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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무의 행복한 로마읽기] <39> 가장 위대한 황제,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서기 161~180)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7월12일 17시43분
  • 최종수정 2018년07월12일 13시58분

작성자

  • 양병무
  • 인천재능대학교 회계경영과 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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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가장 탁월하고 가장 고결한 황제.”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붙여진 평가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현장 제일주의를 실천한 하드리아누스(서기 117~138)와 가장 평온한 시대를 선물한 안토니누스(서기 138~161)를 뒤이어 등장했다. 

 

아우렐리우스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을까.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21년 로마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가문인 덕택에 제공받을 수 있는 모든 교육 혜택을 받았다. 어릴 적부터 수사학과 철학, 특히 스토아 철학에 심취했다. 학자적 소질로 가득 찬 그는 문법과 문학, 과학, 수학, 음악, 춤, 운동, 로마법 등 다양한 교육을 받고 탁월하게 소화해냈다. 더욱이 어릴 적부터 성실한 태도와 온화한 성격으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서기 145년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했고, 서기 161년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로마의 전성기에 통치함으로써 철학자 플라톤이 꿈꾸던 ‘철인 황제’를 구현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통치 초반에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이 닥쳐서 철인 황제는 당장 현장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그의 재위 첫 2년은 위기로 가득했다. 테베레 강에서 대홍수가 났고, 시지쿠스에서 지진이 발생했으며, 갈라티아에는 가뭄이, 브리타니아에는 반란이 일어났다. 또 게르만족이 라인 강을 건너왔고, 젊은 파르티아의 왕 볼로게세스 3세가 아르메니아와 시리아를 침공했다. 이렇게 많은 사건과 사고가 서방과 동방에서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일어나서,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문제가 터져 나왔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해줄 것을 원로원에 요청하여 승인을 얻었다. 제위 초기에 역할을 분담하여 베루스는 파르티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방으로 갔고, 아우렐리우스는 서방의 긴박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베루스는 유능한 장군들을 활용하여 시리아 주둔군을 강하게 만들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파르티아전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개선식을 가졌지만, 생각지도 못한 두 가지 재난이 닥쳐왔다. 

 

하나는 파르티아에서 돌아올 때 페스트 전염병을 가지고 온 것이다. 전염병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소아시아,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에 옮겨 일부 지역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는 결국 라인 강과 도나우 강 국경선을 지키던 군인들의 수마저 격감시켰다. 

또 하나는 도나우 강 유역의 국방은 대규모 병력이 동방으로 차출된 까닭에 이미 약화된 상태였는데, 게르만족이 이 틈을 노려 대규모로 침입해 온 것이다. 이들은 도나우 강 유역 속주들을 짓밟고 이탈리아 북부까지 쳐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두 황제는 지체 없이 북부 국경 지대로 달려가 사태를 수습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공동 황제인 루키우스 베루스가 쓰러져 사망했다. 

 

파르티아 왕이 다시 아르메니아를 침공했고, 라인 강 상류에서 다시 게르만족이 침공했으며, 모로코의 종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프리카와 에스파냐 해안 지대를 괴롭혔다. 서방과 동방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공격을 받으면서 로마제국은 방위의 허점을 드러냈다. 서방과 동방을 동시에 방어하는 데 취약점을 드러낸 것이다. 로마가 강력할 때는 문제가 없었으나, 약해진 틈만 보이면 공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와 같이 철학자인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되고 나서 서방과 동방의 계속된 전쟁뿐 아니라, 기근과 전염병이 잇따라 발생하는 등 군사적·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그는 재위 19년간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싸우거나, 전염병 퇴치와 타락된 윤리 회복에 고심하며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여러 재난과 13년에 걸친 게르만족과의 지리멸렬한 전쟁과 반란 속에서도 내정과 국방을 잘 다스리며 통치한 덕택에 5현제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남긴 『명상록』은 전쟁터에서 낮에는 싸우고 밤에 틈을 내서 기록한 자기 성찰에 관한 고백록이다. 이 책은 현존하는 고서 중 가장 지혜롭고 지성적인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아 역사상 위대한 책으로 오랜 세월 동안 읽히고 있다. 

 

그는 검소한 삶을 살면서 철학으로 영혼을 돌보았으며, 무서운 죽음 앞에 단단하게 자신을 다지며 선한 마음으로 로마제국을 이끌었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일컬어 “가장 고귀한 로마인”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가 쓴 『명상록』은 다윈과 니체, 쇼펜하우어, 존 스튜어트 밀 등 여러 지식인들에게 지적인 영감을 선물했다. 

“온 마음으로 옳은 것을 행하고 진실을 말하는 데 인생의 구원이 달려 있다.” 

“누가 너에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하고 갑자기 물어도 ‘이것과 이것’이라고 지체 없이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일들만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네 마음은 네가 자주 떠올리는 생각과 같아질 것이다. 영혼은 생각에 의해 물들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이란 자연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여라.”

 

천하제일의 권력자인데도 자기반성과 성찰의 폭이 넓었으니 그 겸손한 인격에 감명 받을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에게 남긴 일기이자 기록인데도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삶의 아름다운 교훈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깊은 사색과 성찰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는 관대하고 백성을 사랑했다. 그러나 스토아주의적 철학자인 그는 정책상 기독교를 박해했다. 또한 현명한 사람을 선택해 양자로 삼아 후계자를 삼는 선임 황제들의 관례를 어겨가면서 방탕한 아들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삼은 것은 실책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 <if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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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7월12일 17시43분
  • 최종수정 2018년07월12일 13시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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