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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로마 읽기-천년제국 로마에서 배우는 지혜와 리더십 <22> 퍼주는 복지에서 엄격한 복지로 전환하다 (기원전 49~44)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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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3월15일 16시31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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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복지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이슈다. 카이사르의 정치적 기반은 민중파였지만, 최고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자신의 지지자들만을 위한 편협한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국가 전체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면서 정책을 펼쳐나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복지 정책이다. 

 

기원전 123년,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곡물법을 만들어 국가가 밀을 사들인 후 빈민층에 곡물을 싼값으로 배급하는 복지 정책을 시행했다. 원로원파인 술라는 이 제도를 폐지했으나, 아우렐리우스 코타에 의해 다시 부활되었다. 카이사르 당시에도 곡물법을 둘러싸고 정쟁이 끊이지 않았다. 원로원파인 카토는 빈민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배급 인구의 상한선을 철폐하고 밀을 값싸게 공급했다. 이에 자극받은 민중파 출신 호민관 클로디우스는 빈민층에게 밀을 무상으로 공급하여 가난한 유권자들의 표를 겨냥했다. 원로원파와 민중파 사이에 복지 경쟁이 불붙자, 공짜로 밀을 배급받는 사람의 숫자가 32만 명까지 증가하면서 국가의 재정 압박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필립 프리먼은 『카이사르』에서 카이사르가 도시의 총인구조사를 실시한 내용을 소개한다. 카이사르는 정확한 조사를 위해 집집마다 조사원을 파견했다. 인구조사가 모두 끝나자, 도시에서 식량 배급을 받을 사람은 32만 명이 아니라 절반 수준인 15만 명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짜로 배급받는 수혜자수를 15만 명으로 줄이고, 이를 상한선으로 정하고 증원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공정한 자격 심사를 위해 이 일만 전담하는 2명의 관리관을 두었다. 

 

카이사르는 “복지는 무조건 퍼주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생계비를 지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사의 공정성을 확보해야 곡물법을 정치 투쟁에서 지키고 진정한 복지를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지지 기반인 민중파의 이익에 끌려가지 않고 원칙을 가지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응했다. 

 

실업 문제 역시 중요한 과제였다. 실업 문제는 복지로 해결할 수 없으며, 일자리를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카이사르가 농지법을 개혁한 것도 실업 대책의 일환이었다. 로마 군단은 실업 문제를 흡수하는 좋은 창구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카이사르는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 전략을 구사했다. 그래서 속주에 신도시를 개발하여 실업자나 제대 군인을 이주시켰다. 그러면 이탈리아 안에서 토지를 확보하는 문제로 골치 아플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로마 시민인 이들이 속주 전역에 이주하여 정착하면 로마화의 선봉에 설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 심지어 카이사르는 포에니전쟁이 끝난 후 로마가 소금을 뿌려서 폐허로 만들었던 카르타고와 코린트까지도 다시 개발하여 도시로 회생시켰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의 수도였고, 코린트는 그리스의 수도였다. 카이사르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도시를 과거의 감정만으로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146년에 멸망한 뒤 폐허가 되었던 카르타고와 코린트는 100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카이사르가 카르타고와 코린트를 포함하여 속주에 이주시킨 로마인은 세대주 기준으로 8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에 수도 로마의 인구는 얼마나 되었을까? 연구자들은 여자, 어린이, 노예, 외국인까지 합쳐서 약 100만 명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100만 명을 수용한 로마에는 치안과 교통, 청소와 상하수도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어떻게 대처했을까?

 

카이사르는 수도 경찰을 창설하여 치안 유지에 정성을 쏟았다. 치안 유지는 세계의 수도가 된 로마의 얼굴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교통은 어떠했을까? 2,000여 년 전에 100만 명이라면 정말 많은 인구였으므로, 도심인 포로 로마노나 시장이 들어서는 테베레 강 일대는 넘쳐나는 사람들로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교통규제가 뒤따랐다. 낮에 가마를 탈 수 있는 사람들은 기혼 부인과 여사제로 제한한 것이다. 짐수레도 교통 혼잡의 주범이기 때문에 야간에만 통행할 수 있도록 했다. 카이사르도 시내에서는 수레를 타지 않고 걸어 다녔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제국의 수도인 까닭에 도로포장, 상하수도 등에 있어서 기능뿐만 아니라 운영 면에서도 쾌적함을 갖추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재설계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소아시아 태생인 인문지리학의 선구자 스트라보를 인용하여 수도 로마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인은 아름답고 안전하며 수출입에 필요한 항구까지 갖춘 도시를 건설하면, 그것으로 도시는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한편 로마인은 그리스인이 소홀히 한 것까지 정비하지 않으면 도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도로포장과 상하수도 설비 등이 그렇다. 특히 로마인의 하수도는 훌륭해서 로마 시가지의 지하에 그물처럼 뻗어 있다. 아치 모양의 석조 하수도이기 때문에 하수도 위는 그대로 도로로 쓰이고 있다. 도시 전체에서 나오는 하수는 모두 테베레 강으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 도로포장도 선진화되어 있어서, 시내 도로만이 아니라 모든 지방을 연결하는 가도까지 포장되어 있다. 로마가도는 언덕을 깎아내어 지형의 높낮이를 고르게 만든 뒤에 건설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로마가도는 평탄하기 때문에 짐수레에 짐을 더 많이 실을 수 있다. 상수도 설비도 완벽해서 어느 집이든 음료수가 부족하지 않다. 저수조를 갖추고 있는 집도 많고, 개중에는 온종일 물을 뿜어 올리는 분수까지 갖춘 집도 있다.”

 

카이사르는 복지 정책, 실업 대책, 치안 유지, 상하수도 관리 등 사회복지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카이사르가 자신의 정치적 지지 기반인 민중파에 끌려다니지 않고, 포퓰리즘을 배격하면서 엄격한 복지 정책을 실시한 점은 오늘날 복지 정책을 추진할 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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