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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48)] <끝> 게으르지 말고 꾸준히 길을 가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5월26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8년05월27일 09시10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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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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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쉐우민 

  올해 초 다시 쉐우민에 갔다. 새벽 3시 15분에는 잠을 깨우는 종이 여전히 울리고, 한 시간 좌선 한 시간 경행의 수행시스템이 종일 돌아갔다. 일 년 365일 쉼 없이 돌아가는 반복의 시스템 속에 시간은 그렇게 쌓이고 전통은 만들어진다. 그렇게 붓다의 가르침, 불교는 2천5백 년 동안 이어진다. 그 전통 속에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디테일로 존재한다. 

 

  반가운 얼굴들은 여전하다. 한국 사람들은 올해도 수행자들 중 메이저 그룹을 이룬다. 돌콩 솩샘, 떡대거사, 지리산 빵아재, 만년 대학생 생생정보통, 진달래 보살 등은 몇 년 째 쉐우민에서 보는 얼굴들이다. 마침 사사나 스님이 쉐우민에서 수행중이라서 수차례 담마토크를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오따마시리 스님, 악까사또 스님 등 안면이 있는 한국 스님들도 여럿이어서 법담을 나눌 기회가 많았다. 사사나 스님이 경주 마하보디 선원장으로 주석하실 때 시봉하던 혜주 보살도 쉐우민에서 수행 중이었다. 혜주 보살은 틈만 나면 주스를 갈고, 커피를 내려 드리는 등 스님들을 시봉했다. 수행하러 온 게 아니라 공덕을 지으러 왔다고 농담 겸 핀잔을 주위에서 들을 정도로. 마치 고향집에 온 것처럼 분위기가 낯설지 않아서, 긴장도 없고 쉽사리 메너리즘에 빠져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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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적 수행자들의 면면도 낯설지 않았다. 후쿠시마의 실향민 히로 씨가 무척 반가워한다. 그와 나는 거의 매일 식사 줄에서 서툰 영어와 일본어, 한국어를 섞어서 잡담을 한다. 지난해 같은 날 쉐우민에서 나와 나는 귀국했고, 그는 껄로의 마하시 센터로 떠났는데, 올해도 그와 나는 같은 날 한국과 껄로로 떠났다. 참 이상한 우연이었다. 지난 해 마하시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아홉 달을 보내고 한 달쯤 전 다시 쉐우민에 왔단다. 수 년 째 집에 가지 않은 그에게 집에는 언제 갈 거냐고 물으니, 올해 안에 꼭 가겠다고 말한다. 

 

  말레이시아 고참 수행자 카투니스트 턱룬 씨와 그의 도반의 얼굴도 보인다. 그들은 올해도 복도와 화장실을 청소를 전담한다. 빨간 코카콜라 의자에 앉아 수행하는 턱룬 씨의 모습은 우리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연상시킨다. 해가 진 뒤 그가 앉아있는 실루엣은 특히 그렇다.

         

  잉글리시 스킨헤드 역시 쉐우민에 있다. 고참 수행자인 그는 인근 담마 위밧자에 머문다. 담마 위밧자는 떼자니아 사야도가 세운 개인 절로 쉐우민 종단과는 무관하지만 미얀마에 오래 머무는 외국인 수행자들을 위해 운영된다. 지난해에는 오따마시리 스님과 악까사또 스님도 그곳에 머물렀다. 한국 수행자들은 번갈아 가며 담마 위밧짜에 대중공양을 한다. 대중공양을 하는 날이면 한국 수행자 모두가 그곳에 가서 아침과 점심을 먹는다. 대중이 적고 청현 스님이 세심하게 운영하는 탓인지 식사의 품질이 쉐우민보다 훨씬 높다. 그곳에 가면 김치와 잡채 등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수행자들이 행복해 한다. 

 

  지난해 만났던 일본계 미국인 수행자 에디도 담마 위밧짜에 머문다. 대중공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내가 반갑게 인사했는데,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그는 무척 소심한 사람이다. 다음 대중공양 때 그가 내게 다가와 인사했다. 그러면서 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유창한 영어는 내게는 쥐약이다. 이따금 들리는 단어의 조합으로 문장을 유추해내는 난이도 높은 이해과정을 겪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떠듬거리는 영어가 편하고 좋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무척 미안하며, 내가 짓는 슬픈 표정에 가슴 아팠다는 게 그가 한 말의 요지였다. 그의 말보다 표정에서 내게 대한 미안함이 뭉툭뭉툭 묻어났다. 허~ 참, 슬프지 까진 않았는데... 암튼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아마도 내가 안 길렀던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못 알아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네버 마인’이라고 말해줬고, 내 말에 퍽 위안을 받은 듯했다. 지난해 그는 중국계 미국인 부인과 함께 쉐우민에서 수행했다. 부인 안부를 물으니 먼저 집에 돌아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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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보살 

  이렇듯 수행처라고 해서 빡빡한 계율과, 좌선과 경행의 단순한 일상만 있는 건 아니겠다. 가벼운 일탈과 예기치 못한 이벤트와 사람에 대한 관심 역시 존재한다. 올해 쉐우민 행의 일행은 남성 둘 여성 셋 모두 다섯으로 크게 늘었다. 남녀 둘은 동료교수이자 도반, 두 여성은 여교수의 지인들로 나와는 초면이었다. 동료 여교수의 가까운 친척이었던 한 분은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분이었는데, 다른 한 분은 나이든 소녀 같은 분이었다. 명상은 처음이라며 첨엔 무척 긴장하는 듯했지만 도착 후 적응력은 가히 놀라웠다. 특유의 친화력과 명랑함으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수행처 중 가장 자유롭다는 쉐우민도 수행처다운 묵직함이 있기 마련이다. 가라앉는 수행처의 분위기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깨졌다. 경행 중 마주치는 수행자들과 거침없이 인사를 나누고, 금방 사귄 사람들과 웃고 대화하는 풍경이 조금은 낯설었다. 사사나 스님 담마토크 시간에는 쉐우민에 와서 생긴 에피소드 하나를 실감있게 얘기해 좌중을 한참동안 웃음 도가니에 빠뜨렸다. 식당에서 모두 발을 벗고 다니는데 유독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서양여성 수행자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얘기했다가 거부당한 상황을 재현하면서 그 서양여성의 흉내를 내는 장면은 연극배우의 능숙한 연기를 보는 것 같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를 연상하고 나는 그녀에게 ‘마리아 보살’이라는 닉네임을 지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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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보살의 룸메는 고다꾜 영어샘이었는데 그녀가 두 단어의 음소를 합성해내는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늘 웃음을 몰고 다닌다며 재밌어 했다. 좋은 글 소재가 될 것 같아 영어샘에게 사례 메모를 부탁했더니 다음날 꼼꼼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전해주었다. 재미있을 것 같아 옮겨본다. ▲‘우리 언제 쉐우곤 파고다에 가보자’(쉐우민 센터와 쉐다곤 파고다의 합성) ▲‘사사도 스님께 물어봐야지’(사야도와 사사나 스님 혼동) ▲‘모하가 일어났어’(빨리어를 사용해보려다 도사와 모하를 혼동. 모하는 ‘모함’과 연결해서 외웠다고) ▲갑자기 ‘부곡 하와이’가 생각난다고 해서 이유를 물으니, 귀국할 때 ‘부곡 마켓’ 갈 예정이라고 대답. 며칠 뒤에는 ‘부족 마켓’ 맞지?라고 다시 물음.(보족->부족->부곡? 보족 마켓은 양곤 제일의 시장임) ▲위빠사나를 자꾸 ‘위사빠나’라고 하길래 지적해줬더니 며칠 후 ‘위빠사나’로 정확히 기억. 장난삼아 ‘위사빠나’라고 했더니, ‘아~ 위싸빠나지! 또 헷갈렸네’라고 해서 주변 모두 한바탕 웃음. ▲식사 마친 후 ‘사두 사두 사두’를 ‘사부 사부 사부’라고 하는 바람에 주변이 뒤집어짐. ▲‘떼자니아는 알겠는데 사야도는 누구야?’라고 룸메에게 물음. ▲대화중 ‘낄마레’란 말을 자꾸해서 무슨 말인가 했는데, 낄레사(번뇌)를 뜻함. 며칠 후엔 ‘낄레마’라고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 ▲떠나기 전날 헤어짐을 섭섭해 하며 룸메에게 ‘마음은 쉐우곤에 두고 갈게’라고 말함. 쉐우민과 쉐다곤을 끝까지 헷갈려 했지만 룸메는 그 따듯한 마음만은 이해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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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콩 솩샘  

  그는 필자보다 훨씬 젊은 수행자다. 40대 나이는 수행자로서는 한창 나이다. 그는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다. 적어도 수행에 대한 열의는 그를 당할 자 없다. 그는 단단하다. 마치 돌콩처럼. 그래서 나는 그를 ‘돌콩 솩샘’으로 부른다. 쉐우민 수행은 올해로 다섯 번째다. 가부좌가 쉽지 않다며 뒤로 120도쯤 재껴진 플라스틱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눈을 감고 수행한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경행 시엔 한적한 곳을 골라 다니며 쉴 새 없이 걷고 또 걷는다. 사야도 인터뷰 땐 가장 앞줄에 앉아서 인터뷰가 시작되면 기다렸다는 듯 1차로 질문한다. 그 모습은 가히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뷰 내용은 늘 들어 참고할만하다. 

 

  돌콩 솩샘이 쉐우민 수행과 만난 이력은 기이하다. 5년 전 위빠사나 수행에 입문한 그는 미얀마 수행처 몇 곳을 둘러보는 모임에 끼어 양곤에 왔다. 비행기 속에서 우연히 쉐우민 센터를 소개하는 팜플릿을 보게 됐는데, 팜플릿의 문구들을 보는 순간 체증이 가라앉듯 마음이 편해지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다른 수행처에서 하루 머물고 이튿날 바로 일행을 이탈해 혼자  쉐우민 센터에 왔다. 쉐우민 수행법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담마홀에 앉아만 있기를 보름 만에 이상한 체험을 했다. 보는 대상들이 모두 마음 안에 있더라고. 

 

  돌통 솩샘은 그 해 쉐우민에서 사사나 스님을 만났다. 그 후 그는 사사나 스님의 지도로 맹렬히 수행한다. 시도 때도 없이 카톡으로 묻고, 만나면 또 묻고, 사사나 스님을 괴롭힌다(?). 그는 말한다. 수행하지 않으면 고통스럽다고.

 

  사사나 스님 역시 그렇게 말한다. 수행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수행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수행하지 않는 마음은 고통스럽다”라고. 오랜 수행의 길을 걸어온 수행자의 이 독백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나는 이해한다.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좇는 것은 모든 유기체의 자연적 성향이다. 사람도 그렇다. 하지만 누구나 좇는 쾌락도 고통과 마찬가지로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다. 이는 붓다의 통찰이다. 안정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하니 두카(苦)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래서 두카이다(一切皆苦). 이 명제는 붓다의 네 가지 성스러운 가르침 중 첫 번째의 것이다. 일체개고의 이 가르침을 사무치게 아는 데서부터 수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인생은 괴로움의 바다’라는 말은 보통 시쳇말로 들린다. 하지만 그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려 본 사람이라면 결코 그 말을 쉽사리 뱉어낼 수 없으리라. 수행은 그 바다를 헤어가는 일이다. 허니, 한 순간이라도 한 눈 팔 여유가 없지 않은가? 수행하지 않는 마음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있겠는가?

 

  수행자들은 안다. 사띠와 지혜가 없는 마음은 고통스럽다. 그 사실을 아는 수행자라면 수행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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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으르지 말고 꾸준히 길을 가라 

  마리아와 돌콩은 대조적이다. 하지만 두 케이스 모두 같은 길을 걷는 수행자이다. 수행의 길은 길고 짧음을 잴 수 없다. 멀고먼 그 길에 비교는 ‘도토리 키 재기’로 무의미하다. 떼자니아 사야도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가르침이 있다. “수행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꾸준히 하라. 수행은 마라톤이지 백 미터 달리기가 아니다.” 먼 길을 가는 데 가장 필요한 노하우는 게으르지 않고 꾸준히 가는 일이다. 마음을 다잡고 게으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늘 마음을 살펴야 한다.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사야도에게 물었다. “마음이 게으릅니다. 마음이 왜 자꾸 게으름을 피우는지 원인을 잘 모르겠습니다.” 사야도가 대답했다. “게으른 마음을 살펴보라. 게으른 마음이 있는 줄 알면서 그대로 두면 마음은 더 게으름을 피우게 될 것이다. 마음을 바꿔줘야 한다. 게으른 마음은 고칠 수 있다.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건, 모하(어리석음)의 세력이 커서 ‘고쳐야 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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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은 다음 생보다 멀다

  마음을 살피는 일은 가장 가까운 곳을 살피는 일이다. 수행은 먼 곳에서 뭔가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나이 지긋한 한 여성 수행자가 물었다. 

  “나무 밑을 쓸다가 문득 무상을 느꼈습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 나뭇잎처럼 시들어 떨어지겠구나. 슬픈 생각이 들면서도 무상에서 무아를 이해하게 되니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사야도가 대답했다. 

  “무상, 무아에 지혜가 생기면 집착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나무를 통해 본 무상은 개념이지 실재가 아니다. 왜 내 몸, 내 마음에서 무상을 보지 못하는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내 죽음은 같은가, 다른가? 내일과 다음 생 중 어느 것이 먼가?” 

 

  그렇다. 내일은 다음 생보다 멀다. 내일은 개념이다. 그래서 결코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없다. 나의 다음 생은 바로 내 현실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다. 누구나 살아가면 갈수록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많이 겪는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도 결코 나의 죽음은 아니다. 그래서 시간이 가면 잊혀지고 그들은 그저 ‘고인’이 된다. 죽음에 대한 주관적 체험의 농도가 희석되면서 결국 그 죽음은 객관적 사건이 된다. 하지만 나의 죽음도 객관적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자문해보면 금방 안다. 나의 죽음은 쉽사리 객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개념을 통해 생각하는 일은 체험과는 거리가 멀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무상을 느끼고 무아를 이해했다는 이 여성 수행자에 대한 사야도의 가르침은 그랬다. 낙엽에 ‘나’를 투사해 슬픈 감정이 일어났다. ‘나’라는 생각은 번뇌이고, 번뇌에서 슬픈 감정이 일어난 것이니, 낙엽을 보고 무상을 봤다는 견해는 바른 견해가 아니다. 그러하니 바깥 대상보다는 내 몸을 지켜보라. 그것이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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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과 마음을 떠나 찾지 말라

  이 여성 수행자와 사야도의 이어진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수행자 ; “꽃과 대화하는 것도 삿된 견해겠죠?”

  사야도 ; “모두 개념적인 것이다. 바깥 것을 보면 내 안의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수행자 ; “꽃이 아름답다는 생각도 분별심인가요?”

  사야도 ; “그렇다.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꽃을 보고 생각하지 말고, 보는 줄 알아라.” 

 

  몸과 마음을 떠나 찾는 것은 모조리 생각과 연관되어 있다. 마음에 사띠가 없으면 마음은 생각하는 일을 하게 된다. 마음이 생각하면 개념(빤냣띠)이 개입한다. 개념은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지 실재(빠라맛따)가 아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것은 결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이다. 수행은 실재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몸과 마음을 떠난 수행은 그러니까, 그냥 생각이다. 마음의 추상작용이며 사변일 뿐이다. 

 

  지식인인 듯한 여성 수행자가 사야도에게 물었다. “좌선 말고 지혜를 기르는 방법은 없나요?” 사야도가 대답했다.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좌선이든 경행이든 또는 일상이든 지혜가 있고 사띠가 있어야 한다. 항상 수행해야 한다. 처음에는 몸의 느낌을 보고, 그 다음 마음을 보라. 그렇게 해서 대상과 마음을 분리해서 볼 수 있게 되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떼자니아 사야도의 2018년 1월 인터뷰 법문 중) 

 

 그렇게 몸과 마음을 지켜보고 몸과 마음을 지혜로써 이해하게 되면,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알았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안도 밖도 실상은 그저 개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의 미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명상은 세계적 트랜드가 있다. 동아시아의 대승 선불교가 서양에 소개된 것은 일본 선학자 스즈끼 다이세츠의 업적이었다. 선불교가 서양의 관심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벽안의 수행자를 본격적으로 배출하지는 못했다. 지난 세기 60년대 미국의 히피는 힌두교 명상에 경도되었다. 그 다음은 티벳 명상과 한국 선불교가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지금은... 테라바다의 위빠사나 명상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위빠사나 명상의 키워드는 수차례 강조했듯 ‘사띠’,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이 서양의 명상 이해의 중심에 자리 잡는 데는 임상적 배경이 존재한다. 알아차림 명상이 우울증 치료에 탁월하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그 중심에 명상인지심리학자 카밧 진이 있다. 그는 위빠사나 명상의 ‘사띠’를 ‘의도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알아차림’으로 정의하고 임상에 적용해 커다란 성공을 거뒀다. 그가 창안한 MBSR은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명상을 적용했고, 이를 변증적으로 계승해 MBCT가 명상과 인지치료와 접합시켰다. MBCT는 우울증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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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알아차림 명상은 첨단의 심리학과 뇌과학의 백업을 받고 있다. 인지심리학과 신경생리학 분야에서 명상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성과가 눈부시다. 불교의 아비담마와 현대 인지심리학은 카테고리의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닮은 점이 많다. 인지심리학자들은 자신들의 터미놀러지로 알아차림 명상의 ‘사띠’를 해석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런 많은 시도들이 있다. 알아차림 명상이 가설-연역-조작적 실험-검증의 경험적 심리학의 프레임에서 해석될 수 있다면 설득력은 배가될 것이 틀림없다. 아직 숙제가 많고 많지만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만도 알아차림 명상은 인지적 측면과 정서적 측면에서 그 수행의 성과가 실험을 통해 입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알아차림 명상이 사람이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데 기여한다는 직관적 추정이 경험적 사실로 검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아마도 심리학과 명상의 접목한 일목요연한 명상의 매뉴얼, 그래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마치 요리의 레서피 같은 명상북이나 유튜브 동영상이 출현할 지도 모르겠다. 

 

  어떤 삶을 사느냐는 문제는 종교적 신앙을 떠나 모든 사람의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칸트가 그랬던가? ‘반성 없는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사띠’는 ‘돌아봄’이고 ‘잊지 않음’이니 사띠가 있는 마음은 순간순간 반성하는 마음이 아닐 수 없겠다. 그래서 사띠의 대상인 몸과 마음이 투명해져서 그것이 무상이고 무아라는 빠라맛따를 지혜의 눈으로 보고 사무치게 알게 된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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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5월26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18년05월27일 09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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