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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 흥망의 교훈:#5F 졸지에 건국하고 망해버린 전조(6)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6월22일 16시5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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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9> 충신 유자원의 설득에 귀 기우린 유요(AD320년)

 

전조의 지방장수 해호와 윤차가 파(파,지금의 중경)지역 토호 구서와 사팽 등과 연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사건이 발각되어 해호와 윤차는 모두 죽었고 구서 등 연루자 50여 명을 옥에 가두었다. 이들을 장차 죽일 참이었는데 광록대부 유자원이 나서서 번대했다.

 

“ 성스러운 왕은 형벌을 내릴 때

  오직 으뜸가는 악한사람을 죽일 뿐입니다.

  많이 죽여서는 안 됩니다.“

   

머리를 땅에 대고 간곡하게 청원을 하는 바람에 유자원의 이마에는 피가 흘렀다. 유요는 유자원이 반란 세력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자원을 투옥했다. 계획대로 구서와 사팽 무리를 효수하고 10일 동안 내버려 둔 다음에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유요의 잔학함에 분노한 파(巴)지역 사람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추장 구거지를 옹립하여 주군으로 삼고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했으며 유요의 조를 평정한다는 뜻에서 연호마저 평조(平趙)라고 불렀다. 

 

유요는 반항하는 파지역에 대해 강공책을 쓸 생각이었다. 감옥에 있던 유자원은 황제에게 편지를 썼다.  

 

“ 폐하께서 진실로 제 계책을 쓰시면 

  한 달이면 안정됩니다.

  대가(황제)게서 손수 군대를 이끌고 정벌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요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그를 불러내어 그 계책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유자원의 계책은 이러했다.

 

“ 저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페하께서 잔혹하게 죽음을 내리시니 겁이 나서 반항하는 것입니다.

  일단 대사면령을 내리셔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과거 생업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장해 주십시오.

  그러고도 수그러들지 않고 반항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가 5천의 군사를 가지고 발본색원하겠습니다.

  만약 군사의 힘만으로 산골짜기를 까맣게 덮고 있는 저들을 굴복시키려고 하신다면

  아마 하늘같은 위력을 가지고도 오랫동안

  정복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

 

유요가 그의 말을 믿고 대사면령을 내리고 유자원을 거기장군 및 도독옹진정토제군사로 임명하였다. 유자원이 옹성(섬서성 봉상현)에 도착할 즈음 항복한 자들은 10만 명을 넘어섰고 안정에 진을 칠 때가 되자 거의 모든 반란군이 유자원에게 항복했다. 유요는 유자원의 능력을 감탄했다.  

 

 

<30> 유요의 충신 교예와 화포(AD320)

 

시중 교예와 화포가 상소문을 올려 간언했다.

 

“ 지금 조서를 받들고 풍명관을 짓고 있는데 들으니

  모든 백성들이 그것의 사치함을 비난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 건물 하나 짓는 돈이면 양주(凉州)를 전부 평정하고도 남을 돈이다.’

  또 지금 아방궁을 모방하여 서궁을 짓고

  경대를 흉내 내 능소대를 짓고 있으니

  그 비용은 풍명대 보다 더 들것이므로

  그 돈이면 오와 촉을 병합할 수 있고 

  제와 위를 합칠 수가 있는 돈입니다.

  또 수릉(壽陵)을 건축하는데 주위를 40리로 만들고 

  깊이를 35장이나 판다는데

  이 비용이라면 아마 국내 돈으로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진시황 무덤을 건축하느라고 삼천을 막았지만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진이 망하고 능리 파헤쳐지지 않았습니까.

  예로부터 망하지 않은 나라와 파헤쳐지지 않은 무덤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성스러운 임금은 검소하게 장사를 치러 

  먼 장래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몸소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중흥하는 나라를 다시 망하는 길로 인도하시려 합니까? “

 

유요는 감격했다. 조서를 내려서 이렇게 명령했다.

 

“ 두 분 시중의 말이 이토록 간곡하니

  옛 충신의 기풍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사직을 지키는 정신이 살아있구나.

  궁실 건축을 즉각 중단하고

  수릉건축도 최대한 축소하여 한문제 유항의 패릉과 같이 검소하게 하라.

  교예는 안창자, 화포는 평여자로 책봉하여 

  나란히 간의대부의 직책을 수여하니  

  천하에 선포하여 우리 전조 조정은 

  허물을 즐거이 듣는 다는 것을 알게 하라.“ 

 

 

 

<31> 유요의 태자 책봉(AD323)

 

유요의 큰 아들은 유검(儉)이고 둘째는 유윤(胤)이다. 유윤은 열 살 때 이미 키가 7척이 넘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비상하다고 생각한 유총은 예전에 유요의 후계 자리를 유윤에게 물려주라고 했다. 그 때 유요가 유총에게 말했다.

 

“ 번국의 후계란 제사만 잘 지내면 됩니다.

  장유유서의 질서를 어지럽힐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총은 유윤에게 유요의 나라를 계승하도록 명령했다. 근준의 반란(AD318년)이 일어났을 때 유윤은 흉노족에 인질로 사로잡혀 있었는데 유요가 황위에 오르게 되자 풀려나오게 되었다. 이미 태자로 책봉된 유희와 아버지에게 돌아온 유윤을 두고 태자계승의 문제가 불거졌다. 유요는 유윤으로 바꾸고 싶었다. 유윤이 장성하기도 했고 무예도 깊었던 반면 유희는 나이도 어리고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태부 호연안 등 모두가 유윤으로의 교체에 찬성이었다. 좌광록대부 복태와 태자태보 한광이 반대했다. 태자가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고 어질므로 폐위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유요가 어찌 할 바를 몰라 우물거리고 잇을 때 당사자 유윤이 나서서 말했다. 

 

“ 아버지께서 여러 아들을 사랑하심은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갑자기 유희를 폐출하고 신을 세우신다면

  신이 어찌 마음 편하겠습니까.

  폐하께서 생각하시기에 신이 국사를 감내할 수 있다고 판단하신다면

  어찌 저로 하여금 유희를 도와서 대업을 충실히 계승하도록 해 주지 않으십니까?  

  반드시 저로 대통을 이으라고 하시면

  여기서 목숨을 바칠지언정 폐하의 명령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유윤은 목을 놓아 울었다. 유요는 물론 온 조정이 유윤의 충성과 우애에 감동했다. 유요는 유윤의 생모인 죽은 복씨의 시호를 원도황후로 올리고 유윤에게는 영안왕, 시중 및 도독이궁금위제군사의 직책을 수여했다. 유요와 유희의 두 궁을 호위하는 최고 책임자 자리다. 

 

 

<32> 유요의 성고관(호뢰관) 전투(1차 전-후조 전쟁) 패배와 와병(AD325)

 

유요의 전조가 동쪽의 강력한 석륵의 후조에 막혀 오로지 서쪽(지금의 감숙성)으로 영토를 확장하려고 하는 동안 석륵은 무서운 기세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 남쪽으로는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한 동진의 서주(안휘성)지역 영토를 침략했고 북쪽으로는 요동지역을 놓고 우문걸득귀 및 모용외와 다투었다. 이제 전조와 후조의 마찰은 불가피해졌다. 두 나라군대의 접촉점은 지금의 낙양 부근인 호뢰관이었다. 당시 낙양은 석륵의 부하 석생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조 유요는 유악과 1만5천 군사를 보내 동쪽으로 진군시켜 맹진(하남성 맹진현. 낙양 북쪽)에 도달한 뒤 석생의 낙양을 포위했다. 

 

석호는 4만 군사를 보내 석생을 지원했다. 석호의 군대는 압도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유악의군대를 성고관(하남성 호뢰관)에서 유악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유요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군사들이 야략(夜掠,알 수없는 야간공포감)에 휩싸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석호는 의기양양 낙양을 점령하였으며 사로잡힌 전조 장수 유악 등 80여 명은 형태로 압송 되었다. 석륵은 장안 지역을 제외한 황하 이북의 거의 모두를 장악하게 되었다. 전조 내부에서도 후조에게 귀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장안으로 돌아 온 유요는 소복을 입고 교외에 나가 7일 동안 곡을 하다가 돌아왔다. 그의 분노가 병이 되었다.

 

유요는 영안왕 유윤을 대사마, 대선우 남양왕으로 고쳐 책봉하고 모든 관직은 호족, 갈족, 선비족, 저족, 및 강족의 이민족 만 임명했다. 그것은 아마도 호뢰관 전투에서의 패전이 한족 관리들의 무능함과 나태함, 그리고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움직임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3> 유요가 아끼던 부인 유후의 와병(AD326)

 

유요가 가장 아끼던 유황후가 병이 들었다. 유요는 유황후에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유황후가 대답했다. 

 

“ 첩은 어려서부터 숙부 유창에게 양육되었습니다.

  폐하께서 그들을 귀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숙부의 딸 유방은 덕과 함께 미색을 갖추었으니

  바라기는 후궁으로 들여 와 주십시오.“

 

말을 마치고 곧바로 유황후가 죽었다. 슬픔에 빠진 유요는 유황후의 숙부 유창을 시중 대사도 녹상서사로 삼고 유방을 세워서 황후로 임명하였다. 

 

 

<34> 석호의 전조 공략(2차 전-후조 전쟁) 실패(AD328)

 

유요를 호뢰관에서 격파한 후조의 중산공 석호는 4만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전조의 영토를 넘보았다. 지관(하남성 제원)에서 출발하여 하동(산서성 하현)을 공격하고 나가서 포판(산서성 영제)까지 나아갔다. 이제 장안까지 거리는 200KM가 안 남았다. 석호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면 모든 것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한 유요는 선제적으로 유술을 보내 군대를 먼저 황하를 건너게 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유요가 먼저 선공을 하고 넘어오자 석호는 놀라서 퇴각했다. 유요는 도망가는 석호의 군대를 끝까지 쫓아갔다. 이미 3년 전 뺏긴 낙양부근까지 쫓아간 유요는 낙양을 포위함과 동시에 군대를 사방으로 풀어서 지금의 정주시 부근인 심양, 형양, 급현을 공략하도록 했다. 유요는 3년 전 잃어버린 국토를 다 회복했다.     

 

 

<35> 석호의 복수와 성고관(호뢰관) 전투(3차 전-후조 전쟁) 승리(AD328년 11월)

 

점령했던 낙양을 다시 유요에게 뺏긴 석륵은 낙양을 다시 탈환할 생각이었다. 정하가 반대하고 나섰다.

 

“ 유요가 군사를 천리 가까이 벌여 놓았으니

  가만 두어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왕은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움직이시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석륵은 정하를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패장 서광에게 물었다.

 

“ 유요는 분명히 지금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

  모두들 그가 승세를 타니 예봉을 피하자고 하는데

  갑옷 정병 10만을 가지고 포위하고서도

  100일이 지나도록 함락을 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군사는 늘고 게으른 것이 분명하다.

  내가 정예병을 가지고 공략하면 한 번에 격퇴가 가능하다.

  지금 낙양을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양국(후조의 수도)이 위태로워 질 것이고 

  황하 북쪽에서부터 자리를 밀 듯 밀려 내려오면

  내 할 일은 구름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정하는 공격을 반대하고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 

 

서광이 웅크리며 말했다.

 

“ 유요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석륵이 서광을 칭찬하며 말했다.

 

“ 자네의 말이 옳다.”

 

석륵은 전쟁에 반대하는 자들의 목을 즉각 베어 버리고 군대를 규합했다. 석감, 석총, 도표 등의군사를 모두 형양 부근에 모았다. 중산공 석호에게 석문을 지키라고 하고 석륵 본인은 4만 군사를 이끌고 유요가 점령하고 있는 낙양 금용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부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약 유요가 성고관에 많은 군사를 집결시켜 놓았으면 우리로는 하책이고,

  낙수를 막고 있으면 중책이며,

  낙양을 지키고 있으면 상책이다. 들어가서 사로잡으면 끝이다.“

 

석륵의 후조군사가 성고관에 집결했다. 보병 6만에 기병 2만 7천의 대군이었다. 유요는 낙수에 집결해 있었다. 유요의 군대는 10만 이었다. 석륵은 웃음을 띠며 축하할 만 하다고 중얼거리며 큰 저항 없이 낙양으로 입성했다. 이렇게 해서 낙양성은 쉽게 탈환되었다. 석륵의 군사와 유요의 군사는 낙수를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이 때 유요는 술에 취해 있었다. 젊어서도 술을 좋아 했지만 말년에 가서는 더욱 심해졌다. 전쟁을 앞두고도 몇 말씩 술을 들었다. 말에 올라타고도 술에 취해 고개를 숙이기 일쑤가 되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말을 아예 조랑말로 바꾸어 버렸다. 

 

석감의 공격을 받은 전조의 군사들이 퇴각하면서 술에 취한 유요는 달아나다 말이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떨어졌고 10여군데 칼과 창을 맞은 뒤 석감에게 사로잡혔다. 전조의 군사는 대패했다. 석륵이 명령을 내렸다.

 

“ 잡고자 하는 사람을 잡았으니 

  적군이 도망가게 내버려두라. “ 

 

유요가 석륵을 보자 말했다.

 

“ 석왕은 중문에서의 맹세(重門之盟, 하남성 휘현의 북문)를 기억하시오?”

 

중문에서의 맹세란 18년 전 유총과 유요와 석륵이 서진 태수 배정을 포위하면서 맺은 우호의 맹세를 말한다. 

 

석륵은 서광을 시켜 유요에게 말 하였다.

 

“ 오늘의 일은 하늘이 만든 것이오.

  다시 옛 일을 말해 무엇 하겠소.“

 

석륵은 유요를 다그쳐 빨리 항복하라는 편지를 아들 유희에게 띄울 것을 재촉했다. 유요는 유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와 사직을 바꿀 생각을 하지마라.”

   

석륵은 이마를 찌푸리며 화를 냈다. 한 참 지나서 유여를 처단했다.(AD328년12월)

 

 

<36> 전조 태자 유희의 도망(AD329년 1월)

 

낙양이 석륵에게 점령되고 아버지 유요가 잡혀 죽자 태자 유희는 남양왕 유윤과 함께 당장 서쪽, 즉 지금의 감숙성 방향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상서 호훈이 말리며 나섰다.

 

“ 비록 주군을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국의 강토는 건재하고

  장수와 병사들 또한 배반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땅히 힘을 합하여 막을 생각을 않고 먼저 도망갈 생각부터 하십니까?

  힘으로 막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때 도망을 생각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   

 

남양왕 유윤은 호훈이 자신을 막아서는 것에 분함을 느끼고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전조의 백관을 이끌고 상규(감숙성 천수)로 달아났다. 조정이 떠나버린 전조의 도읍지 장안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몇 몇 잔당들이 장안을 점거하다가 결국 석륵에게 모두 투항하고 말았다.

 

 

<37> 전조(前趙)의 최후 : 태자 유희와 남양왕 유윤의 죽음(AD329년 9월)

 

남양왕 유윤은 수 만 군사를 이끌고 천수를 나와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AD329년8월)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살고 있던 여러 이민족들이 모두 유윤에게 호응했다. 군사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유윤군은 서안 북쪽 50KM 지점인 중교(섬서성 예천)까지 도달했다. 석륵 휘하 석생은 굳게 성문을 닫아걸고 방어에 치중했다. 석륵의 부하 중산공 석호가 2만 군사로 지원을 오고 있었다.

 

9월 석호의 군사가 의거(감숙성 영현)에서 유윤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일격을 당한 유윤군사는 황급히 상규(천수)로 도망쳤다. 석호는 끝까지 뒤를 쫓아 결국 태자 유희, 남양왕 유윤, 그리고 공경 이하 3천여 명을 체포하여 모두 살해하고 유민 9천 명을 수도 양국(산서성 임분)으로 압송했으며 여러 지역에 흩어 져 살고 있는 흉노무리 5천여 명을 낙양까지 끌고 와 거기서 산 채로 묻어 버렸다. 이로써 AD304년 선비족 유연에 의해 건국된 전조는 25년 만인 AD329년 9월 같은 선비족 석륵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38> 전조(前趙)의 멸망 이유

 

유요의 전조는 건국한 지 11년 만에 망했다. 오호십육국 중에서 서연(AD384-AD394)의 10년다음으로 가장 빨리 망한 나라에 속한다. 석륵과 왕미와 같은 강력한 장수들을 수하에 두고서도 건국한지 10여 년 만에 망해 버린 직접적인 원인은 물론 AD318년 성고관(호뢰관)전투(3차 전-후조 전쟁)에서의 패배였다. 이 전쟁에서 주군 유요가 전사한 것이 전조 멸망의 결정타였던 것은 분명하다. 유총에게 복속했던 석륵을 유요가 포용하지 못하고 서로 대립하여결국 석륵에게 패망한 것은 유요의 통합실패라고 봐야 한다.   

 

낙양에서 유요가 패사한 직후 태자 유화와 남양와 유윤이 후조와 대항하지 않고 쉽게 장안을 버린 것도 결정적인 패착이고 멸망의 원인이다. 끝까지 맞서 보자고 한 상서 호훈의 목을 치고 서둘러 장안을 버리고 천수로 도망간 것도 태자 유화와 유윤의 어리석음이다. 그런 점에서 유요는 후계자 선택에 실패한 셈이다.

 

전조의 유요는 유총 못지않은 개인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항상 술에 중독되어 살았고 유총처럼 여색에 빠져 있었다. 유총에게는 그래도 현명한 유황후가 있었지만 유요는 그런 행운도 따르지 않았다. 다행한 것은 그래도 유자원, 교예와 화포 같은 충신들이 유요의 곁에 있었던 것이 그나마 전조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또한 술에 빠져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지도자, 무능한 후계자, 그리고 주변의 막강한 경쟁세력의 존재는 전조를 가장 빠르게 멸망시킨 근본원인이 아닐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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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7년06월22일 16시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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