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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9A : 한 판 전쟁으로 망한 전진(前秦)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12월21일 17시20분
  • 최종수정 2017년12월22일 12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5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 저족(氐族)과 전진(前秦 : AD351-AD394)

 

 

AD301년 장궤에 의해 고장(감숙성 무위)에 전량(前凉)이 세워지면서 통일 서진(西晉)의 중국은 갈기갈기 찢어지기 시작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5호16국(AD304-AD439)으로의 분열이다. AD439년 북위의 세조태무제 탁발도가 북중국을 통일함으로써 약 135년 지속된 5호16국시대가 종말을 고하지만 사실상 5호16국 중국의 북쪽 절반을 가장 먼저 통일한 나라는 저족(氐族)출신의 전진(前秦:AD351-AD394)이다. 이특과 이웅이 세운 성한(成漢)이나 여광이 세운 후량이 저족이 세운 국가지만 전진만큼 강력한 국가이지는 않았다. 전진의 3대 제왕 세조 부견은 AD370년 전연을 멸망시켰고 AD376년에는 전량과 대(대: 탁발규의 북위의 전신)를 멸망시킴으로써 사실상 북중국을 통일했다. 풍전등화처럼 가물거렸던 장강이남 동진(동진)만 멸망시키면 전 중국을 통일하는 것이었다.  

  

저족(氐族)은 기원전 2세기부터 현재 칭하이 성(靑海) 주변에 거주했던 유목 민족이다. 남쪽으로는 티베트계 강족(羌族)이 있었고 북쪽과 동쪽에는 흉노족이 살고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아랍계 유목민들에 둘러싸였다. 당연히 저족은 단일민족으로 보기 어렵다. 서융전(西戎傳)에 따르면 그들 복장 색깔이 벌레 색깔과 같아서 저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저족은 양을 숭배하는 티베트계 강족과는 확실히 다른 종족임에 틀림없다. 후한 말 혼란기에 저족 추장 아귀(阿貴)와 양천만(楊千萬)이 조조를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나 하후연에게 패하여 서남쪽으로 달아나 촉(蜀)에 망명하였다. 이들을 파저(巴氐)라고 부르기도 했다. 남은 저족의 부락민들은 모두 조조에게 항복했고 이후 부풍, 천수 등 변경지역에 분산 이주시켰다. 그 후 저족은 한족과 동화되었다. 독실한 불교 숭상국이었던 전진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AD372년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최초로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2) 유총의 회유를 거부하고(AD310) 유요에게 항복한 포홍(AD318)

 

AD310년경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 부근에는 많은 저족 들이 살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 포홍(蒲洪:AD285-AD350)은 날렵하고 용맹하면서도 지략이 뛰어나 모든 저족들이 깊이 존경하며 따랐다. 포홍의 명성을 잘 알고 있는 한조(혹은 전조) 군주 유총은 포홍을 포섭하기 위해 평원장군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포홍은 거절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저족을 보호하는 책임자, 즉 호저교위 및 진주(秦州)자사 악양공이라고 불렀다.  

 

포홍이 유총에게 귀부하지 않은 것은 당시 정통성을 가진 서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비록 팔왕의 난에 이은 내분으로 나라가 크게 흔들렸고 그 틈을 타서 유연이 독립하여 전조(한조)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포홍은 선비족에 불과한 유요가 세운 전조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도 없었고 또 이복 동생 유화 등 형제 여러 명을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AD310년 7월) 야만스런 유총을 수용할 수도 없었다.<유연 및 유총의 전조에 관해서는 본고 시리즈 #5, 졸지에 건국하고 망해버린 전조 참조> 그러나 유총이 죽고 뒤를 이은 황제 유찬과 근준의 폭정이 이어지면서 나라가 극도로 어지러워졌다. 근준은 쿠테타를 획책하기도 했다. 보다 못한 정국을 수습하기로 나선 사람은 서진을 멸망시켰던(AD316) 상국 유요다.(AD318년) 유요는 유찬과 근준 세력을 제거하고 전조라는 나라를 세웠다. 유연의 한조의 연장선 위에 있는 나라지만 역사에서는 전조라고 따로 칭하기도 한다. 전조는 다시 막강한 세력을 떨치게 된다. 포홍은 더 이상 충성을 바쳐 기댈 언덕, 즉 서진이 없었다. 게다가 유요는 무공과 함께 훌륭한 덕을 갖춘 사람이었다. 마침내 포홍은 유요의 휘하에 들어갔다.(AD319년) 유요는 항복한 포홍에게 솔의후라는 작위를 내렸다.    

 

 

(3) 전조의 멸망과 후조에게 복속한 포홍(AD329) 

   

AD328년 12월 전조의 유요는 성고관(호뢰관) 전투(3차 전-후조 전쟁)에서 막강한 석륵의 후조에게 패하여 죽었다. 남양왕 유윤은 수 만 군사를 이끌고 주둔하던 천수를 나와 석생이 장악하고 있던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AD329년8월)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살고 있던 여러 이민족들이 모두 남양왕 유윤에게 호응했다. 군사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유윤군은 서안 북쪽 50KM 지점인 중교(섬서성 예천)까지 도달했다. 석륵 휘하 석생은 굳게 성문을 닫아걸고 방어에 치중했다. 9월 석륵의 부하 중산공 석호가 2만 군사로 의거(감숙성 영현)에서 남양왕 유윤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일격을 당한 유윤군사는 황급히 상규(천수)로 도망쳤다. 석호는 끝까지 뒤를 쫓아 결국 태자 유희, 남양왕 유윤, 그리고 공경 이하 3천여 명을 체포하여 모두 살해하고 유민 9천 명을 수도 양국(산서성 임분)으로 압송했으며 여러 지역에 흩어 져 살고 있는 흉노무리 5천여 명을 낙양까지 끌고 와 거기서 산 채로 묻어 버렸다. 이로써 AD304년 선비족 유연에 의해 건국된 전조는 25년 만인 AD329년 9월 같은 선비족 석륵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저족 지도자 포홍은 별수 없이 석호에게 항복했다. 저족 십수만 부락은 하남성 사주와 하북성 기주 등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4) 석(염)민의 포홍 처형 주장 

 

포홍은 후조 석호의 휘하에 들어가 많은 무공을 세웠다. 석호는 그런 포홍에게 사지절 및 도독육이제군사 및 관군대장군이라는 높은 직책을 주었다. 석호의 총신 석(염)민이 석호에게 포홍을 제거하자면서 이렇게 말했다.

 

“ 포홍은 뛰어난 책략과 무공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그의 여러 아들들도 비상한 재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만 두시면 장차 염려를 만들 사람이니 미리 제거하여

  사직의 걱정거리를 없애십시오.“

 

석호는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오직 그와 그의 아들(포건과 포웅. 나중에 성을 부씨로 바꿈)에게 의지하여

  오나라와 촉나라를 뺏을 수 있었는데

  어찌 그를 죽이겠는가?“

 

그러면서 더욱 두텁게 포홍 부자를 대하였다.   

 

 

(5) 포홍의 충간(AD346)

 

석호가 총애하는 환관 엄생이 위세를 업고서 상서 주궤를 몹시 증오배척하였다. 마침 오랫동안 장마가 지자 엄생은 주궤가 도로를 제대로 수리하지 않아서 백성들의 피해가 커졌고 게다가 수시로 주궤가 조정 정치를 비방했다고 참소했다. 석호는 즉각 주궤를 가두었다. 포홍이 나서서 주궤를 옹호했다.

 

“ 폐하께서 양국과 업궁을 가지고 계신데 

  장안이나 낙양궁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사냥하는 수레만 1천 대이고 둘레만 해도 수 백리 울타리 안에서 

  금수를 기르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처를 10여 만 명을 탈취하셔서 후궁에다 채워놓으시니

  성스러운 황제와 밝은 임금이 정녕 이렇게 하겠습니까?

  오늘은 길을 제대로 닦지 않았다고 상서 주궤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폐하께서 올바른 덕치를 하지 않으시니 하늘이 노하여 비를 70여 일이나 내린 것입니다.

  귀신같은 100만 군사라 하더라도 비가 개이고 이틀 만에 

  진흙구덩이를 제거할 수 없을 텐데 어찌 한 사람에게 그것을 기대한 단 말입니까.

  정치와 형벌이 이런 모양이니 사해는 어떨 것이며 후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디 작업을 즉각 중단하시고 원유는 없애시며 궁녀들을 풀어서 내보내고        

  주궤를 용서하시옵소서.“

 

석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평소 존경하는 열 살 연상의 어른이었으므로 포홍에게 죄를 주지는 않았다. 

 

 

(6) 석호의 와병과 혼란(AD349)

 

AD349년 4월 석호의 병이 심해졌다. 석호는 팽성왕 석준에게 대장군 직을 주어서 관중의 오른쪽을 방어하게 하고 연왕 석빈을 승상으로 삼아서 조정의 상서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그리고 진위대장군 및 영군장군 장시를 이부상서로 삼아서 석빈과 함께 정사를 나누어 보도록 했다. 태자 석세의 모후인 유황후는 아들 석세 대신 석빈이 정치를 보좌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였다. 장시를 꾀어서 석빈을 도모하게 하였다. 장시는 사냥으로 양국에 가있던 석빈에게 거짓 편지를 보냈다.

 

“ 주상의 병이 이미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 

  사냥을 좀 더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석빈은 정말로 그런 줄 알고 사냥과 음주를 계속했다. 유황후와 장시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조서를 고쳐서 불충하고 불효한 석빈을 관직에서 몰아내고 귀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는 장시 동생 장의에게 무사 500명으로 석빈의 집을 포위하였다.(AD349년4월9일)

 

4월 19일 석준은 병환에 계신 아버지를 보기 위해 유주에서 업성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뵐 수가 없었고 다시 금병 3만 명을 배속 받고 임지(관중의 오른 쪽)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다시 차린 석호는 석준이 도착했는지를 물었는데 이미 임지로 떠난 지 한참 뒤였다. 석호를 호위하는 군사들은 연왕 석빈에게 근위병의 책임을 맡게 하고 황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했으나 석호가 연왕 석빈을 불러도 유황후와 장시가 가로막아 들어올 수가 없었다. 석호의 눈이 가물가물해지자 인새를 직접 연왕에게 주려고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석호의 마음이 석빈에게 있음을 알아챈 유황후와 장시는 다시 조서를 고쳐서 석빈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시를 태보⦁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았다. 최고의 군권이 장시에 쥐어진 것이다. 시중 서통은 절망에 빠져 음독자살하고 말았다.(4월22일) 그 다음날 석호가 55세의 나이로 죽었다. 열 살 태자 석세가 즉위하고 유씨가 유태후가 되어 황제를 대행했다. 태보 장시는 경쟁관계에 있는 태위 장거와 사공 이농을 죽이려고 모의했는데 장거가 이농에게 미리 그 사실을 알려줬다. 이농은 즉시 식솔을 데리고 도망갔다.

 

 

(7) 석준의 무혈 쿠테타 집권(AD349)

 

팽성왕 석준이 하내에 이르렀을 즈음 아버지가 죽은 소식을 들었다. 요익중과 포홍과 석민이 양독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성(하남성 온현)에서 석준을 만났다. 요익중과 포홍은 석준이 장자이고 또 무공이 혁혁한데다가 석호가 장차 후사를 맡길 생각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말년에 정신이 혼미하고 현혹되어 장시와 유후에게 휘둘렸을 뿐이라고 하면서 장시를 토벌하는 것이야말로 쉽고도 바른 길이라고 설득했다. 석준도 동의했다. 군사를 돌이켜 이성을 출발해서 업성으로 향해 들어가니 주변의 낙주자사 유국도 합류했다. 석준의 군사들은 탕음(하남성 탕음현)에 진을 쳤는데 융졸이 9만이었고 석민이 그 선봉에 섰다. 주변 성읍의 주민들은 물론 업성의 주민들도 모두 다 석준에게 부응하여 왔다. 간사한 우복야 장리마저 마지막에는 장시에게 등을 돌리고 성문을 열어 석준의 군사를 영입했다. 다급한 유황후와 장시는 석준에게 있는 직책을 총동원하여 환심을 사려 했다. 승상, 영대사마, 대도독, 중외제군사 및 녹상서사를 석준에게 내렸으며 덧붙여 황월과 구석(황제만 가질 수 있는 물건 아홉 가지)까지 하사했다.  

  

4월 14일 석준이 업 부근에 도착하자 장시가 몸소 나아가 영접했는데 석준이 그를 잡아 가두었다가 다음날 평락시장에서 목을 베었고 삼족을 멸했다. 유태후의 명령을 빌어서 석준이 황위를 이어받도록 했다.(AD349년 4월 16일) 석세를 폐위하여 초왕으로 책봉하고 유태후도 태비로 강등한 다음 얼마 후 모두 죽였다. 옛 연왕 석빈의 아들 석연을 태자로 삼았으며 석감을 시중 및 태부, 낙평공 석포를 대사마에 임명했다. 일등공신 선봉장 석민에게는 도독내외군사 및 보국대장군이라는 최고의 군사직을 수여했다.  

 

 

(8) 포홍의 동진 투항(AD349)

 

사흘 뒤 4월 19일 업성에 태풍이 불었다. 집채만 한 나무가 뽑히고 바가지만 한 우박이 쏟아졌다. 궁궐에 큰 불이 한 달 이상 꺼지지 않는 바람에 많은 누각과 궁전이 불에 탔다. 승여나 어복도 절반 이상 타버려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이 때 패왕 석충은 계성(북경)에 진수하고 있었다. 동생 석준이 석세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앉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석준 토벌군을 일으켰다. 5만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내려오는 동안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정의로운 군사에 동참을 호소했다. 옛 조나라와 연나라 지역에서 구름처럼 지원군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10만이 넘는 대군이 되었다. 석준은 석충에게 편지를 보내 뜻을 충분히 이해하므로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군사를 돌리라고 권유했다.

 

석충은 부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군사를 돌릴 수가 없었다. 석준은 석민과 이농에게 정예군 10만을 주어 석충군을 격퇴시킬 것을 명령했다. 석충의 10만 군사와 석준의 10만 군사는 평근(하북성 석가장 동남쪽 조현부근)에서 싸웠는데 석충이 크게 패하였다. 석충은 도망가다가 원지에서 붙잡혀 참수되었고 군사 약 3만 명은 매몰되었다. 석민은 석준에게 석호의 명령에 따라 관중지역, 즉 진주(섬서성 중남부)와 옹주(산서성 서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포홍이 장차 국가의 위협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종용했다. 석준이 석민의 말을 듣고 포홍의 옹진주도독직을 파면하자 포홍은 화가 나서 동진에 투항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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