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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열여섯 번째 이야기 상식의 늪에서 ‘마음’ 건지기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0월07일 18시14분
  • 최종수정 2017년12월08일 14시05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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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수행처에 오는 사람들은 어떤 인간관을 갖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윤회를 믿지만 죽음 후 모든 것이 사라지며 개인의 세상은 끝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의외로 많다. 이런 생각을 가진 수행자들에게 수행처에 온 목적을 물으면, ‘살아있을 때 잘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런가하면 마음은 몸과 아무런 연관 없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 수행자도 이따금 있다. 이들은 살아서는 마음이 몸과 연관을 맺지만 죽으면 몸을 떠나 독립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들 가운데는 ‘참 나를 찾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참 나’ 따위는 없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이지만, 이런 인간관을 가진 수행자들은 귀담아 듣지 않는다. 붓다는 이 두 견해를 극단적인 견해, 이른바 ‘斷見’과 ‘常見’으로 경계한다. 단견은 윤회를 부정하며, 상견은 불변하는 자아를 찾는다. ‘마음’에 대한 이해는 그래서 중요하다. 불교가 ‘마음’을 어떻게 보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간은 어렵고 딱딱할지도 모를 철학적 논의를 전개해보려고 한다.   

 

  마음, 세상에서 제일 복잡한 수수께끼

  이야기의 진전을 위해 좀 머리 아픈 주제를 개괄적으로나마 다루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모든 수행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마음’이다. 떼자니아 사야도 법문집 첫 단락도 그래서 “마음이 수행합니다”가 아니던가? ‘마음’에 대한 이해는 본격적 수행의 전제가 되겠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처럼 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은 없다. 일상에서 그토록 많이 듣고 말하면서도. 마음에 대한 표현은 거의 모조리 은유적 표현이다. 이를테면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없다’, ‘마음이 시커멓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다’, ‘마음이 깨끗하다’ 등등은 모두 은유적 표현이다.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에 대한 표현을 빌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다. 마음은, 그토록 정체가 아리송해서 무엇이라고 꼭 집어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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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라는 표현조차 은유적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있는 ‘것’인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마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의 습성 때문에 문제는 더 꼬이고 복잡해진다. 사람은 개념을 통해 사고한다. 개념은 언어적인 것이다. 그러하니 많은 사변의 문제들이 언어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이런 측면을 지적한 철학적 천재가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이었다. 하지만 이 까다로운 문제는 잠시 접어두자. 수행자들은 ‘마음을 닦는다’고 말한다. 수행에 대해 언급하려면 이 은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은유적 표현에는 ‘왜’와 ‘어떻게’라는 의문사가 늘 따라다닌다. 

  그에 대한 답보다는 ‘마음’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다. ‘마음’에 대한 이해를 위해, 그것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갖고 논의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에 대한 상식을 살피는 데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마음에 대해 우리가 가진 상식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 마음은 물질과 전혀 다른 무엇이다.

▲ 마음은 물질과 다르지만 물질에서 나온 것이다.

▲ 마음과 물질은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하나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이다.

▲ 마음과 물질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등이다.

 

이제 슬슬 하나씩 곱씹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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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르트의 ‘마음’

  ‘마음’에 대한 근대적 상식은 출발은 철학자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는 나와 세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세우고 싶어 했다. 데카르트는 의심했다.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데카르트의 회의를 그래서 ‘방법적 회의’라고 말한다. 감관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것, 외부세계 이런 것들은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 어떻게 감각기관을 믿을 수 있겠는가? 늘 오류를 범하지 않는가? 외부세계도 사실상 없는 것을 나보다 우월한 어떤 존재가 내게 있는 것처럼 조작할 수 있잖은가?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지 않은가? 

  이 귀족출신의 천재 철학자가 전쟁터 막사의 난로 옆에 앉아 도달한 결론은 ‘코기토(나는 생각한다)’였다. 코기토는 확실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나’의 존재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 ‘나’가 바로 ‘마음’, 심리적 실체였다. 데카르트에게 마음이란 존재론적으로 독립적이고 인식론적으로 명확한 ‘존재’였다. 마음과 물체는 세계를 구성하는 두 단위, 두 개의 실체였다. 마음이라는 실체는 의식을 속성으로 갖는다. 사고, 감정, 의도 등은 의식의 양상이다. 데카르트는 그렇게 설명했다. 마음은 물질인 몸과 명확히 구분되는 실체이기 때문에 몸 없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데카르트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불렀다. 나는 영혼이며 잠시 몸을 빌어 이 세상을 살다 간다. 데카르트 이전에도 이런 관점은 마음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플라톤적 철학과 중세 기독교 역시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물론 아직도 이 시대에도 이런 상식을 갖고 사는 사람이 적지 않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철학은 물질과 마음의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는 데서 난관에 부딪쳤다. ‘몸이 손상되면 아픔을 느낀다’는 명제는 그의 철학체계 안에서 시원스레 설명되지 못했다. 방법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데카르트가 세우고 싶어 했던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현대 철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신화’라고 불렀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왜 신화가 되었을까? 

 

  “퍼레이드는 언제 오느냐?”는 질문의 희극성

  조크를 조크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막힌 사람이라고 한다. 반어법이나 은유를 써서 말을 했는데,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 역시 총명한 사람은 못된다. 앞서 마음에 대한 많은 표현들이 은유적 표현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데카르트가 아무리 근대수학과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듣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에 대한 견해에 관한 한 꽉 막힌 사람이라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는 물체를 모델로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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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다거나 무겁다는 건 물체의 속성이다. 하지만 마음이 검다거나 무겁다는 표현은 두 말할 것 없이 은유적 표현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생각한다는 속성을 가진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무엇’이 바로 마음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에서 생각한다는 속성이 자아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명제는 유명하지만 부당한 명제가 된다. 영국 옥스퍼드 철학자 길버트 라일은 데카르트의 이런 주장을 명쾌하게 비판했다.

  어느 마을 축제일에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악대가 지나가고 가장행렬이 지나가고... 퍼레이드가 끝났다. 그런데, 누군가 “그런데, 왜 퍼레이드는 오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퍼레이드를 마치 퍼레이드 속 하나의 행렬로 잘 못 생각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다.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는 등의 작용을 통틀어 마음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즉 마음은 여러 심리적 양상들을 뭉뚱그리는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마음’을 심리적 현상들 안에 속하는 개념으로 이해했다는 것이 라일의 비판이다. 심리적 현상들을 가리키는 말과, ‘마음’이라는 개념은 범주가 다르다는 지적이다. 마치 퍼레이드가 지나간 뒤 왜 퍼레이드는 오지 않느냐고 묻는 어린아이처럼 데카르트의 질문은 넌센스하다. 라일은 마음을 ‘무엇’이라고 이해한 데카르트의 철학을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라고 불렀다. 

 

  ‘기계 속 유령’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서부의 물자들을 동부로 실어오기 위한 철도가 건설됐다. 철로를 달리는 기차를 본 인디언들은 기차 안에 기차를 움직이게 하는 마음(유령)이 들어있다고 믿었다. 인디언들의 상식은 가히 데카르트적이었다. 데카르트에게 사람이란 기계인 몸에 깃들인 영혼이었다. 심지어 그는 사람을 제외한 동물들을 ‘자동기계’라고까지 생각했다. 사람만이 영혼을 갖는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데카르트의 이런 인간관은 무려 2백년이 넘도록 인간의 상식에 파고들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데카르트적 상식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다. 컴퓨터도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 여전히 기세등등하다니.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은 가히 세기적이었다. 온갖 물음표 세례를 이 시대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사람의 뇌처럼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면 컴퓨터도 마음을 갖게 되느냐는 물음은 대표적이었다. 컴퓨터에 마음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데카르트는 승리하는가? 

  물론 아직 이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은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철학의 절반쯤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다. 현대의 지성인들은 인간학이나 심리철학에서 데카르트의 인간관을 극복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데카르트의 인간관은 ‘기계 속 유령’으로 비판받는다. 그의 확실성 추구는 그렇게 ‘데카르트의 신화’가 되었다.

 

  심리현상의 배후에 무엇이 있을까? 

  데카르트 철학의 성격을 규정한 것은 변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었다. 불변하는 것만이 참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불변하는 것만이 영원하다는 믿음, 그것은 플라톤 이후 서양 주류 철학의 전제이고 전통이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가? 왜 세상에는 불변하는 무엇이 꼭 있어야 한단 말인가? 세상이 변하는 것들로만 구성돼 있으면 안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마음이 왜 불변하는 영혼이어야 하는가? 논의를 전개하는 본인의 방식이 무척 맘에 안 드는 분들도 계실게다. 사실 이 논의는 ‘마음’에서 상식의 색깔을 빼내기 위한 본인의 전략이다. 영혼에 대한 미련이 남는다면 발상을 한 번 뒤집어 보시길 권해드린다. 영원하다는 것, 그것이 혹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건 아닐까, 하고 데카르트적으로 회의해 보시기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영속적 삶에 대한 기대가 영혼론을 만들어냈다는 견해는 지나치게 극단적일까? “우리는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는가?”라는 원초적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마음’에 대해 살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우리가 살필 수 있는 건, 일어나고 사라지는 심적 현상 뿐이다. 심적 경험에는 불변하는 그 무엇도 없다. 변하지 않는 무엇이란 추측이나 믿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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