게 방술을 물었다. 

이소군이 대답했다. 

“부엌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물질을 다룰 수가 있게 되고 물질을 다룰 수 있게 되면 모래를 가지고 금을 만들 수 있고 수명도 늘일 수가 있으며 봉래선인도 만나 볼 수가 있습니다. 봉래선인을 만나셔서 제사를 드리시면 죽지 않게 되시니 바로 전설 속의 황제(黃帝)가 되시는 것입니다.(祠灶则致物,致物而丹沙可化为黄金,寿可益,蓬莱仙者可见;见之,以封禅则不死,黄帝是也) 제가 바다를 떠돌다가 안기생이라는 사람이 저에게 대추 같은 것을 주기에 먹었는데 크기가 오이정도는 되었습니다. 안기생은 신선으로서 봉래를 드나드는 사람인데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끼면 숨어버리므로 만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臣尝游海上,见安期生,食臣枣,大如瓜。安期生仙者,通蓬莱中,合则见人,不合则隐)” 

 

이 말을 들은 한 무제는 곧바로 부엌 신(灶=竈,조)에게 제사를 올렸고 방술하는 사람을 봉래산으로 보내 신선 안기생을 찾도록 했으며 모래를 가지고 금을 만드는 작업을 재촉했다. 한참 지나 이소군이 병으로 죽었으나 한 무제는 그의 몸이 형체가 변했을 뿐 죽지 않았다고 믿었다. 한 무제가 방술에 빠져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연나라와 제나라 해안지역의 수 없는 방사들이 황제를 찾아와 뵙기를 청하였다.(BC133)

 

<2> 제(齊)나라 사람 소옹(少翁)(BC119, 38세) 

 

제나라 출신 소옹이 귀신을 부르는 일을 잘하여 그것으로 황제를 알현할 수가 있었다. 한 무제는 유굉의 생모인 왕부인을 몹시 사랑했는데 그가 죽자 몹시 애통하고 있었다. 소옹은 주술과 술법을 통해 죽은 왕부인의 귀신을 불러낸다고 했는데 휘장을 드리워 놓고서 주술을 외우면서 왕부인 모습을 한 사람의 그림자를 휘장에 보이게 하여 한 무제를 기망했다. 

 

481d152d966ef26962bedf76cf4e17c4_1477901
 

기망술인 줄을 몰랐던 한 무제는 감격하여 소옹에게 문성장군이라는 직책과 함께 큰 상을 내렸다. 문성장군은 황제에게 감천궁(甘天宮)을 짓도록 강요했으며 그 안에 높은 대와 방을 만들고 방마다 천, 지, 신, 태일(북극성)의 그림을 그려 신이 내리도록 빌었으며 참배하도록 했다.

소옹은 그 궁에서 1년 여 살았는데 사람들이 점점 의심하기 시작했다. 소옹은 비단에 글자를 쓴 다음 소에게 먹이고서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 이 소가 심상치 않습니다. 뱃속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소를 죽여서 배를 갈라보니 비단에 해괴한 말들이 쓰여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황제가 국문한 결과 소옹의 소행인 것을 알아 낸 황제는 소옹을 죽여 버리고 그 사실 모두를 은폐했다.(BC119)    

 

<3> 방술사 난대(BC111, 46세)

 

낙성후 정의가 한 무제에게 문성장군과 같은 스승 밑에서 배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방술사 난대(欒大)를 소개했다. 한 무제는 방술사 문성장군 소옹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난대를 만난 것을 매우 기뻐하고 귀하게 그를 대우했다. 난대란 사람은 전에 산동성에 있는 교동왕 유기를 섬겼는데 아름다운 말로 사람의 환심을 사기를 잘 하였고 때로는 큰 소리를 치기도 하면서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냈다.

 난대가 이렇게 말했다.

 “ 신이 바다 한가운데를 드나들면서 안기라든가 선문(모두 신선의 이름)과 같은 사람들을 자주 보았는데 저를 보고 신의 직급이 너무 낮다고 신을 홀대했으며 제가 모시던 교동왕 조차도 제후일 뿐이라서 상대하기 부끄럽다고 했습니다.(황제 정도는 되어야 만나준다는 것을 암시) 스승께서 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황금을 만들 수 있으며 황하가 갈라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불사약도 얻을 수가 있으며 신선도 오시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전에 문성장군이 죽게 되자 모든 방사들이 입을 다물고 두려워하는데 쩌 또한 함부로 비법의 처방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 무제가 말했다. 

“문성장군은 말의 간을 잘못 먹어 죽은 것이지 내가 죽인 것이 아니다. 또 그대가 진실한 비방을 말한다면 내가 무엇을 아끼겠느냐?” 

난대가 말했다.

 “신의 스승은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를 찾으려고 난리들입니다. 그가 보낸 사자를 귀하게 대하시고 친속이 되게 하시며 두툼한 친인척에 대한 예로 대하시면 반드시 입을 열 것입니다.”

 

 한 무제가 난대를 시험하기 위해 깃발 수 백매를 세워놓고 서로 공격하라고 말하자 깃발들이 서로 스스로 부딪치며 공격을 해대다가 10여 미터나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놀랐고 한 무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무제는 난대에게 오리장군이라는 벼슬을 주고 또 천사장군, 지사장군, 대통장군이라는 벼슬을 내려 주었다. 곧바로 낙통후라는 작위와 함께 식읍 2천호를 내렸으며 동복 1천명, 황제가 쓰던 거마와 휘장과 기물을 보냈다. 자신의 딸 위장공주를 처로 삼게 했으며 황금 10만 근을 싸서 주었고 황제가 직접 그의 집에 가기도 하였으며 하사하는 물건들을 옮기는 가마들이 길을 가득 메웠다고 기록되어있다.

 

 황제의 고모 두태주와 모든 장군, 승상 이하 관료들이 난대의 집에서 연회를 열었으며 선물을 보냈다. 황제는 천도장군이라는 칭호를 새겨 패용했는데 난대는 오리장군이라는 칭호를 새겨 패용하여 신하가 아닌 황제와 동격임을 과시했다. 난대는 황제를 알현하고 나서 몇 달 만에 여섯 개의 인장을 지니게 되니 존귀함은 천하를 진동했다. 전국의 방술사들이 그 소문을 듣고 고무되어 스스로 신선이 되는 비술을 가지고 있다고 선전하기 시작했다.(BC113) 약 2년 뒤 오리장군 난대가 행장을 갖추고 동쪽 바다로 나가 스승 신선을 뵙는다고 했다. 바닷가에 도달한 난대는 바다로 들어가지는 않고서 길을 돌려 태산에 있는 사당으로 갔다. 황제가 수행시킨 사자가 은밀하게 보니 신선을 만나지도 않고 길을 바로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난대는 황제에게 신선을 직접 만났다고 하면서 거짓술수를 부렸다. 난대의 술수가 효험이 전혀 없자 황제는 난대를 무망죄로 요참했다. 난대를 소개한 낙성후도 기시했다.(BC111)

 

 

<4> 봉래신인(蓬萊神人) 수색과 공손경(BC110, 47세)

 

황제가 하남성 중악(崇山)에 행차했을 때였다.(BC110년 1월) 따라갔던 신하들이 모두 산에서 “만세(萬世)”소리를 세 번 들었다. 황제는 태실사당을 크게 중축하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동쪽 바다로 향했다. 바다로 나아가 여덟 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신 같은 방술을 하는 자가 만 명이 넘습니다.“라고 보고하자 황제는 더욱 고무되어 배를 더욱 많이 동원하여 바다로 내보내 봉래신인(신선)을 찾도록 하였다. 

공손경이라는 사람은 황제의 부절을 지니고서 항상 먼저 명산에 가서 신선을 기다렸는데 동래에 이르러 이렇게 황제에게 보고했다. 

” 밤에 큰 사람을 보았습니다. 키는 여러 장(丈)이 되었으나 그곳에 다가서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나 간 흔적은 큰 맹수 같았습니다.“ 

여러 신하도 이렇게 말했다.

 ”한 노인이 개를 끌고 지나가면서 ‘나는 거공을 만나려고 간다.‘고 하더니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황제는 공손경이 가리킨 큰 흔적을 직접 보았으나 믿지는 못했다. 다만 여러 신하가 보았다는 한 노인은 분명히 신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닷가에 유숙하면서 천여 명의 방사에게 수레와 가마를 모내 신선을 찾게 하였다.(BC110)  

  

<5> 명신 동방삭의 권고(BC110, 47세)

 

한 무제는 미신에 깊숙이 빠져 들었다. 여러 산에다 제단을 설치하여 때를 맞추어 제사를 올렸으며 수시로 동쪽 바다로 나아가 신선을 찾아 만나려고 노력했다. 동방삭이 나서서 말렸다.

“ 무릇 신선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이지 억지로 만나자고 한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니니 조급하실 것이 없습니다. 만약 신선을 만나는 길이 있다면 못 만날 이유가 없고 또 길이 없다면 봉래산에 가서 신선을 보시려고 한들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황궁으로 돌아가시어 조용히 기다리시면 장차 선인이 반드시 스스로 올 것입니다.”

황제가 마침내 신선 찾기를 그만 두었다. 간간이 신선에 대한 방사들의 경험담을 듣기도 하고 또 마음 속 깊이 신인을 만나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BC98) 명산을 행차(BC93)하기는 하였으나 BC87년 죽을 때까지 과거와 같은 미혹됨은 보이지 않았다.     

 

    

5. 한 무제에 대한 평가 : 미신신봉에도 불구하고 한이 망하지 않은 이유

 

한 무제는 BC87년 1월 14일 죽었다. 죽기 며칠 전 황제가 곽광을 침전에 불렀다. 곽광이 울며 누구를 후사로 해야 할지를 물었다. 황제가 말했다. 

“ 내가 전에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지 않았소. 나이는 어리지만 유불릉을 세우고 그대가 주공 단의 역할로 보필하시오.” 

곽광이 울며 말했다 

“ 소신은 금일제만 못합니다.” 

금일제가 나서서 말했다. 

“ 저는 외국인(흉노족)이므로 곽광만 못합니다. 또 흉노가 우리를 가볍게 볼 것입니다.” 

황제가 죽고 여덟 살 유불릉이 황제가 되었다. 이 사람이 7년 재위한 소제다. 한 무제는 나라를 곽광, 금일제, 상관걸 이 세 사람에게 맡겼다. 

 

미신에 누구보다 깊이 빠졌었고 또 임기 내내 큰 전쟁을 일으켰지만 무제의 한 나라는 망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았다. 왜 그럴까. 자치통감은 한 무제가 첫째로 총명하여 용단을 잘 내렸고(聰明能斷) 둘째로, 사람을 잘 골라 썼으며(善用人), 셋째로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용서하거나 관용함이 없었다(無所假貸)고 했다. 여동생(융려공주)의 아들 소평군이 죽을 죄를 짓게 되자 한 무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동생이 죽으면서 늦게 본 아들을 내게 간곡히 부탁했었다. 그러나 법이란 먼저 계신 황제들께서 만드신 것인데 동생이라고 해서 속여서 적용한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의 묘당에 들어가겠느냐. 또 아래로 만백성들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한 무제는 법대로 처형하게 하고서는 눈물을 가눌 수가 없었다.(BC87)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는 이렇게 무제를 칭찬했다. 

“ 효무제가 처음 즉위하여서는 백가의 학설을 폐지시키고 오로지 유가와 육경의 학설을 받들었으며 누구라도 지혜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등용했고 태학(대학)을 일으켰으며 제사법을 가다듬고 신년의 기원(정삭)을 10월에서 1월로 고쳤으며 역법, 시와 음악을 고르게 하였고 많은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마치 한, 은 주 삼대의 기풍을 보는 듯하였다. 다만 무제의 영웅적 재능과 지략이 한 문제와 한 경제의 공손하고 절검한 정책과 더해졌다면 비록 시경이나 서경에 있는 전설과 같은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의 한 무제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다. 

“한 무제는 끝까지 사치하고 욕심을 부렸으며 번거로운 형벌과 과도한 세금을 거두었고 궁궐을 호화롭게 꾸몄다. 나아가 밖으로 수 없는 전쟁을 일으켰고 신의 괴이함을 믿어 전국을 정신없이 순유하였다. 도적이 창궐했고 백성의생활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는 진시황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진(秦)은 망하고 한(漢)은 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로 선황의 법도를 그대로 지켜 바꾸지를 않았고, 둘째로 국가기강을 붙들어 나라를 통제하고 지킬 줄을 알았으며, 셋째로 충직한 사람의 말을 믿고 받아 들였으며, 넷째로 간사한 사람의 속이는 말을 멀리 하였고 현명한 사람을 찾아 좋아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다섯째로 상벌이 공평하고 분명하였으며, 여섯째로 만년에 허물을 고치고 후사를 돌보며 후계자를 올바른 사람에게 부탁했다는 점이다. 진과 같은 실수를 하고서도 진의 멸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BC87)” <ifs POST>​ 

42
  • 기사입력 2016년10월31일 17시18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