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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경축사 遺憾 <1> 농지개혁으로 보릿고개가 극복되었는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1년08월26일 16시00분
  • 최종수정 2021년08월26일 13시42분

작성자

  • 손병해
  • 경북대학교 경제통상학부 명예교수,前 한국국제경제학회장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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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역사적 사실의 한 단면만 강조해선 안 된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우리민족의 독립에서부터 1970년대의 보릿고개 극복을 거쳐 G7을 넘어서는 고소득국의 달성, 그리고 최근의 UN무역개발기구(UNCTAD)의 선진국 편입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의 저력과 위대함을 피력함으로써 민족적 자긍심을 느끼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공감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공적과 해방 후 수십 년간의 노력으로 이룩한 분야별 성과에만 치중한 나머지 시시각각 도전적으로 다가오는 국제환경의 변화, 특히 미·중 패권경쟁에서 야기되는 한반도 주변의 정세 변화와 같은 굵직한 여건 변화에 대한 언급이 없고, 그에 대처하기 위한 국민적 과제 또한 명시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 

 

이번 경축사에서는 “경제” 란 용어가 십여 차례 언급되고, “선진국”이란 용어도 여러 차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선진화된 경제 강국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국민경제적 과제와 선진국으로써의 책무에 대한 성찰이 없는 점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번 경축사에 관련된 여러 아쉬움 중에서도 특히 보릿고개 극복의 원인과 선진국 진입의 평가에 관련된 경제 관련 주제에 대해서 대통령의 현실 및 역사 인식에 대한 아쉬움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경축사 내용 중에는  “ ... 일제의 수탈에 억눌렀던 작물 생산량이 농지개혁 이후 급증했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식민지 시절의 세 배로 늘었고, 마침내 보릿고개를 넘어섰습니다. ...” 란 대목이 있다. 농지개혁이 마치 누대에 걸쳐 우리 국민이 겪어 왔던 춘궁기의 기근을 해소해 주는 주원인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보릿고개

 

  ‘보릿고개’는 요즘 젊은 신세대에게는 낯선 말이지만 70∼80대 이상의 고령층으로 갈수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춘궁기의 식량부족 현상을 말한다. 가을 곡식이 고갈되고 여름의 보리수확이 있기 전, 봄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풀뿌리와 소나무 껍질(草根木皮)로 연명해 왔던 어려운 시절을 의미한다. 

이러한 보릿고개는 일제 침략기에 극심하였고 해방 직후는 물론이거니와 1950년대를 거쳐 ‘60년대까지도 지속되었으며, 농촌 지역에서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해소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보릿고개’의 극복은 해방 후의 원조경제에서 자립경제로,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을 시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는 배고픔에 한 맺힌 절규를 풀어 주는 감성적 용어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런 만큼 해방 후의 경제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는 빠트릴 수 없는 용어가 되고 있다. 

 

따라서 보릿고개 해소의 배경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 배경 설명은 한국 경제가 발전해 온 경제사적 고찰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축사에 나타난 대통령의 보릿고개 해소 원인은 역사적 사실의 한 면만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본란에서는 필자의 다른 견해를 밝혀 두고자 한다. 

 

농지개혁(農地改革)

 

 경축사에서 부각시키고 있는 ‘농지개혁’은 보기에 따라 후일 보릿고개 해소의 간접적 요인으로 볼 수도 있다. 농지개혁으로 소작농은 줄고 자작농이 늘어남으로써 영농의욕이 고취되고 농업생산성이 높아질 수 있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그러한 유추가 가능하다. 그러나 해방과 6.25 동란을 겪은 이후의 국내 경제상황과 다음과 같은 농지개혁의 결과를 고려할 때 과연 그러한 개혁만으로 온 국민이 겪어왔던 식량부족 문제를 해소하는 동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남한의 농지개혁은 1949년 농지개혁법이 제정되었고, 1950년 3월에 공포되어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시작 직후 6.25 동란이 발발하여 중단되는 등의 혼란을 거쳐 1961년경에 대체로 마무리 되었다(법적으로는 1964년에 종결). 주된 목적은 비농가 농지와 과다 소유한 지주 농지를 회수하여 실제 농사짓는 농민에게 배분함으로써 농지 소유제도를 농사짓는 농민위주로 개편하자는 것이었다. 

 

배분 방법은 유상몰수 유상 배분이었다. 당시의 농지개혁은 해방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한 민주의식의 고취, 일제강점기에 늘어난 소작제도의 정비, 소작쟁의와 같은 사회적 혼란의 해소에 더하여 일본인 소유의 귀속농지 처리와 같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또한 농사짓는 농민에게 농토를 배분한다는 점에서 그 취지가 인정되는 개혁조치였다. 

 

  농지개혁의 결과를 보면 총 농지면적 중 자작농 비중이 개혁 직전인 1949년 6월에는 68%였으나(해방 후 미군정청의 농지개혁 조치로 인해 이미 자작농 비중이 해방 당시 37% 수준에서 1949년 68% 수준으로 높아지고 있었음) 마무리 단계인 1961년 말에는 92%까지 높아진 결과 자작농 중심의 소유제도로 개편한다는 당초의 목적은 상당부분 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작농 증가 외의 사정은 성공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분배 받은 농가 중 지불능력이 약한 농가는 고리채 부담에 시달리거나 분배 받은 농지를 다시 전매함으로써 소작제가 다시 부활하였고, 부농(富農) 중심의 신흥 지주층이 생겨나며, 동란 후의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중소 지주층(중농층)이 몰락하는 등의 부작용이 수반되었다. 6.25와 같은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기는 하였으나 농촌 현장 실정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준비가 부족한 결과였다. 

 

여기에 더하여 가구당 농지 소유 상한선(3ha, 북한은 5ha)을 낮게 제한한 결과 영농규모의 영세성을 면치 못하는 문제점도 있었다. 이는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에 따르는 영농규모의 확대 및 영농 기계화 등의 추진에 오히려 부담 요인이 되었으며, 농업 생산성 향상에도 질곡 요인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1950년의 농지개혁은 농지 소유제도를 개편하여 농사짓는 농민에게 농지를 배분한다는 분배목적에는 성공적이었으나 실행 과정상의 부작용으로 인해 다른 측면에서는 새로운 사회 경제적 부작용을 수반함으로써 과반의 성공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이러한 농지 개혁이 그 후의 작물 생산량 증대와 1970년대의 보릿고개 극복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통계적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경축사에서 제시하고 있는 식민지 시대 대비 1970년대의 수확량이 세배나 늘었다는 주장은 식민지 시대의 피동적 경작과 공업화 시대의 근대적 경작의 차이를 나타낼 뿐 농지개혁의 성과로 볼 수는 없다. 

더욱이 농지개혁이 작물생산 증대에 기여하여 보릿고개 해소에 도움이 되었다면 그 징후는 1950년대 후반 내지 1960년대에는 이미 통계적으로 잡혔어야 할 것이나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농촌 지역의 보릿고개는 1970년대까지도 지속되고 있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

 

  따라서 1970년대 이후 식량수급 여건이 개선되고 보릿고개가 해소된 배경은 농지개혁보다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과 그로인한 공업화의 진전이 농업 생산성 증대로 피드백 되었다는 점과 제2차 5개년계획 이후에 나타난 식량자급 정책과 농업 근대화 사업에서 그 배경을 찾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제2차 5개년계획 기간(1967-1971)에는 식량 자급화계획이 추진되어 통일벼와 같은 신품종개발이 이루어졌고 공업화에 의한 화학비료의 보급이 곡물생산 증대에 크게 기여한 사실은 당시의 농정(農政)통계로 확인되고 있다. 제3차 계획 기간(1972-1976) 중에는 농업근대화 사업과 함께 농촌 생활환경개선(지붕개량, 마을길 확장 등)과 영농여건 개선(도로개설, 농로확장, 유통구조 개선, 농가부채 정리 등)으로 인해 농업 노동력이 절약되고 생산량 증대가 가능하였다. 전통적 운반 수단인 등짐 지게가 이러한 근대화 사업의 결과 손수레 및 달구지로 대체될 수 있었고 이것이 퇴비증산과 농업 노동생산성 증대를 가져왔던 것이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통일벼의 보급

 

  이러한 농촌 근대화의 기반 조성에 더하여 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은 통일벼의 개발과 보급이었다. 통일벼 품종은 196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농촌진흥청이 주관하고 서울대학교 허문희 교수의 주도하에 개발된 새로운 벼 품종이다. 이 품종은 1966년 처음 개발되어 1972년경부터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보릿고개가 사실상 종식되었던 1977년경에는 전국 대부분의 농가에서 이 벼가 재배되고 있었다. 통일벼는 종전에 재배했던 자포니카 품종에 비해 평균 30% 이상의 수확을 올리는 품종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로 인해 식량자급이 이루어졌던 1977년의 전국 쌀 생산량은 1971년에 비해 무려 50%나 더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식량부족을 해결하고 보릿고개를 옛날이야기로 돌리게 한 일등공신은 바로 통일벼의 개발과 보급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보릿고개 극복의 주역이 역사 속에 엄연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짐짓 이를 외면하고 농지개혁으로만 그 공을 돌리려는 대통령의 경축사 한 구절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행여나 이념적 맥을 같이 하고 있는 현재의 토지 공개념적 부동산 정책이 농지개혁만큼의 성공을 가져오기를 기대하는 이상주의적 환상이 그 구절에 표출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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